[한상렬]
언제부턴가 우리 집은 인근애서 '수필집'으로 통한다. 혹여 우리 집을 찾는 이가 있어 "이 동네에 '수필집'이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묻는다면, 가장 확실한 집
찾기가 된다. 대문에 '제물포수필문학회'라는 현판이 붙어 있어서다. 지금은 도서출판《에세이포레》라 하여야겠지만 아직 헌판을 바꾸지 않았다. 몇 차례 내 집을 찾아왔던 사람들이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해 그리 부르기 시작한 것이, 아주 우리 집의 별칭이 되어 버렸다.
공원을 끼고 동네 한가운데에 우리 집은 위치해 있다. 그런데 골목들이 엇비슷하여 집을 찾는 사림에게는 여간해 눈에 익지 않나 보다. 길눈이 어두운 사람에게는 그 골복이 그 골목이다. 아는 이도 오랜만에 찾아오면 늘 헤맨다. 그런 경우에 '수필집'이라는 별칭은 집을 찾기에 안성맞춤하다.
어느 날 갑작스레 이런 호칭이 붙여진 것은 아니다. 수필문학회라는 현판을 달고 수필을 쓰는 일에 매달려, 작가라는 이름으로 글을 쓰다보니 동네에서는 모두가 수필을 쓰는 작가의 집이라고 인식하게 된 데 있다.
어느 새 수필문학에 전념해 온 세월도 30여 년이 훌쩍 넘었다. 수필이 아니고는 살 수 없듯이 내 딴에는 수필을 창작하는 일에 열정을 다해왔다. 수필문학에 대한 문단인의 매도와 폄훼에 때론 적잖이 흥분하기도 하었지만, 문학이란 오직 작품으로 승부를 걸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수필문학에 대한 애정을 키워왔다. 수필창작과 창작지도, 수필비평은 물론이거니와 제책製冊에도 종사하였다. 40년 이상 봉직한 교단애서 물러난 이후에는 비록 유명무실하지만 출판사 등록까지 마쳤다. 그 사이 저술한 책은 수필집, 문학비평서, 창작론 등 털어보면 70여 권에 이른다. 하니 누가 워라 해도 수필에 미친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다.
내게는 별칭이 많다 어떤 이는 날 보고 '수필에 미친 사람'이라 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는 '수필을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 한다. '수생수사隨生隨死'라. 미화해 주는 이도 있다.
학창시절, 지금은 원로 문학평론가인 서울대학의 김윤식 선생님으로부터 배움을 받은 나는 그 분의 한 마디 한 마디를 가슴에 새기곤 했다. 언젠가 니체의 <짜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강의하면서 "인생은 잠에서 시작하여 잠으로 끝난다."라는 말을 인용한 일이 있었다. 그때는 이 말이 그저 건성으로 들렸지만, 훗날 석주명 선생의 한 마디를 통해 내면 깊숙한 곳에 뿌리를 내린 삶의 지표가 되기도 했다.
곤충학자로 유명한 석주명 선생은 평생을 오직 '나비의 연구'로 보낸 분이다. 그 분의 전기에는 '어떤 일이건 그 일에 10년만 매달려라. 그러면 그 분야에 일가 一家를 이룰 것이다."라고 했다.선생은 그 말과 같이 오직 평생을 나비연구에 바쳤다. 그 누구도 나비에 관한 한 따를 수 없는 연구 성과였다. 그 분의 한 마디의 말이 나로 하여금 수필문학에 미치게끔 불을 지핀 동기가 되지 않았나 싶다.
청진동 해장국집 집에 들른 일이 있있다. 기왕에 간 길이니 원조元祖라 불리는 해장국집을 찾았다. 어쩐 일로 근처의 해장국집마다 모두 원조라는 입간판이 서 있었다. 이를 어쩌랴. 그 중 손님이 제일 많을 성 싶은 집에 가서 식사를 한 일이 있다. 원조란 어떤 일을 처음 시작한 사람을 말한다. 한 일에 매달려 10년, 아니 몇 대에 걸쳐 그 일에 일가를 이루고 대를 이어가는 경우이다. 그곳에 가면 다른 집에서는 맛볼 수 없는 특별한 음식의 맛을 음미할 수가 있다. 대물림하여 맛을 연구하고 전통적으로 이어오니 다를 수밖에 없다. 그래 인구에 회자會炙되는 집일수록 한 가지 일에 오래 매달려온 경우이다. 어찌 맛에만 그러하랴.
40년이 넘게 교단에시 학생들을 가르쳐왔다.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수필문학의 발전을 위한 터잡이가 되고자 했다. 지금도 이 일은 내 생명에 버금긴다. 세상에는 철새처럼 직장을 옮겨 디니고 더 좋은 자리만을 찾아 분주한 사람들이 있다. 대를 이어가며 한 일에 매달리는 사람들에 비하면 이는 참으로 약삭빠른 사람들이다.
하지만 아무리 시대가 변한다 해도 시속時俗만 따르랴. 욕망과 잇속만따라 현자가 될 것인가? 미쳐아 한다. 불광불급. 미치지 않고서야 어찌 일을 이루랴. 수필 창작도 이와 같지 아니한가. 수필에 미치지 않는 한 수필에 일가를 이루기는 어렵지 않을까 싶다. 호라티우스는 말했다. "그대의 하루하루를/ 그대의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하고/ 내가 헛되이 보낸 하루하루는/ 어제 죽어간 이들이 그토록 바라던 하루이다."
이 아침에 그의 말을 다시금 떠올린다.
■ 한상렬
수필가.《에세이포레》발행인
[《에세이포레》2011년 봄호(발행인의 편지)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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