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식]
지금은 지난시절에 비해 문인들의 자존심이 많이 훼손당하고 있는 시대다. 자긍심도 많이 퇴색되고 있다.
그 몇가지 이유야 물론 있겠지만 뭐니뭐니해도 문인들이 많이 양산되고 있다보니, 희소가치가 없어졌다는 것이 첫째 이유다. 너도나도 시인이요, 수필가이다보니, 귀한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문단 인구가 무려 만여 명이 훨씬 넘는다니, 다이어몬드도 강바닥에 지천으로 깔려있다면 귀한 취급을 받을 수 없듯이, 우리 문인들도 마찬가지다. 문단도 이제는 전문 프로의 시대는 가고, 마치 ‘동아 마라톤 대회’마냥 아마추어리즘의 시대가 되었다 함이 옳을 듯 싶다.
그다음 컴퓨터의 출현과 영상 시대의 영향으로 문학이 위축되고 있는 것도 큰 이유이다. 책을 내려 해도 독자들이 없어 사업성이 없다고 선뜻 받아주는 데가 없다. 극히 예외적인 문인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자비 출판이다.
어디 이런 것뿐이랴, 혹시 어느 문학지에 글이라도 실리게 되면 고료야 아예 기대할 수조차 없고, 책이라도 몇 권 사주어야 체면이 설 때도 있다. 이 모두가 울며겨자먹기식이라 자존심이 상한다고 아니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한탄만 하거나 글을 포기할 수도 없는 일이다. 이런 속상하는 사정을 어느 누가 뜯어고치고 어느 누가 해결해줄 수 있단 말인가.
현재의 조건에서 ‘찬란한 슬픔’같은 자위에서 자긍심을 찾으며 글이나마 열심히 쓰는 도리밖에는 다른 길이 없지않겠는가.
우선 아무리 불효자라도 아들딸이 있는 것이 무자식보다야 낫다는 말이 있듯, 글을 안쓰는 것보다야 쓰는 것이 좋다는 생각을 하고 볼 일이다.
자식을 낳고 기르는 것이 꼭 무슨 영광을 보자는 것이 아니듯이, 글을 쓴다는 것은 곧 정신적 자식만들기와 같구나, 라고 생각하면 나름대로의 자긍심도 생겨나리라 본다.
그리고 글쓰는 행위를 비유적으로, 정신적 밭갈기나 정신적 골프치기라는 생각도 해볼 필요가 있다. 농부도 많고 골퍼들도 많지만, 이른바 정신적 농부나 정신적 골퍼들은 그렇게 많은편이 아니지 않겠는가.
여기서 마침 골프라는 말이 나온 김에 나에게 있었던 일을 하나 소개해볼까 한다.
나는 골프를 치지 않는다. 골프가 대중화되어서 그런지 동창회같은 델 나가보면 자주 골프 이야기가 나온다.
친구들이 골프 이야기를 가지고 맛있는 특제 안주감으로 삼으며 이야기꽃을 피울때, 나는 마냥 꿀먹은 벙어리가 되어 애꿎은 술잔만 괴롭힌다.
그럴 때, 문득 자기들만의 이야기에 열중했다 싶으면 미안해서 그런지 지나가는 말로 의례적인 선심성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이 교수, 자네 골프 치나?’
‘암, 치고말고, 2백 홀을 치지.’
‘2백 홀? 그게 무슨 말이지?’
나의 대답은 그들을 좀 골려주자는 생각에서 농으로 던져 본 말이다. 그들에게 구태여 기까지 죽을 필요가 없다는 저의가 그 농속에 깔려있다.
첫째, 2백 홀이란 말에 친구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도대체 몇 바퀴를 돈단 말인가. 18홀 코스 아니면 36홀 코스라도 도저히 계산이 되지 않는 홀의 숫자다. 그것은 한마디로 내가 글을 쓴다는 것을, 골프에 비유해서 해 본 말이다. 컴맹세대로서 2백자 원고지에 한 자 한 자 메꾸어나가는 것이 바로 2백 홀을 쳐넣는 정신적 골프치기가 아니겠느냐고 주석을 달아주면, 그때에야 비로소 재미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한바탕 웃음꽃을 피운다.
사실, 우리 문인들의 입장으로 보아 직장 생활을 하며 글에라도 매달리다보면 골프를 칠 여유와 시간이 없으리라 본다. 남들이 자는 시간, 남들이 노는 시간에 우리는 글을 써야 할 팔자가 아닌가.
그렇다면 과연 어느 쪽의 골프 치기가 값있는 일인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사람들이 툭 트인 야외 골프장에서 푸른하늘, 푸른잔디밭의 그린 필드(Green Field)에서 한 홀 한 홀 공을 넣어간다면, 우리는 책상위의 원고지란 화이트 필드(White Field)에다 한 자 한 자 글을 메꾸어가는 것이 더 보람찬 일이라고 자위할 수 있으리라 본다.
자위는 또 이것만이 아니다. 혹시 문인 아닌 다른 사람들이 듣는다면 코웃음을 칠지 모르지만, 우리는 살아있으나 죽으나 시인이요, 수필가요, 소설가며 평론가다. 아무리 높은 지위나 직위에 있다 할지라도 물러나면 ‘前’이다.
富나 직위, 권세란 당대의 일시적 사유 재산에 지나지 않는다. 지나고보면 ‘반짝 출세’요 ‘반짝 광영’이니, 모두 문자 그대로 ‘화무10일홍’이다. 그러나 예술이나 기타 정신 문화는 공유 재산이요, 공유 유산이 되기 때문에 영구성이 있는 만큼, 보다 좋은 작품을 써보려는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하리라 본다.
그리고 다음은 정말 거창한(?) 이야기를 한 번 늘어놓을까 한다. 조선 왕조 5백 년 동안을 한번 생각해보자. 영의정․좌의정․우의정, 이른바 三相의 자리에 오른 사람은 3백 66명이다. 평균 한 자리에 1백 22명이 거쳐간 셈이다. 27명의 군왕이 재임하는 동안 영상의 재임 기간을 평균잡아 5년으로 보면 1백여 명이, 10년으로 보면 50여 명이 그 자리에 올랐다고 상정해 볼 수도 있다.
그런데 일반 지식인의 입장에서도 막상 생각나는 사람은 불과 10여 명 안팎이다. 태조 조에 영상급의 지위에 오른 정도전을 비롯하여, 정인지, 신숙주, 황희, 최명길, 유성룡, 이항복이 쉽게 떠오르고, 그 다음 다시 곰곰이 생가해보면 황보인, 한명회, 박원종, 윤원형 정도가 떠오른다.
그러나 다음의 문인들은 누구나 기억하고 있다. 정1품 좌의정의 송강 정철, 정3품 동부승지의 고산 윤선도, 종4품 수군 만호의 노계 박인로, 정2품 좌참찬의 교산 허균, 정2품 대제학의 서포 김만중, 종3품 부사의 연암 박지원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모두는 관직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남길 글(문학)로 말미암아 후세에 길이 남아있다. 영의정을 지낸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그나마 송강 정철만이 정1품 좌의정을 지냈을 뿐이다.
그렇다면 1백여 명, 아니 50여 명의 조선조 영의정 중에서 불과 10여 명 안팎을 기억하고 있는데, 그보다도 낮은 관직의 모두를, 우리가 지금 기억하고 있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그들이 남긴 글이 아니고 그 무엇이겠는가. 누가 자기 도취의 환상적 꿈을 깨라고 윽박지를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모두 희망을 갖고 볼 일이다.
비록 문학이 힘을 잃어가고 있고, 또 문학 환경이 척박하여 자존심과 자긍심의 훼손이 있다 하더라도 힘과 용기를 가져볼 만하지 않겠는가.
설령 위대한 작품을 남긴다는 것이 언감 생심이라면 작은일에서나마 긍지를 찾고 위안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보다 좋은 작품을 남겨보자는 욕심만은 갖고 볼 일이다.
명예로운 미래는 늘 준비해두는 자에게 있다는 말을 좌우명으로 삼고, 우리 문인 모두가 자중 자애 정신으로 살아갔으면 한다.
■ 이유식
문학평론가. 한국문학비평가협회 상임고문
다음자료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