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선기]
옛 선비는 "나물 먹고 물 마시고 팔을 베고 누웠으니 대장부 살림살이 이만하면 족하다"고 노래하면서 빈한貧寒을 미덕으로 삼아 글 읽고 글 쓰는 데 열중했
다. 낮에는 밭일하고 밤에는 반딧불을 밝혀 책을 벗 삼았다. 선비는 두 셋만 모이면 음풍명월로 가는 세월을 묶어두는 신선놀음을 즐겼다.
인간은 배불리 먹고 헐벗지 않으며 쉴 곳이 있으면 그 다음에는 쾌락과 도덕을 생각한다. 예술과 문화는 의식주라는 기본적 욕구가 채워지고 난 후의 정신활동의 산물이다. 마치 물자의 대량생산시대를 거친 후기 산업사회에 이르러 문화가 주요 품목이 되는 것과 같다. 문화란 기술과 의식의 합작품이다. 의식의 변화는 서서히 이루어지기 때문에 조급히 서둔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인간 심성의 내적 성숙과 의식의 변화를 위해선 좋은 책이 필수적이다.
이 시대는 문화의 부가가치가 엄청나다. 잘 만든 영화 한 편이 수백만 명을 감동시키고, 책 한 권이 수 많은 독자의 뇌리에 새겨져 역사를 바꾼다. 문화예술은 쾌락과 도덕에 대한 갈망을 충족시키는 매개체다. 그 가운데서도 눈으로 읽는 책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영화나 음악보다 선악을 가리기 어렵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감각이 직접적이라면 글자를 읽어 느끼는 감각은 우회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책을 읽는 노력은 영화나 음악보다 더 요구된다. 권위 있는 서평문화가 강화되어야 하고 좋은 책을 스스로 골라 읽을 수 있는 훈련이 필요한 것도 그 때문이다.
베이컨은 어떤 책은 맛보고, 어떤 책은 삼키고, 어떤 책은 잘 씹어서 소화해야 한다고 했다. 글읽기는 완성된 사람을 만들고 글쓰기는 정확한 사람을 만든다. 우리가 일생을 살아가면서 많은 사람과 만나지만 단순한 만남과 대화만으로는 그 사람의 인생과 생활을 모두 다 알 수 없다. 더구나 과거의 사람과는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 없고, 말을 듣고 싶어도 들을 수 없다. 책을 읽는 것은 마치 과거에 살았던 사람과 만나 대화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책을 통해서 시간과 공간을 거슬러 옛사람과 만나 대화할 수 있다. 책을 읽을 때는 참된 벗, 진실한 충고자, 유쾌한 반려자, 충실한 위안자를 대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책을 하나의 인격체로 대우할 때 책은 더 없는 벗, 충고자, 반려자, 위안자가 된다. 한가하게 책을 읽는 한가한 사람을 증오한다는 니체의 짜라투스트라 정신에서 우리는 책의 가치와 독서의 의미를 깊이 되새기게 된다.
"산중에 폐호閉戶하고 한가히 앉아 있어/ 만권서萬卷書로 생애生涯하니 즐거움이 그지 없다/ 행여나 날 볼 님 오셔든 날 없다고 살와라" <무명씨>
이 시조의 '한가한 글읽기'는 단순한 한가함이 아니라 찾아오는 님마저 문전거절하는 절차탁마切磋琢磨의 글읽기임을 알 수 있다. 글읽기가 이 정도 되어야 글읽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책을 옆에 두는 즐거움과 책을 읽는 즐거움이 님을 만나는 것보다 더 즐거울 수 있을 때 독서의 진가는 드러난다.
부질없이 책을 읽는 것은 술을 급히 마시는 것과 같다. 빨리 취해 금방 기분이 좋아지지만 나중에는 몸을 버린다. 책을 무조건 많이 읽는다고 좋은것이 아니다. 가치없는 책을 읽는데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 다독을 권하는 이유가 나름대로 있겠지만 많이 읽으려 하기 보다 가치 있는 책을 골라 정독하지 않으면 책의 공해에 오염되어 심성을 오히려 버리는 수가 있다.
잡서를 손에 닿는 대로 읽어나가는 것은 책을 많이 읽었다는 일시적 성취감을 충족시킬 수는 있겠으나 시간과 정력의 낭비일 뿐이다. 생각하지 않고 책장을 넘기려면 아예 책을 읽지 않는 것이 낫다. 책을 읽을 때는 늘 현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어른과 마주맞아 대화를 나누는 자세를 가져야한다.
심심풀이로 책을 읽는 사람은 책을 덮는 순간 읽은 내용이 머릿속에서 모두 사라지고 만다. 그러나 마음의 양식을 삼으려고 책을 읽는 사람은 자기가 필요로 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 우리는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말을 곧잘 한다. 그렇다면 짧은 인생을 낭비하는 난독(亂讀=너절한 책읽기)은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밥을 여러 번 '꼬옥꼭' 씹어 먹듯이 책도 생각하면서 천천히 읽는 정독습관을 갖는 것이 좋다. 무엇이나 '빨리 빨리' '많이 많이'를 좋아하는 우리의 졸속습관이 부실인간을 만든 원흉이다. 성수대교가 무너지고 삼풍백화점이 내려앉은 것도 부실시공에 부실관리였다. 공부도 이것 저것 닥치는 대로 교과서와 참고서를 들었다 놓았다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한 권의 책이라도 제대로 선택하여 착실히 독파해 나가는 것이 완성된 공부를 할 수 있는 왕도(王道=지름길)이다. 책읽기도 이와 마찬가지다. 신중하게 책을 선택한 후 음미하듯 생각하며 읽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독서의 기술』의 저자 모티머 J 애들러는 "읽는 것은 배우는 것"이라고 했다. 배우기 위해서는 날카로운 관찰력, 틀림없는 기억력, 풍부한 상상력, 분석과 사고에 의한 단련된 지성이 요구된다. 이해를 깊이 할 수 있는 독서는 책이라는 교사가 붙어 있어도 본질적으로는 '교사가 있는 가르침'이 아니라 '도움 없는 발견'과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독서에는 두 가지 목적이 있다. 하나는 자기의 학업이나 직업 등과 관련된 전문적 독서이고, 다른 하나는 지식인으로써 갖춰야 할 교양적 독서이다. 학생에게는 학생이 해야 할 독서의 범위가 대체로 정해진다. 특히 논술고사라는 험한 산을 넘어야 하는 수험생에게는 글읽기와 글쓰기의 방법론이 매우 중요하다. 짧은 기간에 꼭 필요한 책을 효과적으로 읽고, 글쓰는 방법과 기술을 습득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글을 읽고 글을 쓰며 살아가는 삶의 방식은 아름답다. 사람은 누구나 생각하고 행동한다. 그러나 생각과 행동이 글에 의해 외부로 표출될 때 그 생각과 행동은 만인의 것이 된다. 글을 쓴다는 것은 어떤 형태로든 자기의 생각을 형상화하여 바깥으로 드러내는 행위다. 글은 말과 달라 기록으로 남는다. 자기의 생각을 글로 표현한 다음에는 그 글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글은 자기의 의사전달의 표현이기 때문에 글이란 말과 행동과는 다른 의미를 갖는다.
글을 잘 쓰기 위해서는 남의 글을 많이 읽어야 한다. 글을 많이 읽은 사람은 그 만큼 글의 폭이 넓어지고 깊어진다. 글 읽기가 글쓰기의 기본인 것은 독서를 통해서 지식과 지혜를 축적할 수 있으며 축적한 지식과 지혜를 적절한 방법으로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이든 표현하고자 하는 심리는 인간이면 누구나 다 가지는 평범한 갈망이다. 더욱이 생명의 환희나 지혜의 여유, 그리고 처절한 절망과 고독에 처할 때 인간은 이를 표현하고 싶은 욕망을 느낀다. 그 표현이 말과 행동이 될 수도 있고, 글이 될 수도 있다. 말과 행동은 공간과 시간에 제약을 받는 일회적인데 반해 글은 시공을 초윌하는 반복적이고 영구적 특성을 지닌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표현욕구의 강렬성애 의해 예술은 창조되는 것이다.
글을 잘 쓰기 위해서는 다독多讀, 다작多作, 다사多思의 요건을 충족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많이 읽어야 많은 지식과 지혜를 축적할 수 있고, 많이 써야 글의 표현방식과 함축성 있는 내용을 담는 방법을 터득할 수 있으며, 많이 생각해야 남에게 지식과 지혜를 의도대로 전달할 수 있다.
시 쓰기와 시 읽기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기로 한다. 시는 단숨에 계속하여 읽는다. 소설이나 희곡도 마찬가지이지만 시의 경우는 다른 장르보다도 그것이 중요하다. 언뜻 보기에 소박하고 알기 쉬울 것 같은 시라도 시는 대부분 복잡하고 깊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구절에 구애받지 말고 시가 지니는 통일성 파악에 정신을 모아야 한다. 또한 되풀이 읽고 소리를 내어 읽는 것이 중요하다. 눈으로만 읽은 때에는 놓치기 쉬운 어구도 귀로 듣는 순간 확실하게 파악된다. 시의 리듬이나 운율이 이해를 돕기 때문이다. 시에 몸을 맡기면 시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훌륭한 시에는 항상 대립하는 이미지나 개념이 존재한다. 이 대립은 표면에 나타나지 않고 암시적으로 서술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삶과 죽음, 아름다움과 추함, 영원과 순간 등의 상극이 대부분의 서정시의 테마로 등장한다. 이 테마는 시 속에 그대로의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고 가면을 쓰고, 혹은 변형된 모습으로 숨어 있다. 이것을 찾아내는 작업이 올바로 이뤄질 때 비로소 시를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정말로 시를 이해하려면 시를 되풀이 해서 읽지 않으면 안된다. 훌륭한 시는 퍼내어도 끝없이 솟아나는 샘과 같아서 몇 번을 되풀이 읽어도 완전히 이해되지 않는다. 시를 읽는 동안에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많은 것을 배우고 있는 것이다. 시 한 편을 읽으며 '글읽기와 글쓰기'를 끝맺고자 한다.
기다리는 시간은 정지신호에 걸린 시간
이 거리엔 빨간 신호등이 켜져 있다.
그리움을 띄울 공중회선은 초만원이다.
비는 내리고 어둠 속에서 빛나던 별 하나
무심히 돌아선 발길이 오늘따라 후회스럽다
신호등은 언제 파란 불로 바뀔지 알 수 없다
꽃 한 송이 피우면 텅 빈 거리가 환해질까
사람들은 백미러를 기웃거리며 비웃듯이 지나간다
그때 너는, 그건 꿈이었지만, 이쪽으로 다가왔다
눈길을 줄 수 없는 이 슬픈 만남의 순간
가슴은 뚫려 바람이 불고 먼지가 인다
예전 같지 않은 낯선 풍경이 산만하다
문들은 굳게 닫쳐 출입구는 보이지 않는다
팔을 내밀고 싶지만 관절이 고통으로 삐걱인다
방향 잃은 세상 참 많이도 변했다, 너도
내일은 아마 미지의 그리움으로 떠오를 테지
아무래도 손을 흔들어 작별을 말해야 할까 보다
시간은 정지신호에 걸려 아직도 빨간 불이다
― 졸시「정지신호」
■ 정선기
시인. 전 부산일보 논설주간
[계간『문예시대』2010년 여름호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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