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로는 의기의 기질을 가진 사람이다. 바른말 잘하고 잘못된 일을 보면 그대로 두지 않고 자기에게 어떤 손해가 돌아와도 하고 싶은 이야기는 해야 하는 사람이다.”
꽃누리
꽃 피우면
모든 것 꿈같이 잊고
서로를 시새워
가지마다 꽃 피우면
산이며
들이며
빛 고운 꽃누리를…
꽃 피우면
아득히 먼 날을 품고
마을마다 난만히
송이송이 꽃 피우면은
빛이며
향기며
그윽한 꽃누리를…
꽃 피우면
꽃바람 꽃바람 싣고
마을마다 훈훈히
꽃향기 풍기면은
하늘이며
땅이며
빛 밝은 꽃누리를…
이 시는 이상로(李相魯)가 좋아했던 시이다.
“나는 평화를 사랑해. 그러니까 나는 평화주의자다.”
그는 늘 자기는 평화를 사랑하고 그리하여 자기의 시는 평화를 사랑하는 시라고 주장했다.
위에 소개하는 「꽃누리」도 그런 면에서 평화적인 시라고 주장했다.
나는 시가 사랑과 평화를 노래하지 않고 예찬하지 않으면 결코 좋은 시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예술은 왜 있는가. 사랑과 평화를 노래하기 위하여 예술이 있는 것이다.”
그는 늘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이상로는 독선이 심한 사람이었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다 옳고 내가 그르다고 생각하는 것은 다 그른 것이다.
진리는 내게만 있다는 식의 사고를 가진 사람이다. 내가 자주 그에게 그런 식으로 말을 하면 그는 늘 말한다.
“아, 진리가 내게만 있지 남에게도 있나.”
그는 또 말한다.
“위선자가 되지 말아야 해. 선한 체하지 마라. 다 위선자들이야.”
이상로의 이론은 그야말로 이상로 식이다. 그는 어떤 친구를 만나든지 하고 싶은 말을 다 해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가 냉정하게 말할 땐 인정도 없고 사정도 없는 사람같이 보인다. 그러나 인정이 많기로 소문난 사람이 또한 이상로이기도 하다. 그는 가장 강한 것 같지만 가장 유한 사람이요, 가장 눈물이 없을 것 같지만 가장 눈물이 많은 사람이다.
어느 날 나는 이상로를 정원 다방에서 만났는데, 그날 자기가 원고료를 조금 받은 게 있다며 어디 가서 막걸리 한잔하자는 것이다. 그래서 둘이 감자국집으로 갔는데 바로 그 집 앞에 늙은 걸인 할머니가 떨고 서서 구걸을 하고 있었다.
이상로는 그 할머니에게 돈을 좀 주고 와서 그 할머니가 가련하다고 하며 술을 못 마시는 것이었다. 이상로의 인정을 거기서 찾아볼 수가 있었다.
이상로는 불평이 대단히 많은 사람이다. 어디고 앉으면 그때부터 많은 불평을 쉴 새 없이 해댄다.
“한국 대표작 전집이란 말이 있을 수 있어? 아니 내 작품도 안 들어갔는데 어떻게 대표작 전집이 되겠느냔 말이야.”
어느 출판사에서 시선집을 출간했는데 책명을 『한국시인대표작집』이라고 했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전집에 이상로의 작품이 한 편도 실려 있지 않았다.
그래, 거기에 대한 불만이 많았던 것이다. 그뿐이 아니고 남의 말을 그냥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말이 사리에 맞지 않는 것은 아니다. 사리엔 맞지만 따지고 들면 남에게 불쾌감을 주는 수도 더러는 있게 마련이다.
어느 날 전원 다방에서의 일이었다. 일선에서 근무한다는 중위 한 사람이 나를 찾아왔었다. 그의 말인즉 자기가 시 공부를 하고 있는데 전원 다방에 시인들이 많이 모인다는 말을 듣고 찾아왔다는 것이다.
집은 서울인데 며칠의 휴가를 얻어 돌아왔고 더구나 내가 이 다방에 나왔다는 말을 듣고 찾아왔다는 것이다. 그때 바로 이상로와 내가 같은 탁자 앞에 앉아 있었다. 나는 그의 말을 듣고 곧 그를 이상로에게 소개했다.
“이분은 시인 이상로 선생입니다.”
중위는 일어서며 거수경례를 했다.
“나, 이상로요.”
“예, 김 중위입니다.”
그의 말을 듣자 이상로가 말꼬리를 잡는다.
“청년 이름이 중윕니까?”
“아니올시다. 제 이름은 영석입니다.”
“그래요, 아 그러면 ‘김영석입니다’라고 말을 해야지 이름 대신 직명을 소개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요즘은 이상한 시대가 돼서 전화를 받고 ‘저는 아무갭니다’하고 말을 해야 할 것을, 저 김 선생입니다 혹은 김 과장입니다 하고 자기를 소개하는 사람이 많아졌단 말이야. 그것은 안 될 말이야. 선생은 남이 불러주는 말이지 자기가 자기를 소개할 때 쓰는 말은 아니지. 중위나 과장도 남이 불러주는 말이지 자기가 자기를 부르는 말은 아니야.”
그는 입에 침이 마르도록 나무라고 나더니 말하였다.
“내가 초면에 지나친가 보오.”
김 중위는 미안해서 어쩔 줄을 모른다. 그러면서 몇 번이고 이상로에게 머리를 숙이며 죄송하다는 뜻을 전했다.
김 중위가 나간 후 나는 이상로에게 몇 마디 나무라듯이 말했다.
“아니야, 사리에 맞지 않는 말을 하는 사람은 그렇게 타일러 주어야 해. 나이든 사람들이 그런 것도 바로잡지 못하면 왜 살아가는 거야.”
내 말에 이상로는 이렇게 대꾸하는 것이다.
이상로는 의기의 기질을 가진 사람이다. 불평을 많이 하는 사람치고 의협심을 안 가진 사람은 없다. 그렇듯이 이상로도 의사적인 기질을 갖고 있다. 바른말 잘하고 잘못된 일을 보면 그대로 두지 않고 자기에게 어떤 손해가 돌아와도 하고 싶은 이야기는 해야 하는 그런 사람이다. 그 성격이 이상로의 성격이다.
이상로가 연탄가스에 쓰러졌단 말을 듣고 찾아가려 했으나 오지 말라는 것이다. 며칠 후면 종로에 나가겠다는 것이다.
그에게서 직접 듣지는 못했지만 들리는 말에 의하면 이상로가 술을 마시고 집으로 돌아가다가 통행금지 시간이 되어 할 수 없이 어느 값싼 여인숙에 들러 잠을 잤는데 그 밤에 가스에 중독되었다는 것이다.
같은 방에서 두 사람이 잤는데 한 사람은 죽고 이상로는 죽음을 면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천명이었다.
며칠 후 이상로가 전원 다방에 나왔다. 한 20여 일 만에 나온 것이다. 오랜만에 만난 이상로에게 인사를 했다. 하지만 그는 단 한마디의 대답도 없었다. 그렇게 말을 날카롭게 비평하곤 하던 그가 그렇게도 말을 잃을 줄이야. 슬픈 일이었다.
친구가 차를 한 잔 권해도 말 한마디 않고 묵묵히 받아 마실 뿐이다. 하지만 며칠 지나면 다시 말을 할 것이라고 모두들 생각했다. 그런데, 그 후 며칠이 지나도 이상로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전원 다방에는 매일 나오곤 했다. 하오 3시쯤 되면 몸에 힘이 하나도 없는 그런 모습을 하고 조용히 걸어 나오는 것이다.
우리들이 손을 잡고 반갑게 인사를 하면 한참을 바라보고 있다가 피식 웃곤 했다. 그것이 그의 전부였다. 어느 날 몇 친구가 이상로를 데리고 술을 한 잔 마시자고 했다. 이상로의 의향을 물으니 말없이 긍정적인 표정을 지었다. 술을 한 잔 마시더니 그가 겨우 입을 연다. 확실하지도 못한 발음으로 말하는 것이다.
“고마워, 내가 다방에 나오는 것은 친구들이 보고 싶어서 나오는 거야. 내가 언제 죽을지는 모르지만 그때까지 늘 전같이 대해 줘.”
그는 말을 마치고 울기 시작했다.
친구들도 따라 울었다. 한참만에 내가 물었다.
“자네, 요즘 작품은 더러 쓰는가? 써 놓은 것이 있어?”
그가 머리를 흔든다. 없다는 몸짓이다. 그리고 조금 있다가 그가 말했다.
“생각이 안 나서 작품을 쓸 수가 없어. 통 생각이 안 난단 말이야.”
그리곤 우두커니 앉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사흘 후이다. 이상로는 1970년 5월 20일에 발행한 『이상로 전시집』 한 권을 들고 다방에 나왔다. 그는 내게 「7월」이라는 시를 읽어달라고 했다. 나는 그 시를 이상로에게 읽어 주었다.
7월
장춘불로지 곡이 울리려나
바람 한 점 얼씬 않는
하늘 빛은
그래도 고운데
그 무엇을 마련하기에
잎들은 저리도 무겁고
바람의 그날이, 낙엽의 가을이
저어로운가,
…
그는 시가 끝나지 않았는데 손을 든다.
■ 황금찬
시인. 《문예》와 《현대문학》등단. 월탄문학상, 대한민국문학상 외
(월간《문학세계》2009년 2월호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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