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방송(DSB) : 이효석 미발표 일문소설 한글번역본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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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10월15일 09시1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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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석 미발표 일문소설 한글번역본 공개
장순하 원로시인, 일문원고 한글번역완료 전재

[장순하]

李孝石 先生 未發表 日文小說 槪要
이효석 선생 미발표 일문소설 개요


1. 이효석 선생 미발표 일문소설 개관

(1) 제목: 모름
제목이 적혔을 것으로 짐작되는 친필 원고의 첫 장이 없어져서 제목을 모름. 따라서 이 작품은 공식적으로 <이효석의 미완성 일문장편>이라 불러야 할 듯.

(2) 사용 문자: 일한문(日漢文)
작품 전체가 한자 섞은 일본 글자로만 이루어졌음. 일본에서 과거에 쓰던 소위 ‘역사적 맞춤법’을 사용하였으므로,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글자도 있고 표기법도 현대와 많이 다름.

(3) 집필 시기: 1940년 전후로 추정
이때는 작품의 내용에서 보인, 우리 민족지 조선일보의 강제 폐간(1940), 조선어학회 사건(1942)을 앞두고 일본어 상용을 강요하던 시기와 일치함. 또 이 무렵이 국문 장편 화분(花粉,1939)>, <벽공무한(碧空無限,1940)>과 일문 장편 <녹색의 탑(1940)>을 발표하여 장편과 일문 소설에 많은 관심을 보인 시기이기도 함. 1940년은 그의 34세 때요, 요절하기 2년 전에 해당함.

(4) 체제: 장편소설의 일부
처음에는 원고 분량으로 보아 중편소설인가 했으나, 사건의 스케일이 크고 전개의 템포가 느린 것으로 미루어 미완성 장편소설의 일부로 보임.

(5) 작품 분량: 4백자 원고지 77 장
2백자 원고지로는 154 장에 해당. 원래 78 장이던 것인데 그 중 첫째 장이 망실됨.

(6) 원고의 상태: 읽기가 불편함.
4백자 원고지를 반으로 접은 체재. 일제 시대에 지질이 나쁜 원고지에 펜으로 마구 휘갈겨 쓴데다가 세월이 많이 흘러서 훼손이 심하므로 읽기가 매우 어려운 상태임.

2. 작품 개관

(1) 주요 등장 인물
ㄱ. 고승인(高勝仁)- 이 소설의 주인공. 30대의 한국 청년. 대학 동양철학과 출신으로 자유주의와 동양공영 사상의 신봉자. 창씨개명의 일본식 이름은 아마노 가쓰토(天野勝人).
ㄴ. 일본인 조선총독- 이름은 나오지 않았음.
ㄷ. 이요시(倭善)- 고승인의 일본인 처. 마쓰다 이사무의 누이동생.
ㄹ. 마쓰다 이사무(須田 勇)[‘스다 이사무’라 읽을 수도 있음]- 일본인 청년. 고승인의 대학 친구이자 처남. 친일 사회단체 ‘동아연맹(東亞聯盟)’을 주재하면서 그 기관지 ‘깃발(旗)’을 발행함. 그 처의 이름은 미사오(節).[‘후시’ 또는 ‘세쓰’라 읽을 수도 있음]
ㅁ. 주세기(朱世起)- 반일 열혈 청년.
ㅂ. 고숭(高崇)- 고승인의 아버지. 완고한 전형적 한국 양반 가문의 노인. 옛 정승의 후예로서 구한국 정부의 관원을 지냄.
ㅅ. 고승서(高勝西)- 고승인의 아우. 외국어에 능한 국제적 방랑자.
ㅇ. 일리나- 러시아 출신의 새댁. 고승서의 처.
ㅈ. 나자- 일리나의 아버지가 다른 언니.
ㅊ. 단야(丹耶)- 승인의 누이동생인 처녀.

(2) 이야기 줄거리
이 소설은, 一에서 五까지 모두 5장으로 짜여져 진행되다가 五에서 중단되어 있음. 각 장별 주요 줄거리는 다음과 같음.

一. 이 시대의 선구자로 자처하는 이상주의자 고승인은 자청하여 조선 총독을 면회한다. 그는 자기의 신념에 따라 일제의 시책에 적극적인 협력을 약속하고 많은 칭찬과 함께 총독으로부터 ‘내선일여(內鮮一如)’라 쓴 친필 족자를 선물로 받고 감격한다. 일본인 친구 마쓰다이사무는 승인을 이 시대의 영웅이라 치켜세우며 그들의 회견기를 자기 잡지 <깃발>에 특집으로 대서특필하려고 한다.

二. 고승인과 총독의 회견은 세상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켜 신문 방송 등 매스컴들이 연일 떠들어댄다. 고승인은 그것을 은근히 자랑스러워 하는데, 밤중에 주세기라는 청년이 찾아와서 고승인의 친일적 언행을 크게 질책하면서 비수로 팔을 찔러 큰 상처를 입히고 달아난다. 그는 수일 후 마쓰다의 고발로 고등과 형사에게 체포된다.

三. 병원에 누워 있는 승인에게는 많은 위문객이 찾아온다. 그 중에서도 부자의 인연을 끊고 지내온 늙은 아버지 고숭과 그새 내왕조차 없이 하얼빈에서 살던 동생 승서 내외가 찾아와 큰 위안이 된다. 승인은 아버지가 자기의 뜻을 어기고 가출하여 일본 여자와 결혼하고, 사회개혁을 한답시고 친일 운동이나 하는 승인에게 과거사를 모두 용서할테니 집에 돌아와 살라고 하여 감동한다. 아우 승서는 형에게서 시골 땅을 얻어 판 돈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살기로 작정한다.

四. 허숭은 전통적 대저택인 자기 집에 죽림숙이라는 사설 서당을 차려 친구들과 청담을 나누기도 하고, 찾아오는 젊은이들에게 한국의 전통적 서화를 지도하기도 하며, 한방 약초로 늙은 몸을 정양하면서 소일한다. 승인의 처 일본 여자 이요시와 승서의 처 러시아 여자 일리나도 시누이인 단야와 친해져서 이 대저택을 몹시 자랑스러워 한다. 한 달 만에 완쾌하여 퇴원한 승인은 더욱 건강해져서 <동포가 나아갈 길>이라는 저서의 원고를 쓴다. 또 각처에서 시국 강연을 하며 바쁜 나날을 보낸다. 승서는 미국에 갈 때 돈을 숨기려고 옷의 단추를 모두 순금으로 만들어 달 궁리를 한다.

五. 시대는 나날이 급변하는데 사람들의 개혁 의지는 지지부진하여 답답한 승인은 문인협회가 주최하는 강연회에 나가 ‘시국과 국어(일본어) 사용’이라는 제목의 강연을 하여 청중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고 만족스러워 한다. 어두워서 강연회장 밖으로 나가니 어떤 손님이 기다리고 있다. 전에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였던 박사임이라는 사람이다. 본디 이 신문은 시국적으로 고루한 주의를 고집해 왔는데 박기자는 더 철저한 보수주의자였다. 그는 신문사와 운명을 같이하여 퇴직한 몸이라고 했다.

[* 이야기는 여기서 중단됨]

이효석(李孝石) 미발표 미완성
일문장편소설(日文長篇小說)
한글 번역본
장순하(張諄河) 번역

일 (一)

--- 울창하여 바람도 없고 불타는 듯한 한여름 날이었다.1)
“오늘 나는 다시 태어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미 어제의 내가 아니다. ”한눈에 바라보이는 여름날의 정든 도시는, 이것도 처음 태어난 것같이 오늘은 한결 맑고 고요한 기운을 띠고 있다. 멀리 북쪽에 광대하고 하얀 정부 청사2)가 묵직하게 들어앉고 그 뒤로 북악산의 바위들이 우뚝우뚝 솟은 중간에 도시를 끼고 이쪽의 남산과 마주 보고 있다.

그 한 모퉁이에서 낸 아마노[天野]의 목소리는 작지만 장차 큰 물웅덩이에 돌멩이를 던지는 것 같은 결과를 낳으리라는 것을 그 자신도 깨닫지 못하는 바는 아니었다.

“마침내 해냈네그려. 잘 해 주었어. 자네의 그 상기된 얼굴을 오늘만큼 멋지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네.”

누가 어깨를 툭 쳐서 돌아다보니 그 근방 어느 나무 그늘에서 라도 기다리고 있었던 듯 마쓰다 이사무[須田 勇]가 바라보고 있다. 그 또한 못지않게 흥분된 얼굴로 상기된 목소리였다.

"굽은 길을 똑바로 걸어왔을 뿐이야. 누가 뭐라고 하던 자기의 신념에 충실하게 사는 것은 훌륭한 일 아닌가."

"조만간 누군가가 할 일일지는 모르지. 그러나 자네의 그 커다란 용기가 드디어 천만인에 앞장선 걸세."

"어리석은 자라고 비난을 받지만 않으면 좋다고 생각하네. 시대의 물결을 교묘하게 헤엄치려는 심뽀가 아니라는 것만 알아주면 좋아. 마음속으로 가장 좋다고 작정한 일에 온몸으로 부딪쳐 가려고 결심했을 뿐이야."

"누가 자네의 참뜻을 의심하겠나. 때로는 오해나 비방도 있겠지. 나는 자네를 대신해서 세상에 자네의 마음을 천명해 줄 역할을 떠맡아 주어도 좋아."

"고마우이. 자네의 그 정열이 나로 하여금 오늘날 있게 했다고 해도 좋네."

마른침을 삼키듯, 헛기침을 하듯 목줄을 딸꾹거리는 감동을 진정시키면서 두 사람은 인적이 없는 조용한 한길을 천천히 내려오기 시작했다. 길게 늘어난 큰 그림자가 두 사람을 엄청난 거인처럼 보였다.

아마노 가쓰토[天野勝人]는 방금 총독관저를 하직하고 나온 것이었다. 한 주에 한 번씩 있는 민간인 면회일을 이용하여 이 최고의 장관에게 면회를 신청하여, 시국적 정책을 옹호하고 찬양하면서 자진하여 적극적 진출을 꾀한 것이었다. 모험의 기분이 따르지 않는 바는 아니었으나 근래에 품어 온 소신과 정열이 뭉쳐져서 참으려 해도 참지 못할 내면적 요구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의복에까지 배어 나오는 그의 온화한 인품에 접하고 있으니, 술책을 부리는 사람 같지 않은, 요컨대 그도 신념의 사람이라고 느껴져 신념의 일치에서 오는 의기투합이 한층 용기를 떨쳐 일으켜 주었다.

"군과 같이 믿음직스럽고 현명한 선비를 얻어서 나도 기운이 난다네. 아무쪼록 시정施政3)의 참뜻을 체득하여 솔선수범 확실하게 민중을 지도해 주시게나."

1) 원고 첫째장이 유실되었으므로 문장이 중도에서 시작되어 있음.
2) 하얀 정부 청사: 옛 조선총독부 청사. 원작에서는 ‘백악(白堊)의 정청(政廳)’이라 하였음. 화강석 건물이라 백색이었음. 해방 후에 철거됨.
3) 시정(施政): 정치를 시행함.

넓은 응접실은 족자가 두세 폭 걸려 있을 뿐 간소하고, 한 평이나 됨직한 커다란 책상을 끼고 총독은 한 사람의 이름 없는 청년과 단둘이 마주 앉아 있었다. 옆방에는 여기도 면회를 청하러 와 있는 두세 명의 인사와 신문기자가 대기하고 있을 뿐 경계하는 눈초리 하나 번득이지 않는 너그럽고 편안한4) 오후의 한때였다. 뚱뚱하고 햇볕에 그은 큰 덩치에 미소조차 띄우고 어깨도 펴이지 않은, 농촌의 소작인을 연상케 하는 소박한 눈매와 말씨는 예사롭지 않으면서도 흉금을 확 터놓은 듯 솔직한 사람으로 받아들여졌다.

"우리들 주민의 소리를 들으시는 각하의 태도가 민중에게 커다란 친밀감을 느끼게 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것은 한 시대 전에는 도저히 바랄 수조차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렇게 허물없이 면대의 영광을 누리는 것은 불초한 소생이 그러한 민의를 대신 말씀드리는 한편 저희들에게 시국에 대한 올바른 인식의 모범을 보여 주십사 하는 것뿐이올시다."

"내가 가장 염려한 것은 민중의 오해였는데 다행히 군에게서 이해 있는 반향의 한마디를 들은 것은 매우 흔쾌한 일일세. 그렇듯 올바른 방향으로 민의를 이끌어 가는 데는 오로지 군들의 노력에 기대는 길 밖에는 없네."

"사나이가 한번 맹서한 이상 어떤 일이 있어도 각하의 분부에 보답하도록 노력할 뿐입니다. 불초 소생 오늘처럼 사는 보람을 느낀 적이 없었습니다. 영광스런 무거운 짐을 지워주시어 이렇게 활기가 넘쳐 있습니다요."

아마노의 외곬인 태도에 총독도 감동된 듯 만족스런 태도로 천천히 일어서더니 "군에게 줄 게 있네.” 하고 벽장문을 열었다. 한 폭의 두루마리를 꺼내서 펼치니 가로쓰기한 붓글씨였다. '내선일여內鮮一如'5)라고 굵게 쓰인 붓자국도 생생하고 그 끝에 찍힌 낙관도 뚜렷했다.

"오늘의 기념으로 받아 주시게나. 내가 쓴 것일세."

몽실몽실 살찐 커다란 손으로 직접 건네주니 아마노는 황송하기 그지없고 온몸에 닭살이 돋는 느낌이었다. 마음을 채찍질하여 귀중한 그 한 폭을 받들 듯 받쳐 들고 방을 하직했을 때 가슴 속이 뭔가로 가득 찬 듯 목까지 메었다. 현관을 나와 정문 앞 수위소의 순사로부터 인사를 받고 보니 언제나 경계가 삼엄하던 일대의 공기도 온화한 듯 감격의 응어리가 좀체 풀리지 않고 총독의 큰 칭찬의 소리가 언제까지나 가슴속에 남아 있었다. 해 질 녘의 하얀 길에 구두 발자국 소리가 조용히 났다.

"총독은 내가 솔선하여 창씨6)한 데 대해 절대적인 찬사를 아끼지 않았네. 교육 개정령에 대해서나 지원병 제도7)에 대해서나 내선일체의 문제에 대해서도 그 모든 것에 앞서 창씨의 실천으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네. 다 같은 국민으로서 동등한 인격에 도달하려면 형식부터 정돈하는 것이 제일 첩경이니까. 조선에서는 옛날에 성을 고치는 것은 유배와도 같은 형벌이었지. 시간이라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것이라, 때로는 밭을 고쳐 바다로 바꾸는 일조차 예사로 하니까 말이야. 오늘날 우리가 성을 고치는 것은 동포 전체에게, 그리고 다음 세대에게 널따란 길을 열어 주기 위한 일 아니겠나."

길을 내려오면서, 마쓰다 앞에서 아마노는 다시 한 번 흥분되어 오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다.

4) 원작에서는 ‘뇌락활허(磊落活虛)’라 함. 도량이 넓고 쾌활한 것.
5) 내선일여(內鮮一如): 내지(內地-일제 때 일인들이 일본 본토를 이르던 말)와 조선(朝鮮)은 한 몸과 같다는 뜻으로 일인들이 쓰던 숙어.
6) 창씨(創氏): 일제가 1940년에 한국인의 민족의식을 말살하기 위해 한국식 성씨를 일본식으로 고치도록 강요한 제도. 1946년에 회복함.
7) 지원병(志願兵) 제도: 한국 청년을 반강제적으로 일본군에 지원시켜 복무케 한 제도. 나중에 징병제로 고쳐 전원을 소집해 갔음.

"고군. 아니지, 아마노군. --언제나 잘못 말해서 미안-- 자네가 자네들 조상의 법도와 전통을 깨뜨리면서까지 창씨를 한 데 대해 나는 뭐라고 말할 수 없이 통절하고 엄숙한 심정이지만, 큰 행복을 바란다면 큰 바보가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걸세. 장님처럼 다만 행동할 뿐이지. 일일이 처지의 설명이나 합리화를 꾀하려는 것은 이미 무의미하지 않은가."

"나는 내가 한 일을 부끄러워하거나 두려워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나? 그와 같은 내적 회의나 방황은 벌써 옛날에 모두 청산했다네. 지금 눈앞에 갑자기 비수를 들이댄다고 눈 하나 깜짝하겠나. 나는 자진해서 가시밭길로 들어선 걸세. 처음부터 탄탄한 대로를 선택한 것이 아니야."

"오늘 자네의 회견을 기사로 쓸 작정일세. 서두르면 내달 호<깃발(旗)>8)의 편집에 댈 수 있을 것 같아. 지금부터 잡지사에 가서 원고를 쓰겠네."

왜성대倭城臺9)를 다 내려와서 ‘깃발’ 잡지사 근처에서 본정本町10)으로 들어와 조그만 가게에서 차 한 잔을 시켜 꿀꺽꿀꺽 마시고 나오니 마쓰다는 잡지사가 있는 명치정明治町11)쪽으로 아마노를 유인했다.

"내 누이동생이 와 있을지도 몰라. 자네가 돌아올 시각에 맞추어 회사에서 만나기로 했으니 함께 들르지 않겠나?"

도로를 향한 조그만 빌딩을 올라가니 이층 끝자리에 동아연맹본부東亞聯盟本部12)의 간판과 나란히 ‘깃발’ 발행사의 표찰이 걸려 있다. 사원들이 돌아간 뒤의 텅 빈 편집실에 달랑 혼자 앉아서 기다리고 있던 이요시倭善는 마쓰다들을 일어나며 맞이했다.

"잘 되었나요? 꽤 기다렸어요.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니지요? 뭔가 어긋 진 것 같아 무서웠다구요."

아마노 앞을 가로막으면서, 겨우 근심스런 이맛살을 편 듯한 눈치였다. 그처럼 가려한 아내의 모습을 이제껏 보지 못한 것 같았다. 얇다란 홑옷에 새하얀 버선이 눈에 부시게 비쳤다.

"잘 안 될 게 뭐 있어. 아마노군은 오늘 자랑스런 영웅이 된 거야. 유신의 청년13) 같은 기세라구."

오라비의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을 만큼 이요시의 눈은 예사롭지 않은 아마노의 거동을 주시하고 있었다.

"당신 웬 얼굴이 그래요? 눈이 충혈되고 볼이 새빨개요. 마치 술을 마신 것 같다구요. 열이 있는 건지 몰라."

다가와서 이마에 손을 짚으려 하는 것을 아마노는 가로막고,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당연하지. 오늘은 난생 처음 이상한 경험을 하고 온 거요. 과거 30 년을 오늘 하루에 다 산 것 같은 기분이라구. 마치 커다란 용광로 앞에서 단단히 단련 받고 온 것 같소."

"빨리 집에 가서 쉬는 게 좋지 않겠어요? 이 땀 좀 봐. -- 진땀이 등에 잔뜩 스며 나와 있다구요."

8) <깃발(旗)>: 작중 동아연맹의 월간 기관지의 제호.
9) 왜성대(倭城臺): 일제시대 조선총독의 관저 및 그 지역의 이름. 남산 밑 지금의 필동 어름에 있었음. 뒤에 지금의 청와대
자리로 옮겨 ‘경무대(景武臺)’라 고쳐 부름.
10) 본정(本町): 지금 서울 충무로(忠武路)의 일제 때 지명.
11) 명치정(明治町): 지금 서울 명동(明洞)의 일제 때 지명.
12) 동아연맹(東亞聯盟): 작중 마쓰다 이사무(須田 勇)가 이끄는 친일 사회단체.
13) 유신(維新)의 청년: 일본에서 명치유신(明治維新)을 이끈 기개 높은 젊은이들을 이르는 듯.

"그리 서두르지 말아라. 이제부터 중대한 일이 있을 거니까."

마쓰다는 누이를 밀어내듯 하고 아마노와 마주하여 책상 앞에 크게 자리 잡고 앉아서 빠르게 용지에 펜을 달리고 있었다.

"총독 회견기라. --- 자, 더 자세히 그 상황을 이야기해 주게나. 자네가 꺼낸 제목과 총독의 태도며 자네의 감상 등 크고 작은 것 빠짐없이 들려주게. 내달호의 톱기살세. 빅뉴스라구."

재촉하면서, 그렇다고 눈을 감고 분주하게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 아마노의 입만 기다리지도 않고 술술 종이에 검게 잉크칠을 하고 있었다.

마쓰다 이사무가 아내 미사오[節]14)등과 함께 아시아주의15)를 표방하는 국제적인 결사16)동아연맹을 창립하여 널리 맹우를 모집하고, 기관지 ‘깃발’을 발행하기 시작한 지 이미 5, 6년이 지났다.

대학에서 동양철학을 전공하고 있을 때 이미 같은 사상이 굳게 싹터서 정열의 분출이 마침내 그와 같은 행동으로까지 그를 몰고 간 것이었는데, 오늘날 정세가 격변하여 이들 젊은이들의 단체의 의의는 사회의 표면에 크게 떠올라 온 것이었다.

이미 사회 한구석의 흐릿한 존재에 그치지 않고 솔선하여 시국과 관련된 모든 기관과 손잡고 협력하여 적극적으로 활동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있었다. 취지에 공명하여 모이는 맹우는 나날이 그 수가 불어나고 <깃발>의 부수는 몇 만으로 불어 나갔다. 맹우들을 편달하면서 마쓰다 이사무는 스스로 펜을 잡고 연단에도 섰다.

이름도 ‘아마노 가쓰토’라 고친 고승인을 평생의 친구로 얻은 것이야말로 마쓰다에게는 아마도 가장 든든한 의지였으리라.

같은 도시의 대학의 철학 교실에서 전공 외의 시간에 자유주의적 입장을 취하고 있던 경제학 교수가 불그레한 말17)을 했다고 하여 수업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쫓아가서 교수의 잘못을 따지고 실언을 취소시킨 학생이 있었다. 마쓰다 이사무였다.

당시, 같은 철학과에 적을 두고 있던 고승인은 교수로부터 살짝 그 은밀한 고백을 들었을 때, 마쓰다의 패기에 이맛살을 찌푸리고 내심 매우 분노했었으나 십 년이 못 되어 그 마쓰다와 마침내 같은 길을 가게 되었고, 당시의 교수조차도 같은 방향으로 보조를 맞추어 저널리즘의 전선에서 열렬히 활약하게 될 줄은 신만이 아는 오묘한 배합이었다.

교수와 대체로 같은 처지에 있던 고승인이 오늘의 사상을 품게 되기까지에는 물론 가시밭길의 여러 변전이 있었으나 특히 마쓰다와 가까워진 데는 그의 누이 이요시를 사랑한 까닭도 있었다.

나란히 수재 소리를 듣고 실력이 서로 백중을 다투던 두 사람은 학부를 마치면서 연구실에 남아서 거기서도 책상을 나란히 했다. 이따금 연구실을 찾아오는 이요시를 마음에 두기 시작한 고승인은 어느 결엔가 마쓰다에 대한 대립 의식이 차츰 줄어 가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의 사랑에는 여러 가지 외부로부터의 장애도 있었으나 서로의 의지로 둘이는 결합하게 되어, 내선결혼의 모범 부부라고 신문에 나기도 하고 거리의 화제에 오르기도 했으나

14) 미사오(節): 마쓰다 이사무의 처. 성은 일본인의 관례대로 남편의 성을 따라 ‘마쓰다’를 썼을 것임. ‘節’을 이름자로 쓸 때
는 ‘미사오’ 말고도 ‘도모, 도키, 후시, 마코토’ 등 여러 가지로 읽을 수 있음.
15) 아시아주의(亞細亞主義): 일제 때 군국주의 일인들이 제창한바, 아시아가 서로 단결하여 함께 번영하자는 뜻으로 쓴 ‘대동
아 공영주의(大東亞共榮主義)’를 이름인 듯.
16) 결사(結社): 모임을 조직함. 또는 그런 조직.
17) 불그레한 말: 좌경적인 이론. 당시 일본 지식인들 사이에서 많이 유행했었음.


다만 하나 그 결혼을 끝까지 가로막는 의지가 있었다. 언제나 완고한 아버지 고숭高崇의 낡은 옹고집이었다.

고승인이 아버지와 서로 뜻이 안 맞아 이제껏 집을 떠나 반역을 계속하고 있는 것은 결혼에 대한 의견의 어긋남만이 아니라 사상의 차이에도 더 깊이 뿌리박고 있었다.

조숙하여 크로포트킨18) 같은 것을 탐독하고 있던 그는 중학교19)를 마치자 가정의 숨 막히는 공기에 견딜 수 없어(당시 관리로 봉직하고 있던 아버지는 집 밖에 애첩을 두어 가정에서는 찬바람이 불고 있었다) 혁명가가 되겠다며 도쿄로 건너갔다. 어머니로부터의 송금도 끊기자 직공이 되기도 하며 온갖 쓴맛을 맛보면서 아나 운동20)에 몸을 던지기도 하다가 학령을 많이 넘긴 다음에야 향리로 불려 돌아와서 뒤늦게야 예과21)에서 학부로 학업을 계속했으나 냉정한 속에서도 여전히 사회에 대한 정열을 불태우고 있었다. 그러한 정열을 지닌채 지낸 연구실에서의 2년간은 참으로 지루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요시를 만나 또 한 번 도쿄행을 목표했을 때는 아나 운동의 불길도 식어가는 무렵이라, 겨우 남은 연기에 그을리고 있는 운동 단체의 둘레를 겉돌면서 수년을 객지에서 보내고 두 번째로 고향의 땅을 밟았을 무렵에는 시대적 형세도 변하기 시작하여 그의 생각은 이제까지와는 반대적 방향으로 매우 자연스럽게 달려가고 있었다.

보고 있는 눈앞에서 이념과 모순, 희망과 환멸이 나날이 더욱더 뒤얽혀서 몇 번이나 내면적 갈등을 그에게 강요하는 것이었다. 탐구심이 강한 그에게 있어서 그 모든 과정이 자연적 성장으로서 한 가지 한 가지에 대해서 그의 정신을 성숙시켜 가는 데 불과했다고도 할 수 있었다. 마쓰다와는 이미 완전한 이해가 성립되었고, 이제는 이요시를 행복하게 해 줄 자신도 생겼다. 인간은 역사의 물결에 그저 몸을 맡기기만 하면 된다. 그 이상의 일은 할 수 없는 것이라고 체념하는 사이에 어느새 여유로운 마음이 생겨 있었다.

늙고 외로운 아버지의 심경이나 단란이 없이 삭막한 가정의 상황을 생각하면 자식으로서 일말의 애상이 없는 바는 아니었다. 아버지는 승인에게 배반당했을 뿐만 하니라 차남 승서勝西도 일찍부터 아버지의 뜻을 뿌리치고 집을 뛰쳐나가 분방한 행동에 한 몸을 맡기고 있었다. 형이 오로지 아시아의 행복을 생각하는 데 반하여 아우인 승서는 서방에의 강한 동경을 언제까지나 버리지 못했다. 너무나도 크고 화려한 꿈에 완전히 얽매인 꼴로서 아름다운 함정 속에서 몸을 움직일 수도 없이 한 가지 집념 속에서 언제까지나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고향의 전통이나 조상의 가르침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돌아보지 않는 놈은 역적과 매한가지다. 네놈들을 교육한 것은 오늘과 같은 이런 흉측한 꼴을 보려는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한탄하고 경계해도 새 풍조에 정신 빠진 젊은 놈들을 설득할 힘이 없었다.

18) 크로포트킨(Pyotr Alekseevich Kropotkin, 1842~1921): 제정 러시아 시대의 무정부주의자.
19) 중학교: 지금의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합친 것과 같은 학제. 시기 따라 3년제에서 5년제까지 변동이 많았음.
20) 아나 운동: 무정부주의적 국가체제를 실현하려고 한 정치운동. ‘아나’는 ‘아나키즘(anarcism, 무정부주의)’의
준말. 일체의 권력이나 강제를 부정하고 개인을 구속하는 일이 절대로 없는 사회를 실현하려고 한 운동. 프루
돈(P.J.Proudhon), 크로포트킨 등이 그 대표자. 일본에서 군국주의에 맞서 지식인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것을,
일제 때 일본 유학생인 우리나라의 젊은 지식인들이 들여와서 독립운동의 한 방편으로 이용하기도 하였음.
21) 예과(豫科): 본과에 들어가기 전의 과정. 일제 때 우리나라에 있던 유일한 대학인 경성제국대학(京城帝國大
學)은 예과 2년을 거쳐 본과인 학부 4년의 과정에 들어가게 되어 있었음.

승서는 학부를 나와 최고의 교양을 몸에 지니자마자 그 길로 프랑스나 미국으로 건너뛸 것을 몇 번이나 꾀했으나 이루지 못하고 결국은 도시에서 도시로 아무 하는 일 없이 방황하는 신세가 되었다. 도쿄도 소망하는 땅이 아니라는 것을 알자 하얼빈에서 상해로 가서 이국의 아가씨22)를 아내로 얻어 주로 이 두 도시를 떠돌며 청춘의 나날을 지우면서, 분배받은 재산을 대부분 탕진해버리고도 서양으로 출분할 꿈은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세 부자의 각기 다른 모양의 야릇한 갈등 중에 아무래도 아버지의 외로움이 가장 커서, 밀려드는 나이의 물결 속에서 아버지와 어머니를 위로하고 섬기기 위해서 누이동생인 단야丹耶만이 집에서 칩거한 채 혼기조차 놓치고 있었다.

아버지는 좋아하던 한문책을 펼치는 한편 서도書道를 시작하여 별채의 거실을 ‘죽림숙竹林塾’23)이라 칭하고 모여드는 젊은이들의 붓손을 보아 주기도 하고 옛 친구들과 정담을 나누기도 하면서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었다.

승인은 언젠가는 그런 아버지와도 화해되기를 원하고는 있었으나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성씨를 아낌없이 버리고 ‘아마노’라고 고친 것조차 아버지와 따로 독립하여 집안의 계보에서 떨어져 버린 꼴이라, 아버지의 노여움을 생각하면 곁에 다가갈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끈질긴 아버지의 옹고집을 그 나름으로는 존경하고 아우의 헛된 꿈을 나무라면서도 당분간은 혼자 쓸쓸한 길을 걸을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언젠가는 틀림없이 길동무도 불어나리라는 것을 굳게 믿으므로 신념의 저서 <동포의 나아갈 길>의 원고 집필에도 꾸준한 정열을 쏟을 수 있었고 한편 동아연맹에서 마쓰다의 일을 거드는 데에도 활기를 느꼈다.

오늘은 순수한 한 시민의 자격으로 총독에게 면회를 신청하여 소신을 피력한 것이 뜻밖에 큰 감동을 얻어버린 결과가 되었다. 마쓰다 편에서 보면 바라지도 않은 좋은 기사 거리였고 아마노와 누이의 신상이 걱정되어서 예사롭지 않은 위무의 말을 아끼지 않은 것이었다.

22) 이국(異國)의 아가씨: 여기서는 러시아 아가씨인 일리나를 이름. 고승서의 처.
23) 죽림숙(竹林塾): 대숲 속의 글방이라는 뜻. ‘숙’은 오늘날의 사설학원과 비슷한 일종의 서당.


이 (二)


밤에 아마노는 몸에 미열이 느껴져 일찍부터 누워 있는 곁에서 이요시가 라디오를 틀자 뉴스의 시간이라, 마침 낮에 있었던 총독 회견의 상황을 방송하기 시작했다. 이튿날 조간에 동맹통신(同盟通信)24)의 기사로서 커다란 제목이 굵직굵직하게 장식될 특종이라 하면서 아나운서의 흥분에 찬 목소리로 재빨리 거리에 전파되고 있는 것이었다.

"공정 면회일도 이미 횟수를 거듭하기 수 주간에 이르렀거니와 오늘 아마노 가쓰토군과의 회견만큼 총독을 기쁘게 한 적은 없었고---"

이요시가 긴장된 얼굴을 등불 밑에서 빛내고 있는 옆에서 아마노도 자기 이름이 불리어지자 발딱 반신을 일으켜 귀를 기울였다. 두 사람만의 조용하고 좁은 집안 가득히 소리가 퍼져서 낮 동안의 상황을 빠짐없이 보도했다. 아마노는 얼굴을 붉히고 다시 한 번 몸이 더워짐을 느꼈다.

"아마노군은 내선일체의 필연성, 지원병 제도의 실시, 창씨의 급무 등 여러 문제에 대한 소신, 장장 수십 장의 원고를 낭랑한 목소리로 읽어, 정해진 시간 5분이 20분으로 늘어났어도 총독은 더욱 기쁜 표정으로 정열의 선비를 얻었다고 그를 칭찬 격려하여 그 회견은 가장 유쾌한 인상으로 마쳤다. 아마노군은 자기 저서 <동포의 나아갈 길>의 제1부를 공손히 증정하자 총독은 친히 쓴 휘호 한 폭을 주어 글자 그대로 감사에 찬 한때로서 시국적 정책 시행상 다대한---"

"그것 꺼 주지 않겠소?"

아마노는 가슴이 답답해져서 거의 신음하듯이 아내에게 부탁했다. 이요시가 뜻을 몰라 뒤돌아보자 아마노는 다시 한 번 다급하게 소리치고는 그대로 발랑 상반신을 눕혔다. 스위치를 틀자 잠시 잡음이 찍찍 나다가 이내 조용해져 방안은 침묵이 돌아왔다.

"수백만인 앞에서 갑자기 알몸이 된 것 같아 견딜 수 없는 심정이야. 영리한 건지 멍청한건지 난 어느 쪽이야? 당신이 말해 줘요."

"옳다고 믿은 일을 용감하게 시작한 당신 아니에요? 회의 같은 건 벌써 몽땅 내버리지 않았나요?"

"지금 내 이 심정은 전혀 예상조차 못했어. 나는 몇 번이고 가다말다를 되풀이하다가 오늘의 결론에 도달한 것이었소. 라디오는 무서운 놈이야. 사람을 절벽 끝으로 몰고 가려 하고 있어."

"당신 고민 잘 알아요. 시대 물결의 파고가 너무 크다구요. 침착해요. 차차 평상의 심정으로 돌아올 테니까요. 틀림없이요."

"이요시!"

발판에 간신히 매달려 허우적거리며 내는 희미한 신음 소리와 같았다. 여운이 잠잠해지기까지는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나를 오늘날 있게 한 것은 오직 당신의 사랑이었소. 여자의 사랑으로 움직이는 것은 졸부일까? 뭐래도 좋아. 당신이 있음으로 하여 나는 사는 보람을 느끼고 있는 것이오. 도중에 잠깐 방황하기는 했으나 결국 당신의 사랑이 나를 이리로 되돌려서 오늘의 행동을 불러내준 거요."

"이제 와서 새삼스레 사랑타령을 하니 우습군요. ---하나의 사랑을 키우는 데 7년이 걸렸어요. 이상한 건 그 동안에 끈기가 졸아들기는커녕 더욱 더 힘이 솟고 빛이 더했다구요. 생각만 해도 눈부신 기분이지 뭐예요."

24) 동맹통신(同盟通信): 일제 때 일본에 설립된 통신사로, 서울에 경성지사(京城支社)를 두고 운영하였음.

"어떻게 투쟁해 온 우리들이오. 사랑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소. 그런 정열의 연장이 마침내 나를 오늘에 몰아세운 거라고 생각해.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당신의 환경이며 향토며 뭐든지 다 좋아한다구요. 그것들을 위해 죽는다면 당신을 위해 죽는 게요."

"오늘 밤같이 사랑을 이야기한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이상스런 생각이 드네요."

아마노가 감정을 집중한 눈빛으로 바라보니 이요시도 몸이 근질거려서 정열적으로 그에 대응해 주고 싶었다. 그러나 자기는 어째 이렇게도 표현력이 없을까 하고 가슴 답답한 심정에 잠겨 있을 때 현관에서 부르는 소리에 정신이 돌아왔다. 꿈에서 깨어난 듯 이요시는 비실비실 일어나 나갔다.

뜻밖의 손님에 아마노도 벌떡 일어났다. 이요시의 안내도 기다리지 않고 혼자서 뚜벅뚜벅 들어온 사나이의 얼굴을 쳐다본 순간 전신이 감전된 듯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왔구나!’ 하는 직감이었다.

"어때 놀랐나? 주세기朱世起25)다. 돌연히 올라와서 미안."

자진해서 자기소개를 하는 당돌함에 아마노도 태연한 듯 자세를 바로 하고 고쳐 앉았다.

일찍이 민족주의 운동의 투사로서 화려하게 이름을 날렸으나 몇 차례의 좌절 끝에 마침내 오늘의 건달패로 전락했지만, 여전히 매임새 없는 기개를 품고 있는 주세기와 갑자기 가까이서 마주 보게 되니 아마노도 긴장되어 몸이 굳어지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왜소단구26)에 부리부리한 눈빛을 갖고 있는 주세기에게는 아직도 섣불리 범접 못할 위엄 같은 것이 있었다.

"아마노군. --웃기네! 아마노가 다 뭐야. 아 고승인, 너에게 오늘의 감상을 들으러 왔다. 잘났더구나. 거리는 지금 네 소문으로 자자하다."

"오해하지 마시오. 뭐 잘난 체하려고 한 일이 아니오."
라고 대답하고, 아마노는 그 나약한 자기의 정직성에 혐오감이 느껴져서 자신에게 항변이라도 하듯 분연히 말을 보탰다.

"모두를 위한다는 생각에서 한 몸을 던져본 것이라오. 불행한 모두를 위해서라면 나는 이 몸을 망쳐도 좋다고 생각하고 있다오."

"대단한 일념이군그래. 한 몸을 망치지 않아도 좋으니 네가 말하는 그 불행한 모두를 바보 만들진 말아라. 모두를 너 혼자 떠메고 서있는 때가 온 듯 들까불지 말고 얌전히 죽치고 있는게 어때."

꾸짖는 것 같은 말투, 위압적인 말투에 가슴이 떨려 왔으나, 이건 안 되겠다고 생각하면서 매달리듯 기를 썼다.

"당신이 진심으로 동포를 사랑한다면 나도 마찬가지요. 최대다수의 최대 행복을 생각하기 때문에 나도 일어선 것이지 영웅놀이란 당치도 않소."

"거기서도 착각을 일으키고 있군. 최대 다수의 행복을 염원하는 것은 네 자유지만 네가 가는 방향이 과연 행복에의 길인가 어떤가를 정하는 것은 아주 바보 같은 짓이라구. 신의 계시를 받은 것도 아니니 요컨대 값싼 안전이라고 아첨하는 것 이상 그 무엇이 있다는 거야?"

"착오도 심하오. 그렇게 말하고 있는 당신은 움직이고 있는 역사에 대하여 장님이고 무지하다는 것을 폭로하고 있다는 것은 생각지도 않소? 당신은 큰 물결을 거역하려 하지만 그건 엉뚱한 얘기요. 물결은 이미 정해진 방향으로 진행하고 있지 않소? 이 방향을 벗어나서는 미래에 대한 예견도 전망도 없소."

25) 주세기(朱世起): 열혈적인 반일 애국 청년.
26) 왜소단구(矮小短軀): 체구와 키가 작음, 또는 그런 사람.

"누구의 견해가 옳은가는 예로부터 신만이 아는 것이고 최후의 결정은 미래에 속하는 것인데, 나는 다만 그렇게 밖에 보지 못하는 너의 근시안적인 천박성을 지적한 것이고 그런 근시안적 방향에 협력하는 일이 커다란 과오를 범하고 있다는 것을 경고하고자 한다. 너처럼 허영에 들뜬 무리가 나타나려고 정세는 적어도 10년은 앞질러 진행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주면 좋겠다. 세상에 이런 형편없는 얘기가 어디 있어!"

"내가 이런 역할을 담당하지 않았더라도 틀림없이 누군가가 대신 떠맡았을 것이 틀림없소. 물결의 흐름은 도도하게 신념 있는 인사에게 파급하고 있는 것이니까."

"신념이고 나발이고 뭐 있어! 과연 그런 놈들은 구더기처럼 거리에 꿈틀꿈틀하고 있으리라. 그런 놈들을 응징하는 것이 내 역할이다. 할 수만 있으면 단숨에 짓밟아서 말끔히 쓸어내버리고 싶을 정도다."

"공연한 헛소리 말고 당신도 빨리 그 밝은 눈을 뜨면 어때요. 언제까지 거지나 무엇같이 길바닥을 기웃거리는 짓도 가슴이 차가울 게요. 당신을 설득할 능력이 없는 것은 섭섭하기 그지없으나 어때요, 다시 한 번 깊이 마음을 고쳐먹지 않겠소? 손을 맞잡고 함께 나아가자구요."

"까불지 마. 이 풋내기야. 내가 지금 네놈의 군소리를 듣거나 비판하거나 하려고 온 게 아니다. 분통을 터뜨리러 온 거다. 네놈을 벌주러 온거라구."

"밤중에 악을 써대고, 꼴사납군. 마치 깡패의 무리가 아닌가!"

전광석화처럼 빨랐다. 주세기는 어느새 뛰어 올랐는지 재빨리 달려들어서 작은 몸을 굴리듯 아마노 위에 덮친 순간 "무슨 짓이야!” 하는 부르짖음과 함께 
"악!" 하는 비명에 잇따라서 나직한 신음 소리가 났다. 고요한 밤공기에 황망하고 돌발적인 한순간이었다.

옆방에서 차 준비를 하고 있던 이요시가 달려왔을 때, 마침 타고 오른 사냥감에서 떨어지듯 벌떡 일어선 주세기의 눈은 살기가 등등하고 손에는 비수가 들려 있었다. 아마노는 누운채 얼굴이며 상반신에 뚝뚝 듣는 피를 함빡 뒤집어쓰고 있었다.

"무슨 짓을 저지른 거야. 이 무뢰한아!"

이요시는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갑가기 남자 목소리로 소리쳤다. 왼쪽 어깨 언저리를 날카롭게 찔린 듯 솟구치는 피 속에서 괴로워 얼굴을 찌푸리고 요 위에 누운 채 아마노는 일어날 기력을 잃고 있었다. 서둘러 솜을 챙긴다 붕대를 가져온다 하면서 이요시가 바쁘게 설치고 있는 사이에 주세기는 천천히 칼을 거두고 있었다.

"그 젊음이 아까워서 목숨만은 살려 주었다. 잘 반성해 봐라. 그래도 모르겠거든 다시 한번 혼내 주마."

"이 비겁한 놈아. 사람을 다치게 하고도 무사하리라고 생각하느냐!"

이요시는 울먹일 듯 굵은 목소리로 소리치면서 떨리는 손으로 겨우 응급 처치를 하고 있었다. 탈지면으로 닦은 다음에도 잇따라서 피가 스며 나와서 상처 근처를 검붉게 적시고 있었다. 아마노는 일어나보려고 애를 써 보았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당신이 도전해 왔으니까 나도 끝까지 싸워 주겠소. 올바른 이성과 판단이 결핍되어 있는 당신에게 시대의 호흡이 어떤 것인지 뼈에 사무치도록 알려 주겠소. 나는 당신의 완고한 착오를 도리어 슬퍼해 주고 싶을 정도요."

"한 번만으로는 좀체 항복 안 할 것 같구나. 계속해서 중얼주얼 중얼거리고 있군. 이래도 모르겠거던 내 다시 한 번 오마!"

말을 마치고 주세기가 표연히 사라지고 나니 아마노에겐 억울하고 분한 마음이 치올랐다.

"오늘 밤에 어쩐지 이런 일이 닥칠 것 같은 예감이 들더니만 그예 놈에게 당했구나."

"비수를 빼앗아서 그자를 되찔러주었어야 했는데 아 난 무얼 하고 있었을까. 꼭 원수를 갚아 주고야 말겠어. 거저 말지는 안 할 테니까."

이요시도 비로소 분해하면서 입술을 깨물고 발을 구르는 것이었다. 지금은 그런 것보다 상처를 빨리 치료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당황하고만 있던 그녀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가까운 병원으로 가기 위해 집을 나서 골목길을 달려가고 있었다.

상처는 넓고 깊었으나 부위가 부위인 만큼 대단한 일은 없고, 수 주간 치료를 받으려고 서둘러 입원을 마친 아마노는 한동안 병상에 누워 지내는 몸이 되었다.
그 밤으로 마쓰다와 그 부인 미사오들이 달려와 시름 속에서 저마다 분노를 터뜨리는 것이었다.

"어째서 눈을 번히 뜬 채 그자를 그 자리에서 놓쳤단 말이야? 긴급 전화로 알렸으면 좋았을걸. 그래 거처조차 모른단 말인가."

마쓰다는 다급하게 증오의 눈빛을 불태우면서 말했다.

"겨우 한 순간에 생긴 일이었으니까요. 알리려 해 봤자 난 손을 뺄 수가 없었어요. 어름어름하는 동안에 그만 놓치고 말았다니까요."

이요시는 침대 곁을 못 떠난 채 언제까지나 분한 말씨였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녀석을 찾아내지 않으면 안 돼. 그런 놈들이 날뛰는 걸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철저히 응징해 놓는 게 좋아. 세상을 우습게 알고 함부로 덤비는 짓이 얼마나 오산인가를 알려 주어야 해."

마쓰다는 조용히 누워 있는 아마노 앞에서 저 혼자 분해하면서 초조하게 발을 굴렀다.

"자네는 결국 신념 때문에 상처 입는 몸이 되어서 소망대로 된 셈이겠지만, 이런 수난이 있음으로 하여 일한 보람이 있고 자네는 한층 빛을 더할 뿐일세. 이 따위 일로 실망하지도 않겠지만 우리들은 더욱 기운을 내지 않으면 안 되지."

그러나 아마노는 가만히 듣기만 할 뿐 말을 거드는 것조차 번거로운 것 같았다. 마쓰다들의 단순함과 달리 그의 마음속 밑바닥에는 잡다한 사념들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얄미운 주세기조차도 단순히 경멸만 할 수 없는 것은 그도 또한 자기의 신념 때문에 그런 거동으로 나왔을 것이니 결국은 신념의 차이에서 나온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피로써 피를 씻지 않으면 안 될 비극도 어찌할 수 없는 시대의 조류 탓이라 생각하니 다만 가슴이 아플 따름이었다. 동포에의 사랑이 참으로 큰 것이라 한다면 주세기도 또한 아마노가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될 한 사람일 것이요, 최후에 슬픈 사랑이 충만한 시대에 살지 않으면 안되는 고생은 예사로운 것이 아니었다. --- 이러한 반성이 아마노의 심경을 복잡하게 하고 남들이 엿보지 못할 고뇌를 강요하는 것이었다.

"아아 괴롭다. 무척이나 괴롭구나!"
하고 탄식하면 상처의 통증을 호소하는 것으로만 여겨 마쓰다나 이요시 들이 다가와서 수선을 피우는 것이 아마노에게는 더할 수 없이 답답한 일이었다.

이튿날 하루 내내 마쓰다는 사무실의 근무도 젖혀 두고 병실에의 출입이 빈번하더니 다 저녁에 또 한 번 바삐 모습을 보일 때는 만족스런 얼굴을 하고 숨찬 목소리로 말했다.

"자네, 이젠 신경 쓰지 않아도 좋네. 원수를 갚아 주었네."
"그놈 붙잡았나요?"

이요시가 급히 묻는 말에 마쓰다는 천천히 대답하며 "거리의 고등과27)에 부탁하여 간단히 얽어냈지. 녀석도 헐렁한 놈인지 못된 짓을 저지르고도 편안히 집안에서 뒹굴고 있더란다. 혼자서도 간단히 붙들어 서署로 연행했다는 거야. 남들에의 본보기로 호되게 처벌하도록 부탁하고 왔단다."

"참 잘했어요. 그래 나도 이렇게 기분이 상쾌하네요."
이요시가 대꾸하고 오누이는 복수의 쾌감에 절도를 잊고 있었다.

"그 자식 지금쯤 캄캄한 유치장에서 감개무량하겠지.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의 위력을 알게 하지 않으면 안 돼. 시대의 날갯짓이 큰 것을 가르치지 않으면 안 돼. ---오늘 석간을 가지고 왔지. 자네의 부상도 명예로운 것으로 보도되어 있다네."

마쓰다는 들고 온 신문을 펼치고 3면28)의 큰 제목을 아마노의 얼굴 위에 들이밀었다. 아침에, 어제의 회견 기사를 읽은 눈에 또 지금 생생한 부상 기사를 들이대니 아마노는 그 대조에서 오는 일종의 익살스런 심정을 느꼈다. 마음은 어제처럼 자랑으로 날뛰는 대신에 몹시 우울하였다.

"피곤하면 읽지 않아도 좋네. 내가 읽어 줄 테니 듣고만 있으면 돼."
마쓰다가 신문을 들고 낭랑하게 읽기 시작했으나 아마노는 아무래도 듣기가 거북스러워 결국 가볍게 그 호의를 사절해 버렸다.

"그래? 그럼 조용히 누워 있게나."
마쓰다는 위로하면서 자기가 너무 앞서가는 흥분을 가볍게 억제하기는 했으나 어쩐지 아직 자기 심중을 충분히 다 말하지 못한 듯 답답해하고 있었다.

"우리가 이길 것은 자명한데 분별없는 녀석이야. 단말마29)의 실족일 뿐이잖은가. 재미는 있지만 꾸짖어 주고 싶구나."

"이기고 지는 것이 문제겠는가. 내적 요구에서 마지못해 한 짓이 틀림없어."
아마노는 비로소 입을 열고 솔직하게 자기의 생각을 말했다.

"자멸을 초래하기 위한 내적 욕구라면 그런 것을 따르는 바보가 어디 있겠나. 어떻든 시세를 분별 못하는 무지한 무리라 하겠지. 그 외에 아무것도 아니야.”
“몸의 죽음조차도 돌아보지 않을 처지라는 것도 각자 있을 수는 있겠지.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을 각오하고 내게 부딪쳐온 것 아니겠나. 밉기는 하지만 나는 그자의 심정을 알 수 있을 것 같네."

"칼을 맞고 나서 묘한 데서 분해 하는 것 같은데 고통에서 아직 다 벗어나지 못한 증거일세. 얼른 회복해서 기운을 차려주게나."

그 말에는 대답지 않고, 아마노는 다시 못난이처럼 입을 다물어 버렸다. 마쓰다도 그 심정을 짐작하여 대꾸를 하지 않았고, 이요시는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공연히 붕대나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27) 고등과(高等課): 일제 때 조선총독부 경찰국에서 사상범을 담당한 부서. 이때의 사상범이란 우리의 독립투사
들을 이름. 각 경찰서에는 고등계를 둔바 수하에 수명씩의 비밀 요원인 ‘밀정(密偵)’을 두고 사상범을 무자비
하게 단속했음. 그곳에 배치된 형사와 밀정은 모두 한국인이었고, 이들이 저 악명 높은 ‘고등계 형사, 고등계
밀정’이었음. 군에서는 ‘헌병 오장(憲兵伍長)’이 이 임무를 담당한바 역시 한국인을 기용했음.
28) 3면(三面): 작중 당시 신문의 사회면. 당시 신문은 4면 체제인데, 1면은 정치, 2면은 경제, 3면을 사회, 4면
은 문화면이었음.
29) 단말마(斷末魔): 숨이 끊어지려 할 때와 같이 고통스러운 상황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삼 (三)


갖가지 생각이 가슴속에 소용돌이쳐서 병상 생활은 또 괴로움에 찬 것이었으나, ‘동아연맹’이나 <깃발(旗)>의 동료들, 그 밖에 시내 친지들과 위문객의 내왕이 빈번하여, 격려의 말이나 위문의 서신을 받을 때마다 가슴이 진정되어 차츰 정상을 회복해 갔다. 총독으로부터의 정중한 위문장은 가장 기쁘게 하는 일의 하나로서 상처받은 것 또한 영광스러운 것같이 생각되었다.

그런 와중에 아버지를 만난 것은 한층 마음에 위안이 되었다. 노구를 이끌고 불편한 몸으로 병실에 와 준 것만으로도 아마노는 감동으로 가슴이 메었다. 고집불통의 아버지가 그렇게 몸을 굽혀 찾아온 적은 이제껏 없던 일이었다. 아마노도 본디 엄한 가문의 출신으로서 출필고하고 반필면30)하는 자식으로서의 예의를 항상 몸소 실천하지 않은 바는 아니었건만 다만 시대와 주의가 달라서 반목하면서부터는 부자간의 정애를 멀리 한 지가 몇 년이 지났다. 때때로 집에 들른 적이 있어도 대개는 어머니나 누이와 소곤소곤 속삭이는 정도지 아버지의 거실에 올라가는 일은 전혀 없었다. 그러니 아버지의 방문은 뜻밖이었고 그만큼 가슴이 졸였다.

“신체발부를 훼상31)하면서까지 신념에 투철하겠다는 그 기개는 장하다 하겠으나 그것이 본디 효의 길은 아니다. 효도를 따른다면 인륜의 이치는 성립되지 않는다. 너의 주의나 사상에 나는 언제나 반대다. 그것은 오늘도 마찬가지다. 네 이름이 이런 식으로 세상에 알려지는 것이 나는 부끄럽다. 그런 것으로 기뻐할 너도 아니겠지만.”

학과 같은 목에 튀어난 목뼈를 움직이면서 타이르는 아버지의 엄격한 어조는 예와 변함이 없었으나 대나무같이 깡마른 장신과 마주하면 전에는 답답한 위압을 느꼈건만 지금은 누워서 그 말을 듣는 탓인지 다소 기분이 가볍기는 했다.

"아버지 그 말씀은 이제 그만하십시오. 잘 알고 있으니까요."
"그 일과는 다른 이야긴데 ---사상은 사상으로 치고, 이 기회에 네가 장차 집에 돌아와 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것이다. 내 나이도 나이이고 네 어머니의 외로워하는 양이 예사롭지 않은 것 같구나. 게다가 죽림숙의 숙생들 앞에서 집안의 어줍잖은 꼴을 보이는 것 같아서 안 되겠다. 기왕지사는 일절 잊고 돌아와서 집안일을 맡아 주지 않겠느냐. 이것이 오늘의 부탁이다."

의연한 자세를 흩트리지 않고는 있어도 많이 약해진 아버지의 내심을 듣고 있으니 아마노는 코허리가 찡하고 아파왔다. 아버지도 이제 많이 늙었구나 싶으니 이제까지의 반역에 대한 한 가닥 후회의 정이 날카롭게 가슴을 찔러서 잠시 말이 나오지 않았다.

"고맙습니다 아버지. ---그러나 무슨 일이 있어도 저와 제 처와는 헤어지지 못해요. 지금의 저에게는 어떤 일보다도 이것이 제일 먼저입니다."

겨우 이 말을 했을 때 아버지는 의젓하게 말을 이어서
"그래 좋아. 함께 와도 좋고말고. 그럴 요량으로 말한 것이지 너 혼자만 오라는 뜻이 아니니라. 나도 이제까지 대단히 완고했지만 너희 결혼의 일은 그대로 인정 안 하면 어쩔 수가 없게 되어버렸다. 내가 졌구나."

30) 출필고 반필면(出必告 反必面): 밖에 나갈 때는 반드시 고하고, 돌아오면 반드시 얼굴을 보여야 한다는 말로서 부모나 임금을 섬기는 자세를 깨우친 말. 이것은 “부모가 계시면 멀리 나가지 말며 나갈 때는 행방을 밝혀야 한다[父母 在어시던 不遠遊하며 遊必遊方이니라(論語 里仁편)]를 쉽게 표현한 말임.
31) 신체발부 운운: <효경(孝經)>의 개종명의(開宗明義)장의 구, 원문은 다음과 같음. 신체와 머리털과 살은 부모에게서 받았으니 함부로 손상시키지 않는 것이 효도의 첫걸음이니라(身體髮膚는 受之父母니 不敢毁傷이 孝之始也니라).

"정말입니까, 아버지? 허락해 주시는 겁니까?"
기쁨을 숨기려 해도 그만 흥분된 소리가 튀어나오고 말았다.
"네 누이도 저 나이 되도록 아직 집안에서 뒹굴뒹굴하고 있는 것이 꼴 보기도 싫고 죽림숙의 일도 간단한 것 같아도 그리 만만한 게 아니란다. 시절 탓인지는 몰라도 숙생이 점점 줄기만 한다. 네가 돌아와서 만사 재건해 주기 바란다. 나는 이제 나이 탓이겠지만 정기가 다한 것 같구나."

"힘이 미치는 일이라면 무슨 짓이건 다 하겠어요. 제가 가는 길과 어긋나지만 않는 한 집안 일 다 떠맡겠어요."

"하얼빈32)의 승서한테서 편지가 왔는데 네 소식에 놀라 근근 돌아온다는구나. 그쪽 색시를 데리고 올 모양이더라."

"아우가 돌아온다고요? 걔도 오랜 방랑 생활로 꽤 변했겠지요? 그쪽에서 결혼한 것은 소식으로 듣고는 있었습니다만, 그걸로 소망을 이룬 것이겠군요."

"젊은 놈들의 기분이나 사고는 그놈이나 이놈이나 나는 모르지만, 그 애의 처리만큼 신경쓰이는 일은 없을 것 같다. 옛적에 여러 명사를 배출한 우리 가문에 못나고 나약한 자식이 태어난 것이지. 역마살이 끼어서 가사를 맡길 만한 위인이 아니야. 그러니 만사 너에게 맡길 밖에 없구나."

"불효자식들이 아버지께 걱정만 끼치고 있습니다만 이것도 다 본의에서 나온 것은 아닙니다. 아버지께서도 알아주실 때가 있을 줄 압니다."

"알았을 때는 나 같은 사람은 이 세상에서 물러날 시기겠지. 우리들의 시대는 아닌 것 같다. 짧은 인생에 몇 번이나 시대가 바뀌었는지 알 수 없구나."

아버지의 말도 듣는 둥 마는 둥 아마노는 빨리 이 기쁨을 이요시에게 전하고 싶어 몸이 달았다. 잠깐 자리를 비운 채 얼른 돌아오지 않는 그녀가 몹시 기다려졌다. 아버지는 적이 느긋한 표정으로 무거운 짐을 부린 듯 마음이 편안해 보였다. 아마노는 그 순간 몸의 통증같은 것은 말끔히 잊고 있었다.

2,3일 지나 아우인 고승서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아내 이리나를 집에 남겨 둔 채 병실로 형을 방문했다. 수년 만의 대면에 둘 다 많이 변했지만 형의 눈으로 보니 여러 해 타국의 하늘 밑에서 그을리고 단련된 아우 쪽이 마치 연륜 쌓인 거목과 같이 훨씬 건장하고 씩씩해 보이는 것이었다. 손톱 끝까지 서양화한 이 보헤미안을 앞에 두고 아마노는 혈연의 아우라기보다는 한 낯선 이방인을 대하는 것 같아서 눈이 부신 감회를 금치 못했다. 사고방식부터 몸짓이며 말씨에 이르기까지 동화력同化力의 한 표본을 보는 것 같았다.

"오라버니는 우리말도 많이 잊어버린 듯 말씨가 떠듬떠듬하고 퍽 부자연스러워요." 
아우를 안내하고 온 누이 단야는 곁에서 듣고 있기가 민망스런 듯 말참견을 했다.

"제 나라의 말도 잊어 버려서 이렇게 불명예스러울 수가 없지만 오랜만에 듣는 우리말의 가락은 참 아름다워요. 내게는 그대로 외국어같이 들렸어요."

어학의 재능을 타고난 승서는 학창 시절부터 외국어에만 전력을 쏟아 영, 독, 불어를 습득했고 하얼빈으로 건너가서는 2년 동안에 러시아말을 완전히 익힌 처지로서 향리의 말을 접하자 이런 반성을 불러일으킨 것일까.

32) 하얼빈(哈爾賓): 중국 동북부 흑룡강성(黑龍江省)의 성도

"특히 단야, 네 말은 참 아름다워. 울림과 억양이 부얼부얼하면서도 차분해서 뭐라고 표현하기 어려운 아름다움을 갖고 있다구. 프랑스 말 같으면서도 프랑스 말이 아니고 그런가 하면 독일어 같은 딱딱한 느낌도 없다. 이상스런 꿈을 꾸는 것 같아서 실은 집에 돌아온 다음부터 네 말만 귀에 들려서 어쩔 수가 없단다."

"그래요? 굉장히 감격스럽네요. 오랜만에 맛보면 된장이 버터보다 더 맛이 있을지도 모르지요. 그게 혀의 착각이 아니었으면 좋겠지만요."

"말만이 아니다. 그 의복도 좋아. 하얗고 짧은 여름 홑옷은 청초해서 양장보다 얼마나 날렵한지 모른다. 고향의 여자란 참 좋은 것이구나. 거리를 걷고 있으면 눈이 뱅뱅 돌아서 머리 속에 신선한 바람이 뛰어드는 느낌이다. 저쪽에서처럼 색깔은 없지만 청초한 소박미와 신선미가 있어서, 이것이 미끈미끈한 기름기에 익숙한 눈에는 끝없는 매력을 불러일으킨다."

"참말 그래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매우 차분한 느낌이라, 이쪽 의상에 대해서도 보는 눈이 있다구요."

이요시가 또 끼어들어서 때 아닌 향토 찬미론에 꽃이 피었다. 단야도 조용하고 의젓함을 숨기지 않아 세 사람은 한 가지 상념 속에서 아름답게 융합되어 있었다. 다만 아마노 혼자만이 핀잔 주는듯한 억양의 말씨로 아우를 나무라고 있었다.

"너무 정신이 팔려서 제수씨한테 꾸지람을 듣지 않겠냐? 네게서 향리의 자랑거리를 인정받기는 오늘이 처음인 것 같구나. 누구에게나 향수는 있는 법이니까 때로는 고향이 그리워지기도 하겠지."

"웬걸요. 이리나도 여자들의 몸치장의 아름다움에 놀라 거리에서 넋을 놓고 바라볼 정도예요. 엉뚱한 데서 못난 소리를 토하는 것 같지만 마음속까지는 고쳐지지 못하나 봐요. 그러나 나의 서양을 향한 꿈은 아직도 뿌리가 깊어서 그리 간단히 전향하지는 않겠지만요."

승서는 의자에서 일어나 팔짱을 낀 채 날씬한 장신을 쭉 펴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형님은 시내에 큰 화제를 뿌리고 있는데 이걸로 하여 나하고도 완전히 길이 갈라진 셈이네요. 만주33)에서는 오족의 협화34)를 꾀하여 각 민족의 풍속을 존중하고 있는데 조선에서는 그보다도 각자의 개성을 중시하니까 형님들의 사업이 한결 힘들 것으로 생각돼요. 이번 소식으로도 큰 반향을 일으켜 형세의 급박함을 사람들의 가슴에 심어 주고 있어요."

"그런가? 그렇다면 일한 보람이 있었다는 거로구만. 그렇다고 설마 만주 구석에서까지 나를 찌르러 오지는 않겠지?"

"나는 형님의 길을 비판하고 싶진 않아요. 대신에 나의 길도 비판받고 싶지 않다구요. 각자 다른 길을 걷는 것도 결국은 운명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지요. 서로 꿈은 존중해 주어야 마땅하니까요."

"그렇지. 누구나 꿈은 중요하지. 그 때문에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이요, 그 꿈이 잘못된 것인지 올바른 것인지는 사는 방식이 강한가 약한가에 따라서 결정되는 것이다. 강하게 살면서 꿈을 실현한다면 그것보다 좋은 일은 없겠지. 나도 네 꿈을 비판하지 않는다. 다만 그것이 깨어졌을 때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지 않을 만큼의 준비와 예견이 필요한 것이다."

33) 만주(滿洲, 滿州): 지금 중국의 동북 삼성(東北三省) 지방을 이름. 일제 때 군국주의 일본이 이곳을 점유하여 1932년에 만주제국(滿洲帝國)이라는 허수아비 나라를 세우고, 퇴위한 청조(淸朝)의 마지막 황제인 선통제(宣統帝)[이름은 아이신줴뤼 푸이(愛新覺羅 溥儀), 1906~1967)]를 황제로 앉혔다가 1945년 제2차 대전 종전과 함께 소멸됨. 작중 시기는 이때.
34)
오족화합(五族和合): 중국에서 다섯 민족(한족, 만주족, 몽고족, 티베트족, 위구르족)이 평화 공존하자는 정치이념. 만주제국 시절에는 ‘오족협화(五族協和)’라 하고 1911년 손문(孫文)의 신해혁명(辛亥革命)때는 ‘오족공화(五族共和)’라 했음. 오족의 범위는 일정치 않은 듯, 만주제국 때는 위구르족 대신 조선족이 들어갔을 것임.

"외롭게 10년 동안 하는 일 없이 빈둥빈둥 비참한 방랑을 계속했어도 그 중에도 즐거움은 있었어요. 가슴속에 계획이 그칠 틈이 없었기 때문이지요. 우리 세대의 누구나가 한때는 품고 있던 꿈을 나는 언제까지나 잃지 않고 계속 지니고 있다는 차이뿐이어요. 지금도 머리속은 갖가지 설계로 가득합니다. 그것을 수행할 것을 생각하는 것이 나날의 생활이요 고뇌에 찬 외로움입니다. 계획이 성취될지 어떨지는 누구도 모를 일이지만 힘껏 밀고 나갈 뿐입니다."

승서의 지칠 줄 모르는 젊은 정열에 아마노는 입을 닫을 밖에 없었고 이요시나 단야도 그 어세에 눌려서 넋 없이 그 말을 근청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그 뒤 승서는 이리나를 데리고 다시 한 번 병원을 찾아왔을 때 비로소 흉금을 열고 계획이라는 것을 말했다.

하얀 피부에 흑갈색의 머리채를 드리운 건강하고 키가 늘씬한 이리나의 풍모를 대하는 것만으로도 아마노는 눈이 부셔서 마음이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그런 정경에 익숙지 않은 동양 사람의 눈에는 너무나 가슴 설레는 딴 세상의 꽃이었다. 맑은 하늘빛 눈동자에 이쪽의 병색 짙은 모습이 거울처럼 비칠 것을 생각하니 창피하고 궁색하여 깊은 거리감이 느껴졌으나 아우가 생애를 걸고 연모해온 아름다움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잘 익은 포도의 냄새가 풍기는 밝고 희고 대담한 아름다움이었다.

"이쪽의 여자들은 참 아름답네요. 특히 매씨는 거리의 누구보다도 예뻐요."
아우의 통역에 따르면 그녀의 러시아어는 그런 의미였다.

"제수씨가 훨씬 아름다워요. 태양처럼 눈이 부셔서 똑바로 바라 보지 못할 정도예요."
아마노가 하는 말의 통역을 한 마디 한 마디 목마른 듯 경청하면서 이리나는 미소를 지었다. 그 다음에는 승서와 빠른 말을 주고받아서 아마노만 따돌림을 당한 꼴이었으나 그녀는 모든 것이 좋은 인상으로 매우 만족하고 있는 것 같았다. 표정으로도 그것을 읽을 것 같아 아마노도 그것이 즐거워서 점차 그녀에 대한 첫인상의 거북스러움에도 익숙해졌다.

"형님, 이번 우리들의 귀향에는 형님의 문병을 겸해서 또 하나의 목적이 있었어요. 평소의 계획을 이번만큼은 기필코 성공시켜 보고 싶습니다. 이와 같은 생애를 건 유일한 소원을 위해서는 어떤 모험도 돌아보지 않을 작정입니다. 나에게 질력이 나신 아버지께는 말씀드리지 못할 것 같아서 형님에게만 고백 하여 협력을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이것저것 준비할 것도 있고요."

"시기가 나쁘구나. 미국에 건너가는 데는 지금이 가장 곤란한 시대다. 조금 무모한 것 같다."

계획 단계에서는 여러 번 애로를 겪은 아우의 생애의 소원을 아마노는 이제 와서 정면으로 반대도 못하고 할 수만 있으면 성취를 시켜 주고 싶은 심정이 들었다. 육친을 영원히 고향으로부터 떠나보내는 것이 안타깝기는 했으나 아우의 꿈을 꺾는 것은 더욱 못할 짓이었다.

"무모한가 현명한가의 문제가 아니라 이젠 길은 하나밖에 없어요. 우리 같은 인간에게 동양의 땅이 얼마나 좁아졌는지 이리나를 통해 함께 들어 보시지요. 그녀는 하얼빈의 거리에서 한 사관에게 날카롭게 모욕을 당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그 도시가 싫어져서 지금은 그녀 쪽이 나보다 더 서두른다구요.”
지난 그 사건이라는 것을 회상해서인지 이리나의 표정은 해거름같이 민감해져서 입술이 조금 비뚤어지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리나가 전차 안에서 모피를 걸치고 검정 에나멜 핸드백을 들고 있으니까 건너편에 앉아 있던 그 사관이 이 비상시에 지나친 사치로 건방지기 짝이 없다고 이해 못할 말을 중얼거리고 마구 욕지거리를 해댔다는 것이었다. 군도35) 끝으로 코트 깃을 집적거리니 심한 모욕감에 이리나는 눈이 뒤집히고 얼굴이 당기고 입이 벌어진 채 벙어리같이 경직되었다. 그렇게 굳어진 아내의 몸을 부축하고 승서는 말없이 전차를 내렸으나 사관은 집요하게 뒤를 쫓아와서 도로의 모서리에 섰을 때 지하의 홀에서 새어 나오는 밴드의 음악 소리를 듣더니만 '잠깐 실례!' 하면서 이리나의 팔을 억지로 끌고 승서만 남겨 놓은 채 계단을 내려갔다는 것이었다.

"언어도단36)이지요. 이리나는 그날 밤새 눈이 붓도록 울고 한숨도 자지 못했어요. 상해쪽으로 옮겨 간 것은 그로부터 얼마 안 되어서였는데 거기서는 더 위험한 일도 있었어요. 말세라구요. 굴욕을 참을 것인가 죽음을 택할 것인가. 이제는 이 두 길밖에 남지 않았어요. 생각만 해도 피가 끓는다구요."

승서의 말과 표정으로 이리나도 실감이 되살아난 듯 몸을 부르르 떨면서 눈은 분노로 빛났다. 너무나 기가 막혀 목이 메어서 한동안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때같이 인간의 생명을 경멸한 적이 없었어요. 죽지 못해 아직껏 살아 있으니까요. 하얼빈은 제가 태어난 고장인데 지금은 저주받은 땅이 되어 버렸어요. 어째서 모든 것이 이렇듯 뒤죽박죽이 되어 갈까요. 슬퍼지네요. 동양의 땅에는 이제 살 수 없게 되었어요. 어떤 짓을 해서라도 이곳을 떠날 작정이어요. 그것만이 오직 하나 살아갈 길이니까요."

"미국에 가서 그곳 어느 도시에서 누군가를 기다릴 거라고 말하고 있어요. 그 때문에 그녀는 친어머니를 하얼빈에 떼놓고 가는 것조차 불사하는 결심을 하고 있어요."

승서는 흥분하고 있는 아내를 달래면서 이렇게 보충했다. 이리나는 위로받고 다소 표정도 진정되었다.

흑해37)에서 소의 목장을 경영하고 있던 카테리나38)는 전남편 이바노프39)와 사별하자 알렉세이에게 개가하여 딸 나자40)를 데리고 하얼빈으로 옮겨 왔다. 거기서 이리나가 태어난 것이다. 각기 아버지가 다른 두 딸의 성장을 지켜보면서 착실하고 부지런히 살아가는 동안에 시국도 바뀌어 알렉세이가 후가이스프트41)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될 무렵에는 생계도 곤란해져서 나자는 카바레에, 이리나는 밀크홀에 근무하는 몸이 되었다. 아버지 없는 모녀 세 사람의 살림은 쓰라리고 의지 없는 일도 많았으나 두 자매가 착실히 일하여 오붓하고 조촐한 즐거움은 있었다. 그러나 풍운의 위세는 어느새 이 조그마하고 평범한 일가에도 미적미적 밀고 와 뭔가 슬픈 일이 끊이질 않아, 나자는 다시 한 번 흑해로 돌아가 소를 기르고 싶다고 엄마를 조르고 있었다.

35) 군도(軍刀): 군인이 차는 긴 칼[장도(長刀)]. 옛 일본군에서 군복을 입을 때 장교는 장도를 차고 병졸은 단검
을 찼음.
36) 언어도단(言語道斷): 어이가 없어서 말문이 막힘. 이때의 ‘도(道)’는 ‘말하다’의 뜻.
37) 흑해(黑海): 흑하(黑河)를 잘못 쓴 듯. 흑룡강성(黑龍江省) 북부의 지명. 구 만주제국 때는 한 성이었음.
38) 카테리나: 이리나의 어머니, 고승서의 장모.
39) 이바노프: 카테리나의 전 남편. 나자의 생부. 사별함.
40) 나자: 카테리나와 전부 이바노프와의 사이에서 난 딸. 원작에서는 ‘질녀’라는 뜻인 ‘질(姪)’이라 하였으나 문
맥상 정황으로 미루어 보면 ‘딸’이라 해야 옳음. 이리나에게는 아버지 다른 언니가 됨.
41) 후가이스프트: 불명. 옛 만주 지방의 지명이 아닌 것 같은데 혹 시베리아 쪽의 어느 곳인가.


이리나는 홀에서 승서를 알게 되면서부터 언니인 나자보다도 좀 더 꿈과 희망을 갖게 되었다. 승서로부터 꿈을 강요당했다기보다 두 사람의 꿈은 뿌리부터 일치해 있었고 이것이 두 사람을 신속하게 결합시키게 된 것이었다. 똑같이 고향에서 받아들여질 수 없는 사람끼리의 공통된 고민의 결합이었다. 지금에 와서는 이리 나 쪽이 더 성급하게 승서를 졸라대는 형편이었다.

"상해로 가서 미주 항로의 기선에 편승할 계획입니다. 잘 될지 어떨지 위태위태합니다만 모든 것을 천운에 맡길 작정 입니다. 그래서 형님께 부탁이 있는데요."

승서는 잠시 말을 끊더니 가장 중대한 용건을 서슴없이 줄줄 쏟아냈다.
"한 3만42)쯤은 준비해서 가져갔으면 싶어서 여러 가지 궁리를 해 보았으나 결국은 우리들의 저 땅을 처분하는 것 밖에는 방법이 없을 것 같네요. 그것은 어차피 형님 몫이 되기로 작정되어 있고 아버지께 의논해 봤자 될 성싶지도 않아서 형님의 승낙만 받으면 즉각 가서 처분하고 올까 합니다. 일생에 한 번의 소원입니다. 우리 두 사람의 소망을 부디 받아들여 주십시오."

순간적으로 어려운 문제를 서슴없이 술술 말해 버리니 아마노는 대답에 궁했으나 고향의 누구에게서도 버림받은 아우를 돌보아 줄 사람은 자기 혼자뿐임을 생각하고, 그 아우의 가장 사랑하는 아내가 모든 것을 맡겨버리고 있다는 듯한 신뢰의 표정을 보자 쉽사리 결심이 섰다.

"그렇구나. 내가 거절할 수가 없을 것 같다. 아버지의 것이니까 결국 아버지의 결단에 달렸지만."

"승낙해 주시는 겁니까? 형님만 승낙해 주시면 뒷일은 어떻 게든 되겠지요."
아우가 기뻐하는 모양을 바라보면서 아마노는 아버지로부터 집으로 돌아오라는 말을 듣고 기뻐했던 자기의 일을 아울러 회상해 보면서 자기들 형제의 기구한 운명에 생각이 미쳤다.

이리나의 기뻐하는 얼굴까지 아울러 바라보니 마음속이 찡하게 아파 와서 저도 모르게 눈길을 돌렸다.

42) 3만(三萬): 일제 때의 일화 3만 원(圓, 1원은 100전)을 이름. 지금 우리나라 돈으로 환산하면 약 3억 원 정
도 될 듯.[참고]1930년대 일화 1 원은 지금의 한화 1만원 정도였음. 당시의 쌀값으로 환산하면 1 가마(대두
5 말)는 일화로 16 원, 지금 한화로는 16만 원쯤의 비율인바 당시 30년대와 작중 연대인 40년대 초기와는
물가에 큰 변동이 없었을 것임.


사 (四)

죽림숙에 모이는 사람은 대개 고숭과 동년배의, 살벌한 현실을 벗어나서 청담을 즐기려는 고령자들이었으나 개중에는 서도에 전념하기 위해 오는 젊은이들도 약간은 있었다. 그 젊은 이들을 접하면 고숭은 아들인 아마노 등과는 대조적인 한 세대의 전형을 보는 것 같아서 그저 무기력하다고만은 할 수 없는 일종 회고의 정을 느끼는 것이었다. 같은 시대의 청년이면서 이다지도 다를까, 거기에도 여러 계층이 있다는 데에 생각이 미치니 다소의 위안을 받기도 했다.

"모두가 바삐 움직이는 세태 속에서 자네들은 고풍스럽게 서도에나 힘쓰고 있으니 참 느긋하다고나 할까."

고숭이 슬쩍 퉁겨 보자 옛 명인 완당43)을 붓글씨의 스승으로 삼고 이미 고고한44) 경지에 한 발짝 들어선 한 청년은 "가장 옹졸한 생활 방식일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러한 시대에는 도리어 수양의 자료가 될지도 모른다 싶어서요."라고 ‘조솔고졸’45)이라는 서도의 깊은 뜻을 본떠서 ‘졸’이라는 말을 썼다. 조잡하며 옹졸한 글씨가 서도의 극치이듯이 옹졸한 생활 방식이 가장 좋은 삶일지도 몰랐다.

"그렇지만 옛것은 점점 그림자가 희미해져 가는 것이 애처롭구먼. 이 서당도 이 시대의 마지막 자리를 지키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다네."

"선생님, 저는 그 영광스런 최후의 한 사람이 되어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온 세상이 도도한 물결에 휩쓸려 갈 때 외기둥처럼 홀로 거슬러 서는 것도 무의미하지는 않을 듯합니다."

자기의 심경을 그대로 알아맞힌 것 같아서 고숭은 청년의 그 말에 스스로 위안을 받았다.

약간의 유산을 지키면서 낮에는 사무소에 나가고 밤과 휴일이면 이 서당을 찾아오는 이 젊은이의 삶에 커다란 공감을 느끼면서 점점 메말라 가는 그 운필을 응시하는 것이었다.

별채로 되어 있는 이 한 간은 몸채와 완전히 떨어져서 아주 한가롭고 고요했다. 뜰의 수목이 초록색 잎으로 방을 둘러싸서 찬 온돌에 앉으면 속세를 떠난 별천지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벽에 걸린 자하紫霞46)의 행서47)인 족자48), “탄금요월낙화경彈琴邀月樂花徑 始球侈韻圖죽창詩句致雲到竹窓"49)의 구는 그 정적靜寂에 잘 어울리고, 겸재謙齋50)의 수양청풍도首陽淸風圖의 한 폭은 호구蒿觓51)의 양주凉州52)를 더해 주는 것 같았다. 산속 오솔길의 소나무 밑에
서 맞은편의 폭포를 바라보며 무슨 말을 서로 주고받는 백이숙제伯夷叔齊53)의 심경은 또 그대로 이 방에 모이는 사람들의 그것이라 할까.

43) 완당(阮堂): 조선 말기의 명필이며 우리나라 금석학(金石學)의 개척자 김정희(金正喜)의 호. 그는 많은 호를 썼지만 글씨에는 ‘완당’을, 학문을 논할 때는 ‘추사(秋史)’를 많이 썼음.
44) 고고(枯槁)한: 야위어서 파리한.
45) 조솔고졸(粗率古拙); 거칠고 고풍스러우며 소박함.
46) 자하(紫霞): 조선 말기의 문신 신위(申緯)의 호. 시와 글씨와 그림에 능하여 시서화 삼절(詩書畵 三絶)이라 일
컬어짐. 소시에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가서 당대의 대학자 옹방강(翁方綱)과 교유하면서 깨우친 바가 많았다
함. 글씨는 중국의 동기창체(董其昌體)를 따랐고, 그림은 남종화(南宗畵)의 기법을 계승한바 특히 묵죽에 능함.
저서에 <경수당전고(警修堂全藁)>와 <자하시집(紫霞詩集)>이 전함.
47) 행서(行書): 붓글씨 서체 중 해서와 초서의 중간인 반 흘림체.
48) 족자(族子): 글씨나 그림 따위를 두루마리 식으로 표구하여 세로로 벽에 걸도록 만든 물건.
49) 탄금요월낙화경(彈琴邀月樂花徑) 시구치운도죽창(詩句致雲到竹窓): 거문고를 타고 달을 맞아 꽃길을 즐기고,
시구는 구름을 이루어 대나무 창에 이르도다.[참고]원작의 한자 글씨가 불분명하여 잘못 옮겼을 수도 있음.
50) 겸재(謙齋): 조선 후기의 화가 정선(鄭歚)의 호. 금강산, 인왕산, 압구정 등 자연 풍경도와 중국의 역사에서
취재한 고사도(故事圖) 등을 많이 그림.
51) 호구(蒿觓?): 원작의 글자가 불분명하여 고증할 수 없음.
52) 양주(凉州?): 위와 같음. ‘蒿觓’와 함께 원고와 가장 가까운 글자를 쓴 것.
53) 백이숙제(伯夷叔齊): 중국 고대 은나라(殷)의 형제 처사. 주나라(周) 무왕(武王)이 은나라 주왕(紂王)를 치려
하자 신하가 임금을 치는 것은 부당하다고 말렸으나 결국 주가 천하를 통일하자 그 곡식을 먹지 않겠다하고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뜯어 먹다가 굶어 죽었다 함.

"현대에서는 이미 수양산54)의 고사리만으로 살 수는 없지만 이 서당에서 이런 방식으로 고요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것은 또한 행운이라고 하겠습니다. 덕택으로 나 같은 자도 자기를 부정하지 않고 이러한 생활 방법을 발견해 온 것입니다."

"그렇지만 언제까지나 이런 것이 계속될지, 이렇듯 변화가 심한 세상인걸. 조석조차 예측할 수 없으니 그 속에서는 사는 것 같지도 않네."

고숭은 수양청풍도에서 눈을 떼면서 유연하게 뜰 앞을 바라본다. 대나무 같은 표정을 지니고 일생을 살아온 그의 외연한 모습에서도 이제는 노쇠를 보이고
마침 가을 햇살처럼 희미한 빛을 간직하고 있다.

완쾌를 기다려 아마노가 맨 먼저 찾아간 아버지의 집에서 느낀 것은 역시 일가의 그러한 쇠잔한 모양이었다. 어머니가 조근조근 말하는 집안 사정과 말 없는 아버지의 쓸쓸한 눈빛속에서 낡은 집의 가냘픈 숨결이 들리는 것 같았다. 안채에서는 하루 종일 한약을 달이는 냄새가 났다. 그것으로 아버지는 노쇠한 몸에 기운을 차리려고 여러 가지 풀뿌리 ---인삼55)과 감초56) 후박57) 백복령58) 숙변59) 계피60) 오미자61) 등 별의별 이상하게 쌉쌀한 동양의 약초가 이미 3대에 걸친 이 묵은 저택의 고색창연한 녹슬고 때 묻은 속에 스며들어서 어떤 쓸쓸함을 풍기고 있다. 원시적인 그 그윽함이 어디까지 아버지를 구해 줄 수 있을까
하고 그 집요함과 고풍스러움에 대한 연민의 정을 금할 수가 없었다.

서당과는 달리 안뜰로 향한 또 하나의 별채가 있었다. 옛 한국 조정을 섬겨 정승의 반열에까지 오르신 조부가 거실로 쓰셨다는 그 유서 깊은 집이 아마노들에게 배당되었는데 이제까지 익숙해졌을 그 모든 고풍이 아마노에게는 이제는 어쩐지 서먹서먹하고 낯설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54) 수양산(首陽山): 중국 산서성(山西省) 남서군 포주(蒲州) 남쪽에 있는 산.
55) 인삼(人蔘): 건위, 강정, 강장에 쓰이는 한약재. 특히 한국산을 ‘고려인삼’이라 하여 세계적으로 유명함. 생삼
을 그대로 말린 하얀 삼을 백삼이라 하고, 쪄서 말린 붉은 삼을 홍삼이라 함.
56) 감초(甘草): 감초 식물의 뿌리가 한약재. 단맛이 있으며 비위를 돕고 다른 약의 작용을 부드럽게 하는 중화제
로 많이 쓰임. 첩약에는 거의 빠지지 않으므로 아무데나 덤벙대는 사람을 일러 ‘약방의 감초’라 하는 속담이
생김.
57) 후박(厚朴): 후박나무의 열매와 말린 껍질이 한약재. 강장과 건위제로 씀.
58) 백복령(白茯苓): 베어낸 소나무 뿌리에서 생기는 일종의 버섯. 땀을 조절해 주고 소변을 순하게 하는 한약재.
색깔이 흰 것을 백복령이라 하고, 붉은 것을 적복령이라 함.
59) 숙변(熟변): 숙지황(熟地黃)의 다른 이름. 지황 식물의 뿌리가 한약재로서 보혈 강장제로 쓰임. 날것을 생지
황이라 하고, 술에 여러 번 찐 것을 숙지황이라 함. 숙지황을 만들 때 찌고 말리기를 아홉 번 되풀이하는 것
을 ‘구증구포(九蒸九포)’라 함.
60) 계피(桂皮): 계수나무의 얇은 껍질. 맛이 달고 매움. 한약재로서 땀을 조절하거나 건위제로 씀.
61) 오미자(五味子): 오미자나무의 열매가 한약재. 폐를 보하는 효과가 있음. 오미자와 미삼을 달여 오미자차로도
먹고, 오미자를 물에 우려낸 붉은 물로 오미자화채를 만들어 먹기도 함.

뜰에는 연못 가로 화단이 마련되어 있었다. 백일홍이며 맨드라미가 핀 속에 붉은 꽃을 피운 무궁화가 무성하고 그 곁에는 느티나무의 거목이 서서 그 그늘이 안뜰의 반쯤을 온통 가리고 있었다. 한 곳에 정지한 채 3대를 차례차례 바라보아 온 그 고목도 역시 감회 깊은 것이 있을지, 아버지의 모습을 닮아 의연한 중에도 어딘가 노쇠를 머금고 있는 것도 애처로웠다.

"오빠들이 돌아오신다고 어머니는 몹시 기뻐하시며 방을 새로 손질하는 데도 몸소 나오셔서 여러 가지 자상하게 분부하신 정도였다오. 덕택에 어설프기는 해도 이만큼이나마 되었어요."

아마노들과 함께 둘러보고 있는 누이 단야가 기쁨을 못 참고 이것저것 집안의 여러 모양을 설명하기도 했다.

"옛집에 와서 새로운 것을 생각하는 것도 좋을지 몰라. 새로움에 무게와 빛을 더할지도 모르지. 누가 뭐라 해도 내 몸을 이만큼 키워준 집이니까 아직도 거기서 섭취할 것은 섭취해야 하지 않겠나."

아마노에게는 아직도 그런 기쁨이 있었다. 한 달 남짓의 병상 생활에서 상처가 나았을 뿐 아니라 크게 건강을 회복하여 이전보다 더 실팍진 몸이 된 아마노는 중심으로부터 넘쳐나는 활력을 주체 못하면서 커다란 의욕을 불태우고 있었다. 묵은 것 속에 있으면서 그 묵은 것을 승화시켜 왕성한 새 활동을 일으킬 마음의 준비가 어느새 되어 있는 것이었다.

"나 이 집이 참 좋아요. 여기 이렇게 서 있으니 마치 녹슨 옛 거울 속에 있는 것 같네요."

처음으로 본가에 안내된 이요시는 조용히 기쁨을 속삭이면서 옛 연못가에 서서 풀잎을 살짝 뜯어 입에 물었다. 파랗게 고여 있는 수면에는 부평초가 꽃가루를 흩뿌린 것같이 풀숲이 되고 파란 이끼가 돋은 돌이 맨들맨들 젖어서 연못가를 수놓고 있었다. 크게 뻗은 느티나무 그늘 속에 연못은 거의 그 반쯤 잠겨 그늘진 속에서 한층 정적을 더하고 있었다.

"당신 마음에 들었다니 무엇보다 좋군. 나도 차츰 익숙해지겠지만 이 고풍에 익숙해지고 그것을 극복하는 데서부터 우리의 일은 착착 진척되어 가겠지.”
“이 소박한 정밀 속에서는 태고의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아요. 시대의 소리란 참 신비롭네요. 그게 이렇듯 아름답게 들려오다니요."

"태고의 소리에 잠기다니 잘못하면 현대의 날갯짓을 잊을 것 같군그래. 어떻든 이곳은 너무 고요하다구."

단야가 장난삼아 돌멩이를 주워 연못에 던지니 풍덩 하고 둔탁한 소리와 함께 수면에 파문이 퍼져서 다시 한 번 정적을 깨게 되었다.

"너무 고요하다면 이러면 돼요. 꼭 오빠가 그렇게 한 것처럼요. 오빤 한 순간도 고요한 것을 못 견디는 성미거든요."

"나도 해 볼까. 어디 하나."
아마노도 누이를 흉내 내어 돌멩이를 주워 올려 연못 속에 던졌다. 그 뒤에 단야가 또 한번 계속하니 물은 퐁당퐁당 경쾌한 소리를 내면서 물방울을 튕겼다. 먹이를 던져 주는 것이라 잘못 알았는지 물고기의 무리가 뛰어 올라 연못은 전에 없이 기분 좋은 활기를 띄었다.

"승서 오빠랑 이리나씨들도 와서 모두 함께 정답게 지내면 이 집도 조금은 살기 좋을 텐데. 우리 오빠들은 결국 뿌리부터 취미가 다르다니까. 특히 이리나씨는 이런 고요함에는 잘 어울리지 않겠지요."

"아 참 그렇구나. 호텔에 가서 이리나씨를 위로해 주면 어떨까. 달랑 혼자 외로울 테니까. 다들 함께 가는 것도 좋겠지."

아마노는 문득 생각이 나서 이리나의 말벗 되어 주기를 누이들에게 권했다. 승서는 충청도 방면으로, 그 토지를 처분하러 나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은 것이었다. 잠시도 애정 없이는 못사는 서양 여자의 심회가 가엾고 그나마 타관의 낯선 도시에서 혼자 외톨이로 남겨진 쓸쓸함을 동정하면서 아마노는 각별히 마음을 썼다. 사랑을 위해서는 어디까지든 뒤쫓아 가서 행동을 같이 하려는 갸륵한 생각을 짐작하자 두 사람은 벌써 핏줄의 차별 같은 거리감은 조금도 없고 오로지 그 심정이 가엾게 여겨져서 육친과도 같은 친밀을 느꼈다.

그 뒤 2,3 일 지나 승서가 시골에서 돌아오자 이리나는 서둘러 몸을 일으켜서 그 동안의 외로웠던 정황을 조잘댔다. 마침 아마노는 이리나와 함께 역에서 아우를 마중했을 때 중인의 눈도 아랑곳없이 이리나는 남편을 얼싸안고 격렬한 애정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쫄쫄 굶은 짐승같이 민첩했다. 승서도 그러한 풍습에는 익숙해서 매우 자연스럽게 거기에 응했다.

아마노는 보고 있자니 스스로 창피하여 눈길을 돌리면서 과연 아우를 붙잡은 것은 이 애정이었겠지, 다만 이 한 가지 때문에 그렇게 홀려서 중인 속에서 기다리고 있던 것이라고 생각해 보았다.

그런 별난 상봉은 호텔로 돌아가서까지도 계속되었다. 아마노는 그들 둘이 만나고 있는 방에서 나와 혼자 로비의 소파에 걸터앉았다. 둘이가 사랑스러운 반면에 짓궂게도 생각되어 그들 애정의 바깥에 서 있는 자기 신세가 더욱 초라해져서 이요시가 생각나기도 했다.

이요시와의 담백하고 청결한 애정을 생각하니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지, 아우와 서로의 취향의 괴리가 뚜렷이 느껴졌다.

이윽고 아우 부부는 옷을 갈아입고 간편한 차림으로 나타났다. 이리나의 진홍색 이브닝은 큰 꽃송이 같은 호화로움으로 그 넓은 공간을 비추었다. 카멜레온같이 번잡하고 선명한 색깔의 변화가 꽉 짜여 빈틈이 없는 복장에 아마노는 이것이 새 시대의 차림새인가 하는 느낌을 강하게 가졌다. 그 빈틈없는 구성과 디자인과 강한 색채 속에서 서양의 입김이 느껴져 거기에 경의는 표하면서도 어쩐지 낯설고 어설픈 느낌은 지울 수가 없었다.

식당에서 세 사람이 만찬의 탁자에 둘러앉았을 때 아마노는 점차 두 사람의 분위기 속에 조화되어 가는 자신을 깨달았다. 신사로서 한 점 모자람이 없는 아우의 심정과 태도를 눈앞에 바라보면서 부부 사이라도 식탁 앞에서는 반듯하게 지켜야 할 엄연한 예절이 있는 것을 보니 섣불리 그들의 생활 방식을 나무랄 수도 없었다. 결국 자기의 옹고집으로 처음부터 싫어했던가 아니면 고의적으로 반발했던가를 다시 한 번 반성하게 되었다.

"형님, 나는 이번 계획에 은근한 기쁨을 느끼고 있어요. 옥실옥실한 모험에의 기쁨이지요. 잘만 되면 형님도 갈채를 보내 주세요."

그러면서 아우는 방긋방긋 미소를 지으면서 형을 돌아보았다. 그의 이번 시골에서의 거래는 의외로 빠른 성공을 거두었다. 중개인을 데리고 가서 그의 감정으로 수십 정보62)에 걸친 비옥한 경작지의 매도는 어렵잖게 매듭지어져 그곳에서 서둘러 등기까지 마쳤으니 나머지 해야 할 문제는 출발의 여장을 꾸리기만 하면 되었던 것이다.

"필요한 만큼의 금액을 어떻게 몸에 지닐 것인가가 제일 문제였어요. 우리들은 그 궁리에 온갖 지모를 다 짜봤지요. 그리하여 한 가지 좋은 방법을 찾아낼 수가 있었어요."

62) 정보(町步): 옛적 전답 면적의 단위. 농지 1정보는 3천 평. 15 마지기.

"좋은 방법이란 게 뭘까? 그런 걸 생각하면 나까지 걱정스러워진다. 너희의 행동에 협력은 고사하고 어쩌면 중지를 시키지 않으면 안 될지도 몰라. 너희에게 닥칠 많은 고난과는 별도로 나는 책임을 느끼지 않을 수 없구나."

아우가 기뻐하는 것과는 반대로 형은 어쩐지 불안이 느껴져서 마음이 무거웠다.
"이제 와서 그런 말씀을 하셔도 소용없어요. 이미 우리에게 남겨져 있는 것은 이 방법뿐이어요. 그 밖의 모든 사려는 이미 쓸데없이 되었어요."

"그래, 도대체 어떤 방법을 발명했다는 거냐?"
형의 질문에 승서는 나이프와 포크를 익숙하게 다루면서 용기를 내어 이야기를 선명하게 했다.

"놀라지 마세요. 금으로 단추를 짓기로 했어요, 2백 개의 금단추에 에나멜 도금을 하거나 겉을 천으로 싸서 위장을 하는 겁니다. 게다가 아내의 장신구 약간을 금으로 장식하면 필요한 만큼의 액수가 무난하게 몇 개의 트렁크 속에 수용되는 겁니다.--- 어때요. 명안이지요? 아내와 합작으로 안출한 겁니다."

아우가 필요한 액수에 맞추어서 지혜를 짜냈다고 해도 형은 잠자코 입을 다문 채 한동안 침묵만 지키고 있었다.

"이런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용의주도하게 하면 발각될 염려 없어요. 나머지는 배에 타기만 하면 됩니다. 남은 문제는 이미 없어요."

"그러나 그건 불법이란 거 아니야?"
형은 비로소 이요시에게63) 입을 열면서 아우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이제까지 아우에게 보여 주었던 은애 넘치는 보통 때와는 다른 근엄한 표정이었다.

"불법도 합법도 없지요. 지금에 와서는 오직 한 길 그것밖에는 없어요. 수단을 가리던 때는 이미 옛날이어요. 그리고 나는 그 때마다 실패했어요. 지금 이 막다른 골목에 와서 하는 그런 반성은 나에게는 벌써 의미가 없는 겁니다."

"그러나 명백하게 불법인 줄 알면서 나라의 법도를 어기는 것은 나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처음부터 나에게 알리지 않았더라면 몰랐으니까 그랬다고나 하지 일단 들은 이상은 허용 못해."

이제까지와 다른 형의 뜻밖의 태도에 승서는 깜짝 놀라 난감해지면서 크게 눈을 뗬다.

"이제 와서 형님은 이상한 말씀을 하시네요. 결국 그렇게 되리라는 것을 이것저것 다 알고 계셨으면서 지금 그것을 번복하시겠다는 건가요? 그것은 이미 바꿀 수 없어요. 헛짓이어요."

"너희의 그 간절한 목적을 꺾을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그런 수단에 찬성한 건 아니다."

"나로서는 이 목적에 딴 방법은 없어요. 그 목적에는 이 수단밖에 없고, 수단이 있음으로써 목적이 달성되기 때문입니다."

"아니야 틀려. 목적을 들은 것은 좋았으나 수단은 듣지 않았어야 했어. 내 마음은 지금 크게 동요되고 있다. 무엇으로도 멈출 수 없다. 어쩌지도 못할 일이다."

뜻밖에도 강경한 형의 의견을 접하자 승서는 당황했으나 이미 배수진 속에 있는 그로서는 이것으로 결판이 날 일도 아니었다. 도리어 항변을 하고 싶을 정도로 마음이 몹시 초조해지는 것이었다.

63) 이요시(倭善)에게: 작중의 이 장면은 주인공 아마노와 그 아우 고승서의 부부 이렇게 3인이 호텔 식당의 식
탁에 둘러앉은 것으로 되어 있었는데[p.25 "식당에서 세 사람이 만찬의 식탁에 둘러앉았을 때---”] 갑자기
아마노가 그의 처 이요시에게 말을 건네는 장면이 나온다. 따라서 그 식탁에는 애초에 아마노와 그의 처인 이
요시, 그리고 고승서와 그의 처인 이리나 이렇게 4인이 둘러앉았던 것으로 이해하고 읽어야 할 듯.

"형님의 그런 반대와 우리의 결심과는 전혀 별개의 것입니다. 형님이 지금 새삼스레 무슨 말씀을 하시던 우리의 뜻을 막지는 못하실 것입니다. 이것만은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그럴지도 모르지. 내 힘으로 너희의 마음을 어쩌지 못하겠지. 그저 네게서 모든 계획을 명백하게 들은 것을 불행하게 여길 뿐이야."

"도대체 나같이 쓸모없는 자가 나라에 남아 있어 봐야 별수 없어요. 방해가 될 뿐 아무 구실도 못하겠지요. 나의 일은 내가 제일 잘 알고 있어요."

아우의 격렬한 어조에 형은 입을 다물었고, 두 사람의 때 아닌 말다툼을 이리나는 걱정스런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화기애애하게 시작된 만찬장의 공기는 어느새 냉랭하고 어색한 분위기로 변하여 곁에 서서 시중을 들고 있는 급사도 이맛살을 찌푸리고 식탁에 장식된 꽃도 파흥이 되어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오 (五)

시대의 발걸음은 계절의 그것보다도 빨라서 마치 거세게 흐르는 물소리가 바로 귓가에서 들리는 것 같았다. 한 시각 한 시각 밀고 가는 그 하루하루의 전진이 해의 진행에 필적할만큼의 속도로 급격하게 앞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철썩철썩 밀려오는 파도에 나라의 새로운 체제는 착착 정돈되어 가고 그런 빠른 변화 속에서 거리도 사람의 마음도 점차 그 모습을 바꾸어 가고 있었다. 사상과 이념의 되새김질일 뿐 곱삶음이 아니요64) 실천의 의기가 구석구석에 넘쳐서 그것이 새롭고 생생한 인상을 모든 부면에 강요해 갔다. 이를테면 여름이 끝났다는 것은 단순한 계절의 옷갈이65)는 아니고 하나의 커다란 시세의 변화를 의미했다. 

아마노가 병상 생활로 여름 한철을 보내고 나왔을 때 아무리 그의 마음이 앞질러 달려서 새로운 의기에 불타고 있었다고는 해도 거리의 변화에도 괄목해서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될 결과가 된 것만 봐도 알만하였다. 마쓰다 이사무가 편집한 <깃발(旗)>의 여름호는, 가을에는 이미 그 신선함을 거의 잃었고 가장 새로움을 자랑하던 사상도 아마노에게는 벌써 진부한 것으로 여겨지는 대목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자칫하면 착각이나 오차가 역사의 전진에의 인식 부족을 초래하여 하나의 생각지 않은 혼란을 나타내기도 했다.

"자네의 총독 회견기를 잡지에서 다루는 것은 역시 좋지 않겠네. 신문에서 한참 전에 끝낸 일을 이제 와서 같은 제목으로 다시 쓴다면 시대에 뒤처지는 느낌이야. 그땐 그렇게도 흥분했지만 역시 실패였어. 아무튼 시대의 흐름에는 못 당해."

마쓰다는 솔직하게 그 일을 인정하고 거기에서 오는 답답함과 편집의 곤란함을 말했다.

"그저 그 무렵의 하루는 옛적의 10년에도 해당했으니까 말이야. 세월에 대한 감각이 달라져 온거라구. 시끌시끌하는 동안에 다들 앞질러 가버려. 내 머리도 아직 착각투성이여서 심란 하다네. 일신상의 문제마저도 하나하나 망설이고 있을 정도야."

그런 심정은 마쓰다보다도 아마노 쪽이 한발 더 위였다.
"잡지의 편집 따위 이젠 답답해서 못해먹겠어. 도대체 방안에만 처박혀 있는 게 잘못이야. 시대의 물결에서 따돌림 받고 있는 것만 같다구."

<깃발>의 일들은 일절 아내인 미사오에게 맡겨버리고 마쓰다는 방안에서 거리로--- 분출하는 정열의 삿대를 힘껏 저으면서 아마노와 손을 잡고 집회와 강연회 개최의 알선까지 시국적 일에 쉴 틈이 없는 상태였다. 젊은 힘 한 방울 한 방울을 소모하는 것은 그대로 보람 있는 삶을 증명하는�것 같아서 이것을 누군가에게 자랑하고 싶은 충동을 받을 만큼 활기차 있었다.

아마노는 <동포의 나아갈 길>의 후속 원고도 거의 완성되자 이것저것 청탁해 오는 원고며 강연의 준비 등으로 글자 그대로 침식을 잊을 정도로 바빴다. 입원했을 때와는 심경에도 큰 괴리가 생겨 그때의 우유부단한 회의는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오로지 명랑한 의지를 회복하고 있었다. 용기가 몸에도 마음에도 차고 넘쳐서 착실한 안정감이 한층 더 빛을 발하는 것 같았다.

64) 되새김질, 곱삶음: 원작의 ‘반추(反芻)’를 ‘되새김질’로, ‘다시 삶음’을 ‘곱삶음’으로 번역함.
65) 옷갈이: 동물들이 허물을 벗는 것을 이름.

강연회에서도 장내에 큰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하여 말하자면 한 달 전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변모를 보이기에 이르렀다. 발을 구른다든지 야유의 소리 지르기 같은 소란스러움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정숙하고 근엄한 공기가 장내를 채우기 시작하여 그것이 연단에 선 사람으로 하여금 옷깃을 여미고 엄숙한 심정을 불러일으키게 했다. 그런 때면 참으로 일하는 보람을 느껴 아마노는 스스로 마음이 들뜨고 용기가 솟았다.

9월도 끝나려 할 무렵의 어느 강연회의 밤에 아마노는 보통 때보다 성공적이었던 그날 밤 강연의 성과를 내심 기뻐하면서 강연장 안쪽의 대기실에 들어갔을 때였다. 문인협회66)주최의 강연회여서 아마노는 초청을 받고 외부 응원의 형식으로 출연했는데 ‘시국과 국어 사용67)’이라는 시국에 어울리는 제목이 그날 밤 가장 주목을 끌어 청중의 갈채를 받은 것이었다. 일상생활의 일체화로부터 시작할 필요성을 말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국어 사용을 철저히 할 것이 시급하다는 것을 갈파하여 구구절절 성의를 다하여서 일반인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고 은근히 마음에 흡족했다. 서너 명의 강사들과 그날 밤의 성적을 서로 평가하고 있으려니까 급사가 아마노에게 손님이 왔다고 고해 왔다.

방에서 나와 뒤꼍의 어두컴컴한 데에 이르니 돌계단에서 검은 그림자가 움직여 앞을 막아섰다.

"나를 알아보겠소? 고군. ---박사경(朴思經)이오. 조선일보에 있었던."
그 말을 듣고 희끄무레한 먼 불빛에 비쳐 보니 아마노에게 상대방의 얼굴이 차츰 떠올랐다. 시국의 정책에 순응하기 위해 당국의 명령으로 폐간된 전 일간신문 '조선일보'68)의 사회부에 근무하던 면식 있는 기자였다.

신문 자체가 종래의 주의 사상을 굳게 지켜 시국의 추세에 대해 고루한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그와 같은 사람은 완강하게 낡은 껍질에서 빠져 나오지 못한 한 사람이었던지 과감하게 신문과 운명을 함께 하여 깨끗이 그만둔 사람이었다.

"직장을 잃고 반년, 보시는 바와 같이 비참한 실직자지만 이것도 다 시절 탓이라고, 대단한 시국을 만난 것이라고 생각해요. 회사는 겨우 7명이 지키고 있다니 참 금석지감69)이 있구먼."

[원작이 여기서 중단됨]

66) 문인협회(文人協會): 일제 때 친일 어용 문인들의 당체였을 듯.
67) 국어 사용(國語使用): 여기서 ‘국어’는 ‘일본어’를 말함. 일제는 우리의 민족의식을 말살하기 위해 학교에서
‘국어 상용(國語常用)’이라는 구호 아래 일본어만을 쓰게 하고 우리 국어인 ‘조선어’를 쓰면 벌을 주었음. ‘조
선어학회 사건’을 꾸며서 우리 국어학자들을 투옥하기도 했음.
68) 조선일보의 폐간: 조선일보는 우리 민족지로서 1920년 3월 5일 창간한 이래 일제로부터 수없는 정간 등 모
진 핍박을 받다가 우리 민족 문화 말살 정책이 극도에 달한 1940년 8월 10일 지령 6,913호로 강제 폐간을
당함. 광복 후에 복간.
69) 금석지감(今昔之感): 현재와 예전과를 비교하여 그 변화가 큰 데서 오는 감회.

* 이효석 선생의 일문 유작 소설 번역을 마친 소회
[장순하]

지난 해 여름에 강원도 봉평(蓬坪)의 이효석(李孝石) 문학관을 찾았다가 이 작가의 미발표 일문(日文) 소설이 친필 원고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 장순하 시조시인
그런데 적당한 번역자를 못 찾아 애를 태우고 있다는 것이었다.

일제는 그 말기에 우리 문화 말살정책의 일환으로 한글 사용을 억제하였으므로 우리 문인들은 붓을 꺾거나 일문으로 작품 활동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이효석 선생도 <은빛송어> 등 5편의 단편과 <녹색의 탑>이라는 장편을 일문으로 발표하였다.[이것들은 모두 우리말로 번역 발행되어 있다.] 그러나 이효석 선생은 일제의 어용 교육기관인 경성 제일고보와 경성제국대학 출신에다 당대의 유명 문인으로 온갖 회유와 박해를 받았으련만 끝내 창씨개명을 거부했고 창작에 부득이 일문을 사용하면서도 내용에서 친일성을 철저히 배제한 애국 작가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래 그 일문 원고의 복사본을 얻어 보았더니 과연 번역이 쉽지 않겠다는 것을 알았다.

첫째, 벌써 70 년 가까이 전에 저질의 원고지에 쓴 글이라 잉크 빛이 많이 바래져 있고, 글씨를 마구 휘갈겨 쓴 데다 지우고 고쳐 쓰고 끼워 넣고 하기를 수없이 하여 원고가 너털너털 해져서 우선 읽기조차 힘든 상태였다.

둘째, 1930년대 무렵의 일본 문장은 고문과 현대문의 중간 과정이라 할 수 있는 이른바 ‘역사적 맞춤법’에 따라 쓴 글이라 지금은 쓰지 않는 글자도 있고 표현도 의고문체(擬古文體)가 많아 오늘날 일본어를 아는 이라도 섣불리 접근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게다가 관리가 소홀했던 탓인지 혹은 작가의 의도였던지는 몰라도 원고 첫 장이 유실되어서 제목조차도 알 수 없는 상태였다.

나는 당시 소학교 상급반 때부터 일본어로 된 <세계문학전집>이며 일본의 <명치 대정 문학전집> 따위를 섭렵하였으므로 당시의 일본문에 익숙해 있어서 문장 자체에는 전혀 거부감이 없었으나 원고 상태가 너무 엉망인 고색창연한 원고뭉치를 앞에 두고 망연자실해 있었다.

그러다가 주위의 권고도 있고, 이 위대한 문단 선배의 귀중한 유작을 묻어 두는 것이 죄스러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면 도와야 되겠다고 팔을 걷어 부치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우선 내가 할 일은 이 작품을 읽어 보는 일이었다. 내가 첫 번째로 착수한 작업은 원고에서 자획이 확실한 글자들을 가려내어 새 원고지에 깨끗이 옮겨 적는 일이었다. 자연히 불확실한 글자는 공란으로 비워졌다. 이것이 ‘제1차 원고 옮겨 적기 작업’이었다. 마치 프랑스의 천재적 이집트학자 샴폴리옹(J.F.Champollion,1790~1832)이 로제타스톤(Rosetta stone)의 탁본을 놓고 고대 이집트의 신성문자를 해독하던 고역과 같았다고 하면 지나친 과장이겠으나 당시 이 작품을 대하는 나의 경건하고 신중한 자세는 그에 못지않다고 자부했다.

이 작업으로 어설프게나마 이 원고가 어떤 것인지 그 개황을 짐작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아무도 이것이 무엇인지(소설인지 수필인지조차) 모르던 것이 비로소 그 윤곽을 드러낸 것이었다. 1차 원고 옮기기가 끝날 무렵에서야 이것이 소설 작품의 원고라는 것은 알았으나 처음에는 4백자 원고지로 77 장 정도의 분량(지금의 2백자 원고지 154매)이어서 좀 긴 단편이거나 중편 정도의 것인가 하였으나 곧 미완성 장편의 일부라고 판단하게 되었다. 구도의 스케일이 크고 사건 전개의 템포가 느린 것이 그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작품의 전체 윤곽이 드러나자 나는 ‘제2차 원고 옮겨 적기 작업’에 들어갔다. 제1차 작업 때 글자가 불분명하여 비워 두었던 공백을 메우는 일이었다. 공란의 단어는 앞뒤 글자로 미루어 메우고 센텐스는 사건 전개의 정황으로 추리하여 채워 나갔다. 이와 같은 제2차 작업이 끝나자 이 작품의 전모가 좀 더 뚜렷이 드러났다.

나는 용기를 얻어 ‘제3차 원고 옮겨 적기 작업’에 들어갔다. 이때는 다소 억지로 꿰맞춘 듯 어색한 말들을 매끄럽게 다듬되 작가의 언어 구사의 습관과 사고방식을 많이 원용하도록 노력했다.

이와 같은 3차에 걸친 원고 옮겨 적기 작업에 꼬박 반년의 시간이 흘렀고 이것을 대본으로 한 번역을 마치기까지 거의 한 해를 고스란히 바쳤다.

이렇게 하여 제목도 모른 채 묻혀있던 ‘이효석의 미발표 미완성 일문 소설’은 완성되었고 이제 나의 할 일은 모두 마쳤다.

지난 9월 10일 강원도 봉평 소재의 이효석문학관에서 ‘이효석의 유고작(미완성 일본어 장편 소설) 조명’이란 주제로 한 심포지엄에 번역을 맡았다하여 주제발표를 한바 있다. 거기에서도 이야기 했듯이 이제는 이 작품의 문학적, 역사학적 연구 분석은 이효석을 연구하는 학자들과 그를 흠모하는 후학들의 몫이다. 더욱 세심히 연구하여 비운의 천재적 작가 가산 이효석 선생을 다시 우러르는 계기가 되길 간절히 빈다.

■ 장순하
시조시인. 한국문인협회 고문

▲ 참고자료




[ 조회수 3,011 ] [추천수 8]
 
이효석 유작 소설 71년만에 세상으로
이효석 일문 유작, "완성도 높은 미완의 유고"
이효석의 반일사상, 미발표 유작에서 확인
이효석 선생의 가산(可山) 호설
의암호반의 사봉 장순하 시인을 찾아서
장순하 시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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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규재 (abore46@hanmail.net)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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