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장
하상만 시집 / 실천문학 刊
사람이 죽으면 별이 된다는 이야기를 어렸을 때 들었다
그때 참 낭만적이라 생각했는데/ 어른이 되면서 거짓말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철이 든다는 것은 좀 덜 낭만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다
멀리 있는 것에 대해서 상상해서는 안 되고
가까이 손을 뻗어서 잡을 수 있을 만큼의 거리에 대해서만
이야기해야 한다
어른이 되어도 여전히 어린애 같은 사람은
마음속에 간직한 멀리 있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숨긴다
가끔 그들은
넌 외계에서 왔니
라는 말을 듣는다
밤이 되면 우리가 가볼 수 없는 곳에서부터 날아온 빛이
지구의 창호지를 태운다
신혼방을 념보듯 우리가 궁금해서 누군가가 보낸 눈빛이다
우주엔 빛의 속도로 수백 년을 달려도 아무것도 없는 캄캄한 공간이 이어진다
그땐 자신만이 오직 빛이다
그 빛들을 달래려면 가끔 하늘을 보아야 한다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나의 눈이 별이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는가
갓 태어난 아기의 흰자위에 감도는 푸른빛을 별들도 가지고 태어난다
나이가 들면 어른의 눈처럼 별들은 누레지고 실핏줄이 터져 붉어진다
눈꺼풀에 감추어지는 눈동자처럼 까맣게 그렇게 죽는다
무언가를 쳐다본다는 것은 그것에 가닿기 위해 눈동자가 빈 공간을 지난다는 말이다
그러니 별이나 우리의 눈이나 사실 정말 외롭게 서로에게 가닿은 것이다
― 하상만, 책꼬리글 <시인의 말> 중에서
하상만에게 사물은 세계를 읽어내는 하나의 징검돌이다. 시인은 세계를 자기만의 새로운 방식과 언어로 읽어내는 사람이다. 때론 불온하게, 때론 격정적으로, 때론 평화롭게 변주하며 자신의 발언을 의미화한다. 하상만은 이 세계의 진면목에 대해 목소리 높여 얘기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 세계를 절망하지도, 혹은 아름다운 유토피아로 희망하지도 않는다. 그는 슬쩍 눙치듯 이 세계와 연결 짓는 사물의 그림자를 밟으며, 그림자가 기대고 있는 흔적을 얘기할 뿐이다. 마치 꽃잎이 피고 지는 비밀을 깨치듯 소요의 길목을 조금씩 일러준다.
하상만 시의 순도를 맞추는 '간장'은 짜지 않고 따뜻하다. 물에 풀어 먹으면 속이 편안해진다는 하상만식 간장의 레시피는 언뜻 고전적인 것 같지만, 사실 가장 훌륭한 자연주의식이다. 하지만 하상만의 간장 음용법은 슬픔이 치료법이 되는 우리네 어머니의 아궁이 방식이다. 우리는 하상만의 간장을 음미하듯 킁킁거리며 예전의 공동체가 가지고 있었던 단장(斷腸)의 서사를 고백하다가, 때론 그리워하기도 한다. 그렇듯 하상만의 시는 맵고 짜지 않다. 단아하고 맹숭맹숭하지만, 읽을수록 재밌다. 그리고 긴 여운을 준다.
하상만이 사물의 이면을 좇는 의미의 사냥꾼으로만 그쳤다면, 그의 시는 아쉬웠을 것이다. 하상만의 시에서 읽어낼 수 있는 지점은 특별한 사건을 바라보는 데 있다. 여기서 사건이란 흔적에 칼집을 내는 장면이다. 그의 시는 존재의 흔적을 추적해 희미하게나마 남아 있는 시간 너머의 사설(辭說) 속에 깊은 칼금을 그어두는 일이다. 아울러 그는 우리가 잊고 지냈던 공동체의 흔적을 찾아 먼 기억의 사건들을 반추했으며, 지금 우리의 일상이 겪고 있는 현실의 고단함 뒤편에 드리워진 그럼자를 면밀히 비추고 있다.
― 이재훈(시인), 해설 <흔적의 시학> 중에서
- 차 례 -
제1부
작은 새의 발자국
껌칼
손
네오파이트(neof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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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네킹
턴
목주름
마중
우물
담장
식물원
해바라기
쓴소리
내 인생의 브레이크
벚나무
아이젠
누가 나를 신고 있다
유언장
인질
환상통
반점
봄이 지나간다
제2부
보리밥집
아침
물빚
손가락
장수
시
대형마트로 간다
새의 방광
조류장
모기
간장
사랑니
목련
한 삽의 흙
느티나무
흰머리
낮잠
오, 하느님
황학동 시장1
황학동 시장2
신
가을은
제3부
좋은 일
운남
물고기들
여행자 버스
달랏
볕 잘 드는 나무
판다
음악이 들어 올린다
구름
연인
고개를 이쪽으로 돌리시게
해설 | 흔적의 시학_이재훈
시인의 말
[2011.06.30 초판발행. 128페이지. 정가 8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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