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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규철 시집 "꿀벌처럼 잉잉거리는 햇살처럼" 평설 / 홍문표
2010-09-25 23: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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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2296
추천:133

 

     최규철 시집 "꿀벌처럼 잉잉거리는 햇살처럼" 평설 / 홍문표

꿀벌처럼 잉잉거리는 햇살의 초월적 상상력
                            홍 문 표  (시인, 평론가, 오산대 총장)
 
 
최근 우리 시단에 형이상시의 재조명이라는 일련의 시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형이상시의 진심이 지성과 감성의 분열과 대립을 극복하려는 통합적 상상력의 시학이라는 점을 인정한다면 지금까지 우리의 시단이 지나친 양극화나 흑백논리로 이전투구를 벌여온 역사를 청산할 수 있는 탁월한 대안이라는 점에서 매우 긍정적인 시도라고 할 수 있겠다.
사실 우리의 문학사는 늘 모가 아니면 도가 되어야 하는 결코 양보할 수 없는 치열한 양극화의 길을 걸어왔다. 현대문학 일백년을 돌아보면 문학의 과제는 늘 내용이냐 형식이냐, 계급이냐 민족이냐, 참여냐 순수냐, 진보냐 보수냐, 지성이냐 감성이냐 하는 이분법의 논리였고, 저마다 진실이라는 깃발을 들고 이념의 흉기를 휘두르면서 무모한 결투를 반복해온 것이다. 그래서 얻은 것은 무엇인가, 일찍이 박영희가 낭만주의시를 쓰다가는 계급주의 문학을 하더니 마침내 얻은 것은 이데올로기요 잃은 것은 예술이라고 개탄한 일이 있다. 이념과 감성의 양끝을 헤매다 느낀 솔직한 고백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러한 이분법의 갈등이나 흑백논리는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고 우리들의 문제만도 아니다. 고금동서를 막론하고 선과 악의 문제, 천상과 지상의 문제, 정신과 육체의 문제, 본질과 현상의 문제 등 인간의 역사는 끊임없이 극단적인 편을 갈라 패싸움을 하는 것이 필연의 질서처럼 인식되어 온 것이다. 사실 변별성이 없고 차별성이 없는 게임은 흥미가 없다. 사생결단의 결투일수록 흥행거리가 되고 발전하고 진보하는 역사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는 바로 이 잔인한 대결의 논리에 무수한 희생이 있었고, 어두운 모순의 늪에서 방황하는 무지가 반복되었다. 정말 극단적인 양극화가 비극인 줄 몰랐던 것일까, 그건 아니다. 때때로 이를 극복하기 위한 절충론이 나오기도 하고, 중용론이 나오기도 하였지만 이미 잔인한 놀이에 길들여진 문명은 여전히 대결을 즐기는 야성을 보여 온 것이다.
그런데 17세기 영국의 시단에서는 색다른 캠페인을 벌인 일이 있었다. 형이상파 시인들로 불리어지는 이들은 당시 페트라르카풍의 속물적인 애정시나 고답적인 수사법을 탈피하고, 플라토닉한 사랑, 삶과 죽음을 초월하는 영적인 세계 등을 기발한 위트와 아이러니로 표현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시 정신에 있어서는 보다 철학적이고 종교적인 형이상의 문제를 다루면서도 그 표현방법은 그동안의 질서와 조화라는 관습을 깨고 부조화의 조화, 무질서의 질서라는 이질적인 것들의 과감한 결합. 지성과 상상의 기발한 조합, 관념과 현실의 폭력적인 결합이라는 컨시트(conceit)를 구사 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이 시대 형이상파 시인들의 시적 반란은 기존의 분열된 영혼과 세속, 감성과 이성의 부조화 등 낯설기는 하지만 신선한 위트가 있는 방식으로 새로운 시적 메타포를 실천한 의미 있는 운동이었던 것이다.
감수성의 분열현상은 20세기에 들어서 더욱 극치를 보였다. 제국주의, 세계대전, 나치즘, 동서냉전, 물신주의, 모더니즘과 리얼리즘, 모두가 극단으로 치닫던 갈등 속에 상처뿐인 한 세기를 겪으면서 이제 21세기를 맞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21세기 시학은 어떤 것이어야 하나, 그것은 과거에도 그랬지만 시는 본질적으로 치유의 문화다. 성경에서는 시와 노래로 여호와를 찬양하라고 했다. 이때 시와 노래는 인간과 여호와를 연결하는 다리가 된다. 말하자면 지상과 천국을 연결하여 지상의 한계를 벗어나는 초월적 비상이다. 그것은 통합이고 화합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동안의 시가 그러한 역할을 했는가, 20세기 시들은 불행하게도 화해와 통합의 본분에 충실하지 못하고 오히려 각기 다른 이념과 권력들에게 기생하여 그들의 나팔수 노릇을 하였다. 진보의 편에서는 계급을 노래했고, 보수의 편에서는 순수를 노래했다. 자본주의 편에서는 모더니즘을 노래했고, 사회주의 편에서는 리얼리즘을 노래했다. 그리하여 저들의 대립과 갈등은 영원히 화해할 수 없는 철의 장막이거나 빙벽의 극지인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21세기로 넘어오면서 그처럼 견고하게 여겼던 철의 장막도, 빙벽의 산하도 모두가 무너지는 개벽의 시대가 되고 말았다. 아날로그 문명이 디지털 문명으로 바뀌면서 이념의 장벽이 무너지고 국경이 무너지고 모든 장르의 경계가 무너지게 된 것이다. 우리는 그동안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진리와 정의와 평등의 실체를 믿었다. 그러나 진리라는 것도 패러다임이란 사고체계의 새장 속에 갇혀 있는 앵무새에 불과한 것이고, 끊임없이 연기되는 신기루와 같은 것이라는 데서 허탈감을 느끼게 된 것이다. 이러한 대변혁의 격랑에서 우리가 마침내 확인할 수 있는 진실은 다양성의 실상을 인정하는 것이며 화해와 통합만이 인간에게 주어진 유일한 선택이라는 사실이다. 이는 시학에서도 그렇다. 일제강점기와 남북 분단기라는 역사적 비극이 민족의 분열을 고조시켰고, 시학마저 식민지 시학, 민족주의 시학, 모더니즘 시학, 리얼리즘 시학으로 분열되고 왜곡되면서 상처투성이인 분열의 시대를 이제는 통합의 시학으로, 화해의 시학으로, 치유의 시학으로 시학 본래의 모습을 회복하는 일이 역사적 당위로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변화와 역사적 당위 속에 일찍이 통합의 시학으로 많은 충격을 던졌던 형이상시의 정신과 방법을 재조명하고 이를 이 시대 통합적 시학의 타산지석으로 삼겠다는 시도가 우리 시단에 일게 되었는데 바로 최근에 결성된 형이상시회가 그것이고 최규철 시인이 그 중심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최규철 시인의 이번 시집 󰡔꿀벌처럼 잉잉거리는 햇살󰡕도 이러한 역사적 맥락에서 그 위치를 확인하면서 구체적인 시 읽기를 시도하는 것이 적절할 것으로 판단되어 잠시 형이상시의 배경을 살펴본 것이다.
최규철 시인은 이번 시집을 내면서 이번 시집은 목회자로서의 신앙세계를 뛰어 넘어 그 밖의 형이상학적 관점과 정신세계까지도 소재로 다루었다고 했다. 또한 초감각적 이데아세계를 형이상시의 컨시트 등의 기법을 통해서 현실 사물의 세계로 옮겨 표현함으로써 제3유형의 시로서 시의 영역을 넓혀가려고 시도하였다고 했다. 한마디로 형이상시를 이번 시집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실천하였다는 말인데 그렇다면 이번 시집에서 우선 형이상시인들이 시도했던 형이상학적인 시의 정신, 시의 주제, 시의 의미를 먼저 살펴보고, 그러한 주제가 어떠한 컨시트로 통합되었는가를 분석해 보는 것이 이번 시집을 읽는 일차적인 작업이 될 것이다.
최규철 시인의 이번 시집 전편에서 가장 선명하게 다가오는 이미지는 빛이다. 시집 제목을 󰡔꿀벌처럼 잉잉거리는 햇살󰡕이라고 한 데서부터 빛은 이 시집의 중심이 된다. 그런데 직전의 시집 제목도 󰡔빛으로 가는 길󰡕이다. 이번 시집에는 빛을 제목으로 한 작품도 많다. ‘빛의 씨앗’, ‘햇살이 꿀벌처럼 잉잉거린다’, ‘해오름’, ‘햇빛 그것은’, ‘태양에서 울리는 소리’, ‘개기일식’, ‘빛과 소금’, ‘생명의 빛깔’, ‘소망의 촛불이 탄다’, ‘태양에서 걸려온 전화벨 소리’, ‘새아침’, ‘아침정원’ 등은 모두 빛 또는 태양을 제목으로 한 시들이다. 물론 이러한 빛들은 밝음을 드러내는 빛들이다. 그런데 밝음을 드러내는 빛들은 대낮이나 낮달, 별들로 변형되기도 하지만 아예 밝음과 대조적인 어둠의 빛들도 배면에 깔고 있다. ‘문어발 같은 어둠으로’, ‘죽은 그림자 하나’, ‘나의 그림자’, ‘백지에 머물지 못한 그림자’, ‘어둠 속에서는’ 등은 밝음과 대조되는 빛들이다. 뿐만 아니라 작품들을 읽어보면 빛을 소재로 한 제목의 시는 물론 그렇지 않은 시들에서도 대개는 빛과 어두움이 배치되어 있다. ‘거듭남’이라는 작품에서는 황금빛이 등장하고, ‘모든 생체 리듬’에서는 한낮의 태양이 등장한다. 이처럼 최규철 시인의 작품들은 빛으로 가득한 언어들의 잔치다. 그렇다면 그가 보여주는 빛의 진실은 무엇일까, 다음 몇 편을 살펴보자.
불 꺼진 아파트는
공동묘지로 변한다
 
귀뚜라미소리가
가을밤의 중간 허리를
톱질하는 야반(夜半)의 시간
 
죽음의 유리창을 깎던
밤바람소리가
벽과 벽의 어둠 사이에서
물엿처럼 질질 흘러내린다
 
밤빛에 노출된 필름이
암실에서 서서히 현상(現像)되어
흑백사진으로 반전되는 미명
 
해바라기는 어둠 속에
빛의 씨앗으로 묻혔다가
아침 해돋이에는 창문을 열고
일제히 발아(發芽)할 꿈을 꾼다
-「빛의 씨앗」 전문
 
백향목 숲에서
초여름 엷은 햇살이
금빛 꿀벌처럼 잉잉거린다
뜨거운 정오의 제단불에
온 몸을 태우며
금발머리를 풀고
하늘로 피어오르는 향기
 
향나무 옆구리와 손톱 끝에서
송진 덩어리가 녹아 질질 흐르고
그 상처에서 묻어나는 햇살이
떼지어 꿀벌처럼 잉잉거린다
 
동산의 깜깜한 무덤 속에서
개꿀보다 단 모국어로
다시 살아난 새벽빛이 날개를 편다
이제는
구름 끝자락 빛과 그늘 사이에서
세상의 그림자를 벗어버린 빛이
흰옷을 입은 나비가 되어
하늘 가득히 눈발처럼 흩날린다
-「햇살이 꿀벌처럼 잉잉거린다」 전문
 
햇빛, 그것은
뜨거운 사막에 흡수되어
오아시스에서 뿜어내는 생수다
땅에 뿌리내리고 자란
종려나무 숲의 커다란 그늘이다
 
햇빛이 사람의 형상으로 변형되어
얼굴은 해같이 반짝이고
그 옷은 빛과 같이 희어진다
 
달빛 아래
초가삼간을 짓던
그것과는 사뭇 다르게
 
햇빛, 그것은
커다란 집이 되어
밤도 낮으로 사는 사람들끼리
옷을 훌훌 벗은 사람들끼리
오순도순 모여 사는 가정을 이룬다
-「햇빛, 그것은」 전문
「빛의 씨앗」은 제목부터가 은유적이다. 여기서 빛은 밝음이 일차적 의미이겠지만 씨앗과 결합하면서 문맥적 의미로 재탄생된다. 따라서 씨앗이 될 수 있는 빛, 어떤 생성을 예비하는 빛, 그것은 물리적인 빛이 아니다. 작품의 첫 연에서 불 꺼진 아파트는 공동묘지가 된다고 하였다. 공동묘지가 죽음을 말하는 것이라면 불 꺼진 아파트는 주검들이 있는 장소, 즉 무덤이 된다. 빛이 없는 세계는 바로 죽음의 세계다. 그런데 죽음의 유리창을 깎던 바람이 흐르고 밤빛이 차츰 흑백사진으로 반전되는 미명, 이런 현상을 물리적으로 말하면 밤이 새벽으로 전환하는 것이겠지만, 신화적으로 말하면 태양이 어둠의 용과 밤새 싸우다가 다시 회복하는 승리의 과정이며 기독교적으로 말하면 죽음의 돌문을 깨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승리일 수도 있다. 그러나 마지막 연을 보면 아파트의 주인공들은 바로 해바라기이고 그들은 빛의 씨앗이라는 데서 이는 그리스도의 빛을 받은 씨앗들 즉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이 된다. 그렇다면 이 시는 해바라기처럼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이 비록 죽음의 세계에 있지만 빛의 씨앗으로 있다가 주님 재림시에 일제히 부활할 것을 꿈꾸는 부활소망의 시가 된다. 따라서 이 시의 형이상적 주제는 무엇인가 그것은 죽음에 대한 부활신앙이다. 해바라기같은 신앙인들에게 죽음은 절망이 아니라 부활을 기다리는 빛의 씨앗일 뿐이다. 이는 물질시나 관념시가 해결할 수 없는 초월의 영역이기도 하다. 바로 종교적 형이상의 세계다. 그리고 이러한 초월의 주제가 빛의 씨앗과 해바라기 등으로 은유화되면서 생과 사의 양극화가 부활로 통합되는 과정을 통하여 재치있는 컨시트를 형성하고 있다.
「햇살이 꿀벌처럼 잉잉거린다」는 제목부터가 컨시트적이고 은유적이다. 이는 햇살의 강렬함 보다는 햇살이 꿀벌처럼 달콤한 사역을 수행한다는 데 열쇠가 있다. 그것은 첫 연의 백향목이나 정오의 제단 불에 피어오르는 향기에서 더욱 선명해지는데 이는 여름처럼 뜨거운 제단의 향연, 말씀의 잔치를 연상할 수도 있다. 셋째 연에서 용해와 치유를 경험하는 과정도 그러한 향연의 결과가 된다. 또한 햇살은 개꿀보다 단 모국어가 되어 부활의 날개가 되고, 빛과 그늘, 빛과 그림자의 허상을 벗고 나비가 된다는 데서 햇살의 의미를 재확인하게 된다. 꿀처럼 달콤한 햇살, 제단의 불처럼 뜨거운 햇살이 빛과 그늘이라는 양극을 벗어나 흰옷 입은 나비로 부활 승천하는 과정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일 수 있기 때문이다.
「햇빛, 그것은」에서는 햇빛의 정체가 더욱 분명해진다. 햇빛은 오아시스의 생수라고 했다. 생수는 갈증으로 죽어가는 생명들을 살릴 수 있기에 생명수가 된다. 뿐만 아니라, 종려나무 숲의 커다란 그늘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그늘은 안식처, 휴식처란 말일 것이다. 그런데 둘째 연에서 햇빛은 사람의 형상으로 변형되었다고 했고 얼굴은 해같이 반짝인다고 하였으니 이는 모두 빛으로 오신 예수그리스도를 상징한 이미지들이다. 더구나 그 햇빛은 달빛과 다르고, 초가삼간과 다르게 커다란 집을 짓고, 모두가 오순도순 모여 사는 화평이 된다. 따라서 햇빛은 모든 생명과 안식과 화평의 근원이 되는 존재자의 메타포다. 요한복음 1장 9절과 10절을 보면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라는 말씀이 있다. 그렇다면 최규철 시인의 빛은 누구인가가 더욱 분명해진다.
그런데 빛의 저편에는 낮달이 있고, 그림자가 있고, 어둠이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빛과 그림자, 밝음과 어둠의 두 공간에서 방황하는 나그네가 아닌가, 뿐만 아니라 빛과 그림자의 공간은 그냥 공간으로 고정된 것이 아니라 세월이라는 시간과 함께 유전한다. 여기에 시인의 실존적 자각이 있고, 자아의 진실이 있다. 이러한 실존적 자각이 최규철 시인의 또 다른 형이상의 과제로 제시된다.
 
맨얼굴로 떠서
표정만 살아있다
 
오직 연줄로만 교감하는
불연속성 바람
늦잠을 자다가
갓 깨어난 창백한 낮달이다
 
현기증으로
고공에서 곤두박질치며
가느다란 실에 매달리는 모험
 
남은 생의 팽팽한 긴장이
얼레에서 서서히 감겨지고 있다
-「연」 전문
 
시를 쓰는 동안
단색 그림자로 태어나서
채색 그림자를 남기고 간다
 
완벽한 그림자는
불꽃 속에서도 타지 않는다
 
햇빛이 그림자일 때
천국은 짙은 녹색 변색안경 속에서
동화나라의 동산수풀로 가려 있다
 
지금 하늘에서 떠올리는
나의 시상(詩想)의 화려한 갈라 쇼가
지상에서는 하늬바람 소리일 뿐이다
 
하늘이 열린 곳에서는
귓속에서 익숙한 바람소리도
눈앞에서는 찬란한 이미저리로 펼쳐진다
 
이 땅에서 시인은
그림자 속에 들어 있는
낮달과 같은 뉘앙스를 남긴다
-「낮달과 같은 뉘앙스」 전문
 
밤은 문어발 같은 어둠으로
세상을 휘감는다
 
굳은 바위도 빨판에 붙으면
묽은 용액이 되어
검은 피로 흡수된다
 
야반의 피를 빨아
토해내는 보호색 먹물
그것은 연막술이다
 
밤은 연체동물이다
바람 되어 흐느적거리다가
새벽쯤이면
벌거벗은 그림자로 드러눕는다
 
날이 샐 무렵에야
문어발 같은 어둠을 풀고
밤은 깊은 지하의 암반에
뼈 없는 뿌리를 내린다
 
낮에는 땅 위에
철모를 쓴 머리만 남고
깊은 땅속은 지옥까지 어둡다
-「문어발 같은 어둠으로」 전문
 
가느다란 실에 의해 공중에 매어달린 연, 연의 운명은 오직 실에 의해서 좌우된다. 그러나 더 정확히 말하면 허공에 매어달린 연의 운명은 실에 의해 그 존재가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실을 조종하는 얼레의 주인공에 의해서 좌우된다. 이러한 연의 속성이 「연」이라는 작품을 통해 독특한 컨시트로 제시되었다. 첫 연에서 “맨얼굴로 떠서⁄표정만 살아 있다”고 했다. 얼굴만 있고, 몸통이 없다. 어쩌면 뿌리없는 존재와 같다. 표정만 있다는 것이다. 기발한 컨시트다. 여기서 ‘표정만’이라는 제한적 어미가 매우 불안한 인상을 준다. 그 불안은 둘째 연에서 더욱 강화된다. 불연속성의 바람은 연의 운명을 언제 어떻게 바꾸어 놓을지 모른다. 따라서 연의 실상은 창백한 낮달이 된다. 이는 첫 연에서 표정만 있는 연과 연결되는 이미지인데 모두 실체가 없는 허상들의 무력함을 보여준다. 결국 연의 실존은 가느다란 지상의 인연에 매달려, 또는 목숨을 지배하는 어떤 존재자의 힘에 의해 계속 아슬한 곡예를 모험하는 존재다. 그런데 마지막 연을 보면 그러한 긴장관계마저 얼레에서 서서히 감겨지고 있다는 것이다. 불안한 실존은 마침내 긴장관계마저 유지될 수 없는 절박한 한계로 다가가는 것이다. 이처럼 「연」은 생과 사의 갈림길, 인생이란 연과 얼레, 지상과 생명, 생명과 신의 섭리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하다가 마침내 감겨지고 마는 형이상적 존재인식이 감성적인 컨시트로 신선하게 표현되어 있다.
그런데 「낮달과 같은 뉘앙스」에서 낮달은 앞 시에서 제시한 낮달과는 달리 태양, 즉 본질에 대한 시적 형상으로 표현되고 있다. 첫 연에서 시인은 단색 그림자로 태어나 채색 그림자를 남기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완벽한 그림자는 불꽃 속에서도 타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여기서 그림자는 불멸의 그림자가 되는데 바로 시적 완성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한 그림자야말로 천국이고 동화나라의 수풀이 된다. 또한 하늘과 지상의 하늬바람 소리가 함께 갈라 쇼를 펼치는 조화의 세계가 되고 하늘이 열리는 찬란한 세계가 된다. 낮달이 갖는 뉘앙스는 이처럼 시가 빛의 그림자가 되고, 태양의 낮달이 되고 본질의 현상이 되어 지상과 천국이 함께 어우러지는 통합의 세계가 되는데 이는 시인으로, 목회자로 감당하고 싶은 시적 소망과 신앙적 소망의 진솔한 고백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빛의 저편에는 어둠이 있고, 밤이 있다. 「문어발 같은 어둠으로」는 바로 빛의 저편에 있는 밤의 속성을 보여주고 있다. 밤의 세계는 악마의 세계, 또는 죄악의 세계일 수 있는데 이는 지상의 속성이기도 하다. 악마의 세계는 문어발 같은 흡착력을 갖고 있다. 그 힘은 바위마저도 묽은 용액을 만드는 무서운 힘이다. 악마는 피를 좋아한다. 여기서 피는 희생이 아니라 죽음이고 살육이다. 먹물을 토하여 자신을 숨기고 지상을 파괴한다. 새벽이 되어서야 악마의 밤은 지하의 무저갱으로 내려가는데 이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해 악을 물리치는 심판의 메타포라고 할 수 있겠다. 결국 지상의 악은 인간의 힘으로 해결하기 어렵다. 밤과 어둠은 빛과 태양과 낮을 통해서만 제압될 수 있는 것이고 지상의 모든 악은 그리스도의 심판을 통해 해결될 수 있다. 이처럼 최규철 시인의 시적 상상력은 모두 빛으로 정화되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완성된다.
 

이상으로 최규철 시인의 이번 시집 󰡔꿀벌처럼 잉잉거리는 햇살󰡕에서 몇 편을 살펴보았는데 결국 최규철 시인은 빛의 시인이라는 데 이의가 없다. 빛이 때로는 태양이거나 대낮이거나 별이 되기도 하지만 최규철 시인의 모든 작품들은 빛으로 통하고 빛으로 마무리 된다. 빛은 밝음이고 생명이고, 영원이기에 최고의 형이상적 이데아요 절대적 존재의 메타포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최규철 시인의 모든 작품들은 이러한 형이상적 빛으로 가는 과정이고 빛으로 완성되는 그리스도를 향한 성화의 과정이기도 하다. 그것은 어둠은 물론이거니와 낮달이나 그림자조차도 광명의 빛, 본체의 빛, 생명의 빛으로 동화되어 마침내 꿀벌처럼 잉잉거리는 햇살의 세계, 초월적 상상력의 세계가 된다. 따라서 최규철 시인의 형이상적 상상력은 철학적이기보다는 종교적이고 특히 빛으로 시작하여 빛으로 회귀하는 기독교적 초월성이 누구보다 철저하고 분명하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기독교적 형이상의 이데아들이 빛의 다양한 메타포를 통해 오색의 스펙트럼처럼 빛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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