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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 삼촌 12-17 / 비밀이 생겼어요
2012-11-22 17:55:19
simsazang

조회:855
추천:79

 

12. 속마음은 좋지만

삼촌은 속으로 좋으면서도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솔이가 하는 대로 따라 나섰습니다.

보름달이 온 세상을 대낮같이 비추고 배나무에는 화사한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향기와 달맞이 웃음으로 넘쳤습니다.

달그림자를 밟고 솔이 도도하게 앞장서서 배밭 한가운데 긴 의자로 가서 앉았습니다. 삼촌은 주춤거리고 한쪽 끝에 걸터앉아 눈길을 다른 곳으로 보냈습니다.

“오빠, 왜 그렇게 앉아, 이리 가까이 다가앉으면 안 되나?”

“여기도 좋아.”

“좋기는, 내가 불편해. 이리 다가와 앉아.”

“알았어.”

삼촌은 조심스럽게 자리를 뭉그적거리며 다가앉았습니다.

“오빠는 내가 무서워?”

“아니.”

“그런데 왜 떨어져 앉는 거야?”

“그냥.”

“오빠는 여자 친구 있어?”

“어떤 여자가 나를 친구 삼아?”

“왜?”

“그냥.”

“그냥이 뭐야?”

“난 키만 커다랗고 할 줄 아는 것도 없고, 학교도 겨우 중학교만 나왔잖아?”

“그렇다고 여자 친구도 못 만드나?”

“……”

“오빠, 오빠는 내가 어떤 사람들과 무슨 일을 하는지 궁금하지 않아?”

“글쎄…….”

“나는 어떤 사람을 좋아할 것 같아?”

“인물 잘나고 돈 많고 학벌 좋은 사람…….”

“인물 잘난 사람이 어떻게 생긴 사람인데?”

“세상엔 잘난 사람들이 많아서……”

“오빠같이 생긴 사람이 잘난 사람이야.”

“놀리지 마.”

이렇게 말하면서도 그 말이 싫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좋아할 수도 없어서 달빛을 받고 하얗게 웃는 배꽃을 가리켰습니다.

“달에 비친 꽃이 참 예쁘다. 시집간 누나 웃는 얼굴 같아.”

“어머! 그렇게 멋진 말도 할 줄 아네?”

“그게 멋진 말인가?”

“또 말해 봐, 배꽃을 보고 느낀 대로……”

“꽃도 예쁘지만 은은한 향기가 요란하지 않아서 더 좋아.”

“또 말해 봐. 누구를 닮았어?”

삼촌은 너라고 한 마디 하고 싶었지만 참았습니다. 달빛에 비친 솔이 얼굴은 배꽃보다 예쁘고 달빛에 반짝이는 눈은 배꽃 향기보다 더 마음을 끌어당겼습니다. 그러나 대답은 부끄러워서 할 수가 없었습니다.

“예쁜 사람을 닮았어.”

“예쁜 사람 누구?”

솔이는 바로 너라고 대답해 주기를 바랐지만 삼촌은 또 딴 소리를 했습니다.

“넌 좋겠다.”

“왜?”

“은행에는 멋지고 돈 많고 잘난 사람이 많으니까.”

“그래서?”

“아무것도 아니야. 그렇다는 거지.”

“은행에서 나한테 무슨 일이 있는지 말해 줄까?”

 13. 도시 냄새 땀 냄새

삼촌 동길은 눈길을 달빛에 걸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본 솔이 삼촌 동길의 옆구리를 꾹 찌르며 말했습니다.

“내 얘기 듣고 있어?”

동길은 솔이 건드리는 순간 전기에 감전되기라도 한 듯 정신이 번쩍 들고 전신이 찌르르 했습니다.

“응, 들어, 듣고 있어.”

“그럼 내 얼굴을 보아야지 달만 쳐다보고 있잖아.”

솔직히 동길은 솔이 얼굴을 똑바로 바라볼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솔이는 언제나 강 건너 멀리 피어 있는 꽃 같은 도도한 느낌이 들어서입니다.

“오빠. 내가 은행에서 얼마나 인기 짱인지 알아?”

“응.”

“알아? 알고 응 하는 거야?”

“몰라.”

“이럴 때는 바보 같아. 아주 귀여운 바보.”

“귀여운 바보가 어디 있어? 바보는 그냥 바보지. 난 바보가 맞아.”

“바보라고 해서 화난 거야?”

“아니.”

“그럼 내가 오빠 어깨에 고개를 얹어도 괜찮아?”

“!!!!”

“왜 대답 안 해?”

“응.”

솔이 다가앉아 삼촌 어깨에 얼굴을 괴었습니다. 동길은 솔이 볼이 어깨에 얹히는 순간 말로 할 수 없는 감동을 받았습니다. 솔이 머리에서는 배꽃보다 좋은 향기가 난다고 생각하며 가만히 눈을 감았습니다.

“오빠, 내가 은행에서 인기 짱이라고 하니까 듣기 좋지?”

“응.”

“우리 은행에는 정말 멋진 사람들이 많아.”

“……”

“우리 은행 지점장 아들이 있는데 호호호.”

“……”

“그 아들이 나를 좋아하는 눈치야.”

“……”

“지점장님도 나를 좋아하고 있는 것 같고.”

“……”

“그런데 내 곁에 있는 선배 직원이 나한테 날마다 쪽지 편지를 주는 거야.”

“……”

“뭐라고 썼는지 알아?”

“……”

“그 사람 글씨도 잘 쓰고 문장 실력이 아주 좋아. 쓰는 말마다 아름답고 달콤한 시야 시.”

“……”

“인물 좋고 학벌 좋다고 다 좋은 건 아니지? 그렇지? 오빠.”

삼촌 동길은 다 들으면서 생각했습니다.

‘솔이는 참 좋겠다. 지점장 아들이면 부자일 테고 공부도 많이 했을 테고. 또 멋진 선배 직원이 날마다 아름다운 시를 써서 마음을 주고……’

멍청하게 생각에 잠겨 있는 삼촌 얼굴을 한 손으로 솔이 꼭 찔렀습니다.

“오빠, 무슨 생각하고 있어?”

“응, 아무것도.”

“내가 한 말 다 듣고 있었어?”

“응.”

“그런데 오빠 생각은 어때?”

“응? 응.”

“응응만 하면 되나? 지점장 아들이 좋아? 선배 직원이 좋아?”

“둘 다.”

“둘 다 말고 하나만.”

“……”

“아이고 답답해. 어떤 사람이 좋으냐고?”

“네 맘.”

“난 그 두 사람이 다 싫어.”

“왜?”

“두 사람한테서 도시 냄새가 너무 나서.”

“도시 냄새?”

“응, 난 도시 냄새가 싫어.”

삼촌은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갔습니다. 그래서 속으로 중얼거렸습니다.

‘난 바보라 그게 무슨 말인지 몰라. 도시 냄새가 어떤 것이기에 싫다는 거야?’ 

14. 쿨하게

“오빠는 내가 좋아하는 냄새가 어떤 것인지 알아?”

“……??”

“내가 가장 좋아하는 냄새는 우리 아빠 땀 냄새야. 그리고……”

“??”

“하루 종일 들에서 땀 흘리고 오는 사람 냄새.”

삼촌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갔습니다. 도시 냄새는 무엇이고 땀 냄새가 어째서 좋다는 것인지 모릅니다.

“바보 오빠. 아무 말 하지 마. 대답 안 해도 좋아. 이대로 가만히 있어. 가만히……”

솔이 얹은 얼굴이 따스하고 숨소리가 귀밑을 뱅뱅 돌았습니다. 높이 뜬 달은 배 꽃밭을 눈 내린 들판처럼 하얗게 비치며 이따금 떠가는 구름 사이를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삼촌은 나비가 어깨에 앉았을 때 날아가지 말라고 어깨를 내주고 숨도 제대로 못 쉬고 나비를 태워주던 어느 봄날을 생각을 했습니다.

나비보다 진한 느낌이 전해 오는 하얀 볼은 배꽃보다 곱게 달빛에 빛났습니다. 건너편 산에서 소쩍새 가 짝 찾는 소리가 애잔하게 들리고 이따금 안개 자욱한 골짜기 아래 먼 마을에서 개 짖는 소리가 컹컹 들려왔습니다.

솔이가 어깨에 얼굴을 얹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지만 가만히 있으라는 말에 입을 열 수가 없었습니다.

삼촌은 속으로 너한테 나는 냄새가 좋아 하고 하늘을 나는 감상에 젖었습니다.

‘나는 언제나 좋아하는 여자와 이렇게 달구경을 할 수 있을까? 솔이는 귀엽고 예쁜 아가씨야. 나 같은 사람 어깨에다 얼굴을 얹고 있다니! 안 어울려. 나하고는 너무 먼 사람이야. 솔이는 마치 동화 나라 공주 같은 아가씨. 나는 날마다 배밭 가꾸는 농부……’

삼촌과는 전혀 안 어울리는 솔이지만 어깨에 그 예쁜 얼굴을 얹고 있는 것이 즐거웠습니다. 마치 자기를 좋은 사람처럼 인정해 주는 그런 느낌도 들었습니다.

달이 구름을 타고 서산에 기울 때까지 솔이는 어깨에 얼굴을 묻고 눈을 감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습니다. 삼촌은 아련한 솔이의 숨소리를 타고 달빛에 마음을 실었습니다.

그렇게 얼마가 지난 후 솔이 어깨에서 고개를 들며 말했습니다.

“이슬이 내렸네. 이제 가야지?”

“응.”

“오빠는 너무 딱딱하고 무드가 없어. 다음에는 쿨하게, 알았지?”

삼촌은 또 모르는 말에 의문이 생겼습니다.

‘무드? 쿨하게? 그게 무슨 말이야?’

도도하게만 보이는 솔이가 이렇게 말할 때는 높은 담이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고 거리 없는 친근감으로 다가왔습니다. 솔이 달빛을 받고 환하게 웃으며 하얀 손을 내밀었습니다.

“오빠, 악수!”

삼촌 동길은 쑥스러워서 멈칫거리다가 손을 내밀었습니다. 귀엽고 작은 손이 팥고물보다 부드럽다고 생각하며 잠깐 잡았다 놓았습니다. 그러나 순간 느낀 야릇한 감동은 손바닥에 묻어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15. 할배 큰소리만

삼촌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던 노라가 물었습니다.

“삼촌 어디 갔다 이제 오는 거야?”

“응, 저기.”

“배밭?”

“응.”

“밤에도 일했어?”

“아니. 달구경. 노라야. 난 모르는 게 너무 많아. 무드가 뭐냐?”

“무드?”

“또 쿨한 게 뭐냐?”

“어디서 그런 말을 들었어?”

“응, 저기서. 그게 무슨 말이냐?”

“그런 것도 몰라?”

“모르니까 묻지. 너도 모르니?”

“그런 말 모르는 사람은 삼촌밖에 없어.”

“그러니? 말해 줘.”

“무드라는 말은 분위기라는 말이고 쿨이라는 말은 시원스럽게라는 말이야.”

“고맙다. 분위기, 시원하게……아, 그런 말이구나. 노라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할아버지하고 할머니가 아까까지 기다리시다 들어가셨어.”

“그랬니?”

“낼 아침에 삼촌 각오해!”

“뭘?”

“몰라, 나 졸려서 잘 거야.”

*

아침이 밝았습니다. 삼촌은 잠에서 깼지만 누운 채 아직도 손바닥에 남아 있는 솔이 손에서 느꼈던 감촉을 지우지 못하고 달콤한 꿈에 젖어 있었습니다.

밖에서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누마가 언제 들어왔노? 임자는 아나?”

“잠이 들어서 모른당게요.”

“저 바보 같은 자식 땜이.”

“그게 워뗘서요?”

“동네 사람들이 하는 말 몬 들었나?”

“남이야 뭐라면 어때서유!”

“동네 사람이 뭐라카나 하문, 배밭집 딸이 맴이 들어 날마다 가서 거저 일해주고 있다 안카나?”

“그러면 어때서유? 집에 처박혀 있는 것보다는 좋지라우.”

“다 큰 자식이 실없이 올라가도 몬할 나무를 바라본다카는 동네 사람 말 몬 들었나?”

“당신만 귀가 있소? 나도 다 듣고 있당게요. 저 좋아하는 걸 누가 말린당가.”

“오늘은 내 혼을 내줄끼라. 다시는 몬 가게 할기라.”

할머니가 심통이 난 듯 툭 쏘아붙였습니다.

“해보시유.”

아직도 자리에서 뭉그적거리던 노라가 삼촌을 흔들었습니다.

“삼촌, 일어나. 할아버지 말씀 안 들려?”

동길은 막 깬 척하고 기지개를 켜며 말했습니다.

“할아버지가 뭐라고 하시냐?”

“나가 봐. 할아버지가……”

이때 할아버지가 큰소리로 불렀습니다.

“노라 안 일어났나? 삼촌도 깨우거라.”

노라가 큰소리로 대답했습니다.

“일어났어요 할아버지.”

“삼촌 일어나라캐라.”

“네.”

삼촌과 노라가 문을 열고 나왔습니다. 할아버지가 삼촌한테 물었습니다.

“니는 우째서 날마다 배밭에만 가서 사노? 거기서 뭐 생기는 거라도 있나?”

삼촌이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저는 거기가 좋아요. 그리고 배밭 아저씨한테 배나무도 얻었어요.”

“배나무를 얻었다꼬? 그기 무신 소리고?”

“일해 준 값으로 배나무를 저한테 주셨다고요.”

“그 큰 밭을 다 주었단 말이가?”

“누가 그걸 다 주어요. 좋은 나무 다섯 포기를 주셨습니다.”

“허허, 그 잘난 배나무 메포기 땀에 날마다 간단 말이고?”

“두고 보세요. 제가 이 담에는 배나무 밭을 크게 할 테니까요.”

“네가 무신 재주로 큰 배나무 밭을 하겠노?”

이때 할머니가 나섰습니다.

“듣고 봉게 잘했네. 세상에 공짜가 없당게. 배나무 몇 그루만 잘 길러도 우리 집 겨울나기는 될 것 같은게 열심히 가꾸어 보랑게.”

할아버지가 입을 딱 벌리고 말을 못했습니다.

“허허 저러니 저 아가 저 꼴 아인가.”

할머니는 지지 않았습니다.

“동길이가 어때서요? 키 크고 잘 생기고.”

“잘생기고 키만 크면 되나?”

“남자는 인물이 잘나야 팔자도 좋은 법이랑게. 당신처럼 맹해 가지고는.”

“뭐라꼬? 내가 맹하다캤나?”

“두고 보시오. 우리 동길이가 인물값은 할탱게.”

“허허 허허.”

할아버지는 큰소리만 치시고 아무 위엄도 못 보이게 되자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네가 인물값은 했나 본디 배나 잘 길러라 잉?”

할머니는 배나무 얻었다는 아들이 대견해서 벙실거렸습니다.


16. 눈은 못 속여

 배밭을 비워두고 딸만 남겨놓은 부모님은 다음 날 아침 일찍 돌아왔습니다. 솔이 출근하고 비어 있는 집은 썰렁했습니다.

솔이 아버지가 배밭을 한 바퀴 둘러보고 와서 말했습니다.

“동길 총각이 참 성실하고 부지런하오.”

“그렇지요. 그만한 사람 이 세상에서 구하려고 해도 못 구할 거예요.”

“내가 버려야겠다고 생각한 배나무 다섯 포기가 있었는데 그것을 가지라고 했더니 좋아하더군. 어제는 배나무 언저리에 뒤엉킨 잡풀을 말끔히 베어내고 배나무에 북까지 주었소.”

“그래요?”

“그 풀 속에서도 배나무들은 제법 꽃을 달고 있소.”

“그럼 올해는 열리겠네요?”

“그럴 것 같소.”

부부는 날마다 와서 열심히 일하는 삼촌 동길이 믿음직스럽고 좋아서 매월 꼬박꼬박 솔이 편으로 통장을 맡기고 적금을 부었습니다.

여름이 가고 가을에는 다른 해보다 많은 배가 달렸고 솔이 부모는 큰 수확을 했습니다. 삼촌이 얻은 다섯 그루에도 다른 나무보다 더 큰 배가 주렁주렁 달렸습니다.

삼촌이 가꾼 배나무의 배는 숫자는 작지만 크기는 다른 배의 두 배만큼 컸습니다. 배 따는 날 솔이가 삼촌 동길의 배를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아빠, 이 배 좀 보세요. 아빠 배 안 아프세요?”

“왜?”

“우리 배보다 오빠 배가 더 크잖아요?”

“하하하, 네 말을 듣고 보니 배가 아프구나.”

“아빠, 주지 말고 도로 뺏으세요.”

“그걸 도로 줄까?”

배밭 아저씨가 삼촌을 바라보았습니다. 삼촌은 고개를 저었습니다.

“안 됩니다. 그 대신 배를 반으로 나누어 드리겠습니다.”

“아닐세. 배는 우리 것도 넘치는데 그것 받아 무얼 하겠나. 다 가져가게.”

“감사합니다. 오늘은 저쪽 나무 한 그루의 배를 따 가지고 가서 부모님께 자랑하겠습니다.”

“그러게. 모자라면 내가 더 줄 테니 넉넉히 가지고 가서 온 가족이 즐겁게 배 잔치를 하게나.”

그 날 삼촌은 한 나무에서 딴 배를 어깨가 아프도록 둘러메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것을 본 노라가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 소리쳤습니다.

“야아! 배다, 배가 삼촌 배보다 더 크다아.”

할머니가 마루에 수북이 쌓인 배를 보시며 좋아서 할아버지를 불렀습니다.

“여보, 이리 와 보시오. 아따! 배 한번 크네요이. 이것 좀 보시오. 세상에서 이렇게 큰 배는 처음 본당게.”

할아버지도 좋아하는 눈빛을 숨기지 못하시면서 말은 엉뚱하게 하셨습니다.

“배가 다 그렇지, 그기 뭐 그리 크다카노?”

“잘 보시랑게요. 이만큼 큰 배를 난 처음 본당게요.”

할아버지가 다가가 배를 하나 들고 들여다보면서 또 딴소리를 하셨습니다.

“크기만 하다꼬 다 좋은 줄 아나. 맛이 좋아야 좋은기라.”

“먹어 보지도 않고 그러슈? 배나 사과나 다 때깔 좋으면 맛도 좋당게. 보기 좋은 떡이 맛있다 안 하오? 내가 정지에 가서 칼을 후딱 가져 올랑게 기다리시오잉?”

“후딱 가 오니라.”

할아버지가 말은 불만스럽게 하면서도 빨리 하나 잡숫고 싶은 눈치입니다. 노라가 할아버지 눈치를 알아채고 말했습니다.

“할아버지도 배가 잡숫고 싶으시지요?”

“그기 무신 말이고. 누가 먹고 싶다캤나?”

“할아버지도 좋으시면서……”

“쬐그만게 눈치는 있어서, 할배를 놀리나베.”

할머니가 칼을 가지고 오셔서 배를 깎았습니다. 배는 크고 연하고 맑은 빛이 보기도 좋고 물고 줄줄 흘렀습니다.

“배가 보기도 좋더니만 연하고 단내가 난다.”

할머니가 배를 한쪽 썰어 할아버지께 드렸습니다. 할아버지는 배를 입에 물고 눈으로 웃으시며 말했습니다.

“별 맛 이이고만. 배 맛이 다 그기 그기지.”

“거짓부렁 마시오. 당신 눈이 거짓말을 못하고 맛있다 안 하오?”

“내 눈이 뭐라캤노?”

“당신 눈은 좋으면 요로코롬 눈꼬리가 올라간당게.”

“별소리 다 듣는다. 할매가 거짓말도 잘하네.”

할아버지는 한 조각을 금방 잡숫고 또 한 조각을 잡수시면서 거짓말을 하십니다.

“보기만 좋았지 별맛 아이다. 동길아, 이게 다 네 나무에서 따온기가?”

“다섯 그루 중에 한 나무에서 딴 것입니다.”

“뭐라꼬? 이 배 말고 또 따올 배가 있나?”

“네. 서리 내릴 때까지 네 그루 다 따오면 우리집 겨울 동안은 날마다 배를 먹을 수 있어요.”

할머니가 좋아서 입을 다물지 못하십니다.

“당신이 그렇게 못 가게 하시더니 겨울 동안 입 호강하시게 되었소잉?”

“하모, 동길이 덕에 겨울 배는 즐거울랑가 보다.”

마침내 할아버지가 솔직하게 마음을 내놓으셨습니다. 노라가 생글거리며 말했습니다.

“속으로는 좋으시면서 겉으로는 안 좋은 척하셨지요. 할아버지?”  

“그런 말 하는기 아이다. 할배를 놀리나?”

“할아버지, 배가 참 달고 맛있지요?”

“그래, 내가 이 나이가 되도록 먹어본 배 중에 가장 연하고 달다.”

할머니도 좋아서 한 마디 하셨습니다.

“동길아, 내년에는 배밭에 가서 아주 살거라. 이렇게 좋은 배를 벌어오는데 못 갈 이유가 없응게.”

할아버지는 체면만 생각하십니다.

“허허 이 할망구, 누가 몬 가게 했나? 동네 사람이 하는 말 땜시 아인가. 몬 올라갈 나무 쳐다보지도 말라카는 사람들이 남새시러버서 그러제.”

“동길이가 무엇이 무서워서 배나무를 못 올려다본당가?”

“배나무 올려다보는 거야 누가 말리나. 그 집 딸 보고 하는 말 아인가.”

“그 집 딸 예쁘고 좋기만 하던디.”


17. 비밀이 생겼어요

할아버지가 어이없다는 듯 말했습니다.

“그래서 하는 말 아인가.”

할머니가 놀리는 소리로 말했습니다.

“누가 그 집 딸 달라고 했간디? 같은 여자지만 애가 참하고 예쁜 게 부럽다는 말이지.”

*

삼촌 덕에 노라네는 겨우내 맛있는 배를 실컷 먹었습니다. 겨울이 가고 또 봄이 왔습니다. 봄만 기다리던 삼촌은 배나무 밭으로 갔습니다.

배나무들은 사람보다 먼저 바쁘게 봄맞이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가지마다 뽀얗고 보송한 꽃망울이 모자를 쓰고 바람에 빳빳이 서서 맞서고 있었습니다.

삼촌이 온 것을 안 배밭 주인아저씨 아주머니가 나와서 반기셨습니다.

“아직 날씨가 찬데 벌써 올라왔나?”

“네, 빨리 배를 돌봐야지요. 아저씨.”

이때 출근하는 솔이가 삼촌을 보고 생끗 웃으며 윙크를 했습니다.

“오빠, 오랜만인데, 곰처럼 겨울잠만 잤나?”

삼촌은 솔이가 보내는 윙크에 가슴이 짜릿했는데 솔이 엄마가 딸한테 눈을 흘겼습니다.

“곰이 뭐냐? 오빠라고 하면서 말버릇이 그게 뭐야. 오빠가 곰이면 오빠라고 부르는 너는 뭐냐?”

“나도 곰이지, 곰, 아기 곰 호호호.”

솔이는 겨울을 지나는 동안 많이 달라진 것 같았습니다. 삼촌은 이상하게 솔이만 보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좁아집니다. 좋으면서도 좋다고 할 수 없는 높은 담은 여전히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무 말도 못하고 솔이가 배밭 길을 도도하게 걸어가는 뒷모습만 바라보았습니다.

솔이 아버지가 방으로 들자고 하시더니 차를 내놓고 말했습니다.

“자네 배나무 다섯 그루 옆에 실하지 못한 배나무가 있지 않은가?”

“네.”

“그 나무들이 몇 그루나 되는지 모르겠지만 여남은 그릇은 될 것 같은데 그것도 자네가 갖게.”

“네?”

“왜 싫은가?”

“아닙니다. 좋습니다.”

“그럼 됐어. 그 나무들까지 잘 가꾸어서 가을에 배가 많이 달리거든 자네가 팔아서 가져도 되네.”

“배 값을 절 주신다고요?”

“자네 배나무니까.”

“감사합니다. 나가서 세어 보고 오겠습니다.”

삼촌은 신이 나서 배 밭으로 가 나무를 세어 보았습니다. 열 그루 정도가 부실했습니다. 어느새 따라 왔는지 솔이 아버지가 나와서 나무를 세고 있었습니다.

“열다섯 그루 정도가 시원찮은데 어떤가? 기왕이면 좋은 나무를 주는 것이 예의일 것 같은데 저 나무들은 자네의 사랑을 먹으면 좋은 나무가 될 것 같아서 주려는 거야. 알겠는가?”

“그렇게 많이 주시나요?”

“그래야 농사지은 보람이 있지 않겠나. 가꾸는 것은 자네 몫이고 소득도 자네 몫이니까 알아서 하게.”

그렇게 하여 삼촌은 입이 쩍 벌어진 채 집으로 왔습니다. 그리고 노라한테만 배나무가 작년에 받은 다섯 그루와 합하면 스무 포기가 삼촌 몫이라고 알려주었습니다.

“노라야, 너한테만 말인데 올 여름에는 너도 열심히 그 나무들을 돌봐 주어야 한다. 알았지?”

“할아버지 할머니도 가서 도와드리라고 할까?”

“안 돼, 그건 비밀이야. 아무도 모르게 너만 알고 있어야 해. 그리고 가을에 배 많이 따서 돈 생기면 그 때 말씀드리자.”

“알았어. 삼촌. 나도 열심히 도와줄게.”

그렇게 하여 그 해 여름은 즐거웠습니다. 열심히 가꾸고 일한 보람이 있어서 작년에는 부실하던 배나무들이 가지가 휘도록 달리고 튼튼해졌습니다.

그것을 솔이 아버지가 바라보며 중얼거렸습니다.

“동길 총각이 대단한 솜씨야. 내가 아무리 해도 부실하던 나무들이었는데 무슨 재주로 저렇게 일등 배나무를 만들어 놓았는지 모르겠군.”

곁에서 듣고 있던 솔이 어머니가 말했습니다.

“나무나 사람이나 사랑을 먹고 자라야 아름답고 건강해진다는 말이 헛말이 아니라는 걸 느끼겠어요.”

“동길이 같은 좋은 총각을 어디서 구하나?”

“구해 놓고 무슨 말씀이세요?”

“하하하 그런가. 참 좋은 사람이야.”

“사람도 신실하고, 인물도 그만하면 남한테 안 빠지고.”

솔이 아버지는 진지하게 말했습니다.

“사람은 그래야 하는 건데…….”

삼촌은 꽃과 나무를 얼마나 좋아하고 사랑하는지 집에도 마당과 뜰이 여름 내내 온통 꽃동산입니다. 가을이 되자 뜰에는 국화가 여러 모양으로 피어 향기를 날리고 있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아들이 날마다 배나무 밭에 가서 일하는 것이 못마땅했지만 집에 가꾸어 놓는 꽃을 보고 은근히 좋아하면서 할머니한테 말했습니다.

“미루나무맹기로 키만 큰 것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줄 알았는데 꽃과 나무 가꾸는 재주는 눌 닮았는지 모르것다.”

“나 닮았지라우.”

“임자가 언제 꽃나무에 물 한 방울이나 주었나?”

“동길이가 알아서 항게 난 구경만 하지 않았소.”

“그눔아가 날마다 배밭 가는기 동네 사람 남새시럽지만 꽃 가꾸는 솜씨 보면 밉지 않다.”

“냅두시오. 다 잘 될 것잉게.”

“올해도 배나무 다섯 포기에서 배 따오겠제?”

“할배가 웃겼소. 가지 말라면서 배는 먹고 싶은갑소?”

“일 년 내내 일해주고 얻어오는 배 아인가. 당연히 그런 거라도 먹어야 안 되나.”

“기다려 보시오잉.”

*

가을이 깊어지자 과수원으로 배를 사러 오는 서울 장사꾼들이 몰려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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