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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찬모박사가 평한 신경림론
2010-05-27 13:2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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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2157
추천:103

밤의 양면성과 유유상종의 시학

-신경림의 초기시집 『農舞』를 중심으로-

 

 

강찬모(문학평론가, 청주대학교 국문과 강사)

 

 

 

1. 들어가며

 

시인 신경림은 시집 『農舞』(1975)를 시작으로 현재 『낙타』(2008)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 세계를 선보여 왔다. 이러한 시적 변모과정 속에는 시인의 삶의 상투와 관성에 대한 지속적인 자극과 회의가 짙게 드리워져 있어 탈각하는 자의 아픔과 권세를 함께 느끼게 한다. 『農舞』에서 『낙타』까지 신경림 시의 특징은 각 시집마다 지향한 시적 관심이 다소 편차를 보이고 있긴 하지만, 시종여일한 것이 이 땅의 필부필부의 야사(野史)적 삶의 편린들이다. 신경림의 시사적 평가도 이에 근거하는 면이 크다. 절륜자가 만들고 주도한 정치 사회적 담론 속에 속절없이 방기된 무명의 삶을 보듬어 시의 정사(正史)에 물질하는 역할을 했다.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영락한 민중의 적빈의 삶을 그대로 드러냄으로써 당대 시의 흐름에 역행을 시도했다.

그의 시의 양날의 칼인 서사지향성과 민요의 채록 그리고 구비문학을 비롯한 전통민예의 시적 수용은 이러한 신경림 시의 특징을 시로 체현하기 위한 모험적 여정이었다. 이는 기존의 서정시로 상징되는 시의 질서에 대한 심각한 성찰과 내적 진통이 전제된 아픈 모색의 결과를 의미한다. 신경림의 모험은 평단의 우려와 달리 70년대 격동의 정치 상황과 맞물려 민중이라는 소외된 집단에 대한 시적 관심을 증폭시켰고, 후생 시인들의 창작의 도식성에 신선한 자극제가 됨으로써 초기시집 『農舞』에 가졌던 평단의 우려와 염려를 불식시켰다.

후기시에서 보이고 있는 자연과 삶에 대한 달관된 여유와 관조도 이 같은 초기시의 모태를 두고 있다. 한 인간의 의식세계는 평지돌출적 예외성을 띨 수 없다. 더구나 난마처럼 얽혀있는 의식의 회로를 천착하는 시인의 의식은 필연적으로 최초의 경험적 의식세계와 무관할 수 없기 때문에 역사적 감각일 수밖에 없으며, 외적 현실을 규정하는 인자가 된다. 따라서 초기시집 『農舞』를 살펴본다는 것은 그의 삶과 문학 전반을 이해할 수 있는 지평이 될 것이며, 『農舞』의 주요 배경으로 등장하는 ‘밤’은 이 같은 이해의 폭을 넓혀 주는 역할을 한다. 특징적인 것은 밤이 변증적 과정(좌절→연대→화이부동→인정주의)을 통해 신경림이 지향한 민중의 주목받지 못한 삶에 안착한다는 것이다.

『農舞』에서 밤은 ‘사회 역사적 맥락의 현실적인 밤(상징적 밤)’과 ‘물리적 밤’으로 구분된다. 상징적 밤은 화자와 ‘못난이’들을 현실에 그대로 노출시키는 좌절의 밤이다. 물리적인 밤은 화자와 못난이들이 연대하고 유유상종하며, 고단한 현실을 위로하는 이른바 ‘보호고치(protective cocoon)’로서 기능을 하는 공간이다. 못난이는 신경림의 초기시집 『農舞』를 관통하는 복수의 공동체의 화자를 지칭하는 말로서 자조적 삶에 대한 냉소적 호칭이다. 일반적으로 호칭이 제 삼자에 의해 존재와 사물이 규정되는 대타적인 의미를 갖는 데, 못난이는 그들 스스로 자신의 존재 가치를 의도적으로 폄하함으로써 현실의 부정과 비판의식을 강조하기 위한 호칭이다. 보호고치(누에고치)는 사회학자 엔소니 기든스가 개념화한 용어인 데 서로의 신뢰가 일상생활에서 일어날 수 있는 잠재적 위협과 위험으로부터 개인을 보호해 주는 역할을 한다고 한다. 신뢰의 정도에 따라 외부에서 제기되는 불신을 제거하거나 혹은 경계와 의심이 가중 극도의 경각심을 갖는다고 한다. “학교 마당을 벗어나면/전깃불도 나가고 없는 신작로.”(「씨름」)에서 학교 마당의 안쪽이 못난이들이 보호고치로서 연대하는 공간인 신뢰의 공간이며, 학교 밖의 공간이 신뢰의 상실로 의심과 경계가 만연한 “전깃불도 나가고 없는” 상징적 밤의 경계가 되는 셈이다. 물리적 밤에서 못난이들이 연대하고 유유상종하는 것은 상징적 밤을 초래한 자들이 신뢰의 보호고치를 훼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물리적 밤에서 못난이들의 유유상종의 연대는 당초의 보호고치로 회귀할 수 없는 불가능한 현실을 견디기 위한 그들만의 최선의 자구책이지만, 상징적 밤을 초래한 자에 의해 훼손된 당초의 보호고치는 아니다. 따라서 궁극적으로 『農舞』에서 밤의 변증은 훼손된 보호고치를 복원하려는 과정이며, 변증과정의 끝인 공동체의 ‘인정주의’는 훼손된 보호고치의 원형이 된다.

 

2. 좌절과 죽음의 상징적 밤

 

좌절과 죽음의 상징적 밤은 화자와 못난이들에게 깊은 좌절과 열패감을 안겨주는 밤이며, 그들을 현실에 그대로 노출시키는 밤이다. 삶의 일상성이 뿌리째 뽑힌 을씨년스러운 공간이다. 보호고치의 공간에서 일탈된 사람들이 그 어디에서도 지친 삶을 위로받지 못하고 방치된 곳이다. 특히 1인칭 화자가 직접 개입하지 않고 담담하게 진술하는 전개 방식은 방치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줌으로써 현실에 노출된 대상과 사물의 비극성을 심화시켜 주는 역할을 한다. 비극의 심화는 대상과 사물이 처한 조건을 냉정하며, 정직한 시선으로 객관화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정조이다. 개입과 접근을 금지하는 차단효과라고 할 수 있는 데 대상과 사물이 처한 절망의 상황을 극대화하는 효과가 있다.

 

이제 나는 시골 큰집이 싫어졌다.

장에 간 큰아버지는 좀체로 돌아오지 않고

감도 다 떨어진 감나무에는

어둡도록 가마귀가 날아와 운다.

대학을 나온 사촌형은 이 세상이 모두

싫어졌다 한다. 친구들에게서 온

편지를 뒤적이다 훌쩍 뛰쳐나가면

나는 안다 형은 또 마작으로

밤을 새우려는 게다. 닭장에는

지난봄에 팔아 없앤 닭 그 털만이 널려

을씨년스러운데 큰엄마는

또 큰형이 그리워지는 걸까. 그의

공부방이던 건넌방을 치우다가

벽에 박힌 그의 좌우명을 보고 운다.

우리는 가난하나 외롭지 않고, 우리는

무력하나 약하지 않다는 그

좌우명의 뜻을 나는 모른다. 지금 혹

그는 어느 딴 나라에서 살고 있을까.

조합빚이 되어 없어진 돼지 울 앞에는

국화꽃이 피어 싱그럽다 그것은

큰형이 심은 꽃. 새아줌마는

그것을 뽑아내고 그 자리에 화사한

코스모스라도 심고 싶다지만

남의 땅이 돼버린 논둑을 바라보며

짓무른 눈으로 한숨을 내쉬는 그

인자하던 할머니도 싫고

이제 나는 시골 큰집이 싫어졌다.

―「시골 큰집」전문

 

“시골 큰집”과 화자의 “사촌형”이 시를 이루는 기본 골격인 데 외면적으로 나타난 시의 흐름은 가문의 장자인 화자 가계의 비극을 그리고 있으며, 상징적 밤을 배경으로 당대 현실을 전경화하고 있다. 사촌형의 부재의 원인이 6,70년대 대학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일어났던 사회 정의에 대한 권력과의 갈등으로 보인다. 이러한 사건은 당시의 정치 상황과 이 땅의 의식있는 대학생을 견주어 보면 다른 집안에서도 흔히 있을 수 있는 특별하지 않은 현실이다. 그러나 신경림은 “시골”과 “큰집”이라는 대상을 시의 제목 겸, 중심 소재로 설정함으로써 당대 정치 사회의 파행성을 드러내고 있다. 공통적으로 시골과 큰집(종가)은 중앙에 대하여 종적인 위치에 있는 공간으로 개발독재란 미명하에 중앙으로부터 심한 열패와 훼손을 경험한 공간이다. 근대적 가치에 의해 재래적으로 간직한 고유한 정체성이 무차별적으로 훼손되는 대상이라는 것이다. 특히 큰집의 몰락은 한 가문의 정신문화의 정수가 모인 집성체란 의미에서 당대의 살풍경한 현실을 보여준다.

전체적인 시의 정조는 을씨년스럽고 종말적인 분위기이다. 화자 사촌형의 비극적인 삶이 큰집의 쇠락을 몰고 온 원인임은 물론이다. 큰아버지, 감, 닭, 돼지, 논둑의 부재는 사촌형의 부재의 자리를 심화시켜 주는 역할을 하며, 4행 “가마귀의 울음”과 18행 “그는 딴 나라에서 살고 있을까”의 구절을 통해 형의 부재가 예사롭지 않게 다가온다. 화자의 사촌형은 장자가 집안의 희망이며, 자랑이었던 우리의 6,70년대 농촌의 일반적 상황을 상징한다. 집안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소위 ‘우골탑(牛骨塔)’이란 대학을 나왔으나 입신양명의 길을 가지 못하고 낙향, 술과 마작으로 부지하세월을 보내고 있다. 성공과 출세를 위해 한 집안의 희생이 온전히 담보된 뒷바라지였기에 사촌형의 부재가 갖는 충격이 크다. 심지어 사촌형이 심은 꽃(국화꽃→코스모스)의 교체를 통해 집안을 감싸고 있는 을씨년스러움과 괴기를 털어내려고 하지만, 형의 부재를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다. 15~17행의 “우리는 가난하나 외롭지 않고, 우리는/무력하나 약하지 않다”라는 사촌형의 좌우명은 그의 방황과 좌절이 보다 근원적인 것에 잇닿아 있음을 촌탁할 수 있다. 사촌형의 세상에 대한 믿음은 ‘가난하고 무력하지만 외롭거나 약하지 않다’는 현실의 결핍된 조건을 전제로 한 믿음이었기 때문에 견고한 것이었다. 즉 사촌형의 세상에 대한 믿음은 못난이들의 유유상종적 연대에 대한 깊은 신뢰에 기인한 것이다. 현실적인 힘은 미약하지만 민중이란 폭넓은 저변이 결국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역사에 대한 믿음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촌형의 회의와 좌절은 자신이 지향한 가치가, 보다 깊은 구조적 모순에 의해 쉽게 이루어 질 수 없다는 현실을 인지한 후에 비롯한 좌절이기 때문에 낭패감이 큰 것이다.

주목해 볼 대목은 전통적으로 할머니는 사회 역사적 갈등과 대립 속에서 파생된 조건들에 대하여 그 상처를 포용하거나 수용하는 존재로 그려지는 데 “남의 땅이 돼버린 논둑을 바라보며/짓무른 눈으로 한숨을 내쉬는 그/인자하던 할머니도 싫고/이제 나는 시골 큰집이 싫어졌다.”라고 말하는 화자의, 할머니에 대한 부정이다. 화자의 할머니에 대한 부정은 사촌형이 부재하고 집안이 몰락하는 위기의 순간에도 현실적으로 아무런 대안이나 도움을 주지 못하며, 안타까움만 자아내는 무력한 환경에 대한 부정이다. 이러한 부정은 화자 자신에 대한 부정과 시골 큰집에 대한 부정 그리고 세상에 대한 부정으로 이어진다.

 

해가 지기 전에 산 일번지에는

바람이 찾아온다.

집집마다 지붕으로 덮은 루핑을 날리고

문을 바른 신문지를 찢고

불행한 사람들의 얼굴에

돌모래를 끼얹는다.

해가지면 산 일번지에는

청솔가지 타는 연기가 깔린다.

나라의 은혜를 입지 못한 사내들은

서로 속이고 목을 조르고 마침내는

칼을 들고 피를 흘리는데

정거장을 향해 비탈길을 굴러가는

가난이 싫어진 아낙네의 치맛자락에

연기가 불어 흐늘댄다.

어둠이 내리기 전에 산 일번지에는

통곡이 온다. 모두 함께

죽어버리자고 복어알을 구해온

어버이는 술이 취해 뉘우치고

애비 없는 애기를 밴 처녀는

산벼랑을 찾아가 몸을 던진다.

그리하여 산 일번지에 밤이 오면

대밋벌을 거쳐 온 강바람은

뒷산에 와 부딪쳐

모든 사람들의 울음이 되어 쏟아진다.

―「山 一番地」전문

 

‘산일번지’는 상징적 밤을 대표하는 죽음의 공간이다. 화자가 서 있는 현실은 “젊은이들은 흩어져 문 뒤에 가 숨고”(「폭풍」) “사람들은 가로수와/전봇대 뒤에 숨”(「그날」)어서 “무엇인가/말을 하려고”(「그」)하며, “돗자리 위에 웅크리고 앉은 아저씨들은/꺼칠한 얼굴로 시국 얘기를 한다/그 겁먹은 야윈 얼굴”(「時祭」)을 하고 있는 현실이다.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있”(「누군가」)기 때문이다. 삶의 일상성이 무너진 현실에 화자가 서 있으며, 소통과 공유가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통제와 감시의 ‘파놉티콘(panopticon)’적 사회를 연상케 한다. 파놉티콘은 제러미 벤덤이 개념화한 말로 원형 감옥에서 감시자가 죄수를 감시하는 시스템을 말한다. 이 시스템은 감시자는 죄수를 볼 수 있지만, 죄수는 감시자를 볼 수 없기 때문에 죄수는 언제나 감시를 받는다는 강박관념으로 스스로 위축 주체적인 행동을 할 수가 없다. 익명의 눈으로 조종되는 노예가 되기 때문이다.

산일번지와 화자가 서 있는 현실은 자기 검열을 통해 정신이 억압받음으로써, 개인의 자유의지가 말살되는 경직된 공간이다. 비연시로 구성이 되어있지만, 1행의 “해가 지기 전”과 7행 “해가 지면” 그리고 15행의 “어둠이 내리기 전”과 21행의 “밤이 오면” 등 일몰 전후와 어둠의 번짐과 명암을 통해 ‘산 일번지’란 공간의 비극성을 심화시키고 있기 때문에 시적 전개과정은 4연으로 구분된다. 전체적으로는 시간의 추이과정에 따라 비극이 확대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으며, 비극의 단초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 ‘흉풍(凶風)’이다.

『農舞』에서 바람은 “뒷산 나뭇가지에 와 엉겨/굶어죽은 소년들의 원귀처럼 우는”(「눈길」), “이 흙바람 속에 꽃이 피리라고/우리는 믿지 않는다 이 흙바람을/타고 봄이 오리라고 우리는/믿지 않는다 아아 이 흙바람 속의/조국의 소식을 우리는 믿지 않는다.”(「3월 1일」), “꽃바람이 불면 늙은/수유나무가 운다”(「서울로 가는 길」), “바람은 복대기를 몰아다가 문을 때리고/낙반으로 깔려죽은 내 친구들의 아버지/그 목소리를 흉내내며 울었다.”(「廢鑛」), “그 봄엔 유달리 흙바람이 차서/아내는 온몸이 시퍼렇게 얼어 떨었”(「冬眠」)다 등으로 빈번하게 등장하며, 액운을 몰고 오거나 가중시키는 역할을 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바람은 “한 사람의 울음이/온 마을에 울음을 불러오”(「그 여름」)도록 하는 즉 개별적 통곡을 모든 사람의 울음으로 보편적으로 확산하는 역할을 한다. 이런 면에서 22행의 ‘대밋벌’을 거쳐 온 강바람의 존재는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보통 하나의 흐름이 목적지에 도달하기 전에 머무는 경유지는 그 흐름을 완곡하게 유화하거나 더욱 강한 흐름을 촉발하는 역할을 하게 되는 데, 산 일번지에 부는 바람은 그 흐름을 더욱 강하게 촉발하는 강바람이다. 울음이 개별적 통곡에서 집단적 전체적인 울음으로 그 강도를 더해가는 것도 대밋벌이란 경유지의 강바람의 유속과 관계가 있다.

‘연기’는 액운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는 바람과 달리, 호구의 삶을 더욱 빈핍하게 부각하는 역할을 한다. 더구나 “가난이 싫어진 아낙네의 치맛자락에” 붙은 연기는 청솔가지의 미진한 화력과 함께 가난한 삶을 집요하게 따라다니는 구차스러운 역할을 한다.

 

3. 연대와 유유상종의 밤

 

신경림의 초기시에 주요 배경이 되고 있는 ‘물리적 밤’은 그의 초기시의 지배적인 정조인 자조와 비애 그리고 냉소적 태도를 발산하는 소위 ‘멍석자리’ 기능을 담당하는 공간으로 활용된다. 물리적 시간으로서 밤은 화자와 못난이들이 고단한 삶을 서로 위로하거나 억압된 정서를 푸는 해방구의 의미를 가진 공간으로서 기능을 하는 곳이다.

밤이 배경으로 단지 후경을 지키는 병풍적 역할에 머물지 않고 화자와 못난이들의 가슴 속에 맺힌 응어리진 한을 풀어 주는 치유 기능으로서 역할을 하는 공간이라는 것이다. 이들에게 치유 기능으로서 밤이 근본적인 회복을 보장하지는 않지만, 이들에 의해 밤은 고요한 정태적 공간에서 탈피 그들 스스로가 연출하고 만드는 창조적이며, 약동하는 그들만의 고유한 삶의 중심적 공간으로 탄생된다. 밤이 고단한 삶의 멍에를 잠시나마 내려놓을 수 있는 공간이 된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치유 불가능을 상쇄한다. 밤 배경의 고정적 평면성이 화자와 못난이들에 의해 자율적이며, 창조적인 멍석자리 깔기의 능동적 공간으로 전이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협동조합 방앗간 뒷방에 모여

묵내기 화투를 치고

내일은 장날, 장꾼들은 왁자지껄

주막집 뜰에서 눈을 턴다.

들과 산은 온통 새하얗구나. 눈은

펑펑 쏟아지는데

쌀값 비료값 얘기가 나오고

선생이 된 면장 딸 얘기가 나오고.

서울로 식모살이 간 분이는

아기를 뱄다더라. 어떡할거나.

술에라도 취해볼거나. 술집 색시

싸구려 분 냄새라도 맡아볼거나.

우리의 슬픔을 아는 것은 우리뿐.

올해에는 닭이라도 쳐볼거나.

겨울밤은 길어 묵을 먹고.

술을 마시고 물세 시비를 하고

색시 젓갈 장단에 유행가를 부르고

이발소집 신랑을 다루러

보리밭을 질러가면 세상은 온통

하얗구나. 눈이여 쌓여

지붕을 덮어다오 우리를 파묻어다오.

오종대 뒤에 치마를 둘러쓰고

숨은 저 계집애들한테

연애편지라도 띄워볼거나. 우리의

괴로움을 아는 것은 우리뿐.

올해에는 돼지라도 먹여볼거나.

―「겨울밤」전문

 

물리적 밤은 바로 복수의 공동체의 화자인 못난이들이 빛과 밝음 그리고 중앙에 대하여 상대적으로 열악한 공간인 밤을 오히려 그들 삶의 구체적인 존재 공간으로 인식하며 연대하는 곳이다. 그들이 거처하여 연대하는 공간은 “뒷방”이나 “주막집”, “사랑채”나 “구판장” 등 소외된 자들이 그들만의 적층된 정서를 해소하거나 발산하는 ‘뒤안’적 공간이다. 신경림 시에 자주 등장하는 “장날”이나 “공사판”도 뒷방이나 주막집이 변주된 공간이다. 화자와 못난이들이 뒷방이나 주막집에서 벌이는 화투와 마작은 한결같이 그 자체가 종국적인 목적 행위가 아니라 심심파적으로 하는 여기적인 놀이다. 위의 시의 진술 형태도 ‘-고’나 ‘-데’의 열거와 ‘-거나’라는 유보적 의문형을 종결어미로 씀으로써, 화자와 못난이들이 어떠한 것에서도 확신을 갖지 못하고 전망부재의 현실에서 방황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같은 화자와 못난이들의 행위는 13행의 “우리의 슬픔을 아는 것은 우리뿐”과 24, 25행 “우리의/괴로움을 아는 것은 우리뿐”이라는 확정적 구절에서 암시하듯 타자의 개입에 의해 초래된 삶을 그들 나름대로 견인하기 위해 벌이는 세상에 대한 행기의 몸짓이다. 이른바 유유상종의 연대감은 “누가 가난하고/억울한 자의 편인가/그것을 말해주는 사람은/아무도 없”(「前夜」)기 때문에 하릴없이 현실을 견디기 위한 방편이다. 선행 주어절에 대한 원인을 아는 것은 결국 “우리뿐”이라는 것은 사회적 현실에서 파생된 소통과 공유의 단절 정도를 의미하는 것이지만, 신경림은 데뷔작인 「갈대」에서 이미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그는 몰랐다.”라고 고백함으로써 인간 소외가 보다 근원적인 인간의 실존에 기인한 물음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고 있다. 타인이 아픔과 상처에 대하여 얼마나 공명할 수 있을까에 대한 회의라는 것이다. 『農舞』에는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罷場」), “우리는 미친놈처럼 자꾸 웃음이 나온다”(「눈길」), “마침내 한데 어울려 해롱대었으나”(「어느 8월」)와 같이 유유상종의 구절이 많은데, 이는 반영적 자화상보기를 통해 연민을 극대화하기 위한 시의 전략이다. 그러나 소외된 자가 품는 세상에 대한 특유의 반감은 그 강도가 강할수록 복수의 화자인 우리를 하나로 묶는 정서적 유대감은 강화시켜주지만, 그만큼 세상에 대한 개방성을 멀게 한다. “빈주먹과 뜨거운 숨결만 가지고/아우성과 노랫소리만”(「갈 길」)무성한 것도 개방성을 상실한 결기이기 때문이다.

 

박서방은 구주에서 왔다 김형은 전라도

어느 바닷가에서 자란 사나이.

사월의 햇살은 아직도 등에 따갑구나.

돌이 날고 남포가 터지고 크레인이 운다.

포장 친 목로에 들어가

전표를 주고 막걸리를 마시자.

이제 우리에게 맺힌 분노가 있을

뿐이다. 맹세가 있고 그리고 맨주먹이다.

느티나무 아래 자전거를 세워놓은

면서기패들에게서 세상 얘기를 듣고.

아아 이곳은 너무 멀구나, 도시의

소음이 그리운 외딴 공사장.

오늘밤엔 주막거리에 나가 섰다를

하자 목이 터지게 유행가라도 부르자.

사이렌이 울면 밥장수 아주머니의

그 살찐 엉덩이를 때리고 우리는

다시 구루마를 밀고 간다.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밀린 간조날을

꼽아보고. 건조실 앞에서는 개가

짖어댄다 고추 널린 마당가에서

동네 아이들이 제기를 찬다. 수건으로

별을 가린 처녀애들이 킬킬대느라

삼태기 속의 돌이 무겁지 않고

십장은 고함을 질러대고. 이 멀고

외딴 공사장에서는 가을해도 길다.

―「원융지」전문

 

『農舞』에서 “공사판”은 인생의 막장들이 가슴 속에 피치 못할 사연 하나쯤은 화인처럼 간직하고 모여드는 삶의 끝자락이다. 공사판은 이미 언급했던 다른 뒤안적 공간과 달리, 화자와 못난이들의 전적과 이력의 행로에 대한 무성한 추측과 그 추측에 그럴만한 필연성을 부여하는 공간이다. 화투와 마작이 영락한 삶을 순간적으로 위로하는 마취적인 여기라면, 공사판은 이러한 여기적 행위를 하는 못난이들이 그들의 삶을 마지막이란 심정으로 의탁하는 삶의 전부인 공간이다. 선택의 여지없이 벼랑 끝에 선 심정으로 쓸려 온 공간이기 때문에 어떠한 대의명분도 찾지 못하는 생존의 본능적 절실함과 분노만이 삶을 지속시키는 슬프고 연민스러운 공간이다. 7행 “이제 우리에겐 맺힌 분노가 있을/뿐이다. 맹세가 있고 그리고 맨주먹이다.”라는 구절은 공사판이란 공간에 모여든 각성바지들의 세상에 대한 적개심이 얼마나 큰가를 보여준다. 공사판은 전적으로 타의에 의해 밀려 온 공간이기 때문에 이들에게서 지금 현재에 대한 어떤 책임과 의무로부터 자율적 협조를 기대하기 어려운 경직된 공간이다. 건드리면 터질 것 같은 호승심이 지배적인 정서도 여기에 연유한다. 공사판의 번다한 소란과 분주함이 사실적으로 전달되지 못하고 오히려 적요한 느낌을 갖게 하는 데, 이는 그만큼 화자와 못난이들의 분노가 내면적인 견고성을 띠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이러한 적개심이 고조된 공사장에서 이들에게도 유일한 위안과 즐거움을 주는 공간이 바로 ‘밤’이다. 주막에 나가 “섰다를 하”거나 “목이 터지게 유행가”를 부르며 “밥장수 아주머니”와 농지거리를 해도 무방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밤의 위안은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일반성이기 때문에 딱히 화자와 못난이들만의 특별함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들의 삶이 낮과 빛 그리고 중앙을 부당하게 희생하고 얻은 밤이기 때문에 위안과 즐거움을 주는 해방구로서의 의미가 더욱 큰 것이다. 화자의 밤에 대한 근친적 정서는 유년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오래된 것이다. 화자를 둘러싼 온갖 인간 군상들이 펼치는 삶의 일탈된 행태와 사연 속에서도 “내게는 밤이 오는 것만은 즐거웠다.”(「장마 뒤」)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화자의 이러한 밤에 대한 근친적 정서는 밤이 낮의 소란과 피로를 위무해 주는 안식처로서 본래의 기능을 하지 못하고 늘 사건과 사연을 만들어 내는 문제적 배경임에도 불구하고 보이는 반응이기에 근원적이며, 문맥적으로도 밤이 갖는 부정성에 대한 반어가 아니기에 정직한 고백으로 보인다. 밤이 갖는 양면성과 인간의 속성을 등가시킴으로써 인간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고자 했다는 것이다. 밤이 갖는 인간의 욕망이 오히려 낮의 분식과 위장으로 은폐된 위선보다 정직하다는 호의적인 시의 전략 차원이다.

 

4. 회귀의 욕망과 화이부동

 

『農舞』에서 상징적 밤은 화자와 못난이의 현실적 좌절과 절망으로 점철된 죽음의 공간이며, 물리적 밤은 이들이 유유상종으로 연대하며 현실의 고단함을 잊는 ‘멍석자리 깔기’의 공간이라고 말한 바 있다. 주목해볼 점은 화자의 좌절이 정사적 권력에 편입되지 못한 사적 감정이나 울분보다는 “먼 마을의/개 짖는 소리만 들을 것인가/눈 오는 밤에 가난한 우리의/친구들이 미치고 다시/미쳐서 죽을 때/철로 위를 굴러가는 기찻소리만/들을 것인가 아무렇게나/살아갈 것인가 이 산읍에서”(「山邑 日誌」)의 구절처럼 사회 역사적 대의명분에 입각한 윤리적 측면이 강하기 때문에 여건과 계기만 주어지면 언제든지 회귀할 수 있는 좌절이라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화자에게는 “기찻소리”도 사치가 될 정도로 산읍이란 궁벽한 공간은 현실적 갈등을 잊게 해 주는 곳이 아니라, 오히려 친구들이 처한 죽음의 현실과 함께 하지 못하고 있다는 윤리적 죄의식이 강하게 작용하는 곳이다. 따라서 화자의 영락은 심연이 될 수 없는 것이며, 회귀의 꿈은 영락한 환경 속에서도 포기할 수 없는 현재적 관심사가 된다. 영락한 삶에서도 늘 한 쪽 귀를 세상의 풍문에 기울이는 것도 이 때문이며, 이는 화자가 못난이들이 처한 환경과 ‘화이부동(和而不同)’하는 것으로 나타나게 되는 원인이 된다. “면서기패들에게서 세상 얘기를 듣고./아아 이곳은 너무 멀구나, 도시의/소음이 그리운 외딴 공사장./……/외딴 공사장에서는 가을해도 길다.”(「원융지」)라고 비로소 세상과의 물리적 거리를 실감 도시의 소음을 그리워하는 것이며 “우리가 가고 있는 곳이 어딘지를/그러나 우리는 서로 묻지 않”(「同行」)거나, “비겁하게 사느라고 야윈 어깨로/밤새도록 우리는 빈 얘기만 한”(「달빛」)것도 화자의 화이부동의 태도 때문이다. 또한 “하얗구나. 눈이여 쌓여/지붕을 덮어다오 우리를 파묻어다오.”(「겨울밤」)라고 말하는 것도 명징한 이성을 소유한 자만이 느끼는 염치이기 때문에 화자의 절망과 행기가 끝이 전제된 몸짓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순백의 눈을 자신의 현재를 비추는 거울로 인식한다는 것은 곧 부끄러움을 내면화한다는 것이며 현실과 객관적 거리를 유지, 회귀에 대한 꿈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農舞』의 진술 형태도 못난이들이 그들끼리 유유상종하며 현재적 삶을 이야기 하는 것으로 묘사되지만, 결국 서로의 아픔을 공유하기보다 자기의 아픔을 하소연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물론 화자의 화이부동이 사적 욕망 때문에 비롯된 표리가 아니라는 것은 회귀의 욕망과 화이부동에 윤리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측면이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화자가 영락한 현실에서 못난이들과 경험한 소통의 부재를 호의적 시선으로 바라볼 이유는 없다. 아직까지 화자가 그들의 현실적인 삶을 올바로 이해하는 데 장애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화자도 자신의 현재적 위치가 주는 불완전성을 잘 알기 때문에 자학과 행기의 골이 깊다. 신경림 시의 지배적 정조인 비애와 자조 냉소적 태도는 바로 이 같은 화자의 불가근불가원의 현재적 삶의 상황에서 생성되는 화이부동의 정서이다.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이발소 앞에 서서 참외를 깎고

목로에 앉아 막걸리를 들이켜면

모두들 한결같이 친구 같은 얼굴들

호남의 가뭄 얘기 조합빚 애기

약장수 기타소리에 발장단을 치다보면

왜 이렇게 자꾸만 서울이 그리워지나

어디를 들어가 섰다라도 벌일까

주머니를 털어 색싯집에라도 갈까

―「罷場」부분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모두들 한결같이 친구 같은 얼굴들”이며 “가뭄 얘기 조합빚 얘기” 그리고 기타소리에 발장단을 쳐 보지만 결국 화자는 지금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 깊이 몰입하지 못하고, 회귀(서울, 중앙)의 욕망에 대한 강한 지향성만을 드러낸다. 기타소리(음악)는 몰입의 최적의 환경이지만, 오히려 화자의 회귀의 욕망을 자극하는 역할을 한다. 이는 음악이 갖는 특징인 기억의 재생이 화자의 정서와 어느 지점에서 상호 충돌 교호 작용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서울을 떠나 왔지만 서울스럽거나 서울과 관계된 이미지는 화자가 살고 있는 공간이 세상이라면 도처에 존재하는 것들이다. 이러한 이미지는 연상작용에 의해 자극이 확대되기 때문에 낙향과 탈속을 아무리 반복해도 피할 수 없는 근본적인 문제들이다. 서울과 물리적 거리의 상거가 화자의 회귀에 대한 욕망 자체를 소멸시켜 주지는 않는다.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

오동나무에 전등이 매어달린 가설무대

구경꾼이 돌아가고 난 텅 빈 운동장

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

학교 앞 소줏집에 몰려 술을 마신다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

꽝과리를 앞장세워 장거리로 나서면

따라붙어 악을 쓰는 건 쪼무래기들뿐

처녀애들은 기름집 담벽에 붙어서서

철없이 킬킬대는구나

보름달은 밝아 어떤 녀석은

서림이처럼 해해대지만 이까짓

산구석에 처박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

(중략)

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

한 다리를 들고 날나리를 불거나

고갯짓을 하고 어깨를 흔들거나

―「農舞」부분

 

화자와 못난이들이 추는 농무는 그들만이 ‘몸짓’이다. 뚜렷한 이념과 벼리를 바탕으로 정제된 의지가 아니라, 그들의 일그러진 현재의 삶을 더욱 초라하게 만드는 자학적인 자기 부정의 몸짓이다. 따라서 그들이 추는 농무가 기형적 형태를 띠면 띨수록 자학적인 분노는 고조되어 간다. 꽹과리를 앞장세워 장거리로 나와도 따라붙는 건 조무래기와 처녀애들뿐 선뜻 농무에 동참하는 무리들이 없다. 처녀들의 철없이 “킬킬”대는 모습에서 화자와 못난이들의 농무가 주는 자학적이고 절실한 급박성이 급속히 이완되며, 정서적 호응이 힘없이 교차된다. “산구석에 처박혀 발버등친들 무엇하랴”의 화자의 외침은 농무가 결국 주변과 호응을 이루지 못하고 그들만의 못난이 ‘짓’으로 보일 수밖에 없는 현실에 대한 절규이다.

「失明」에서도 화자의 자학적인 몸짓은 아내를 끌어내어 곱사춤을 시키는 우악스러움에서 강도를 더한다. “미치기 시작했다”는 화자의 말은 그들의 자기부정의 행태가 극단에 와 있음을 보여준다. 화자의 이런 행위는 “먼 도회로 떠”나고 싶기 때문에 벌이는 행기이며, “꿈꾸웠다”는 말 속에서 화자의 회귀에 대한 욕망이 언제나 실현되지 못하고 자학적 형태의 행기만을 반복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영락한 공간에서 삶의 정체는 그들 자신의 존재를 망각할 수 있는 소멸을 의미하는 데, 행기의 몸짓은 현실을 환기하며 견인하는 그들만의 독특한 생존 방식인 셈이다.

화자의 회귀의 꿈은 인간에 대한 보다 깊은 성찰을 바탕으로 공동체의 ‘인정주의’로 바뀌게 된다. 이 변화는 신경림의 개인적 경험 등에 비추어 보아도 주목할 만한 것이다. 영락한 삶에서 초기에 당연히 가질 수밖에 없었던 세상(중앙)에 대한 분노는 그곳으로의 회귀를 강하게 열망하는 것으로 나타났지만, 이후 그가 떠돌며 경험한 삶의 진실 즉 민중의 저력과 인간애는 회귀의 공간이 특정한 곳이 아니라 인정주의가 보존되는 공간으로 확대하는 계기가 된다. 특정한 물리적 공간인 서울(중앙)이 좋다면 “서울을 얘기하고 그/더러운 허영과 부정”(「피지」)을 얘기하지 않았을 것이고 “처서가 오기 전에 어디 공사장을 찾아/이 지겨운 서울을 뜨자고 별”(「處暑記」)르지 않았을 것이며, “허물어진 외양간에/그의 탄식이 스며 있다/힘없는 뉘우침이//부서진 장독대에/그의 아내의 눈물이/고여 있다 가난과/저주의 넋두리”(「서울로 가는 길」)라며 이향에 대한 분노를 앞세우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발 최씨는 그래도 서울이 좋단다/자루에 기계 하나만 넣고 나가면/봉지쌀에 꽃이 한 마리를 들고 오는 /그 질척거리는 저녁 골목이 좋단다//허구헌 날 우리는 너무 심심하고 답답했지만/최씨는 이 가파른 산동네가 좋”(「골목」)은 것은 외면적으론 이발소 최씨가 서울 생활의 만족과 행복을 얘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신경림의 변화된 회귀의 욕망에 견주어 보면 이발소 최씨가 서울이기 때문에 서울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는 공동체적인 삶의 인정주의가 훼손되지 않고 통용되는 곳이기 때문에 서울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서울이 특정한 공간으로서 당초에 화자가 회귀를 강하게 욕망했던 공간이 아니라, 가난하지만 사람 냄새가 나며 보편적 인정주의가 소통되는 곳이면 서울이 되는 것이다.

 

5. 나가며

 

아직도 현장의 시인으로 자강불식하는 시인을 일정한 틀로 규정하는 것은 전형적인 문학 편의주의의 발상으로 마땅히 경계해야 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農舞』에서 『낙타』까지 신경림의 시 세계는 이 땅에 살았으나 주목받지 못한 야사적 삶에 바치는 신경림 개인의 헌사이며, 진혼곡이란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다. 이로 인해 한국 현대시가 풍성해졌음은 물론이다. 그가 걸어 온 시의 일관성을 놓고 볼 때 시업의 황혼기를 맞은 노시인의 앞으로의 관심도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그는 공간에 대한 남다른 관심을 보여왔다. 신경림 시에서 공간은 다른 공간과 비교 대상이 아닌 그 공간 자체로 자율적인 생명력을 가진 자생적 공동체로서 역할을 담당하는 곳이다. 그 공간에 대한 믿음이 곧 소외되고 버림받은 민중의 역사와 현실에 대한 애정으로 확대되었다. 중앙에 대한 시골, 중심에 대한 변방이 아니라 시골과 변방 자체가 삶의 주체와 중심이라는 것을 보여 주었다. 『農舞』의 ‘공동체의 인정주의’가 다다른 지점이 바로 그러한 인식의 결과이며, 『길』, 『가난한 사랑노래』,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쓰러진 자의 꿈』, 『南漢江』, 등의 기행시편에서 공간에 대한 애정이 절정을 이룬다. 각자가 처해 있는 삶의 자리가 세계의 중심이라는 존엄성은 어떠한 외적 억압에서도 자성체가 되지 않고 삶과 세계를 지탱할 수 있는 주체적인 힘이 된다는 점에서 신경림의 초기시집 『農舞』가 갖는 의미가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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