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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우스의 선물-5[박찬현]
2009-01-18 17:4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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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찬현 시인
△《문예사조》시 등단
△한국문인협회, 한국펜클럽한국본부, 서대문·은평문인협회 회원
△대전 백지동인. 청다한민족협회 간사
△시집『먼나라』, 『종이강』
△지방문화재 노씨문중 의병 영정, 천주섭리수녀원 성화 제작. 불우이웃돕기 갤러리 30점 기증. 와우갤러리 작품 등재
조회:1486
추천:94

*

희뿌연 우유 빛 새벽이면 수진은 유년의 시네라마들이 펄럭이며 깃발처럼 넘실거리고 현실을 시위하듯 수진의 과거가 조소를 뛰며 성큼 다가선다.

 

아주 오랜 나이를 먹은 앵두나무가 드리워진 두레박 우물가를 지나 ‘ㄱ’자 안채를 지나 그 담벼락을 끼고 돌면 아름드리 호두나무와 대추나무들이 줄지어 선 한가한 뒤뜰에 호젓한 별채 하나 허허로운 햇볕을 살랑이며 이고 있는 곳, 거기엔 언제나 고요함이 흐르고 있었다. 여름 모시옷을 풀을 먹여 조물조물 지르잡아 정갈한 모양새를 다듬어 낸 단아한 여인네처럼 언제나 그 자리에 그림자처럼 머물러 있는 방, 창호지 바른 격자문살 여닫이 문 아래 댓돌 위, 오랜 시간 주인을 기다려 온 운동화 한 켤레가 우둔하게 고요를 베고 잠들었다. 단지 인간의 호흡이 그 방안을 지키고 있음을 알려 줄 뿐,

 

수진은 안채의 외곽에 지어진 작은 쪽대문 앞 수양버들이 심어진 아래채에서 그녀의 어머니와 살고 있다. 가끔 타지에서 사업상 일을 하고 귀가하는 그녀의 아버지는 안채에 관행적으로 들렀다가 다시 돌아서 나와 수양버들 쪽문을 들어서는 것은 수진이 어려서부터 늘 상 봐 온 생활이다. 수진의 어머니는 자그마한 체구에 항상 단정한 매무새를 잃지 않고 윤기 흐르는 동백기름으로 곱게 빗어 넘겨 쪽을 찐 모습과 화장기가 화사하게 도는 얼굴에는 언제나 엷은 미소를 입가에 베어 문 채 총총히 아버지를 맞아들이는 일이 행복에 겹다는 듯 그렇게 얼굴에 생글거림으로 새겨져 있었다. 그런 어머니를 바라보는 아버지의 모습은 과묵했지만 여유로움이 유유히 번졌다.

 

방년 16세인 수진은 양 갈래 머리를 촘촘히 땋고 하얀 세라 복의 신교육을 받고는 있지만 수진의 가슴 한켠에는 안채의 뒤뜰 고요함만이 흐르는 그 방이 들어 앉아 있었다. 그러나 쉽사리 맘 놓고 드나 들 수 없는 곳인지라 더욱이 답답해했고 알 수 없는 정 하나 커져만 갔다. 수진은 어머니의 심부름으로 안채를 드나들곤 하는데 그 안채의 여주인에게 칭하는 단어는 ‘마님’이라고 불렀다. 그 마님이란 언제나 암울하고 입을 도무지 열지 않으려는 듯 무겁게 닫은 채 오랜 세월 침묵으로 일관 해 왔었다. 온전히 씻어내지 못한 아픔과 세월에 누적 된 고통들이 녹아서 밀랍이 된 미이라가 움직이는 것 같기도 하지만 또 어느 한편으로는 모든 삶의 애착들에 관해서 체념을 한 채 살고 있음이 곳곳에서 베어 나와 흐르는 세월 속에 묻어나곤 했다.

한때는 수진의 어머니와 석연찮은 관계를 거북하게 부대끼며 살았었지만 어느 즈음에 마님은 아버지조차 귀찮은 인연으로 여기기 시작했었다. 수진의 어머니에게 그 인연을 떠넘기며 마음의 손을 털어 내는 듯 했다. 그리하여 그늘 깊은 우수아래 짙은 앙금들을 조금씩 정리하며 세월을 맞아들이는 가벼운 항아리가 되고 또 바람이 고픈 삶을 원했다.

 

일찌감치 학교 수업이 끝난 날, 수진은 하교 길 미리 그녀를 생각하며 챙겨서 산 생과자(센베) 봉투를 교복 블라우스 안에 감추어 안고 살그머니 안채를 향해 들어 갔다. 언제나 수진의 맘을 이끄는 그곳엔 알 수 없는 그리움 같은 것이 진하게 느껴져 왔다.봄 햇살을 하얀 너울처럼 쓴 수빈은 가늘디가늘고 핏기 없는 손가락으로 둥근 수틀을 안고서 자목련 화를 검은 공단 위에 한 뜸씩 피워 내고 있었다.

수빈은 그녀의 인기척에 열려진 문 쪽을 향해 얼굴을 들었다. 시선을 맞춘 그 얼굴에는 막 개화한 벚꽃 송이처럼 잔잔한 미소가 피었다. 그녀를 반기는 기색이 수진에겐 매우 행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수빈은 수진보다 네 살 위이지만 친 혈족으로서는 그 둘보다 더 가까운 이가 있을래야 있을 수 없는 자매이기에 반갑고 그립다.

수진은 그녀의 방문턱에 앉아서 불룩한 교복 아래로 숨겨 온 것을 수빈 앞에 꺼내 놓았다. 그녀는 “이게 뭐야?”라며 기쁜 호기심으로 물어 보았지만 수진은 그냥 웃기만 했다. 봉투를 열어 본 그녀는 수진을 바라보며 웃으며 사랑하는 동생이 이뻐서인지 과자를 수진의 손에도 쥐어 주었다. 특별한 말이 없어도 마냥 행복한 그녀들 그렇게 한참동안을 햇살을 받으며 만남의 해후를 만끽했다. 수빈의 검은 머리는 비단처럼 윤기가 흘렀고 촘촘히 양 갈래로 땋아 내린 그녀의 봉긋한 등 위의 척추 선에서 나뉘어져 흘러 내렸다. 그런 그녀의 모습이 수진은 늘 안타까움으로 자리했다. 다리뼈도 가늘어서 더 이상 성장을 멈추었고 앉아 있거나 아마도 누워 있는 자체마저도 아퍼 보였다. 그래서 수빈은 뒤채에서 세월을 엮어가야 하는 운명이 되었고 또한 세상 구경조차 해 본 경험이 없음이다. 뒤채를 빠져 나오다가 수진은 안채를 향해 바라보았다. 마님의 우수 짙은 그늘이 늘 얼굴에서 묵직한 고통과 편치 않은 세월이 인고로 삭혀진 앙금들이 녹아 있어 보였다. 그렇게 한참동안을 물끄러미 그곳을 바라보다가 쪽대문께로 발을 놓았다. 수진이 기거하는 곳에는 안채 사정과 전혀 무관한 듯 자리를 틀고 앉아 있음이다.

 

안채 큰 마님은 그 우울한 어둠을 거두어 보노라면, 그분 역시 예전에는 고왔을 흔적이 세월 아래 뉘여 져 있고 그분 특유의 고요함 아래는 부드럽고 우아한 자태가 베어 있다. 비록 아버지 보다는 네 살 위이지만 그 근심 섞인 세월이 없었다면 십년은 거뜬히 아름다운 여인으로서 살았을 것으로 보여 졌다. 일찍이 가문의 규율에 따라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아버지인 신랑의 얼굴 한번 보지 않은 채 어른들의 형평성 논리인 가문이란 잣대로 혼례를 치루게 되었고, 대가 댁 맏며느리로써 종가의 대소사일이며 집안의 살림을 소홀 함 없이 이끌어 나가는 그 직분에 다한 삶이였지만 불행히도 대를 이을 자손을 생산하지 못해서 칠거지악에 치부되어 죄인 아닌 죄인이 되어 살아왔다. 반면, 수진의 아버지는 일본으로 건너가 신교육을 받았고 그 시절 수진의 어머니와 한눈에 정을 빼앗길 정도로 둘 사이는 갈라 설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으며, 결국 귀국을 해서는 사랑채로 쓰던 곳을 수진 어머니가 기거하게 되었다. 남아선호 사상에다가 가부장제도가 깔린 사회구조 속인지라 수진의 어머니가 비록 신교육을 받았다 할지라도 그 시대로서는 자유분방하고 파격적 개념을 고수한 그녀의 어머니였었다. 결국 신분이 하락 된 후실의 자리이건만 그녀의 어머니는 그런 조건을 마다하지 않았음은 수빈의 아버지를 끔찍이 사랑한다는 것이지만, 큰 마님으로서는 생에서 두 번째 맞이하는 절망이였고 또한 모멸감과 배신의 아픔이 삶을 통째로 헝클어 놓은 것이다. 대가댁 종부의 위치에 있고 보니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절망과 분노를 분출 할 수도 없어서 조각난 인생의 편린을 끌어안고 회색 발을 문전에 내렸다. 이미 우뢰와 소나기가 쏟아지고 있는 마당이니 그 혹한을 안채에서 피하고 살기를 원했다. 먹구름인 운명과 숙명이 함께 쏟아지는 그 하늘 아래 나설 필요가 없음을 인지 한 것이다. 수진의 어머니 역시 아들을 생산하지 못하였어도 눈총을 주거나 간섭 할 윗 어른들이 세상에서 자리를 뜬지 오래인지라 대를 이어야 한다는 명분을 던 셈이다. 그 중대한 임무에서 한켠으로 벗어난 수진의 어머니는 대신 수진의 신교육에 열의를 쏟았다. 안채와 아래채의 숙명은 그렇게 상반되어 있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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