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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감쟁이(소설)
2009-01-05 16:48:29
예외석

조회:1788
추천:99
첨부파일 :  1233580445-97.hwp

 영감쟁이

예외석

오늘은 논에 못자리를 옮기는 날이다. 김 영감은 일찍 일어나보니 날씨는 너무 좋은데 괜히 짜증이 난다. 날씨가 좋으면 기분이 좋아야 하는데 왜 짜증이 날까. 그 좋아하는 등산을 못가서다. 김 영감은 건강을 생각해서 산에 다닌 지 벌써 십 년째다. 그렇지만 연례행사로 이맘때면 부지런히 몸을 움직여주어야 한다. 그래야만 여름동안 벼가 익고 가을에는 누렇게 익는 황금들판을 여유 있게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늘 농사일에 매달릴 수는 없고 주말에만 시골에 가서 도와주는 형편이지만, 그래도 얼치기 반풍수 농사꾼이 다 되가는 것 같다. 좀 있으면 감 밭에 가서 약도 쳐야한다. 덥기는 덥고 어떡할까 망설여진다. 그래도 하루 온종일 콘크리트 사무실 안에서 답답하게 갇혀 있을 때 보다는 훨씬 낫다.    

김 영감은 아침에 출근해서 부동산사무실에 들어서면 풍기는 콘크리트 건물 특유의 그 매캐한 냄새가 싫었다. 거기다 건축 내장재에서 풍기는 야릇한 냄새는 더 사람을 질리게 만든다. 김 영감이 예전에 직장생활 할 때 현장에서 맡던 기름 냄새도 질리게 하기는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그 냄새가 그리웠다. 사람의 냄새는 더욱 그립다.

사람 사는 세상에는 어딜 가나 층계가 있다. 하다못해 세상이 싫어 속세를 떠나 수도하는 절간에도 층계가 있다. 직장이나 단체는 말할 것도 없다. 물론 조직에서는 질서유지를 위해 일정한 규칙과 상하간의 예절은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에 너무 과도한 경쟁의식이 생기면 정(情)이란 게 없어진다. 김 영감은 직장생활에서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경쟁의식으로 시기와 모함을 하는 행태에 환멸을 느꼈다. 그래서 일찌감치 자영업으로 돌아섰지만 여기서도 경쟁은 만만찮았다. 오히려 직장생활보다 더 피를 말리는 날들이 많았다. 

김 영감은 이승과 저승을 구분하기 이전에 천국과 지옥이 있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이 어쩌면 아비지옥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모든 것이 마음먹기 달렸고 생각하기 나름이겠지만, 현실에서는 사람들 간에 경쟁으로 인한 시샘과 다툼이 끊이질 않는다. 살아남기 위해서 남을 해코지 하는 경우도 보게 된다. 김 영감은 그런 경우가 너무나도 싫다. 그래서인지 조금 바보처럼 손해 보면서 살려고 한다.


김 영감은 요즘 몸과 마음이 좀 복잡한 일이 생겼다. 거래를 성사시켜 준 고객이 부도가 나서 자살을 해버린 것이다. 그래서 그 뒷수습을 해 주느라 별 소득도 없이 뛰어다니다 많이 지쳐버렸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마산시에서 봉암동 수원지에 세워놓은 일본인 공적비를 철거하는 항의시위에 가담하느라 한동안 분주한 날들을 보냈었다. 이럴 때는 휴식을 취해야만 했다. 대자연의 공기를 마음껏 마시고 나면 머리가 맑아진다. 그래서 지난 10년간 주말이면 어김없이 함께 산에 다닌 친구 정희 영감에게 전화를 해본다.

“뭐하노? 시간 맹글어서 산에나 가자. 막걸리나 한자 하구로. 내 요즘 황 사장 때문에 미치겄다 고마. 딱 돌아뿌겄다. 글마 그거 죽었다 아이가. 머리나 좀 식히고 와야겄다.”

김 영감은 산에 올라갈 때 막걸리는 꼭 챙겨간다. 산에 가면 언제나 즐기는 시간이 있다. 천천히 한걸음씩 정상을 향해 발을 옮기다보면 어느새 옷이 땀으로 흥건히  젖었다. 얼굴에서는 빗물처럼 줄줄 흐른다. 그래도 산에 오르며 이런 저런 생각의 고리들을 하나씩 떨쳐버리게 되니 마음은 편안하다. 정상에 올라가서 가장 바람이 잘 불고 탁 트인 장소를 골라 엉덩이를 붙였다.

숨을 가다듬고 배낭속의 막걸리를 꺼내 한잔 천천히 털어 넣었다. “꿀떡꿀떡” 목울대의 막걸리 넘어가는 소리를 음미하면서 시원하게 ‘크윽’ 트림을 뱉어냈다. 멀리 바다를 쳐다보니 ‘으아’ 소리가 절로 나온다. 김 영감은 그 짧은 찰나의 순간 10초가 가장 즐겁다. 무아지경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만하다. 그 황홀한 순간을 음미하고 천천히 여유를 즐겼다. 대화가 통하는 정희 영감이 있으니 세상사의 묵은 찌꺼기는 쓰레기처럼 다 털어버릴 수가 있었다.         

이번 주말은 그 좋은 산행을 못하고 논에다 못자리 옮기는 작업을 했다. 그리고 아내와 텃밭에서 푸성귀를 뜯으며 오랜만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논두렁에 쪼그려 앉아 돌미나리를 뜯고 있노라면 그 향긋한 내음에 몸과 마음이 다 씻기는 것 같다. 수박을 심어놓은 비닐하우스 안에 따로 키우는 상추와 깻잎을 먹을 만큼 넉넉하게 뜯고 마늘밭에서 마늘종을 뽑았다.

마늘종, 이놈들은 참 예쁘기도 하지만 고약스럽기도 하다. 못되고 되바라진 것이 뽑아주지 않으면 나중에 마늘이 잘 자라지 못하게 된다. 그놈을 잡고서 쑤욱 뽑아 올리다 보면 어떤 것은 아주 기분 좋게 잘 올라온다. 어떤 놈은 빠지지 않으려고 몸부림을 치다가 뚝 끊어지고 만다. 살살 달래가면서 힘 조절을 해야 끝까지 올라와서 ‘뽁’ 하는 소리를 내며 뽑힌다.

“이거 뭐 이래? 이것도 마누라처럼 살풀이 해줘야하나? 허 그것 참.”

마늘종을  잡아 당기다보면 예전에 동네 공터에서 푸닥거리 하던 약장사가 생각났다. 그 시절에는 아이들이 횟배라고 하는 배앓이를 많이 했었다. 배 안에 회충이 많았다는 뜻이다. 약장사가 한 아이를 불러내어 선물 하나를 주면서 회충약을 먹인다. 조금 후에 아랫배가 살살 이상해지면 약장사가 그 아이의 바지춤을 내리고 구경꾼들에게 보여준다. 뭔가 구물구물 기어 나왔다. 꼭 굵은 지렁이처럼 생긴 것이 색깔은 희멀건 했다. 그놈을 약장사가 손으로 잡고 쭉 잡아 당겼다. 김 영감은 마늘종을 뽑다가 왜 갑자기 그 생각이 나는 건지 한참을 비식비식 웃었다.

“혼자서 와 실실 쪼개는교? 날아가는 참새 불알을 봤나 저 양반이. 와 카는교?”아내가 도끼눈을 하고 쳐다본다.

“아이다. 이기 생긴 게 꼭 뭐같이 생겼다 아이가. 살살 쓰다듬어줘야 뽑히는 게 당신 닮았다 아이가.”

“뭐라꼬요. 저 양반이 뭘 잘못 묵었나.”

손에 흙을 묻히고 일을 하다보니 평소보다 식욕이 빨리 당겼다. 논일을 끝내고 마늘종을 뽑다보니 그 향긋하고 알싸한 냄새에 침이 고인다. 하나를 입안에 넣고 끼적끼적 씹어보니 보약이 따로 없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점심상에 막걸리를 한잔 따라 마시고 푸성귀와 함께 마늘종을 하나 된장에 쿡 찍어 입에 넣었다. 신선이 따로 없는 것 같다.

“아이고, 나 같은 얼치기 주말농사꾼 말고 진짜 농사를 생업으로 하는 농민들에게는 참말로 미안한기라.”

요즘 농민들이 한미 FTA다 수입소고기다 뭐다해서 점점 어려운 상황으로 내 몰리고 있다. 김 영감의 가까운 친척들도 농사를 짓는 분들이 많이 있었다. 이제는 지쳐서인지 농사를 그만 두겠다고 하는 분들도 있다. 등 따습고 배부른 소리 하다가도 언제나 현실로 돌아오면 세상에는 고통스러운 일들이 많다.

김 영감은 하루 온종일 콘크리트 더미 안에서 서류나 컴퓨터와 씨름하며 고객들을 상대하고 나면 머리가 멍멍해지지만 주말이면 찾아 갈 고향이 있고 자연이 있어서 좋았다. 생활 중에 이런 저런 고충이 있지만, 주말만 되면 씻은 듯이 날아가 버린다. 숨쉴 수 있는 대자연이 있기 때문이다. 뒤늦게 하고 싶은 것이 참 많지만 현실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기만 할뿐 돌파구가 나오지 않을 때는 대자연을 벗 삼아 막걸리 한잔으로 풀어버린다. 오늘도 텃밭에서 푸성귀를 뜯는 심정으로 하루를 보내고 미나리 향기를 떠올리며 마음을 다스린다.   






*


팔용부동산 사무실에는 아침부터 동네 영감들이 들이닥쳐 커피부터 주문해대기 시작한다. 옆 건물 슈퍼마켓 주인인 장씨는 조간신문을 펼치며 씨부렁대기 시작했다.

“이기 무신 나라고? 응이? 나라 꼬라지가 와 이리 개판이고 말이다. 아무리 나라가 힘이 없어도 이리 당하고만 있을끼가 말이다.”

“맞다. 장가 니말이 맞다. 원자폭탄이라도 하나 있었으면 강대국들한테 이 꼴을 당하겠나?”세탁소 염씨도 같이 거들며 침을 튀기고 흥분한다.       

한동안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문제로 학계와 정치권이 술렁이더니 그것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슬그머니 꼬리를 내리고 말았다. 한 언론사에서 그것을 꼬집는 사설이 나오자 슈퍼주인 장씨가 제일먼저 발견하고 말을 꺼냈기 때문이다. 그 고구려사 왜곡문제를 한번 살펴보면 고구려는 한민족의 조상인 예맥족이 세운 나라라는 것이 지금까지의 정설로 내려왔다고 한다.

중국학자들은 예맥족과 한민족의 연관성을 없애기 위해 "예맥족은 중국 소수 민족 중 하나인 "상인"의 후손"이라는 가설을 만들었다. 중국의 의도대로 예맥족이 중국 소수 민족 중 하나로 전락하게 되면 고구려 왕조 역시 독립왕조가 아닌 중원왕조와 종속관계를 갖는 중국 지방 정권 정도로 추락하게 되고, 한국사와의 연관성이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광개토대왕과 연개소문이 중원대륙을 호령하며 끝없이 펼쳐진 만주벌판을 누비던 자랑찬 우리역사를 중국의 속국으로 전락시키려고 엄청난 거금을 들여서 아시아의 역사마저도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는 미묘한 외교 관계만을 내세우며 적극적인 대응을 하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때마다 일본에서마저 집요하게 한반도가 자신들의 신민지 국가였음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며 독도를 자기들의 영토라고 도발을 걸어오고 있는 것이다.

“고구려와 일본의 역사왜곡만 해도 부끄럽기 짝이 없고 후세들에게 자랑찬 역사를 물려주어야 할 우리의 책무가 막중하고 무겁다 아이가. 일부 언론이나 학자들이 검증된 역사마저 이상하게 비틀어 꽈배기처럼 만들려 한다면 당연히 우리 세대에서 바로 잡아 가는 것이 마땅하고 옳은 일일 것이야.”

직장 다닐 때 노조위원장 출신이었던 통닭집 배씨가 걸쭉한 톤으로 일갈했다. 

“내가 말이야 지난주에 팔용산에 한번 올라갔다가 수원지 쪽으로 내려오는데 길목에 요상한 푯돌이 하나 있더란 말이야. 그기 머신고 싶어서 한번 봤더니 캬아, 참말로 때리 쥑일 놈들이데. 어떤 놈들이 거기다가 일본 놈 공적비를 떡 하니 세워 놓았더라꼬. 망할 놈의 자슥들.”   

마산 시내의 24개 장소에 ‘역사표지석’ 이라는 것이 세워졌다고 한다. 그것은 마산의 역사적 의미와 그 역사물을 내외에 널리 알리고 아울러 침체된 지역사회를 부흥하기 위해 시도된 사업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그 사업이 추구 하고자 하는 의미는 충분히 이해할 만한 것이었으나 그 방법론에서 너무 쉽게 접근하지 않았나 하는 의문과 그 대상물이 너무 문화유산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에 시민들이 의문을 가지게 된 것이다. 물론, 그 사업을 담당했던 마산시와 용역을 받아 사업을 수행하였던 단체에서 본질적인 의미가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에서 언론을 통하여 몇 차례 논박을 하였으나 아직은 그 결론이 나지 않고 있는 상태였다

먼저 문제제기를 한 시민단체 회원들이 지난주에 함께 모여 최근에 문제가 되고 있는 마산 팔용산 봉암수원지 일대와 일제시대 헌병대 자리, 그리고 근대금융의 효시라고 하는 현재의 성당건물, 경남대학교 북한대학원과 인근 놀이터 자리를 답사하게 되었다. 그 일행 중에 통닭집 배씨와 부동산을 하고 있는 김 영감이 있었던 것이다.

장씨는 노조를 그만 둔 뒤 회사의 집요한 압력으로 보직을 3개월에서 6개월  단위로 계속 바꾸는 수모를 겪었었다. 배씨 후임으로 선출된 노조위원장과 집행간부들의 성향이 소위 말하는 어용이어서 배씨를 보호해주지도 않았던 것이다. 결국 명퇴를 하고 나와 통닭집을 하게 된 것이다. 통닭집을 하고 있으면서도 시민단체에 가입해서 수시로 마산시청이나 지역집회 때 앞장서서 활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그런 배씨를 보며 아내는 수시로 신경질을 냈다.

“저 화상 쳐다 보머 내가 자다가도 울화통이 치미는 기라. 하이고, 지가 머시라꼬 남들 잘 댕기는 회사를 노조 한다꼬 앞장서서 까불어 대더마는 짤리고 꼬라지 좋다. 내가 미친다 미쳐 고마.”

“시끄럽다 고마.”

배씨는 늘 듣는 소리지만 들을 때마다 부아가 치밀어 한 소리 꽥 하고 내지른다.    

“하이고, 꼴에 남자라꼬 방구뀌는 소리 하기는. 그래도 자존심은 있는 갑네.”

“어허이, 시끄럽다 케도 고마. 입 안 다무나?”

표지석이 세워진 다섯 군데의 장소를 답사해 본 결과 최초 문제가 된 봉암수원지에는 벌써 오래 전에 마산시장 명의로 된 상세한 역사해설 표지석이 정교하게 박혀져 있었다. 새삼스럽게 거액의 돈을 들여서 표지석을 세울 필요가 없었음을 재차 확인 한 것이다. 그리고 근대문화유산으로 충분한 자격을 갖추었다고 하는 구 헌병대 자리는 붉은 벽돌 건물로 일제식민지 시대의 잔재로서 군부독재 시절 악명 높았던 삼일공사가 있던 곳이었다. 문화유산이라고 선정하기에는 시민들의 정서에 너무나 반하는 곳으로 선정한 과정을 의심스럽게 하기에 충분한 곳이었다.

더욱이 현재 경남대학교 북한대학원이 있는 건물과 그 옆의 마을공원은 당시의 흔적이나 시설물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곳으로서 지금 굳이 일제시대 때 무슨 장소가 있었던 곳이었다고 자랑삼아 표지석을 세울 필요가 전혀 없는 장소임을 다시 한번 눈으로 확인하였다.

김 영감은 “문화유산이라고 하기 보다는 오히려 일본인들이 향수를 느끼기에 좋은 곳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문화유산이라는 것은 뒷날에 계승·상속될 만한 가치를 지닌 전날의 문화적 소산, 정신적·물질적 각종 문화재나 문화양식 따위를 일컫는 말이다. 그러므로 문화유산이라는 것은 후손들이 자손만대에 걸쳐 역사적 교훈을 배울 수 있고 그 문화적 가치를 사회의 여러 분야와 각계각층에서 소중한 자료로 인정해 주어야만 그 값어치가 더욱 빛나게 되는 것이다.

마산이 문화유산의 불모지라는 이유로 문화유산이라고 할 수도 없는 구 헌병대와 같은 장소에 억지로 역사적 가치를 부여하여 표지석을 세우는 행위는 오히려 봄이 되면 한국을 찾아올 수많은 외국인 관광객 특히, 일본인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눈요기 거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자신의 조상들이 한반도를 식민지로 다스렸음을 눈으로 확인하고 얼마나 흐뭇하고 자랑스럽게 생각 하겠는가. 이런 걸 두고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무지의 소치라고도 표현을 하는 것이다. 

그 비석에는 “이 수원지는 1928년 11월에 일본인 혼다 쓰지코로우가 건설 하였다. 이 수원지는 근대 마산 일원의 생활용수 및 공업용수를 공급해오다 1984년 12월31일 폐쇄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마산 시민들 중에 그 수원지가 일제시대 때 만들어진 것은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수원지 근처에 가보면 조그만 옛날 기록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이 오고 가는 길목에다 혈세를 낭비하면서까지 일본인들이 마산의 근대화에 크나큰 기여를 한 것처럼 과대 포장하여 자랑을 하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일까 의심이 들었다.

김 영감은 역사학을 전공한 사람도 아니지만, 살아가는 과정 중에 알게 된 것은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역사교육이 그 동안 잘못된 지식인들의 장난에 의하여 얼마나 뒤틀어지고 왜곡되었는지를 똑똑히 알게 되었다. 우리 사회에는 지금 잘못된 역사교육을 부끄러워하거나 반성하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을 지적하고 바로 잡으려는 사람들을 매장시키려는 이상한 풍토가 조성 되는 것을 보고 참으로 걱정이 앞섰다.

그 비석을 보면서 김 영감은 갑자기 작년 가을에 강원도 봉평에 있는 이효석 기념관에 단체관광을 갔던 생각이 떠오르면서 심한 부끄러움과 함께 역겨움이 들었다. 이효석 기념관에는 개인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단체관람코스로 지정이 되어 있어서 속된 말로 “천지도 모르고” 남 따라 장에 가듯이 가 보았는데 그야말로 천지도 모르고 기념관에 써 있는 내용들을 그대로 믿었었다. 이효석이 일제시대 때 저항 작가였고, 대부분의 작가들이 살기위해 일제에 투항하였는데 이효석은 자신의 신념과 철학을 지키고 일제에 협력하지 않은 사람으로 묘사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오래 전에 읽어 보았던 책 내용이 떠올라 기억을 더듬어 보니 이효석 기념관에 전시된 내용들이 너무나 잘못된 것임을 알고 일순간 현혹되어 이효석을 대단한 저항 작가로 생각했던 자신이 한심스럽게 느껴졌었다.

이효석은 일제식민지 그 혹독했던 시절에도 겨울이 오면 크리스마스트리를 만들고 눈이 오면 스키 탈 생각을 하였던 사람이다. 민중들은 추위와 굶주림에 신음할 때 따뜻한 난로 옆에서 온갖 호사를 누리며 오로지 글만 쓰고 “나도 한창 푸르디푸른 잔디 필드에 나가 골프를 치고 여름에는 시원한 바다에 가 요트를 타볼까” 하는 고민을 하던 사람이다. 한마디로 부르주아 지식인에 불과했던 사람을 우리는 학교 다닐 때부터 일제에 저항했던 아름다운 사람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마산시 봉암동 수원지도 마찬가지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일제 시대 때 일본인들이 조선에 철도와 다리를 놓고 댐을 만들어 조선인들이 그것을 일부 이용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와 같은 일을 벌인 이유를 분명히 알지 못하게 우리는 역사교육을 배울 때 일본인들이 무지한 조선인들을 개화시키고 근대화에 기여한 공로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고 듣고 자라왔다.

그것은 일본이 대동아공영의 기치를 내걸고 중국대륙까지 진출하여 아시아를 호령하려는 제국주의 야욕으로 한반도를 병참 기지화 하였던 것에 불과하였다. 지금 미국이 이라크에 주둔하면서 도로 건설하고 다리 놓는 것도 미국의 필요에 의한 행위일 뿐이다. 그것을 이라크 백성들을 위한 것인 양 포장하여 홍보하는 것이나 일본의 조선 근대화론이나 뭐가 다를 것인가.   

당시에 모든 정보가 차단된 상태에서 해방이 그토록 빨리 오리라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당시 일본에 협력했던 사람들은 일본이 한반도를 천 년 만 년 지배할 것으로 생각하고 그것에 순응하는 길이 최선으로 알고 있었을 것이다. 물론 그런 조상들을 탓 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그때에는 그것만이 전부로 알 만큼 참혹하고 다급했던 시절이었기에 벼룩이 간만큼은 이해할 만도 하다.

하지만, 이제는 적어도 스스로가 과거의 부끄러웠던 기억들과 잘못된 것은 잘못된 것으로 인정하고 털면서 갈만큼 사회가 성숙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반복되게 거짓된 정보를 흘리면서 왜곡된 역사의식을 국민들에게 심으려는 자들이 있기에 분노를 금할 수가 없다. 그것도 학식과 권위를 겸비한 자들이 더 몸이 달아올라서 난리를 치니 참으로 가관인 것이다.

권위와 자존심은 좀 별개로 생각할 수는 없을까. 자신들의 논리에 오류가 있었음을 인정하게 되면 그 동안 지켜오던 학계의 권위와 자존심이 일순간에 뭉개져서 두려운 나머지 왜곡된 진실을 계속 반복 재생산 하려는 것일까. 근대화라는 것은 일제의 한국 지배를 미화한 것에 불과한데 아직도 그러한 허구의 논리를 써먹는 학자들이 있다는 것이 동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부끄러움과 함께 심한 역겨움이 들었다.

모르면 무지해서 그렇다고 이해는 가지만, 공부를 할 만큼 한 지식인들이 그것도 학계에서 나름대로 권위를 인정받는다는 학자들의 입에서 그런 망언이 나오다니 이것은 도저히 용서 받을 수 없는 행위인 것이다. 또한 그 논리에 동조하는 사람들 중에는 나름대로 예전에 시민. 사회단체에서 활동했던 경력이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기에 더더욱 한심한 노릇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일본이 아니었다면 조선이 강대국들에 의해서 초토화가 되었을 것이다” 는 말과 “미국이 아니면 다 망하게 된 걸 살려준 게 누군데” 는 말이 같은 맥락이듯이 일본의 조선 근대화 기여론과 1980년 5월 광주에서 군인들이 민간인들에게 총을 쏜 것은 정당했다고 강변하던 사람이 다름 아님을 생각해본다. 이제 그 지겨운 자신들을 합리화하려는 거짓말 좀 안 할 수는 없겠는지 김 영감은 공연히 심사가 뒤틀렸다.






*


우리 일상생활에서 동서양을 막론하고 가장 은밀하고 아늑한 휴식공간을 찾으라면 화장실을 꼽을 수 있다. 그곳은 우리의 몸을 깨끗이 유지 관리할 수 있기도 하지만 혼자만의 사색공간이 되기도 한다.

김 영감이 하루 일과 중 화장실 사용 빈도가 높은 시간대는 주로 아침이다. 신문을 펼친 채 가만히 앉아 있으면 배설물이 저절로 쓰윽 삐져나왔다. 그런데 옆 칸을 들락거리는 사람들이 내는 소리의 종류도 참 가지각색이다. 저마다 방귀소리도 특이하고 몸부림을 치며 내 지르는 소리도 여러 가지다. 우선 양변기에 앉으면 방귀소리가 대포처럼 ‘뿌웅’하고 우렁찬 사람도 있다. 그 소리의 주인공은 통닭집 배씨였다. 그런가하면 ‘부르륵’하는 오토바이 엔진소리도 있고‘쭈르륵 쭉’하는 배탈이 난 것 같은 소리도 있다. 그 소리는 평소 장이 좋지 않아 고생하는 세탁소 염씨의 화장실 소리다.

장이 튼튼한 김 영감은 괄약근을 힘들여 조절하지 않아도 아주 부드럽게 볼 일을 본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변비가 있는 사람은 고통스런 신음소리를 낸다.

“어헉... 허억... 끄응...”슈퍼 주인 장씨의 소리다.

김 영감은 우연히 귀에 들리는 소리였지만 참으로 안타깝고 자기가 괜히 답답해짐을 느꼈다.

“욕본다. 쯧쯧쯧.......”

김 영감은 아침에 볼일을 보다가 ‘화장실’이라는 화두가 떠올랐다. 아련한 어린시절 기억부터 더듬어보았다. 지금부터 30여 년 전에는 도시와 농촌 할 것 없이 대부분의 화장실이 푸세식(재래식)이었다. 나무로 얼기설기 만든 것과 시멘트로 만든 차이일 뿐 쪼그려 앉아서 일을 보는 형태는 똑 같았다.

도시에서는 주기적으로 마을을 돌며 돈을 받고 똥을 퍼는 위생차(일명 똥차)가 있었고 농촌에서는 군용 철모내피(화이버)에 긴 작대기를 묶어 ‘똥장군’이라 불리는 통에 퍼 담았던 기억이 난다. 그것을 지게에다 얹어서 밭에다 뿌리면 아주 훌륭한 거름이 되었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인분은 그 성분이 매우 독해서 작물을 잘 구분해서 뿌려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잎사귀들이 다 녹거나 말라서 낭패를 볼 때가 있다. 그래서 옛말에 “사람 똥은 개도 안 먹는다.”는 말이 나온 듯싶다.

화장실에서 나온 김 영감은 슈퍼마켓 앞을 지나다가 장가를 보고 손짓했다. “우리 사무실에 놀러오이라. 차 한잔 하구로”

“알었구메”

김 영감은 아침부터 장씨를 앉혀놓고 똥 이야기에 열을 올렸다. 똥에 관한 에피소드는 참 많다. 예전에 시골에는 거름이 귀해서 밭 옆에 구덩이를 파서 똥을 저장해 놓은 곳이 많았다. 오래되면 그 표면이 굳어서 자세히 보지 않으면 흙인지 똥인지 구분이 잘 되지 않는다. 멋모르고 발을 짚었다가 욕을 보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똥탕에 빠지면 오래 살라는 의미로 떡을 해서 이웃과 나눠먹던 기억도 났다.   

“행님,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아이요. 가정집을 제외하머 일반 공중화장실이나 학교 화장실에는 영락없이 지저분한 낙서자국이 있는 기라요. 그 중에서 제일 많은 것이 거시기 이바구하고 욕이데요. 간혹 남자나 여자의 신체를 그려놓은 것을 보면 한심하기도 하지만 우리가 어렸을 때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구나 생각하면 씁쓸한 웃음이 나오데요.”

장씨는 아침부터 똥 이야기에 열을 올리는 김 영감과 장단을 맞춰 화장실 이야기에 재미를 붙였다.

“어이 봐라 장가야, 얼마 전에 내가 테레비에서 베트남의 어느 마을에 있는 공중화장실을 보고 놀래 자빠진 적 있다 아이가. 길가 양쪽으로 길게 파놓은 구덩이에 온 동네 주민들이 어른 아 할 것 없이 나래비로 엉덩이를 까고 백주대낮에 노상에서 볼일을 보는 기라. 잠시 후에 누가 돼지 떼들을 몰고 오머 돼지들이 그 인분을 먹는 기라. 그걸 보고 예전에 한국에도 있었던 제주도 똥돼지 생각이 나데. 근데 벌건 대낮에 떼 지어가꼬 궁뎅이를 드러내놓고 똥을 누는 짓은 참말로 얄궂데. 글마들 희안한 놈들 인기라. 에이 더럽은 놈들”

“행님, 화장실 이야기가 나왔으이까네 내가 군대시절 겪었던 일을 한 가지 이바꾸 해 보끼요. 대한민국 남자라머 누구나 한번 갔다 와야 할 곳이 군대아인교. 특히 전방부대에서 근무한 사람들은 내가 하는 이바구에 공감하는 기 많을 깁니더.”

장씨 이야기에 따르면 군대화장실에는 ‘똥탑’이라는 것이 있었다. 전방부대의 혹한기에는 보통 영하 25도를 오르내리는데 겨울 내내 화장실 오물을 퍼내지 못하고 꽁꽁 얼린 채 내버려 두게 된다. 서너 달 인분이 쌓이면 그 위에 배설을 하고 밤새 얼어붙으면 그 위에 또 볼일을 봐서 층을 이루게 된다. 탑처럼 차곡차곡 쌓인 것을 이른바 ‘똥탑’이라고 불렀다. 더 이상 볼일을 보지 못할 정도로 탑이 쌓이면 작대기를 하나 장만해놓고 똥탑을 툭툭 쳐서 한 층을 제거한 후 거사(?)를 치른다. 그런 수고도 하지 않은 채 볼일을 보려면 엉덩이에 차갑고 불쾌한 것이 와 닿는다.

“아, 그때의 그 기분이란……으…….”

장씨는 몸까지 주르르 떨면서 실감나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오래 전에 김 영감은 직장산악회에서 단체로 경주남산을 간 적이 있었다. 마침 경주가 고향인 동료의 집에서 아침식사를 했었는데 그날 재수가 옴 붙었는지 아주 큰 낭패를 겪게 되었다. 아침밥을 맛있게 잘 먹고 화장실에 쪼그려 앉아 느긋하게 담배를 한대 물고 아랫배에 힘을 넣었다. 흐뭇한 웃음을 지으며 기분 좋게 일발 발사한 순간 아뿔싸, ‘철퍼덩’하는 소리와 동시에 오물이  튀어 엉덩이를 적시는 것이었다.

오매야, 이런 낭패가 어디 있는가…….

그곳은 위생차가 와서 변소를 비운지 며칠 되지 않은 물탕이었던 것이다. “아으, 우째 이런 일이”환장할 일이었다.

화장지와 신문을 있는 대로 동원해서 어찌어찌 응급처치는 했지만 그 고약한 냄새는 사라지지 않는 것이었다. 버스에 탑승해서 주변 동료들 눈치만 보고 있는데 결국 후각이 발달한 목소리 큰 녀석에게 얻어 걸리고 말았다. “흠흠, 우와 니, 방구 뀌었나? 어제 뭐 묵었노? 썩는다, 썩어”

아, 그 난감함이란. 그런데 그 녀석 1절만으로 끝내는 게 아니고 2절을 읊는 것이었다.

“이거, 이거 아무래도 수상타. 니 방구낀 게 아니고 혹시 바지에 똥 싼 거 아이가? 니 바른말 해라이”

그 순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던 동료들마저 눈빛이 달라지며 장단을 맞추는 것이었다.

“맞다. 이거 분명히 싼 거 같은데, 니 바른대로 말해라. 쌌제?”

김 영감은 결국 화장실에서 있었던 똥 폭탄 사건을 이실직고 하고 말았다. 그 사건 이후 지금도 쪼그려 앉아 일을 보는 푸세식 변소를 보면 공포를 느낀다. 그때 향수라도 좀 있었으면 그런 수모는 면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많이 들었다.

프랑스에서 향수가 발달된 것도 실은 몸에서 나는 변(똥) 냄새를 감추려고 향수를 많이 사용했기 때문이다. 프랑스 루이 14세가 호화롭게 베르사이유 궁전을 지었는데 그곳엔 화장실이 없었다고 한다. 그 많은 귀족들이 배설물을 처리할 때는 건물의 구석진 곳이나 정원의 풀숲 또는 나무 밑을 슬쩍 이용했다고 한다. 심지어 봉지 같은 데 볼일을 보고 창문 밖으로 던질 때도 많았다고 한다. 특히 그 시대 여성들의 치마가 통이 넓었던 이유도 아무 곳에서나 일을 치룰 수 있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를 보다 못한 궁전관리인이 정원에 출입금지 표지판을 세웠는데 그것을 ‘에티켓(etiquette)’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


김 영감과 배씨의 활약으로 마산지역을 뜨겁게 달군 화젯거리가  하나 있었다. 이른바 "역사표지석 사건"이 그것이다. 사건의 발단은 시민단체 등산반 회원들이 팔용산에 등산을 갔다가 우연히 발견한 수상한 빗돌 하나로 시작된 것이다.

발견 당시 불과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없었던 이 빗돌이 등산로 입구에 당당하게 버티고 있는 모양새를 보고 모두 깜짝 놀라고 말았다. 거기에 "이 수원지는 1928년  11월에 일본인 혼다 쓰치코로우가 건설하였다. 이 수원지는 근대 마산 일원의 생활용수 및 공업용수를 공급해오다 1984년 12월31일 폐쇄되었다"라고 새겨져 있었고, 아무리 보아도"일본인 공적비"라고 할 수 밖에 없는 그 새김글이 친일청산을 주 사업으로 하는 단체의 회원들에게 심한 거부반응을 일으키게 했던 것이다.

뒤늦게 경남대 박물관이 마산시로부터 학술용역을 받아 24개나 설치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중 몇 개의 표지석이 심각한 문제가 있음이 드러났다.  시민단체에서는 김 영감과 배씨를 주축으로 오히려 건전한 논쟁을 기대했고 이를 위해 학술용역 측과 마산시측에 역사표지석 바로 잡기를 위한 3자 협의를 제안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이성적이고 상식적인 논쟁이 아니라 예기치 못한 일련의 사건으로 비약해 버리고 말았다. 여기에는 모 언론의 악의적인 기사가 단단히 한몫을 했고 이를 시작으로 김 영감과 배씨 그리고 회원들은 계속해서 많은 상처를 입게 되었다.

어떤 형태로든 해결되어야 할 이 문제는 아직 제대로 해결되지 않은 채 물밑으로 가라앉아 있을 뿐, 언제 수면위로 떠올라 또다시 뜨거운 화젯거리가 될지는 아무도 짐작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 당시, 24개의 역사표지석 중 시민단체가 문제삼은 것은 모두 4개로 제일 처음 역사표지석 사건의 발단이 되었던 "마산 수원지" 역사표지석은 내용과 위치가 완전히 바뀐 채, 새로 세워져 있는 것을 최근에 확인했다.

두 번째로 문제가 되었던  신마산 월남 성당 앞에 세원 둔 "일본 제일은행 마산출장소 터"라는 표지석은 언제부터인지 슬그머니 사라지고 없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 표지석은 당시 시민단체로부터 "역사가 없는 역사표지석"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이곳은 1907년 마산에서 근대적 금융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일본 제일은행 마산출장소가 있던 자리이다"라는 새김글은 이 역사표지석을 세운 이들의 역사관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수준이었다.

참고로 제일은행은 개항이후 조선에 제일 먼저 진출한 은행으로서, 일제의 조선침략에 첨병역할을 담당한 곳이었다. 1905년(을사늑약) 일본인 재정고문에 의해 화폐개혁이 단행되었고, 신, 구화폐의 교환과정에서 우리나라는 많은 금융자산을 수탈당하여 심각한 금융공황에 시달려야만 했다. 이때 화폐개혁을 전담한 곳이 바로 일본 제일은행이었다.

이런 일제 수탈의 역사를 알고 표지석의 내용을 다시 읽어보면 "마산에서 근대적 금융의 효시"라는 표현은 마치 "마산 아구찜의 원조"라는 말처럼 매우 긍정적인 의미만을 담고 있어 이 역사표지석이 일제의 침략과 수탈의 역사를 감추고 미화한 듯한 느낌을 강하게 받을 수밖에 없었다.

김 영감은 학술용역 측과 마산시에 이 표지석을 철거하고 대신 바로 위에 위치한 제일여고교문  앞에 " 이 자리는 일제 신사 터" 라는 표지석을 세우자는 다른 의견을 제시했다. 그러나 당시 학술용역측은 내부에서 의논을 해보겠다는 대답이었고, 마산시 관계자는 난색을 표하며 내용만을 수정해서 다시 세우자는 안을 내 놓았다.

이후, 한차례 마산시 담당자가 김 영감의 사무실을 찾아와 똑 같은 안을 제시했으나 시민단체 측과 합의를 보지 못했다. 그런 상태에서 마산시가 합의 상대자인 김 영감에게 아무런 통보도 없이 일방적으로 철거를 해버린 상태로 그 처리가 어떻게 될 것인지 궁금증을 자아내고 있었다.

세 번째는 가포에 있는 경남대학 재단 부지 안에 일반인들의 접근을 막은 상태로 세워져 있는 "가포청동기 출토지" 표지석이다. 이는 본래 목적 중의 하나인 시민들의 접근성은 말할 것도 없고, 시민의 세금으로 세운 역사표지석이 마치 경남대 소유인양 되어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희망연대는 표지석을 밖으로 들어내던지 아니면 경남대학이 철책을 풀던지, 두 가지 중 하나를 택해야한다고 주장했지만 역시 그대로였다.

마지막 4번째 문제의 역사표지석은 철거나 내용 수정의 문제와는 무관하게 또 다른 차원에서 문제가 제기된 표지석이다. 이는 경남대 정문 앞에 새워진 것으로서 일본의 "조계지 구역"이라는 표지석이다. 옛 일본 조계지 구역은 일본영사관 터와 헌병분견대가 있는 지금의 신마산 일대이기 때문에 구태여 특정한 장소를 조계지라고 표시하는 표지석을 세우는 것은 그야 말로 "표지석을 위한 표지석일 뿐" 이라는 문제 제기였었다. 

표지석 논쟁을 주도했던 김 영감은 역사표지석 논쟁은 아직 끝난 것은 아니라는 단서를 달면서 "상처뿐인 "역사표지석 바로 세우기 운동"이었지만, 상처 입은 소나무에서 송진이 나와 나중에 어둠을 밝히는 광솔이 되듯, 우리의 상처 속에서 역사의 진실을 밝힐 수 있는 송진 같은 피고름이라도 흘러나온다면 그것만으로도 우리의 역할은 다 했다" 고 말했다.

*


“문경세재는 웬 고갠가 구부야 구부 구부가 눈물이로구나 아리 아리랑 쓰리 쓰리랑 아라리가 났네.”중모리 장단에서 육자배기로 넘어가는 걸쭉한 남도 소리는 가을밤의 흥취를 한층 더 돋우어 주고 있었다. 그렇게 시작한 진도아리랑은 밀양으로 넘어가서 정선으로까지 올라갔다.

권주가로 시작한 아리랑이 어느새 60년대에서 7080 유행가로 넘어가 버렸다. “오매야” 이 점잖은 사람들이 드디어는 탁자에 젓가락까지 두들기고 말았다. 막걸리를 담은 주전자와 양은 냄비는 이미 제 모양을 잃어가고 있었다. “쩔그렁 쩔그렁 딸그락 딸그락”

봉암동 수원지 폿돌 사건을 일단락 지어놓고 김 영감과 배씨의 제안으로 상가 식구들이 지리산으로 야유회를 나오게 되었다. 장소는 청학동에 위치한 ‘무아정’이었다.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붙들지 않는다는 주인장은 이미 속세의 사람이 아니었다. 고향이 진도인 그이는 김 선생님으로 불려지고 때론 스님으로도 통했다. 생김새는 어찌 보면 임꺽정을 연상케 할 정도로 범상인데 자세히 보면 절 입구를 지키는 사천왕과 금강역사를 닮은 것 같다.

악한 자에게 벌을 내리고 착한 이에게는 상을 준다는 사천왕처럼 주인장의 두 눈이 왕방울만하다. 지리산 청학동 중턱에 산막을 짓고 그 입구에 태극기를 턱 하니 달아 놓았다. 월남전에 참전하여 무공을 세운 국가유공자라고 한다. 국가로부터 이런 저런 혜택을 받으니 그것을 무아정을 찾는 이들에게 다 되돌려 준다는 것이었다.

“어데 김씨인교? 우리 행님은 광산 김씨라 카던데요.”세탁소 염씨가 너스레를 떨며 주인장에게 물어보았다. “ 워메 그라요. 내도 광산 김간디요. 여그서 성님을 만나네그려. 아이고 성님”무아정 주인장은 한술 더 떠 맞받아  치면서 분위기를 띄워주었다.  

하룻밤 묵어가는 이들이 굳이 사례를 하면 받고 그렇지 않으면 안 받는 곳이‘무아정’이다. 전국 각지에서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이곳을 찾는데 주로 예술인들이 많다고 한다. 기인(奇人)이 사는 곳이니 특이한 사람들이 많이 찾는 모양이다. 20년 전에 했던 음주가무 놀이문화로 무아정의 밤은 그렇게 깊어만 갔다.

새벽 1시였다. 건너 방에서 대금산조와 장구 치는 소리가 들렸다. 김 선생이 덩실덩실 어깨를 흔들고 너울거리며 춤을 추고 있었다. 김 영감은 슬쩍 건너 방으로 가서 손님들과 합석을 했다. 자연스럽게 술잔을 주고받으며 춤사위를 감상할 수 있었다. 쓰러질 듯 일어서고 다시금 쓰러졌다 반복하는 춤사위는 한풀이라고 했다. 한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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