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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심줄(소설)
2009-01-05 16:38:48
예외석

조회:1949
추천:98
첨부파일 :  1231141128-9.hwp

 

고래심줄

예외석


내 이름은 박종팔이다. 주변에서는 박상사로 통한다. 월남에서 돌아온 새카만 김 상사가 아닌 박 상사다. 의리의 사나이 박상사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사망으로 청와대가 발칵 뒤집히지 않았다면 큰집 물을 먹을 뻔 했다. 두 번씩이나 청와대 경호실에서 콜을 했건만 모두 사양하고 다른 동료를 추천해 주었다.

“종팔아, 소 어데 갔다 팔아 묵었노?” 

아버지는 초저녁부터 집에 돌아오지 않는 소를 찾아 들로 산으로 쫓아 다니셨다. 캄캄한 밤에 소는 집으로 돌아왔지만 종팔이는 아버지로부터 죽지 않을 정도로 매를 맞았다. 소는 집안 재산목록 1호로 가족들만큼 소중한 존재였던 것이다.

가만히 돌이켜보면 비록 쓰라린 기억만 이어졌던 고향이지만 그 고향 초가집 뒤로 나지막하게 엎드린 산이며 동네 입구의 작은 개울 그리고 그 개울둑을 따라 파릇파릇 돋아나던 풀들이 내 마음을 오랫동안 잡고 있었기에 지금껏 흔들리지 않는 삶을 살 수 있었던 것 같다.

1950년대 소를 키울 당시 고향집 앞 들판 왼쪽으로 제방둑이 있었고 버드나무 뒤편으로 낙동강이 흐르고 그 뒤로 부곡온천이 있었다. 6.25 전쟁이 터지고 갯가 작은 게들처럼 새카맣게 밀려오는 중공군과 북한군에게 밀린 국군은 후퇴를 거듭하여 결국 내가 살던 낙동강에까지 오고 말았다.

낙동강 이남에 위치한 우리 부락에도 “피난 보따리 꾸리고 준비하라”는 동네 이장의 지시가 전달되었다. 철모르는 어린 나이의 나는 신이 나서 이리저리 마을을 쏘다니다 동네 어른들로부터 혼쭐이 나기도 했다.

미숫가루가 든 푸대를 안고 잠을 자다 깨보니 먼동이 훤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인민군의 후퇴로 피난가지 않아도 된다는 연락을 받고 모두 꾸렸던 피난 보따리를 다시 풀고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 그 시절엔 누구나 할 것 없이 비슷한 어린 시절 추억이 있다. 지독하게 가난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은 상처로 남아 잊혀지지 않지만 씁쓸한 웃음으로 떠오르는 것도 있다.

6.25가 휩쓸고 간 뒤 물자가 궁핍해서 너 나 할 것 없이 변변한 속옷조차 없던 시절이었다. 당시 암시장에 유행하던 것이 대포 조명탄용 낙하산 천으로 만든 속옷이었다. 그것도 화약 냄새가 베여있고 천이 거칠어 피부를 심하게 손상시켜 피부염이 심할 정도였다. 그나마 그것조차 없어 매일 겉옷차림으로만 다니다가 체육시간마다 곤욕을 치루기도 했다.

“야 인마, 난닝구(런닝) 왜 안 입고 나와?”

“난닝구 입고 와 난닝구”라며 매를 맞았던 기억이 난다. 선생님이 아무리 매를 때려도 없는 런닝을 만들어서 입고 올 수도 없고, 훔쳐올 수도 없는 일이기에 난감한 일이었다.

그로부터 6년 후 고등학교 2학년 때 교무실에서 쓰라린 경험을 하게 된다. “공납금 밀린 놈들은 내일 부모님 모시고 온나. 안그라모 매타작 할기다. 돈도 안 내는 놈들이 공부는 무신 놈의 공부고?”

“ 돈 없시모 촌에서 똥지게나 지든지 노가다나 하러 가삐라”

내 눈에선 닭똥 같은 눈물이 주르륵 흘러 내렸다. 교복소매로 훔치며 이를 갈았다.

“그래, 이런 놈의 학교 때리 치아뿌자. 고마 돈이나 벌러 가자”

종팔이 초등학교 5학년 때 어머니는 둘째 동생을 낳다 세상을 떠나셨다. 밤새 하혈을 심하게 했으나 당시 시골에서 병원 갈 엄두도 못 내고 전전긍긍하다가 결국 날이 새면서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싸늘한 시신이 되고 말았다.

그 뒤 아버지는 장날 소를 몰고 읍내에 나가시더니 낯선 여인을 한 명 데리고 왔다. 이복동생이 한 명 생긴 뒤로 종팔은 아버지와 새어머니에게 관심 밖이 되고 말았다. 주변 친척들의 도움으로 중학교를 어렵게 마치고 고등하교 진학은 아예 포기하고 있던 중에 중학교 담임선생님의 권유로 마산에 있는 공업학교에 시험을 보게 되었다. 합격은 되었으나 등록금이 없어서 발을 동동 구르며 입학수속을 포기하려 했으나 중학교 담임선생님의 도움으로 어렵게 입학할 수 있었다.

그 뒤 낮에 수업을 마치면 밤마다 식당이나 작은 공장을 전전하며 돈을 벌고 밤에 공부하면서 어렵게 학업을 이어갔으나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결국 공납금도 두 번이나 밀려 고등학교 2학년 1학기까지 버텨오던 학교와의 인연을 끝내고 말았다. 종팔은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던 수복이와 가출을 결심했다. 말이 가출이지 이미 어린 나이에 식당이나 공장에서 생활하던 날들이 많았었다. 가출 후 마산과 부산을 오가며 일자리를 알아보던 중 우연히 마산역전 앞 게시판에 붙은 모집공고문을 발견하였다.

“육군소년기술병 및 하사관 모집” 

“수복아, 우리 저거 시험 한번 쳐보자. 군대가서 월급도 받고 나중에 하고 싶은 공부도 실컷 해보자, 어떻노?”

“그래, 그거 좋은 생각이데이, 이왕지 우리들이 공부할 형편이 안되모 군대나 일찍 가서 돈이나 벌어서 오자” 

의기투합이 된 종팔과 수복이는 육군소년기술하사관 시험을 보기로 마음을 굳혔다.

수복이네 집에서 훔쳐낸 돈으로 서울 갈 차비를 마련해서 시험을 볼 수 있었다. 시험 결과 종팔이는 합격했으나 수복은 낙방하고 말았다.

한 달 뒤 합격통지서와 함께 입영통지서가 집으로 도착했다. 종팔은 아버지와 새어머니 몰래 입영통지서를 가지고 집을 나왔다. 고향집이 있는 마을 어귀를 벗어나며 이를 악물었다.

“성공하기 전엔 이놈의 집구석엔 발을 들여 놓지 않겠다.”


*


“차리엇, 열중 쉬엇, 차렷”

“지금부터 호명하는 놈들은 오른쪽으로 튀어나와서 줄을 서라”

1966년 3월 용산역 광장. 아침부터 지루하게 기다리던 종팔의 이름이 불려졌다. “박종팔, 112969번”

오른쪽 팔목에 종이띠로 만들어진 번호표와 명찰을 달고 열을 지어 호송열차에 몸을 실었다. 용산역을 출발해 달리는 열차는 경부선을 타고 거꾸로 종팔의 고향 쪽을 향해 가는 것이었다. 밤늦게 도착한 곳은 경북 영천의 육군3사관학교였다. 그곳에서 52주간 교육훈련을 받았다. 교육을 수료할 즈음 종팔은 교관으로부터 간부후보생 지원권유를 받고 지원하게 되었다. 육군소위로 임관된다는 것이었다.

명령대기 상태로 3사관학교 내 시설관리 임무를 부여 받았다. 종팔이 공업학교 출신이라는 이유로 교내 보일러실 담당사관으로 명을 받고 근무를 하면서 교육생을 지도하게 된 것이다. 동기생들 중 하사관들은 임지로 떠났고 간부후보생 지원자들도 인사명령을 받은 상태였다. 종팔과 잔류하게 된 동기생들은 2차 명령이 떨어지면 임지로 떠나게 되어 있었다.   

1966년 겨울 어느 날 밤 박종팔 하사의 인생행로를 바꾼 중대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보일러를 담당하던 기술병의 실수로 압력이 높아진 보일러가 폭발한 것이다. 한 달 후 육군 소위로 임관하여 장교의 길을 가려던 종팔에겐 청천벽력과 같은 일이었다. 그날 밤 일직사관은 분명히 김귀동 중사였다. 하지만 시설책임을 맡고 있던 종팔은 연대책임으로 할 달 앞두고 있던 소위 임관이 취소되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사고의 책임을 물어 하사관에서 사병으로 강등 조치한다는 인사장교의 연락을 받게 되었다. 그날 일직사관을 하던 김귀동 중사에게는 아무런 조치가 없었다.

눈이 뒤집힌 종팔은 그날 밤 사복으로 바꿔 입고 사관학교를 도망 나오고 말았다. 마산으로 온 종팔은 제일 먼저 친구인 수복에게 연락을 했다.

수복은 시험에 떨어진 뒤 창원공단에 있는 공장에 취직을 해서 자리를 잡고 야간고등학교에 뒤늦게 편입해서 공부를 계속하고 있었다.

“야 인마, 니 우짤라꼬 탈영했노? 니 미친나?”

“내도 모리겄다, 니미럴 한 달 뒷면 육군소위 계급장 마빡에 달고 폼 나게 군대생활 한번 해볼라 캤는데 이기 무신 일인고 모리겠다.”

종팔과 수복은 마산 오동동에서 밤새 술을 마셨다. 고향집에는 돌아가지 싫어 당분간 수복이의 자취방에서 지내며 후일을 생각해보기로 했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갔다. 

헌병대에서 수복이의 자취방에 들이닥쳤다.

“박종팔 하사, 널 체포한다. 반항하지 마라”

종팔은 헌병대에서 인계된 뒤 사관학교 교장실에 도착하였다. 당시 교장은 유학석 대령이었다. 동기생들보다 장군 진급이 몇 년 뒤쳐져 안달이 나 있던 중이었다. 그러던 중 종팔의 탈영사고가 발생해서 눈이 뒤집힌 상태였다.

“니 인마 정신이 있는 놈이야 없는 놈이야? 어쩌자고 탈영을 하나?”

“니 탈영보고는 두 번씩이나 내가 막아 놓았으니까 상부에 올라가지는 않았다. 마음을 돌리라. 두 눈 딱 감고 명령에 따르거라.”

종팔은 이제 막가는 심정으로 따졌다.

“내가 와 그 고생하고 사병 계급장을 달아야 합니까? 한 달 뒤면 육군 소위로 임관할 사람을 보고 사병이 뭡니꺼 사병이”

“아 그거야 니가 사고치고 도망갔으니까 그런 것 아이가?”

“내가 보일러 뿌삿는교? 병사들이 불낸 거 가지고 와 내보고 책임을 묻는교? 그리고 그날 일직사관은 김귀동 중사 아인교? 책임을 물을라 카머 김 중사가 책임을 지야제 와 내가 책임 지는교?”

김귀동 중사는 2군사령관의 처조카였다. 그래서 교장인 유학성 대령도 인사조치 하기가 난감한 처지였다.

“내보고 자꾸 입 다물고 다 뒤집어써라 카머 내도 가만히 안 있을기요. 확 다 까발릴 테니까 고마 알아서 해 주이소”

유학석 대령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사관후보생 육군하사에게 막말을 듣자 심기가 단단히 틀어졌다.

“정 그라모, 니가 원하는 기 뭐꼬? 한번 들어보자”

“인자 육군 소위는 물 건너갔으니 지금 있는 계급 그대로 유지해주고 다른 데로 보내 주이소. 안 그라모 김귀동 중사를 물고 늘어질기요 고마.”

결국 유학석 대령은 종팔의 요구를 들어주기로 하고 김귀동 중사를 살리는 쪽으로 결정했다.

*


1967년 봄, 유학석 대령은 준장 진급을 하고 육군본부 병기감으로 인사명령이 나서 서울로 영전을 해 갔다. 종팔은 유학성 준장의 자기 직속 휘하에 명령을 내린다는 약속을 믿고 2군사령부 본부대로 명령지를 가져갔다. 그러나 정작 인사명령을 받은 곳은 27사단 병기중대였다. 열이 뻗친 종팔은 그날로 육군본부 유학석 준장을 찾아갔다.

“내 육군소위 계급장을 내 놓든지 아니면 약속 지키소”

“니가 참말로 지정신이가? 여기가 어디라고 찾아 오노? 한 번도 아이고 두  번씩이나 탈영을 하다니 니 돌았나?”

“하모, 내 돌았소. 내도 이판사판이요 고마. 유 장군님 누구 때문에 장군 됐는교? 내가 입 다물고 하사 생활하는 동안 김귀동이 놈은 벌써 상사 계급장 달고 안 있는교?”

유학석 준장이 육군본부로 인사명령을 받을 때 김귀동 중사도 상사로 진급시켜 함께 육군본부로 오게 된 사실을 종팔이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라모 내 따라서 월남으로 가자. 내가 먼저 가 있을 거니까 뒤 따라 오너라.”

“월남 갔다 오면 뭐가 달라 지는교?”

“월남 갔다 오면 니가 장교 못된 것을 다 보상해주마”

그렇게 유학석 준장과 종팔은 월남 파견 결정을 내렸다. 유학석 준장은 월남 에 잠시 머물다 오면 곧 소장으로 진급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종팔은 부대 복귀 후 일주일이 지나 전격 월남 파견 특명이 내려왔다.

1967년 5월, 부산항 제3부두!

“무사히 돌아오라!”, “사랑해요, 꼭 살아오세요!” 애타는 절규의 목소리들이 적힌 피켓을 들고 울부짖는 사람들로 부두전체가 흔들거렸다. 

1만 5천 톤 급의 미군수송선 갑판에서 병사들 속에 섞여 그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종팔의 마음은 착잡했다. 육군 소위를 눈앞에 두고 벌어진 사고와 어린 시절 가난해서 겪었던 학교생활의 어려움들이 주마등처럼 떠올라 눈물이 주르륵 흘러 내렸다. 군복 소매로 닦아 내어도 쉴 새 없이 타고 내리는 눈물은 그칠 줄 몰랐다.

옆에서는 펄쩍펄쩍 뛰며 목이 터져라 가족과 애인의 이름을 부르는 병사들을 보면 가슴에 휑한 바람이 일고 목이 메었다. 종팔은 누구 한 사람 전송 나온 가족이 없었기 때문이다. 고향집에도 월남 전선으로 떠난다는 연락을 하지 않고 슬그머니 도망치듯 왔다.

“부웅!” 하는 뱃고동 소리와 함께 군 수송선과 부두와의 간격이 조금씩 벌어지는 순간 아예 선착장 바닥에 주저앉아 통곡을 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선상에 있는 장병들도 하나 둘씩 왕주먹같은 눈물을 주르륵 흘리며 어린아이처럼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월남 전선으로 떠나는 장병들은 한결같이 이런저런 사연들이 많은 이들이었다. 종팔은 차츰 멀어져가는 고국 땅을 갑판 위에서 멍하니 바라보았다.

월남 전선으로 가는 수송선에서의 생활은 국내에서 경험해보지 못한 최상급 호텔 수준이었다. 침대엔 하얀 시트가 깔려있고 식사시간이면 쟁반가득 각종 고기와 야채, 과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고급 잔에 가득 따라주는 원두커피는 현기증이 날 정도로 호사스러웠다. 가끔씩 거친 파도에 ‘롤링’과 ‘피칭’ 때문에 배멀미를 하거나 식사시간에 커피나 음식이 쏟아지는 소동이 있었지만 끼니때마다 배식되는 각종 육류들은 목숨 걸고 사지로 떠나는 장병들에겐 마지막으로 제공되는 최후의 만찬 같았다.

드디어 사이공 임지에 헬기를 타고 도착했다. 상사 3명, 중사 3명, 나이가 지긋한 늙다리 하사 2명이 사단사령부 대기막사에 도착했다.

도착한 첫날부터 정신이 쏙 빠질 것 같은 적들의 포사격이 시작되었다. 전 부대원들은 이미 지하 벙크로 대피해버린 뒤였다.

“야, 이거 우리레 도착 첫날부터 신고식이레 걸게 치루누만 썅! 적들이 우리레 온걸 아는 모냥이구만”

이북사투리가 진한 황상사가 푸념을 늘어놓았다. 임지로 도착한 일행만 남겨두고 부대원들 모두 지하 벙크로 대피하는 바람에 벌써 두 끼나 식사를 건너뛰어 배가 몹시 고팠다. 종팔과 하사 2명이 나서서 부식창고를 뒤져보니 한국에서는 구경도 못하던 진귀한 부식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그중에서 간단한 씨레이션 박스 몇 개를 가져왔다. 박스를 개봉하니 온갖 진귀한 것들이 들어있었다. 햄, 과일통조림 그리고 커피봉지와 껌, 초콜릿, 비스켓 등  국내에서는 구경하기 힘든 음식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밖에서는 포성이 진동하는데 모두 한자리에 모여 배가 빵빵하도록 실컷 먹고 즐겼다.

“야, 이거 아무도 반겨주지 않는데 우리레 회식 한번 실컷 하누만 썅! 이거레 앞으로 복귀할 때까지 매일 먹을 것들 아니가”

포사격이 그치고 다음날 부대원들이 지상으로 올라왔다. 부대정비가 끝난 후 대기막사에 웬 험상궂은 사복차림의 사내가 들이닥쳤다.

“어떤 새끼야? 부식창고 턴 놈이?”

“너, 이 새끼들 쥐새끼들이야 뭐야?”

다짜고짜 종팔을 비롯한 하사관(부사관)들을 걷어차고 따귀를 올려붙였다. 엉겁결에 따귀를 두 대나 얻어맞은 종팔은 속에서 불이 올라왔다.

“뭐 이런 새끼가 다 있노 이거, 목숨 내놓고 죽으러 온 우리보고 뭐 쥐새끼? 너, 이 새끼 오늘 한번 죽어봐라”

종팔이 그 사내의 배를 전투화발로 걷어차고 주먹을 턱에 올려붙였다.

“억, 너 이 새끼 내가 누군 줄 알고”

“니가 누군 줄은 알 필요 없고, 배가 고파서 밥 묵은 우리가 와 욕을 얻어 묵어야 돼노?”

일행은 우르르 달려들어 그 사내를 걷어차고 짓밟았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사내는 해병 중령으로서 감사실 감찰참모인 권 중령이라고 했다. 그러나 권 중령은 그 일이 벌어지고 나서 부하들에게 일체 함구령을 내렸다. 종팔은 한동안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막사 안을 돌아다녔다. 일주일 뒤 종팔은 병기중대 인사계로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종팔은 또다시 유학석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부대 내 장병들은 유학성의 소식을 알지 못했다. 월남으로 온 것은 알 것 같은데 도무지 행적을 찾지 못하고 3개월이 흘러갔다.

        

*


월남의 기후는 ‘스콜’이라고 부르는 소나기가 잠깐씩 스쳐갈 뿐 일 년 내내 강렬한 햇볕만 지독하게 내리쬐어 숨이 턱턱 막혔다. 한낮의 태양에 바짝 달구어진 대포나 장비에 무심코 손이라도 짚었다간 그 몸체에 손바닥이 쩍! 하고 달라붙는 바람에 기겁을 하고 물러선다. 땡볕에 달궈진 철모에 계란을 깨트려 넣고 5분만 기다리면 계란프라이가 만들어질 정도였다.

그런 건기철의 어느 날, 계속된 무더위로 숨이 막히던 중 반가운 스콜이 한바탕 소나기를 뿌리고 지나가자 그 시원함에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도 받아든 아이들처럼 한바탕 신이 났다. 그것도 잠시, 다들 슬금슬금 막사로 들어가 으스스한 추위로 온몸에 소름이 돋으며 벌벌 떨었다. 고국에 있을 때도 여름에 지긋지긋하게 끈적거리는 더위를 느꼈었다. 지금의 기온도 그때처럼 섭씨 30도였다. 월남의 평균 섭씨 40도를 오르내리는 엄청난 고열의 더위에 서서히 길들어가기 시작하다보니 섭씨 30도에도 추위를 느끼는 것이었다.


그렇게 찾아 헤매던 유학석 준장을 우연히 사이공 시내에서 만났다. 중사로 진급한 종팔이 모처럼 외출을 나왔다. 사복차림으로 사이공 시내를 어슬렁거리다가 골목길에서 어린아이들이 담배를 피우는 걸 목격했다.

“이놈의 새끼들이 대가리 피도 안 마른 것들이 어른 앞에서 담배를 피워?”

두 녀석을 불러 세워 뺨을 한 대씩 올려붙였다. 골목 저쪽에서 주민들이 몰려와 박 중사에게 항의를 하는 것이었다. 궁지에 몰린 박 중사는 도망치다가 골목 앞을 막 지나가던 지프차에 받힐 뻔 했다. ‘끼익’하고 지프차가 급정거하고 뭐라고 욕을 해대는데 한국말이었다.

“이 새끼, 죽으려고 환장했나? 너, 이 새끼 어디 소속이야?”

정신을 차리고 지프차 안을 보니 뒷좌석에 유학석 준장이 떡 앉아있는 것이었다.

“충성! 하이고 장군님, 여기서 만나네요.”

유학석 준장이 눈을 똥그랗게 뜨고 자세히 보니 그 찰거머리 같은 박종팔 중사가 느물거리고 있는 것이었다.

“너, 이놈의 자식 여기 어쩐 일이냐? 그리고 그 옷차림은?”

“아하, 이 옷은 오늘 그냥 외출 나온 깁니더. 그라고 월남 온지 육 개월 됐심더. 유 장군님 만나러 왔다 아인교”

“너, 일단 여기 타라.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 된다.”

차에 올라타고 가는 도중 유학석 준장은 박 중사에게 월남에 관한 현지 사정을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월남에서는 어린아이 때부터 담배를 피우는 게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어릴 때부터 담배골초가 되면서 어른이 되면 이가 대부분 시커멓게 된다는 것이다. 민간인들 중에서도 베트콩들이 많기 때문에 언제 어느 때 총을 맞을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박 중사는 다시 유학석 장군에게 억지를 부려 사단 직할대 차량중대 선임하사로 명령을 받아내었다. 유학석은 종팔이 하고는 참으로 질긴 인연이라고 생각하며 껄껄 웃었다.

고국에서의 병영생활도 그랬지만 월남에서의 군 생활 중에도 매일 해질녘이면 국기하강식이 거행되었다. 월남 닭의 “뀌꼴! 뀌꼴!”하는 울음소리를 제외하면 일체 잡음이 정지된 채 엄숙하게 애국가가 울려 퍼졌다. 조국을 떠나면 모두가 다 애국자가 된다고 했던가. 머나먼 월남 땅에서 애국가를 들으며 태극기를 바라보니 가슴이 찡해왔다.

객지에서는 고향 까마귀만 봐도 반갑다더니 조국의 소중함과 애틋한 마음에 몸이 ‘부르르’ 떨리는 전율을 느꼈다.

1969년 6월 박 중사는 월남 파병 2년의 계약을 마치고 고향으로 귀국하는 미군 수송선에 몸을 실었다. 원래 기간이 1년이었지만 추가로 연장해서 2년을 채우고 복귀하는 셈이다. 유학석 준장은 6개월 전에 소장으로 진급해서 먼저 귀국한 뒤였다. 고국으로 돌아가는 수송선에는 장병들이 포탄궤짝으로 만든 각자의 사물함을 한 두 개씩 챙겨 실었다. 초가집 안방 문짝만한 크기의 박스 안에는 배고픈 나라의 군인답게 미군용 씨레이션(야전식량)을 차곡차곡 모아둔 것도 있었다. 미제 런닝셔츠, 비누, 일제라디오, 카메라 등 고가품을 챙겨 넣은 것도 있었다. 가난한 고학생들은 그때 챙겨온 시계나 라디오, 카메라를 하나씩 팔아서 대학 등록금을 마련한 병사도 있었다. 그만큼 한국에 물자가 귀한 시절이었다.

주월 미군이나 한국군 주둔지의 철조망 바깥에 산더미처럼 쌓인 빈 통조림 깡통더미를 보며 돈을 눈앞에 보고도 가져가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느낀 병사들도 많았다. 박 중사는 차량중대의 노련한 선임하사답게 포탄박스 나무로 만든 상자 두개 가득 차량용 엔진부품을 꽉꽉 채워서 실었다. 수송선은 ‘퀴논’항을 출발한 지 5일 만에 일본 오끼나와 부근 해역을 지나가고 있었다. 병사들이 소지한 라디오에서 ‘치이익’ 하는 잡음 속에 고국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간혹 들려오기 시작했다. 기쁨에 들뜬 병사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얼싸안기도 했다. 

월남에서 돌아온 새카만 얼굴의 박 중사는 또 한번 유학석의 배려로 부산 해운대에 위치한 2군사령부 병참부대로 발령이 났다. 당시 박정희 장군이 2군사령부에 근무를 했었고 훗날 경호실장이 된 차지철이 병참부대에서 박 중사의 직속상관으로 있었다. 이때 박 중사와 많이 마찰을 일으키기도 했다. 성질이 더러운 차지철을 월남에서 돌아온 노련한 박 중사가 군기를 잡은 것이었다. 동료 중사 한 명과 함께 차지철을 산위로 끌고 간 박 중사는 한 시간이나 넘게 두들겨 패 주었다. 하지만 워낙 맷집이 좋던 무식한 차지철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두들겨 패다 지친 박 중사가 오히려 화해를 청하고 그때부터 차지철과 형님, 동생 하는 사이가 되었다. 영내에서는 박중사가 부하가 되지만 사석에서는 형님이 되었다. 이곳에서의 군 생활을 마지막으로 박 중사는 결국 옷을 벗게 된다.

차량정비 담당관이었던 박 중사는 전임자였던 김 상사가 차량수리장비를 여러 곳에다 외상거래를 해 놓고 그 대금을 착복한 후 장부를 없애버린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김 상사는 벌써 월남 파병을 자원해서 가버린 뒤였고 그 뒷수습은 고스란히 박 중사가 뒤집어써버렸다. 박 중사는 해운대에서 전역 신청을 했으나 상급주대에서는 1년 동안 애를 먹이다가 전역명령을 내려주었다. 그동안 월남에서 가져온 차량엔진 부품을 야금야금 팔아서 김 상사가 저질러놓은 부도를 말끔히 처리해놓은 다음에야 전역을 할 수 있었다. 결국 박 중사는 빈 손 탈탈 털고 다시 사회로 나왔다. 고래심줄처럼 모질게 견뎌온 보람이 한 순간에 날아가 버린 것이다.



*


빈손으로 고향에 돌아온 종팔은 고향집에서 다시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그러나 전통적인 벼농사에서 벗어나 단감농사를 한번 시도해보기로 했다. 주변에서는 모두들 미쳤다고 손가락질 했으나 종팔은 눈 딱 감고 밀어붙였다. 두 해에 걸쳐 황무지를 개간해 감나무를 심고 겨울엔 비닐하우스로 수박농사를 지었다. 결국 단감나무에서 과실이 열리기 시작했고 종팔은 농사에 재미를 붙이게 되었다.

군에서 전역 한 지 3년이 지난 어느 날 진해에 있던 군대동료 양 상사가 찾아왔다. 그 친구 역시 월남에 갔다 온 후 2군사령부에서 종팔과 함께 근무 했었다. 전역하고 사업을 하다 사기를 당해 쫄딱 말아먹고 거지꼴로 나타난 것이다. 종팔은 양 상사를 시장으로 데리고 가서 구두 한 켤레와 양복을 사 입히고 청와대로 올려 보냈다. 청와대엔 차지철이 있었다. 그는 5.16혁명의 주체가 되어 군복을 벗고 박정희의 최측근 경호실장이 되어 있었다.

차지철의 주선으로 양 상사는 청와대 경비반장이라는 직책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도 채 1년도 못 채우고 박정희의 사망으로 옷을 벗게 되고 말았다. 당시 전두환 신군부에 끌려가서 대통령이 그 지경이 되도록 경비반장은 뭐하고 있었느냐는 죄목으로 고문을 받고 두들겨 맞아 염라대왕 앞에까지 갔다가 살아 돌아왔다.

종팔은 시골 농장에서 라디오 방송으로 대통령의 총격 사망 사건을 접하고 양 상사가 걱정이 되었다. 백방으로 수소문하고 손을 써서 겨우 양 상사를 데려올 수 있었다. 월남에서 돌아온 양 상사는 그렇게 모진 목숨을 건지고 골병이 들어 고향으로 내려왔다.

당시에 종팔은 차지철로부터 청와대로 올라오라는 권유를 여러 차례 받았으나 계속 사양했었다. 그때 청와대로 올라갔으면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종팔은 월남에서도 살아 돌아왔고 염라대왕 앞에까지 갈 위기도 피해갔다. 그리고 결혼 후 손자, 손녀들까지 보게 되었으니 이만하면 고래심줄처럼 질기게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벌써 나이 칠십이니 인생의 화살이 참 빠름을 느꼈다.

“그래도 그때가 참 좋았지”

종팔은 월남에서 돌아오던 당시를 회상해보았다.


월남에서 돌아온 새까만 김상사 이제서 돌아왔네

월남에서 돌아온 새까만 김상사 너무도 기다렸네

굳게 닫힌 그 입술 무거운 그 철모  웃으며 돌아왔네

어린 동생 반기며 그 품에 안기며 모두 다 안겼네


미군이 수 년 간에 걸쳐 천문학적 전쟁비용을 쏟아 붓고 연일 비행기와 대포로 포탄을 퍼부어가며 베트콩을 밀어붙여도 중화기래야 박격포 몇 문에다 소총과 죽창이 고작인 그들에게 고전을 면치 못하는 이상한 전쟁이었다. 100년 가까운 열강의 지배로 인해 오랜 전쟁에 시달려온 터에 동족끼리의 이념싸움에 휘말려 전쟁이 그칠 날 없는 그들의 삶도 참 기구한 운명이었다. 그러나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사랑의 씨앗을 마르지 않았으니 오늘날 월남이 있게 된 것이다.

종팔에게도 야자수 밑에서 사랑을 나누던 처녀가 있었다. 지금은 그녀가 무엇을 하고 있을까. 휠체어에 몸을 의지한 채 종팔은 서산에 기우는 저녁노을을 바라본다. 아오자이가 참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그때가 참 좋았지......”      

                       

종팔이 얼마 전에 우연히 TV에서 베트남의 어느 마을에 있는 공중화장실을 보고 옛날 생각이 떠올랐다. 길가 양쪽으로 길게 파놓은 구덩이에 온 동네 주민들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엉덩이를 내놓고 백주대낮에 노상에서 볼일을 보는 것이다. 잠시 후에 돼지 떼들을 몰고 오면 돼지들이 그 인분을 먹는 것이다. 그것을 보고 예전에 한국에도 있었던 제주도 똥돼지 생각이 났다. 그러나 벌건 대낮에 떼 지어 엉덩이를 드러내놓고 일을 치르는 행위는 어쩐지 우리의 정서와는 너무 동떨어져 해괴하게만 느껴진다. 종팔이 당시에도 그 장면을 보고 혀를 찬 적이 있었다.

월남 화장실을 보면서 종팔은 군대시절 초기에 겪었던 일이 생각났다. 전방부대 화장실엔 ‘똥탑’이라는 것이 있었다. 전방부대의 혹한기에는 보통 영하 25도를 오르내린다. 그래서 겨울 내내 화장실 오물을 퍼내지 못하고 꽁꽁 얼린 채 내버려 두게 된다. 서너 달 인분이 쌓이면 그 위에 배설을 하고 밤새 얼어붙으면 그 위에 또 볼일을 봐서 층을 이루게 된다. 탑처럼 차곡차곡 쌓인 것을 이른바 ‘똥탑’이라고 불렀다. 더 이상 볼일을 보지 못할 정도로 탑이 쌓이면 작대기를 하나 장만해놓고 똥탑을 툭툭 쳐서 한 층을 제거한 후 거사(?)를 치른다. 그런 수고도 하지 않은 채 볼일을 보려면 엉덩이에 차갑고 불쾌한 것이 와 닿는다.

어쩐지 종팔은 자신의 처지가 그 똥친 작대기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그러나 오늘도 녹슨 태극무공훈장을 바라보며 그 시절을 회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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