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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 풋바심
2017-10-04 18:02:10
hmhessayist

■ 한명희(韓明熙) 수필가
△경기 광주 출생
△성균관대 교육학과 졸업. 연세대 교육대학원 수학
△《문학21》등단
△가원중·영등포고 교장, 서울 학생교육원장·교육연구원장, 교육부 편수국장 역임
△강원대, 동국대, 성균관대, 동덕여대 강사, 용인대 겸임교수 역임
△구리문인협회 회장. 서울교원문학회 명예회장. 한국작가회 중앙위원. 한국수필가연대 중앙위원. 한국수필가협회 이사.《문학저널》편집위원
△한국문인협회, 청다문학회 회원
△경기도문학상 본상, 좋은문학 문학상 본상, 대통령표창 수상. 국민훈장 석류장, 홍조근정훈장 수훈
△수필집『드러누워 보는 세상』,『참을 걸 베풀 걸 즐길 걸』,『하늘을 보라』
조회: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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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파일 :  1507107729-34.hwp

보리 풋바심

 

韓 明 熙

춘원(春園) 이광수의 수필집 돌베개에는 그가 남양주 광동중학교 국어교사로 근무할 때, 봉선사에 머물며 쓴 산에서라는 글이 있다. 춘원은 돌베개 서문(序文)에서 산에서는 내가 봉선사에 들어 가 있는 동안의 일기라고 적고, “내 업장을 다 떼어 버리고 한 낱의 깨끗한 수도자가 되어 보려 하였다고 소회를 밝히고 있다. 그는 해방 후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복잡한 심정을 추스르기 위해 수도자가 되겠다는 생각을 한번쯤 해보았을지도 모른다.

그 산중일기 중, 나를 옛 추억에 젖어들게 하고, 어려웠던 시절의 아픔을 생각나게 한 것이 910(화요일) 일기다.

 

날이 맑다. 가위라서 휴학, 아침 예불, 좌선, 송경.

검다니라는 동네에 풍씨 집을 찾다. 양철조각 하나도 아니 섞인 농촌이다. 마당에는 풋바심이 널리고 대추나무에는 풋대추가 번쩍거리고 있다. 사람들은 절사 음복으로 낯이 붉다.송편과 신청주 대접을 받았다. 돌아오는 길에 개울에서 목욕하면서

 

짧은 글이지만 농촌풍경을 서정적으로 잘 담아내고 있다. 글을 읽으면서 나는 어릴 적 농촌 정경이 떠올라 잠시이지만 감회에 젖기도 했다. 절사음복(節祀飮福), 송편, 신청주(햇곡식으로 새로 빚은 맑은 술)에서는 추석의 여유와 즐거움이, 풋바심에서는 늦은 봄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연명해온 옛 농촌의 어려움이 저절로 떠올랐다. 물론 이 글에서 마당에 널린 것은 보리가 아니라 벼이다. 하지만 나는 풋바심 하면 보릿고개에 물 한 바가지로 배고픔을 달래고, 멀건 산나물 죽으로 끼니를 때우던 때의 보리 풋바심이 떠오른다. 시간이 많이 흐른 때문인지 그 아픔마저 이제는 아름다운 추억으로 되살아나고 있다.

요즈음 사람들은 풋바심이라는 말 자체를 알지 못 한다. 물론 끼니를 잇기 위하여 풋바심을 한 사실과 그 아픔도 모른다. 나와 동년배 노인이라 하더라도 도시에서 자랐거나 농촌의 부유한 가정에서 자란 사람은 풋바심을 모른다. 보릿고개는 배워 아는데 풋바심이란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고 한다. 우리조상들이 태산준령보다도 높다는 보릿고개에 굶어죽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든 것은 풋바심이나 산나물 같은 구황식물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풋바심은 벼, 보리, 조 등 곡식이 채 여물기 전에 베어다가 바심(타작)을 하여 식량을 거두는 것이다. 벼 풋바심은 요기를 하는데 주 목적이 있었지만 차례를 지낼 때에 햇곡식을 제물로 올려야 한다는 제사예절에서 풋바심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이에 비해 보리 풋바심은 묵은 곡식은 다 떨어지고, 햇보리가 익기에는 아직 이른 5월 말에서 6월초, 보릿고개를 굶지 않고 넘겨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 아픔이 더 컸다.

보리타작은 6월말 경 보리가 누렇게 익을 때 하는 것이 순리이다. 그래야 알곡도 제대로 여물고 싸라기도 적게나와 많은 양을 수확할 수 있다. 그렇지만 보리가 익을 때 까지 끼니를 이을 식량이 없는데 어찌하겠는가, 누런빛이 제대로 돌기도 전에 풋 보리를 베어다가 손으로 훑거나, 발이나 방망이로 부수어 얻어진 겉보리를 큰 가마솥에 찌거나 볶아낸다. 그리고 다시 절구에 찧는다. 그렇게 얻어진 보리쌀로 밥을 짓기도 하고, 나물과 섞어 죽을 쑤기도 하고, 싸라기를 기울과 섞어 보리개떡으로 만들어 먹기도 한다.

이렇듯 호구지책으로 이루어진 풋바심은 6·25 전쟁 후까지 대부부의 농촌에서 이루어졌다. 그 풋바심이 있었기에 가난한 농민들이 힘든 보릿고개를 넘을 수 있었지만 누구라도 기억하기 싫은 아픔이었다.

그렇지만 가난했던 시절 풋바심의 아픈 기억을 반면교사로 삼아 다시 한 번 새로운 도약을 꿈꾸어야 한다. 그리고 풋바심을 보존해야할 민속 문화로,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해 나아가야 할 것이다.

나는 어려서, 힘든 농사일로 손발에 굳은살이 밖이고 시골티가 나는 부모님을 부끄럽게 생각한 때가 있었다. 물론 성장한 후에는 그런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일이 없다. 오히려 어려움을 극복하고 자식들을 바르게 키워내신 부모님이 자랑스럽고 고마워, 그 고마움을 글로 남기기도 했다.

가난 속에서 배곯아 가며 힘들게 살아온 삶이지만 지금 되돌아보아도 부끄러움은 없다. 그 가난과 아픔이 있었기에 더 성숙할 수 있었고, 오늘의 풍요를 더 값지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 이다.

다산 정약용의 다북쑥을 캐다라는 시의 일부이다. 이 시에서 보듯이 우리 조상들은 참으로 어렵게 살아왔다.

… … …/ 다북쑥 캐어 무얼 하나눈물만 쏟아지네쌀독엔 쌀 한 톨 없고들에도 풀싹하나 없네다북쑥 캐어다가둥글게 넓적하게말리고 또 말려서데치고 소금 절여죽 쑤어 먹을 밖엔달리 또 무얼 하리

 

살갗을 파고드는 풋보리의 가시라기, 풋보리를 쪄내는 가마솥의 열기, 땀으로 범벅이 된 몸뚱이, 맛이라고 찾아볼 수 없는 보리나물죽, 보리 개떡 등 가난하고 암울했던 시절의 아픈 기억이 이제는 아련히 떠오르는 아름다운 추억이 되어 나를 행복의 동산으로 불러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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