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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1.01 이후)


(단편) 신 보헤미안
2015-01-29 10:49:25
sws60

조회:658
추천:44
(단편) 신 보헤미안
신외숙
 
 
 
청량리를 출발한 버스가 어느덧 중랑교를 지나 공릉동에 닿았다.
상가가 밀집된 거리를 지나자 개천가를 끼고서 화랑대역이 보였다. 왼쪽이 여자대학 오른쪽이 육사였다. 갑자기 내 소설 속 주인공들이 여기저기서 튀어 나오면서 아는 체를 하는 것 같았다. 이 근처에서 둥지를 틀었던 사람들을 대상으로 쓴 내 소설 속 주인공들이었다. 드라마 같은 현실 속에서 내가 직접 취재해서 소설로 재구성한 것들이었다.
 
그 중에는 꽤 쓸만한 소설도 있고 가십거리도 안 되는 허섭쓰레기 같은 것들도 있다. 어쨌든 이곳은 오래전부터 와보고 싶은 곳이었다. 그중 중편으로 썼던 줄거리가 생각난다. 척박한 환경에서 성실 하나로 버티던 여자가 공릉동 근처에서 알바를 하며 겪는 복잡한 인생 여정. 그녀는 대학 동기인 남자를 만나 잠시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리다 어느날 사기라는 걸 깨닫고 방황하고 좌절한다.
 
흔한 말로 돈에 속고 사랑에 우는…….
 
그러나 여자는 당황하지 않고 씩씩하게 삶을 개척한다. 당당하고 꿋꿋하게 그리고 마침내 새로운 사랑을 쟁취한다. 또 하나는 유복한 가정에서 자라나 평탄한 삶을 살아가는 여자 이야기다. 주인공은 대학시절 육사 생도와 그룹 미팅을 한다. 모두들 의기투합해 가까운 불암산으로 단체 산행을 간다. 그런데 그날따라 파트너가 몹시도 마음에 들었던 친구는 하이힐 뒤축이 부러지는 바람에 일행에서 제외된다.
 
집에 왔는데 오빠가 부아를 돋운다.
“너 오늘 미팅 나갔다 퇴짜 맞았지?”
“안 그래도 화가 나 죽겠는데 오빠 너 죽을래?”
“한강에서 뺨 맞고 종로에서 눈 흘긴다더니 왜 나한테 성질이냐? 누가 너더러 퇴짜 맞으래?”
“나 퇴짜 맞은 거 아니거든, 구두 뒤축이 부러졌단 말이야, 산에 올라가다가.”
“뭐? 산에는 왜 갔는데?”
“오늘 육사생도랑 미팅 했거든, 불암산 올라가다가 그만.”
 
친구는 그 이야기를 하며 그때 만난 육사 생도가 너무 근사해 마음에 들었다며 두고 두고 아쉬워했다. 다음은 불암산 근처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보헤미안의 이야기다. 운동권 출신의 남자는 공안사범으로 몰려 혹독한 고문 끝에 정신병을 얻는다. 그는 겉보기엔 자유로운 영혼을 꿈꾸는 보헤미안이지만 기실은 극심한 공황장애와 불안장애를 겪는 환자다.
 
준수한 외모와 해박한 지식은 강한 카리스마를 풍기지만 여자에겐 고통을 안겨줄 뿐이다. 그러나 여자는 그걸 사랑이라고 착각한다. 낯섦과 방황의 함수관계가 둘 사이에 펼쳐진다. 둘은 불암산 자락에 근거를 마련한 채 사랑에 빠진다. 사랑과 문학을 두고 많은 대화가 오간다. 간간히 찰나적인 기쁨이 두 사람 사이를 오가며 가교 역할을 한다.
 
그러나 사랑은 운명처럼 오래 가지 못한다. 남자의 정신병이 재발한 것이다. 그는 공안사범으로 잡히기 전 오랫동안 도피생활을 했다. 잠시도 한군데 머물지 못하고 늘 떠나야만 했던……. 낯선 곳만을 찾아 방황을 거듭하던 그는 그것을 예술적 감각에 의한 보헤미안 기질로 치부한다.
 
낯섦과 방황은 거듭된다. 이별 후 그들은 근거지인 불암산 자락을 떠나 각기 다른 환경 속에 살아간다. 그러다 어느날 여주인공은 신문기사에 난 그의 소식을 접한다. 신혼여행 중 정신병이 재발해 벌어진 보헤미안의 실종.
여주인공은 또다시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린다. 그리고 숙원인 문학을 향해 도전한다. 그 소설을 쓰고 나서 20년이 흘렀다. 나는 지금 두 보헤미안의 근거지였던 불암산을 향해 가고 있는 중이다.
 
버스가 담터를 지났다. 그런데 예전에 못 보던 광경이 나타났다. 사통팔달(四通八達) 새로난 도로를 따라 거대한 아파트 군단이 형성돼 있었다. 불암산을 중심으로 미니슈퍼와 군 부대, 수녀원 개울물 작은 동리 그리고 45번 버스 종점이 사라진 채 하나의 평면처럼 변해 있었다.
 
배밭 사이로 들어선 고기 음식점들도 보이지 않았다. 불암산은 저만큼 물러난 채 제지공장도 촬영소와 수녀원 뒷길에 난 울창한 숲길도 모두 사라졌다. 신축된 아파트 군락은 아늑하고 조형미도 뛰어났다. 잘려져 나간 불암산 자락이 신도시를 둘러싸고 조경역할을 하고 있었다.
 
세태보다 더 빠르게 변하는 게 신도시 같다. 버스는 천지개벽한 주변풍광을 담고서 경기도 남양주군 별내면을 지나 퇴계원으로 접어들었다.
신축도로를 따라 달리던 버스는 흰 눈천지로 변해버린 산야를 그대로 담아냈다. 내 소설 보헤미안의 고장이 뒤로 물러나면서 차창은 새로운 풍경을 나타냈다. 낡고 퇴락한 거리의 읍내 도시였다. 상가는 어두침침한 겨울의 민낯을 그대로 드러냈고 옛 풍광을 그대로 재현했다.
 
버스는 오밀조밀한 상가를 지나 낯선 곳을 향해 계속 질주했다. 핸드폰 기기를 파는 상가와 의류상가, 음식점들 사이로 인파가 보였다. 낯선 기운이 이질감이 가슴에 전해 오면서 소설 속의 문장이 떠올랐다.
소설 보헤미안 속의 두 주인공 민희와 이현수의 대화였다.
 
“전 일정하게 고정된 틀이 싫어요 그러한 틀 속에 내가 갇혀 있다는 느낌이 들 때면 난 무작정 이 도시를 탈출하고 싶어져요, 우선 아쉬운 대로 서울만 벗어나도 해방감이 느껴져요, 낯설다는 건 일종의 자유예요, 어쩌면 방종의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어요. 낯선 곳에서는 혼자 있어도 들킬 염려가 없어 안심이 돼요. 나를 알아 볼 이가 없다는 데서 은밀한 기쁨이 느껴져요. 보세요 이 도시 이 거리들  온통 처음 보는 것뿐이에요. 분위기도 전혀 새롭구요. 난 이제 더욱 안심이 돼요”
 
“맞아 낯설다는 건 완벽한 자유야, 온갖 수모와 고통으로부터의 탈출구지.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서로 통하는 보헤미안이지.”
 
거리에 어느덧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칙칙한 겨울하늘이 음습한 공기와 함께 처음 대하는 낯선 객지에 흐르고 있었다. 버스는 한떼의 청소년이 내렸다 타고는 계속 목적지를 향해 질주했다. 2차선 도로를 달려 상가와 산야를 끼고서 강줄기를 타고서 낯선 동리도 수없이 지났다. 낡고 퇴락한 촌락을 지났을 때 나도 모르게 말했다.
그래 바로 그거였어.
 
나는 버스에서 내려 불 켜진 곳을 향해 걸어갔다. 십자가 네온이 켜진 천주교회였다. 동리에서도 한참 떨어진 산기슭에 자리한 수양원 같은 곳이었다. 성모마리아상이 높게 서서 오는 사람들을 미소로 맞이하고 있었다. 저녁 미사가 끝났는지 교인들이 성당 문을 나서는 모습이 보였다.
 
그때 나는 환시를 보았던 걸까? 성의를 입은 신부가 보헤미안의 남자 주인공과 흡사했기 때문이다. 항상 변화를 꿈꾸며 이상(理想)의 세계에 살고 싶어하던 이현수. 그는 시인이기도 했지만 집안대대로 카톨릭 신자이기도 했다. 도피시절 시골의 성당에 숨었다가 들키는 바람에 담당신부가 곤욕을 치렀다는 이야기가 생각났다.
그렇다면 여기가 바로 그곳?
 
기억 속에서 상상이 출몰을 거듭했다. 세월의 간극을 두고 사실인지 내가 꾸며댄 소설의 한 대목인지 영 헷갈렸다. 어둠과 달빛이 내 소설적 상상력을 부추기고 있었다. 그럴수록 나는 놀란 토끼눈이 되어 신부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신부는 의아한 눈빛으로 나를 한참 바라보더니 사제관 쪽으로 걸어갔다.
 
사십 후반쯤 됐을까. 신부치고 체격과 외모가 준수했다. 하긴 내 소설 속 인물 이현수가 살았다면 아마도 저와 비슷했으리라. 내가 또 소설을 쓴 것일까.
 
나는 가끔 소설과 현실을 착각할 때가 많다. 현실감각이 둔해지고 상상력과 영감이 물줄기처럼 차오를 때다. 그때는 내 주변이 온통 소설 소재감이 되면서 시나리오 무대가 된다. 닥친 현실 문제를 놓고 엉뚱하게 상상력을 갖다 붙이다 낭패를 보기도 한다. 주변사람들을 시나리오의 등장인물로 착각하며 대사를 쓴 적도 수없이 많이 있다.
 
상상력도 지나치면 해악이 된다는 사실을 미리 깨달았어야 했다. 사제관으로 걸어가는 신부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또다시 소설 문장을 떠올렸다. 그때 남자 주인공 이현수는 분명 괌으로 신혼여행을 떠났고 첫날 밤 정신병이 재발해 실종되었다. 여주인공 민희는 직장에 근무하던 중 그 소식을 접했다.
 
그 소설을 쓴 지가 20년이 지났으니 그들의 나이도 중년으로 접어들었으리라. 나는 손가락으로 20이란 숫자를 허공에 그리고는 성당 내부를 구경하기 시작했다. 시골 성당이라 그런지 규모는 작아도 아늑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걸음을 옮기는데 발밑이 미끌했다. 쌓인 눈이 녹지 않아 빙판을 이루고 있었다.
 
성당 문을 나서는데 사방이 온통 눈천지였다. 올라갈 땐 잘 몰랐는데 언제 이렇게 눈이 쌓였던 걸까. 그러고 보니 발길이 계속 미끄럼을 타고 있었다. 두 팔이 허공에서 몇 번인가 춤을 추는가 싶더니 어느 샌가 버스정류장 근처로 가고 있었다. 문득 배가 고팠다. 시간을 보니 저녁 7시가 지나 있었다.
 
주변에 음식점이 보였다. 비닐포장이 쳐진 간이음식점이었다. 음식점이라기보다 포장마차에 가까웠다. 청소년들이 입을 호호 불며 어묵 꼬치를 먹고 있었다. 맞은편에 청기와라는 상호 아래 한식전문점이 보였다. 시골 음식점 치고 규모가 꽤 커 보였다. 윈도우 안에는 불판이 놓인 탁자가 여럿 있었다.
 
말이 한식이지 고기전문점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앞치마를 두른 중년여자가 주방 쪽에서 나왔다. 내게는 눈길도 돌리지 않더니 한쪽 테이블에서 식사 중인 커플에게 다가가 더 필요한 게 없냐고 묻는 눈치였다. 그들이 없다고 하자 비로소 내게로 발길을 돌리며 물었다.
 
“뭘로 해드릴까요?”
그때 내 가슴 속에서 활활 타오르는 불길이 있었다. 분노. 그리움. 낯섦. 방황의 거센 불길이 목을 태울 듯이 달려들었다. 나는 턱끝으로 메뉴판을 가리키며 말했다.
“냉면 되요?”
“네? 이 추운 겨울에 무슨 냉면?”
여자가 주문을 받으러 왔다가 무슨 황당한 일을 당한 것처럼 되물었다.
“겨울이라서 대신 칼국수는 어떨까요?”
 
여자의 입가에 비웃음이 감돌았다. 표정도 여간 얄미운 게 아니었다. 이 엄동설한에 냉면을 시키다니 어떻게 된 거 아닌가 여자의 눈빛이 말하고 있었다. 기분 나빠 그냥 나오려는데 커플들이 하는 이야기가 귓가에 들려왔다.
 
“그러니까 오빠는 여기까지 온 이유가 겨우 옛 여자를 찾겠다 그거였어?”
“누가 그렇대, 그냥 소식이나 알 수 있을까 해서지.”
“알아서 뭘 할 건데? 오빠 지금 소설 써?”
“너 어떻게 알았냐, 내 본업이 소설이란 걸.”
“지금 농담이 나와? 제정신이야?” “너 좀 심한 거 아냐? 옛 소식을 물었기로 이게 막 사람을 무슨 또라이 취급하고 있어.”
“아니 이제 와서 이십 년 전 소식을 물으니까 그렇지, 그렇게 궁금하면 직접 찾아가 보시던가.”
“그럴 것 같으면 내가 왜 너한테 말하겠냐, 지금 거기는 신도시로 변했잖아.”
“그럼 거기가 불암산 동네구나.”
“응 그래.”
 
그들의 대화를 듣고 보니 둘은 커플이 아닌 남매거나 절친 사이 같았다. 그런데 들을수록 내용에 호기심이 당겼다. 20년 전이란 숫자도 그렇고 소설가라는 말도 그랬다. 두 남녀는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다가 내 쪽을 바라보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때서야 나는 두 남녀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말투로 보아서는 30대 초반 같았는데 얼굴을 보니 40대를 훨씬 상회했다. 나는 주방에 가 직접 음식을 주문했다.
 
“삼겹살 정식 주세요.”
음식이 나오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이다. 남녀의 대화를 좀 더 들을 필요가 있었다. 어쩌면 오늘 내가 길을 떠난 목적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야기를 자세히 들어보니 남녀는 오래된 지인관계였다. 튀어나오는 말마다 20년 전과 오늘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발견되었다.
 
여자가 하는 말은 현실적이고 진지한데 비해 남자가 하는 말은 허무맹랑하고 농담조가 많았다. 그에겐 도무지 현실감각이 없어 보였다. 이윽고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나는 고기 한점을 집어 입어 넣고는 여전히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이제 두 남녀는 취해 혀 꼬부라진 소릴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오빠 니는 제정신이 아니라니까 왜 또 정신병이 도진 거가?”
여자는 술잔을 흔들더니 남자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그 말에 남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너 그 소리 한번만 더하면 니 죽고 나 죽는다.”
“그래 죽여라 죽여 어디 한번 그래 봐라.”
여자도 지지 않고 대들었다. 남자가 주먹을 들었는가 싶었는데 이내 풀이 죽었다.
 
“오빠 니는 내 맘을 그렇게 모리나 와 와 그러는 건데.”
여자의 말투가 사투리로 변하면서 사정조로 나왔다. 아! 그러고 보니 둘 사이는 남매는 아니고 그렇다고 썸을 타고 것도 아닌 묘한 사이였다. 여자가 일방적으로 남자에게 대시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여자는 왜 정신상태도 불안한 남자를 좋아하는 걸까. 잃어버린 옛 사랑이나 추억하는 남자에게.
 
밥그릇이 거의 비워질 무렵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계산을 하는데 두 남녀가 내 등뒤에 서 있었다. 여자가 남자의 어깨에 기댄 채 지갑에서 돈을 꺼내고 있었다. 저런 한심한… 나는 속으로 욕했다. 저런 등신. 어디 남자가 없어서.
 
버스 정류장 앞에 섰다. 거리도 도로도 한산했다. 시골 버스는 자주 오지 않는다. 눈이 녹지 않은 거리는 빙판이 져 미끄러웠다. 두 남녀는 서로 부둥켜안은 채 저만큼 가고 있었다. 그들 뒤에서 소설의 실마리가 보이다 사라졌다. 찬바람이 목과 귓속으로 마구 들어왔다. 버스정류장에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벌써 불 꺼진 상가도 몇 보였다.
 
서울까지 가는 버스노선은 많았다. 광역버스가 아닌 시내버스였다. 장거리 운행치곤 노선도 경비도 괜찮았다. 어둔 하늘에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종종걸음을 치며 연신 사거리 쪽을 바라봤다. 아무래도 버스가 연착될 모양이었다. 핸드폰 전원을 켜 보니 8시였다. 문자메시지가 와 있었다. 모 문예지에서 보낸 원고청탁이었다.
 
등단 초기에는 우편으로 원고청탁이 오더니 다음엔 이메일과 쪽지를 통해서 왔다. 그러더니 언젠가부터 핸드폰 문자메시지로 오기 시작했다. 참 편리한 세상이다. 답 문자를 보낼까 말까 망설이는 사이 버스가 도착했다.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가 승차했다. 뒷자리에 앉아 창밖을 보니 눈은 함박눈으로 변해 있었다.
 
온 세상을 눈으로 덮으려는지 천지가 하얗게 변해가고 있었다. 낭만과 행복이란 단어가 공중에 붕붕 떠다니는 것 같았다. 이보다 더 아름답고 행복한 정경은 없으리라. 사람들은 모두 행복한 눈빛으로 쏟아지는 눈을 감상했다. 영화의 한 장면을 바라보듯. 이런 날은 소설보다는 시나리오가 더 제격이다. 휠씬 더 잘 떠오를 테니까.
 
그림 같은 풍경들이 차창 밖으로 휙휙 지나갔다. 어둔 들녘을 걸으며 데이트 하는 젊은 연인들이 포옹하는 장면도 눈에 띠었다. 길가에 차를 세워 놓고 핸드폰으로 통화하는 장면도 여러번 지나갔다. 산야는 점점 눈발에 쌓여가고 있었다. 길가의 가로수도 상가도 인가도 점점 눈속에 침식돼 갔다.
 
정말이지 아름다운 시골밤 풍경이었다. 사람들은 버스에 설치된 영상화면을 보거나 잠에 떨어져 있었다. 봇짐을 안은 시골 노인들도 흔들리는 버스에 몸에 맡긴 채 곤히 잠들어 있었다. 이제 버스는 별내면 경계선을 넘고 있었다. 지하 굴다리를 나온 버스가 좁다란 이면도로로 접어들었다.
이제껏 조용했는데 뒷자리에서 통화를 하는지 말소리가 들려왔다.
 
“민희, 나 현수야 혹시 나 기억할 수 있겠어?”
남자의 목소리는 아주 절실했고 뭔가 잔뜩 기대감을 갖고 있었다. 못 알아들었는지 저쪽에선 반응이 없는 것 같았다. 잔뜩 귀를 기울이고 있다가 나는 화들짝 놀랐다. 민희? 현수? 가슴 속에서 쾅! 하고 거대한 울림이 들려왔다. 내 소설 보헤미안에 나오는 두 주인공 이름이 아니던가.
 
고개를 돌려 남자의 얼굴을 확인하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다. 목이 경직된 채 움직이지 않았다. 혹시 아니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보다도 그가 나를 알아보게 될까봐 두려움으로 가슴이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나는 벗었던 모자를 깊게 눌러 썼다. 청각은 여전히 통화 내용에 가 닿았다.
 
“대답 안 해도 돼. 벌써 이십 년이란 세월이 흘렀으니까 기억 못한다 해도 할 말이 없어, 그동안 민희를 찾기 위해 여러번 불암동을 갔었어, 이미 떠나고 없더군, 사실 몇 년 전만 해도 혹시나 하고 찾아가 보았는데 역시나……….”
남자의 목소리가 울먹거리는가 싶더니 짧은 신음이 들렸다.
 
“난 당신과 헤어진 뒤 주로 바닷가 지역을 떠돌며 살았지. 불안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 어쩔 수가 없었어. 쫓기는 심정으로 늘 새로운 곳을 찾아다녔지. 어딘가엔 내 안식처가 있을 것 같았어. 내가 안심하고 숨을만한 곳, 피난처 요새 같은 곳 말야. 끊임없이 방황하면서 문학에 심취하고 여러 직업도 전전했지. 그러던 어느날 남쪽 바닷가에서 필이 꽂히는 한 여자를 만났지, 직감했어 운명이구나.”
순간 속에서 천불이 나는 것 같았다.
저런 망할 XXX…….
 
욕설이 생각나면서 분노가 머리를 태울 듯이 달려들었다. 신문기사에 읽었던 그녀에 대한 기사가 눈앞에 쫙 펼쳐져 보이는 것 같았다.
 
“그 여자가 가진 부와 힘이 그동안 힘들었던 나를 편안하게 해줄 거라 믿었지, 새로운 환경이 나를 다른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지 않을까 기대감도 있었어. 내게도 변화라는 센서 기능이 작동해 주지 않을까, 그래서 결혼을 강행했던 거야. 그런데 그게 그게 사단이 날 줄 누가 알았겠어. 사실 말이지 그 여자는 내게 평안을 준 적이 한번도 없었어, 그런데 왜 나는 그런 그릇된 판단을 했던 걸까.”
그러면 그렇지.
 
“난 한동안 용인에 있는 정신과 신세도 졌고 그리고 잠적 또 잠적 죽을까도 여러번 고심했지, 그렇게 어둠속을 헤매다 어느날 한 빛줄기를 발견했지.”
나는 순간 심호흡을 멈추었다. 빛줄기라니? 지금 소설을 쓰려는 것인가.
 
“내 맘에 평안과 만족을 주시는 분, 그분을 만난 거야. 지존하신 그분은 내게 가장 안전한 피난처와 산성이 되어주셨고 유일한 안식처가 되셨지. 그분을 만나고 난 치유를 경험했지. 그후론 다시 용인에 가지 않았어, 진정한 자유를 찾았거든.”
자유? 나는 조금 전에 갔던 천주교회 십자가 불빛을 생각했고 신부의 얼굴을 떠올렸다.
 
“민희, 나는 지금 우리가 함께 기거했던 그곳으로 가고 있는 중이야. 그런데 불암산 말고는 다 변해버렸더군. 불암산도 반이나 잘려나가고 신도시가 들어섰어, 우리가 즐겨 걷던 수녀원 뒷길의 울창한 숲길도 개천가 따라 걷던 산책로도 제지공장도 군 부대도 다 사라졌군, 이런 천지개벽도 또 없지 싶어, 촬영소 주변의 미니 슈퍼도 중국음식점도 우리가 가끔 가서 기도하던 교회도 다 없어졌더군, 내가 얼마나 그리워하던 곳인데. 이곳이야말로 우리의 꿈과 사랑이 있던 유일한 장소인데, 민희 내 말 듣고 있지, 전화 끊지 마, 이거 음성녹음으로 말하는 거야. 날보고 뻔뻔하다 말해도 어쩔 수 없어. 난 살면서 당신을 잊은 적이 한번도 없었어, 잘못된 선택으로 결혼예식을 치렀던 그 순간마저도. 나 참 뻔뻔하지.”
 
그래 너 첨 뻔뻔하고 가증스럽다. 너 혹시 다중인격자 아니냐? 하마터면 욕설이 튀어나올 뻔했다. 또다시 소설 속 문장이 떠올랐다.
“민희 이제 나를 떠나도 좋다.”
그렇게 나를 밀어놓고 새 여자를 만나 안정을 꿈꾸다니, 이런 적반하장도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지난 세월동안 난 끊임없이 내재된 불안과 싸웠지, 매번 그 전쟁에서 넘어졌는데 이젠 달라, 이길 수 있는 힘이 생긴 거야. 내 안에 힘과 능력을 공급해 주시는 그분이 내게 창조의 힘과 함께 참된 만족과 기쁨도 주셨지. 나는 그분 한분만으로 만족하기에 더이상 새것을 찾아 방황하지 않아, 그리고 죽음에 대해서도 담대할 수 있어. 내세에 대한 확신이 생겼거든.”
아! 그 순간 나는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는 기분이었다. 전혀 상상하지 못한 의외의 결과였다.
 
“사람들은 상황이 좋을 때는 서로 잘 지내다가도 사업이 부도가 나거나 실직을 하는 등, 어려운 닥치면 등 돌리고 외면하기 일쑤지. 내 친구들 중 사업하는 중견실업가가 있었는데 어느날 IMF라는 태풍을 만난 거야. 친구 일가친척은 물론 가족들도 싹 외면하고 돌아서더래, 핸드폰까지 수신거부로 해놓고, 친구는 충격으로 자살기도까지 했었지. 그때 나는 친구를 내가 하는 출판사로 끌어들여 영업사원으로 채용했지. 친구 빚 문제는 파산선고로 해결했고. 사람들은 필요하면 이용하고 망하면 외면하고 멸시해, 그러나 사람은 우리를 외면해도 끝끝내 나를 도와주시는 분은 오직 전능주뿐이야.”
 
나는 그즈음 숨을 내리쉬었다. 아! 저 사람이 또 소설을 쓰는구나. 역시나 직업은 못 속이는구나. 버스 안 승객들은 모두 스마트폰에 빠져 있거니 잠들어 있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조금 전에 분명히 별내면에 들어섰는데 아직도 불암산이 보이지 않았다. 그 주변만 맴돌뿐이었다. 여전히 눈은 폭풍같은 기세로 내리고 있고 산야는 하얗게 색칠을 당하고 있었다.
 
남자는 여전히 핸드폰에 대고 음성녹음 중이었다. 내가 듣던지 말든지, 심지어 내가 소설 속 여주인공이 되어 자신을 비난하고 있는 줄도 모른 채. 생각 같아선 남자의 얼굴을 똑바로 보고 심한 대거리라도 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너 때문에 민희가 얼마나 많은 마음 고생을 했는지 아느냐고.
그런데 이제 와서 그리움이라니, 이십 년이란 세월이 너한텐 장난이었냐고.
 
“내가 용인병동 속에 갇혀 있을 때였지, 그날따라 어둠 깊숙이 침몰돼 있는데 내 귓가에 음악이 들려왔어 누군가 내 마음을 열고 들어오는데 그건 아주 환한 빛이었지. 나중에야 알았어. 정신병동에 전도대가 찾아왔는데 인근 교회에 있는 봉사자들이었어, 그들이 찬양을 부르는데 가슴속에 있는 어둠이 싹 빠져나가면서 빛이 내 마음을 한가득 차지하는 거였어.”
「어두운 후에 햇빛 오며 바람 분 후에 잔잔하고 소나기 후에 햇빛 나며
수고한 후에 쉼이 있네, 고통한 후에 기쁨 있고 십자가 후에 면류관과
숨이 진 후에 영생하며 이러한 도는 진리로다.」
순간이었지, 빛은 어둠을 몰아내는 가장 강력한 무기라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지. 그건 바로 신의 사랑, 신적 의지였어, 그가 내게 의지를 준 거야. 사랑과 용서라는 의지를. 그후에도 어둠은 나를 여러번 찾아왔었어. 하지만 난 이전처럼 당하지는 않았어. 왜냐하면 그걸 이길 수 있는 힘이 생겼거든. 한마디로 난 담대해진 셈이지, 그리고 사랑은 두려움을 이기는 또다른 무기가 되더군. 사랑이야말로 두려움을 이기고 평안을 갖다주는 가장 큰 힘이야, 그분은 그런 초월적인 힘을 공급해주는 분이신 거야, 진즉 그분을 알았더라면 그렇게까지 헤매고 다니지 않았을 것을. 민희, 난 이제 자유해, 더 이상 방황은 없어, 내가 이곳에 온 것은 당신이 생각나서야. 나를 만나준 그분을 당신도 만나길 바래.” 나는 그 순간 새로운 대사를 썼다.
 
“사람이 살다보면 옛일은 잊게 마련이라고 하지만 그렇지 않아, 기억은 그리움은 없어지지 않아, 난 그동안 안정된 평화를 찾아 헤매고 다녔지, 이 세상 어딘가에 숨 쉬고 살고 있을 당신을 만나 내 마음을 꼭 전하고 싶었어 당신은 내게 주신 신의 선물이었어.”
그러나 내 귓가에 들려온 건 전혀 의외의 말이었다.
 
“민희, 이제 나는 진정으로 당신을 내 맘속에서 떠나보낼 수 있을 것 같애. 그래서 오늘 마지막으로 이곳을 찾아온 거야. 더 이상 과거에 묶여있다간 미래로 나갈 수가 없어. 미래는 현재의 선택과 직결돼 있거든.”
넌 나를 또 한번 죽이는구나. 이십 년 전에도 그런 식으로 나를 죽이더니 왜 또 말장난이 하고 싶어진 거냐? 그리고 또 의심했다. 저 사람은 아직도 완치되지 않았다. 신의 사랑, 신적 의지 운운하면서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다. 새 여자를 만나 다른 삶을 꿈꾸기 위해 이별을 선언하고는 방황 운운했던 것처럼.
 
도대체 너의 진실과 속셈은 무엇이냐? 제 맘대로 떠났다가 다른 여자와의 삶을 계획했다가 실패하니까 이제 와서, 그것도 20년이나 지난 지금 와서 사랑 그리움 운운하더니 결국엔 또다시 떠나겠다? 슬금슬금 부아가 나기 시작했다. 참 편리한 사고방식을 가진 남자이다. 사랑도 이별도 배반도 재회도 모두 일방통행식이다. 그런 그의 방식에 놀아난 여주인공 민희는 더욱 한심하다.
무책임한 남자에게 사랑이라는 기대를 걸어 놓고 상처와 방황을 거듭하는 민희는 소설 초반에 나오는 버림받은 시골 여자의 모습과 똑같은 양상이다. 허무맹랑한 보헤미안의 논리에 함께 휘말리는, 나는 또 소설 속의 문장을 떠올렸다.
 
「우리는 자신의 진짜 모습과 가짜 모습이 전혀 분별되지 않는 아주 낯설고 외진 곳을 좋아한다.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은 곳. 정체를 들킬 염려가 없어 더욱 안심이 되는 곳. 창작열이 불꽃처럼 활활 타오르는 곳이어야 한다. 우리는 끊임없이 여행을 떠나며 보헤미안의 꿈을 재현할 것이다」
 
차창 밖을 내다보았다. 밖은 칠흑 같은 어둠속에 쌓이는 눈으로 시간이 정지된 것 같았다. 버스는 아무리 달려도 이정표 하나 보이지 않았고 어둠과 공존한 공간만이 보일 뿐이었다. 하늘과 맞닿은 공간은 시간과 함께 정착지도 모른 채 계속 달려가고 있었다. 이제 버스는 막다른 골목을 향해 가속페달을 밟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남자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대사가 끊긴 걸 보니 남자는 잠들었거나 이미 내렸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뒤를 돌아보려는데 역시나 고개가 빳빳이 굳어 움직이지 않았다. 주변을 둘러보니 승객들은 모두 잠들어 있었다. 스마트폰을 쥔 채 잠이 든 젊은이도 있었고 아기를 업은 채 잠든 여자도 있었다.
 
모두 꿈나라로 직행한 모양이군. 그런데 왜 이 버스는 중간에 한번도 쉬지 않고 계속 달리기만 하는 걸까? 그리고 왜 내 몸은 움직이지 않고 생각만 하는 걸까? 도대체 이 버스는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그때였다. 내 뒤에서 요란한 전화벨 소리가 들렸다. 벨소리는 버스 안을 통째로 흔들듯이 엄청나게 컸다.
 
그런데 그건 사이렌 소리 같기도 하고 엠뷸런스 소리 같기도 했다. 전화벨 소리 하나 특이하게 해놨네. 그런데 왜 전화를 받지 않는 거지 시끄러워 견딜 수가 없군. 당장이라도 남자를 흔들어 깨우고 싶었다. 이봐요 빨리 전화 받지 않고 뭐하는 거예요? 다른 사람들한테 방해된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벨소리는 여전히 울려대고 있었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군. 나는 드디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몸이 차꼬에 묶인 듯 꼼짝 않는 것이었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걸까? 그런데 자세히 보니 승객들도 운전기사도 몸이 굳어 있는 것 같았다. 모두 잠든 채 미동도 않는 걸 보면.
 
그러고 보니 버스는 달리는 게 아니고 그대로 정지돼 있었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것일까.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상황을 인식해야지. 그런데 정신을 차리면 차릴수록 자꾸만 혼미해져 갔다. 그때였다. 내 손에 미끈하게 잡히는 게 있었다. 새빨간 핏덩어리였다.
그 피가 내 옆구리에서 자꾸만 새어 나오고 있었다. 얼굴에서도 손에서도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아악!
 
내 입에서 비명이 터지고 말았다. 그러나 소리는 공중에 흡수된 채 들리지 않았다. 아니 내 입안에서만 감돌뿐이었다. 도대체 이 상황이 어떻게 발생한 걸까? 나는 무엇보다 뒤에 앉은 남자가 궁금했다. 방금 전까지 내 소설 줄거리를 외우며 그리움을 하소연하던, 그런데 눈앞이 자꾸만 뿌옇게 변하면서 의식이 가물거렸다.
 
나는 이내 혼곤한 잠속으로 추락했다. 꿈속에 많은 길들이 보였다. 아스팔트 직선도로로 뚫린 광활한 빛이 보이는 길과 비포장도로 울퉁불퉁한 자갈길과 가시덤불 숲길 속에 구름이 보이는 산길도 있었다. 험한 등산로 끝에 찬란한 햇빛이 보이는 길도 보였고 가파른 오솔길 너머 아슬아슬한 벼랑이 보이는 십자로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해안도로를 따라 여러 사람들이 한꺼번에 달려가는 길도 있었고 혼자서 무거운 짐을 진 채 끙끙대며 올라가는 시지프스 같은 험한 길도 있었다. 그러나 길은 모두 한곳으로 나 있었다. 영원이라는 길이었다. 사람들은 모두 그 길을 향해 자신도 모르게 끌려가고 있었다.
그 길 끝에서 민희와 현수가 나를 향해 손짓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 뒤로 햇빛과 구름이 산 아래 세상을 비추고 있었다.
 
언젠가 기차 레일을 바라보며 길이란 제목으로 글을 쓴 기억이 났다. 수없이 갈라진 레일은 인생행로와 같이 선택과 책임이라는 의미를 엄숙히 묻는 거라며 경고성 메시지를 날린 적이 있다. 그때 영원이라는 단어도 함께 썼던 것 같다. 그런데 그 다음은 무엇이라 썼는지 통 기억이 안 난다.
 
민희와 현수를 향해 나가는데 주변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비명 같기도 하고 싸우는 소리 같기도 하고 걱정과 근심이 잔뜩 서린 말소리 같기도 했다. 내 몸이 누군가에 의해 거칠게 흔들리고 있었다. 정신 차리라고 일어날 수 있겠느냐고 누군가 내 귓가에 대고 계속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눈앞이 환해지면서 사물이 보이기 시작한 것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침대 위에 누워 있는 내 모습이었다. 다음은 내 앞에서 왔다 갔다 하는 의료진과 나와 동승했던 승객들이 내 침대 옆에 누워있는 모습이었다. 부상 정도가 경미한 걸로 보아 대형사고는아닌 것 같았다.
 
그러니까 버스가 퇴계원을 막 벗어났을 때였다. 갑자기 차량이 왼쪽으로 쏠리는가 싶더니 쾅! 소리가 났다. 커브 길에서 마주 오던 차량과 버스가 맞부딪친 것이다. 간단한 접촉사고였지만 피해는 만만치 않았다. 사고 차량이 거의 반파되다시피 했는데 부상자가 적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다친 승객들은 시골에서 농사지으며 힘들게 살아가는 촌로들이었는데 그들은 내게 걱정스런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그 관심어린 눈길에 저절로 눈물이 났다.
 
그런데 내 옆자리에 누운 남녀는 유난히 많은 앓는 소리를 냈다. 다리를 다쳤는지 붕대를 친친 감고서 거푸 의사와 간호사를 불러댔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상대를 걱정하는데 잉꼬부부도 그런 잉꼬부부가 없었다. 다음 순간 나는 내 뒷자리에서 음성녹음으로 통화를 하던 남자를 떠올렸다.
그는 틀림없이 내 소설 속 주인공 이현수였다. 민희를 향한 그 애저린 호소가 한서린 사랑고백이 생각났다. 옆 침대에 누운 환자에게 물었다.
 
“혹시 제 뒷자리에 앉아 계시던 분은 어떻게 되었나요?”
“아줌씨 뒤에 앉은 사람이냐뇨? 아무도 없지 않았나?”
“아니요, 분명히 있었어요. 제 뒤에서 길게 음성녹음으로 통화했었어요.”
“혹 꿈을 꾼 건 아니슈? 버스 안에 승객이라곤 아줌씨랑 나 그리고 노인네 몇 명뿐이었는데 기억 안 나슈?”
그는 옆자리로 돌아누우며 귀찮은 듯 말했다. 시덥잖게 별 걸 다 묻고 있네 하는 표정이었다. 그러자 그 옆 침대에 누운 젊은 남자가 말했다.
 
“아줌마 생각났어요, 아줌마 뒷자리에서 계속 전화통화 하던 아저씨 말이죠? 방금 전에 퇴원했어요, 자기는 다친 데가 없다면서 어떤 아줌마가 오더니 같이 나가던데요.”
남자는 아무리 봐도 멀쩡해 보였다. 다친 척 연기하는 건 아닌지 의심될 정도였다.
“그런데 그 아저씨는 왜 찾는 건데요? 혹시 아는 사이세요?”
혹시라는 말에 나는 잔뜩 긴장했다.
 
“아니 그게 아니고 뒤에서 통화 하는데 자꾸 눈물이 나서.”
“그 아저씨가 통화 하는데 왜 아줌마가 눈물이 나요?”
“통화 내용이 그랬거든요.”
당황한 나는 링거병에 달린 주사바늘을 빼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옷을 갈아입고 나자 나는 듯이 병원을 빠져 나왔다. 사방에서 객지의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난생 처음 보는 곳이었다. 시골 읍내 치고 병원 규모가 꽤 컸다. 요즘은 웬만한 소읍에만 가도 문화시설이 대도시 못지 않다.
 
거리마다 각종 브랜드 의류상가와 음식점을 비롯한 위락시설과 병원이 들어서 전혀 불편함이 없다. 각 동리마다 교통편이 발달돼 있고 은행 전자대리점 대형마트 학원 등이 주거민들의 편의를 도와준다. 점점 갈수록 도시와 농촌의 간격이 좁혀지고 있는 걸 실감한다.
버스와 전철도 연이어 도착하고 상가의 불빛도 대도시의 그것과 똑같다. 나는 읍내 거리를 걸으며 누군가를 급히 찾고 있었다. 시멘트 담벼락이 있는 골목길까지 찾아 헤매며 급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처음 보는 거리 풍경은 옛 정취를 일깨우고 있었다. 나는 길을 헤매며 소설적 상상력에 집중했다.
 
그러다 미친 발걸음으로 전철 역사를 향해 무한속도로 달려갔다. 달려가는데 객지의 성난 바람이 내 갈기를 물고 늘어졌다. 역사(驛舍)는 가파른 계단 위에서 승객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웬일인지 에스컬레이터는 멈춘 채 작동이 되지 않고 있었다. 나는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계단을 단숨에 뛰어 올랐다.
 
카드를 판독기에 대는데 전광판에 불빛이 보였다. 전동차가 막 역내로 진입하고 있었다. 발걸음을 전동차 안으로 드미는 순간 나는 보았다. 지난 밤 꿈속에서 보았던 수많은 길들을. 그리고 내 뒷자리에 앉아 음성녹음으로 길게 이야기하던 남자의 실체를. 전동차는 출발하자마자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인생여정에 지친 발걸음들을 빠르게 빠르게 대도시로 옮겨주고 있었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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