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박한 기원(祈願)
해마다 초파일이면 연등공양은 주저 없이 계속되고 있다. 사찰로 이어지는 길 양편으여러 모양의 등이 걸리고 한동안 철거되지 않는 광경을 보게 된다. 연등행사는 절에서 불자들만의 불교의식으로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으로 통하고 있지만 신라 때부터이어 온 국가적 행사의 하나라는 사실을 모르는 이들도 많을 것이다.
신라 진흥왕 12년 팔관회(八關會)의 개설과 함께 국가적인 행사로 연등회(燃燈會)가
열리게 되었다. 등불을 밝혀 다과를 베풀고 임금과 신하가 함께 즐기며 부처님을
즐겁게하여 국가와 왕실의 태평을 빌었다고 한다. 문헌에 따르면 신라에서는 정월 보름에
관등(觀燈) 의식이 있었는데 이는 연등을 보면서 마음을 밝힌다는 것이며 고려시대로
계승되어 오늘날의 초파일 연등행사로 이어지고 있다. 고려시대에는 연등도감(燃燈都監)
이라는 관청까지 설치되었다고 하니 그만큼 국가적 중요 행사로 관리되었음을 알 수 있다.
지금부터 30년 전 4월 초파일에 사진작가인 직장의 동료와 함께 서울 견지동 조계사에
들린 일이 있다. 절 마당은 물론이고 한길로 이어지는 입구며 담장 언저리며 어디
빈틈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촘촘하게 매달린 수많은 등을 보고 많이 놀랐다.
수 백 개도 아닌 수 천 개도 아닌 더 많을 것 같은 등 아래를 거닐면서 이토록 많은 기원을
들어 줄 그 절대한 주인은 어디에 있을까를 생각했다. 수많은 등을 머리 위에 달고 그
아래에 모인 사람들의 표정은 진지하고 겸손하였다. 합장하고 고개 숙여 간절히 기구하는
자세는 삶과 죽음을 숙명으로 받아드리는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참 모습 그것이었다. 동행한
동료는 열심히 사진을 찍고 있었는데 그의 생각은 나와 달랐다. 머리 위에 장엄하게 펼쳐진
현등행렬(懸燈行列)과 각자의 표정을 갖고 갈구하는 사람들 속에서 광학예술의 영상물을
찾느라 여념이 없었다. 같은 장소에서 이리 저리 방향과 자세를 바꾸어 가면서 주위의 시선도
동행한 나도 관여치 않고 자기 일에 집중하고 있었다. 주위에는 아이들과 함께 온
할머니 할아버지도 있었고, 청춘남녀도 있었다. 합장하고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조심스럽게
걷는 사람도, 하늘과 땅을 번갈아보면서 머리를 상하로 움직이는 사람도, 탑을 향해 눈동자를
고정시키고 서 있는 사람도 모두 다 한결 같은 바람이 서리어 있는 듯 보였다. 동료는
우주만물 속 인간의 겉모습을 사진기에 담고, 나는 인간 내면의 가치를 찾고 있었다. 내가
찾고 있는 인간의 가치란 무엇이란 말인가. 각자의 자기세계를 운명으로 수용하면서 운집한
많은 중생들 속에서 나는 과연 무엇일까. 그때, 불현듯 어머니가 떠올랐다. 왜 하필
어머니였을까. 아버지가 아니고 왜 어릴적 어머니 모습이었을까. 지리산 동북쪽 한적한
시골에서 내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그때, 그 어둡던 성장체험에서 어머니의 모습은 언제나
선명하였고, 나의 존재감을 일깨우는 뜨거운 자극상(刺戟像)이 되었다. 자신의 존재를
절실하게 통찰하는 일에서 인간의 가치를 찾는 것은 나의 인생철학이 된지 오래다. 그러한
내면의 핵심에 어머니가 있었고, 어머니 안에는 불심이 자리하고 있었다. 어린 시절에는
미처 감지하지 못했었고 해방 후 학교교육을 받으면서 미신이라고 규정하고 자랐다.
어머니는 가끔씩 인근의 절에 가기도 하였지만 내방한 스님께 시주하면서 가족들 이름
써서 등을 달아 달라고 하는 일이 더 많았다. 어머니는 뒤안의 돌담 아래서 축원, 축수하였다.
큰말(大斗) 크기의 사각형 등이 캄캄한 어둠 속에서 가물거렸다. 두 손바닥 넓이에
한 자 높이의 사각형 목조 등은 하얀 창호지로 발라졌고, 퇴색되어 누리끼리하게 빛이
바랬고, 찢겨진 부분은 덧씌워 새로 발라진 어설픈 등이었다. 등 안에는 호롱불이 켜지고
움직일 때는 불꽃이 힘없이 가물거렸다. 첫닭이 홰를 치고 목청껏 울어대는 이른 새벽에
우리 집 등불이 놓인 곳은 뒤안의 돌담 아래 냉장고 크기의 자연석 바위였다. 이 천연의
단석(壇石)에서 빛바랜 창호지 등불을 밝히고 정갈한 자세로 기원하였다. 어머니가 입속
말로 간구하는 내용이 궁금하였고, 미신이라는 생각 때문에 부끄러웠다. 간헐적으로
내가 들었던 내용 중에는 호주(아버지)의 함자도 형과 나와 동생들 이름도 끼어 있었고,
부처님께서 돌봐 주시도록 빌었다. 어머니는 정월 보름과 4월 초파일에는 더없이 진지하였다.
찬물로 목욕하고 새 옷을 갈아입고 2,3일 전부터 몸도 마음도 조신하는 모습을 눈치챌 수 있었다.
축수 기원이 끝나고 날이 새면 언제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듯이 평상심의 일상으로 돌아왔고,
버지와 우리 형제자매는 어머니의 기원하던 모습을 보지도 듯지도 못한 때가 많았다.
이러한 어머니의 태도는 너무도 단순하였고, 개인적이었고, 순수하고 소박하였지만 나에게 전달된
울림의 영향은 무한하였다. 어머니의 소박한 단순성은 삶의 문제를
총체적으로 성찰하는 첫 단초가 되어 나의 문학적 상상력을 확장시키는데 무한한 개방성을 담보해
주었고 의식 내면의 능동적인 활동성을 조장하여 주었다. 조잡한 창호지 등불을
켜고 손 모아 축원하는 어머니의 모습에서 내 삶의 의미와 가치를 풀어내고 문학적 상상력을 드넓히는
암호와 불립문자(不立文字)를 내가 어떻게 읽어낼 수 있었을까. 믿음이란
무엇이며 종교의 철학적 정의를 어머니는 끝내 일러주지 않았다. 죽든 살든 네 스스로
해석해 내도록 암시한 묵상의 화신(化身)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팔만대장경을 모두 풀어본들
그 내용을 내 것으로 만들어 나를 이토록 전율시킬 수 있을까. 언어로 규정하거나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사람의 가치는 스스로의 존재감을 찾아나서는 삶의 과정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초라한 어머니의 창호지 호롱불 등빛은 신앙과 종교와 삶의 진실한 가치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를 현시해 주는 높은 곳의 별이 되었다.
그 별은 무규정성(無規定性)과 더불어 무한정의 내면적 자유의지를 보장해 주기 때문에 나에게는 고귀한 것이다.
이제 또 4월이 올 것이고, 무수히 많은 세련된 등이 내어걸릴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연등공양의 공덕을 기리기 위하여 합장기원하면서 거리를 메울 것이다.
나는 무신론자이며, 어떠한 종교나 절대한 신에 심취 된 경험이 없다. 하지만, 언어 이전의
모성상(母性像)에서 신격화된 한 영상을 품고 산다. 그것은 형식과 의식(儀式)과 규정된
한계와 강요와 조건화 된 종교적 신(신앙)이 아니라 내 마음 속의 순수한 인간성 자체이며
내 자신의 믿음과 실존적 가치인 것이다.
부처의 참뜻이, 부처의 진정한 모습이 각자의 마음 속에 있다고 하는 것이 참으로 올바른
깨달음이라는 생각이 든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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