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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시선이 닿는 곳에 3부
2008-08-04 11:53:47
sionsira

조회:2087
추천:118

삐리리, 삐리리. 삐리리, 삐리리.

 

“여보세요?”

“나야. 서울에 폭우가 쏟아진다고 하던데 별일 없지?”

“당신이 없다는 것 외에 무슨 별일이 있겠어요? 아무 일도 없어요. 언제 올 거예요?”

“내일 아침 비행기로 올라갈 거야. 그런데 당신 목소리가 왜 그리 힘이 없어? 어디 아파?”

“아뇨. 내일 올라와서 얘기해요.”

“알았어. 잘 자.” 딸깍-.

 

그가 전화를 끊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미련이 남은 사람처럼 한참 동안 수화기를 들고 있었다. 당신 지금 누구랑 있어? 혹시 여자랑 있는 거 아냐? 라고 따지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느라 등줄기를 타고 진땀까지 흘러내렸다.

 

‘침착해야해. 경고망동 해서는 안 돼. 아직까지 확실하게 밝혀진 게 없는 이상 참아야 해. 그래. 참자, 진실을 알기 전까진 참는 거야. 참을 수 있어. 참을 수 있다고.’

 

밤새 내린 비에 도로가 침수되고, 전신주가 넘어져 인근 세대 전기 공급이 몇 시간 동안 중단되었다는 소식과 빗길 교통사고 소식이 들렸다. 나는 빗물에 젖은 솜이불처럼 뻑적지근한 몸을 일으켜 소리 나는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침 7시면 저절로 켜지게 맞추어놓은 텔레비전에서 나는 앵커우먼의 따분한 목소리가 잠을 깨운 것이다.

간밤 소파에 잦바듬히 기대고 앉아 심야영화를 보다가 그대로 잠이 든 모양이었다.

 

나는 일어나자마자 공백에 냉수 한 잔을 들이켠 후 커튼을 젖히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폭우가 몰아치고 난 후의 창밖 세상은 참으로 적요했다. 방음이 지나치게 잘 되는 집에 사는 것도 지루하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해 보았다.

창문을 열었다. 삭연한 바람과 함께 자동차의 요란한 엔진소리, 빗길에 미끄러지는 오토바이의 굉음, ‘웅웅웅, 왕왕’ 거리는 정체불명의 소리들이 밀폐된 공간에 갇혀 있다가 한꺼번에 쏟아지는 잡동사니처럼 내 귀에 들려왔다. 시끄럽고 짜증이 났다. 나는 황급히 창문을 닫고 또 다시 익숙해져 있는 적요함 속으로 들어섰다.

 

그가 집에 도착하려면 한나절은 더 지나야 할 것이다.

‘그 동안 난 뭘 하지?’ 갑자기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갑자기 어제 한 일들이 가물거리고, 지금 내가 무엇부터 해야 하는지 선뜻 떠오르지가 않았다. 당혹스러움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나는 알맹이가 모두 빠져나간 껍데기처럼 멍하게 서 있었다. 머릿속은 안개 속에 내던져진 미아처럼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띠리리, 띠리리리.

 

전화벨이 울렸다. 순간 깜짝 놀라 정신을 가다듬었다. 전화벨은 끈질기게 울어댔다. 나는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소파에 앉아 수화기를 들었다. 남편에게서 걸려온 전화였다.

 

“여보세요?”

“왜 이렇게 전화를 늦게 받아? 지금 공항이야.”

“아침은 먹었어요?”

“먹었어. 당신은?”

“지금 먹으려고요.”

“알았어. 이따가 봐.” 딸깍-!

 

그때서야 내가 무엇부터 해야 하는지 떠올랐다. 나는 먼저 몸을 씻고 식사를 해야 하는 것이다. 전혀 생각지 못했던 충격적인 사건으로 인한 후유증은 밤새 내 정신을 혼미케 했고, 내 사지를 무기력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욕조에 따뜻한 물을 받고 라벤더 향이 짙은 거품목욕제를 풀었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속내처럼 부푼 거품 속에 나신을 담그고 눈을 감았다. 남편이 오기 전에 생각을 정리해야만 한다. 무엇부터 물어야 할까? 사진부터 꺼내놓고 ‘이 여자 아는 여자예요?’ 라고 물어야 하나? 아니면 정체불명의 남자한테서 전화를 받고 커피숍에 나갔던 일부터 털어놓아야 하나, 아니면 그냥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나만 아는 비밀로 해야 할까?

거품이 사라지고 목욕물이 사느랗게 식을 때까지도 내 생각은 정리가 되지 않았다. 그냥 맞닥뜨려지는 대로 대처하기로 마음을 먹자 뱃속에서 시냇물소리가 들렸다. 돌이켜보니 어제부터 꼬박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팔다리가 경련이 일 정도로 파르르 떨려왔다. 속에서는 신물이 솟고, 거울 속에 비친 얼굴은 인귀상반(人鬼相半) 같은 매골이 되어 있었다. 소름이 돋을 정도로 사르르 떨리는 맨 몸뚱어리에 가운을 걸치고 나와 냉장고 문을 열었다. 시크름한 음식물냄새가 코끝을 찡그리게 했다. 우유를 꺼내 마시고 가스레인지에 불을 댕겨 찌개를 데웠다. 전기압력밥솥엔 곰팡내가 날 정도로 오래된 밥알들이 누렇게 변색되어 있었다. 할 수 없이 햇반을 전자제인지에 데워 찌개와 더불어 빈속을 채웠다.

 

혼자가 아니면서도 혼자처럼 살아온 세월이 벌써 십여 년 째다. 친자식처럼 보듬고 키운 조카들을 외국에 유학 보낸 뒤부터였으니까. 그리고 남편의 사업이 불같이 일어난 그때부터였으니까. 참으로 긴 세월을 혼자 외롭게 살아왔던 것이다. 그렇다고 남들 앞에서 속내를 보일 수도 없는 아주 은밀한 외로움이었기에 당사자가 느끼는 고통은 더욱 큰 것이다. 진심으로 행복한 것보다 행복한 척 자기 최면을 걸면서 살아온 날들이 많았었다. 어쩌면 지금 느끼는 공허함과 절박함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산물은 아닐 것이다. 그 동안 곪고 곪은 상처가 터지기 직전에 이르렀을 때 작은 바늘구멍 같은 충격에도 뻥 하고 터질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삶이었다는 증거일 것이다.

나는 드레스 룸으로 들어가 검정색 속옷을 입고 그 위에 검은 색 원피스를 입었다. 오늘 같은 기분에는 화려한 색상보다는 침울한 색상의 옷이 어울렸다. 검은 색 원피스는 며칠 전 명품관에 갔을 때 직원이 권해준 신상품이다. 보통 가정의 한 달 생활비에 육박하는 고가의 제품이었다. 나는 기분이 울적하거나 짜증이 솟구칠 때면 버릇처럼 새 옷을 사서 재였었다. 드레스 룸에는 한 번도 입어보지 않고 먼지만 쌓이도록 내버려둔 옷들도 여러 벌 있었고, 각종 선글라스와 모자, 벨트, 핸드백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만약 내게 여동생이 있다거나 친정 엄마가 살아계셨다면 사이좋게 나눌 수 있는 물건들이기도 했다.

 

갑자기 목울대를 타고 그리움이 솟는다.

결혼을 하고 남편의 사업이 풍랑을 만난 돛단배처럼 위태위태할 무렵 나의 고향에도 풍파가 들이닥쳤다. 바캉스 계절을 며칠 앞둔 어느 날 바다낚시를 즐기시던 아버지는 갑자기 몰아닥친 해일에 동료 낚시꾼과 함께 흔적도 없이 물속으로 사라져버렸다. 그날의 사고로 실종된 사람 수만 해도 수십 명에 이르렀는데 그들 속에 아버지도 끼어 있었던 것이다. 주인을 잃은 민박집은 수마에 의해 산산이 부서졌으며 삶의 터전을 잃어버리고, 사랑하는 남편마저 잃어버린 어머니는 시름시름 앓다 끝내 아버지의 뒤를 따랐다.

그렇게 나는 혼자가 되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외로운 사람끼리 만나 결혼을 했었고, 자식이라곤 딸자식 하나 달랑 있었을 뿐이었는데 ……….

 

초인종 소리가 들린다. 남편이 온 것이다.

나는 사풋이 걸어 문을 열고 남편을 맞이했다. 푸르스름한 턱수염이 자라 있는 것으로 보아 무척 피곤한 일정을 치르고 온 건 틀림이 없어 보였다. 김 기사가 트렁크를 들고 뒤따라 들어섰다. 남편은 구두를 벗고 슬리퍼로 갈아 신은 후 성큼성큼 걸으며 목을 옥죄고 있던 넥타이부터 풀어헤쳤다. 공근하고 과묵한 김 기사는 트렁크를 옮겨 놓은 후 간단히 목례를 하고 나가버렸다.

남편은 와이셔츠의 단추를 풀면서 시원한 냉수를 가져다 달라 했다. 나는 사붓사붓 걸어 유리컵에 물을 담아 건네주며 남편의 낯빛을 살폈다. 구겨진 와이셔츠에서는 퀴퀴한 냇내가 풍겼다.

 

“간밤에 한 숨도 못 잤어. 회의가 계속 길어지는 바람에 피곤해서 제대로 씻을 힘도 없더군. 아~! 피곤해.”

 

그는 냉수를 들이켠 후 안방으로 들어가 옷을 벗었다. 그의 옷에서 나는 문뱃내가 이처럼 반가운 적이 또 있었던가, 여자 향수냄새가 아닌 찌든 땀 냄새와 문뱃내로 얼룩진 남편의 와이셔츠가 괜히 반가웠다. 와이셔츠를 손에 들고 사냥개처럼 냄새를 맡는 내 모습이 어처구니가 없었다.

남편은 맨몸으로 욕실로 들어섰다. 처음 그를 만났을 때 보았던 뒷모습이 겹치기로 보이는 듯했다. 밤이었고, 파도가 치는 바닷가에서 보았던 땀에 젖은 그의 뒷모습은 무척 섹시했었다. 나는 그 뒷모습에서 남자의 향기를 처음으로 느꼈었고, 그 향기에 취해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 마음 졸이며 그의 선택을 기다려왔던 날들과 꿈같은 결혼식 장면들이 파노라마처럼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이십여 년 동안 지내오면서 내가 느꼈던 모든 안 좋은 감정들은 지나친 나의 욕심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임을 알고 있다. 외로움도 공허함도 ……….

 

물기가 덜 마른 머리를 작은 수건으로 털면서 그는 내게 차 한 잔을 요구했다. 나는 남편에게 그 옛날 그가 내 어깨에 자신의 점퍼를 걸쳐주었듯이 가운을 입혀 주었다. 그리고 주방으로 향했다. 내가 차를 준비하는 동안 그는 소파에 잦바듬히 기대고 앉아 텔레비전 채널을 요리조리 돌려가며 간만에 찾아온 휴식에 취해 있었다. 나는 찻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면서 조용히 입을 열었다.

 

“여보, 혹시 이영순이라는 여자를 알아요?”

“이영순? 그 여자가 누군데?”

“보험설계사라고 하던데 …….”

“보험설계사?”

“예.”

 

그는 찻잔을 들어 향기를 맡은 후 조금씩 맛을 음미하면서 마셨다. 그러면서 눈은 텔레비전에 고정시킨 채 내 질문에 대꾸를 했다.

 

“아~. 하도 귀찮게 찾아와서 보험 들어 달라는 여자가 하나 있긴 있어. 찰거머리 같은 여자지. 그래서 한번 만나 차 마신 적은 있어.”

“그래요? 그 여자랑은 그게 단가요? …….”

 

남편이 시무룩했던 내 전화목소리의 원인을 알기라도 하겠다는 듯 자세를 고쳐 앉으며 내 어깨에 두 손을 얹었다. 그리고 한번 빠지면 헤어나기 힘들 정도로 깊은 눈매로 내 눈을 응시했다.

 

“당신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그런 게 아니라. 며칠 전에 이상한 남자의 전화를 받았는데 …….”

 

나는 이참에 모든 것을 속 시원히 밝혀야겠다는 생각으로 몸을 일으켜 서재로 갔다. 그리고 양수머리책상 서랍에서 누런 봉투를 꺼내어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사진 몇 장을 꺼내어 그에게 보여주었다. 사진 속의 당신모습을 보며 남편은 헛웃음을 지었다. 그 사진들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충분히 알고 있다는 웃음이었다.

 

“누가 이런 장난질을 ………. 당신 대놓고 말도 못하고 속으로만 끙끙 앓았겠군.”

“당신이 결백할 거란 걸 알면서도, 전, …….”

“내가 좀 더 조심했어야 하는 건데. 어쩐지 젊은 여자가 이상하다 했어. 이유 같지 않은 이유로 자꾸 만나자고 하기에 딱 한번 만나긴 했는데 얘기를 나누다 보니까 아무래도 낌새가 이상한 거야. 그래서 나중에는 전화도 안 받고 연락을 끊어버렸지.”

“그랬군요. 전 그것도 모르고 당신을 의심했었어요. 미안해요. 여보.”

 

몸속 깊은 곳에서 뜨거운 액체가 왈칵 쏟아졌다. 응구첩대하는 그의 태도에서 그 동안 내 의심이 오해였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동안 제대로 알지로 못하고 의심부터 했던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당신의 마음이 변한 줄 알았어요. 그래서 날 멀리하는 거라 생각했고, 그러던 찰나에 그런 사진을 보니까 당신한테 새로운 여자가 생겼다고 생각한 거예요. 얼마나 가슴이 아픈지 아예 죽어버릴까도 생각했었어요.”

“요즘 당신이 갱년기라 그런 거야. 나도 요번에 출장 가서 생각을 많이 했어. 바쁘다는 핑계로 당신과 함께 있어주지 못해서 당신이 많이 외로웠을 거란 거 잘 알아. 나도 회사 일을 좀 줄이도록 해 볼게.”

“여보 …….”

 

나는 남편의 품에 안겨 흐느꼈다. 외로움에 냉동인간처럼 차갑게 굳어졌던 심장이 봄눈 녹듯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때로는 표현해야 하는 거였는데, 불만이 쌓여도 안 그런 척, 외로워도 외롭지 않은 척 했던 내 자신이 어리석게 느껴졌다. 왜 터놓고 남편한테 솔직하지 못했던가, 후회가 되기도 했다. 상처가 곪아터질 때까지 방치했던 방관이 내 정신과 건강을 좀먹고 있었다는 것을 왜 진작 몰랐던가 싶었다. 태양은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지구 지 혼자 빙글빙글 돌다 밤도 만들고 낮도 만들듯이 나 또한 스스로 만들어낸 망상과 자격지심으로 남편의 진심을 의심하고 있었던 거였다.

“여보. 이십 여 년 전 바닷가 생각나지? 그때 당신이 없었다면 난 바닷물에 몸을 던졌을 것이오. 그럴 마음으로 찾아갔던 것이고. 형 잃고, 애인 잃고 삶의 희망마저 잃어버린 내게 용기를 준 사람은 바로 당신이었소. 또한 당신은 내 조카들을 친 자식이상으로 키워주었고, 사업이 힘들고 어려웠을 때, 정말 쌀 살 돈도 없이 궁핍했을 때에도 당신은 나를 믿어주었소. 오늘이 있기까지 당신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오. 내가 표현을 못한 건 잘못이오. 하지만 당신을 향한 내 마음은 조금도 변함이 없소. 당신이 그때 그 일로 인해 자격지심을 갖는 것 같아 조심한다고 했는데, 내 노력이 부족했나보구려.”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다 내 잘못이라고. 아이를 갖지 못하는 몸, 부모님의 죽음으로 찾아온 우울증세, 모든 것은 내 잘못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아니에요. 당신은 아무 잘못이 없어요. 괜히 제가 쓸데없는 생각을 한 거였어요. 난 당신이, 여자로서의 매력을 상실한 내 몸이 싫증나서 젊은 여자를 ……. 그래서 …. 여보, 미안해요. 내가 잘못했어요.”

비 그친 하늘에 구름과 안개가 벗개고 볕이 돋았다. 약간 벌어진 커튼 사이로 눈부신 햇살이 쏟아져 소파에 포개고 앉은 부부의 몸을 에워쌌다. 이십여 년 전 바닷가에서 소리굽쇠의 파장처럼 울리던 설렘과 감동이 되살아나는 듯했다.

나는 생각했다. 경고망동하지 않기를 잘했어. 모든 일은 침착해야하는 거야. 섣불리 의심하고 그릇 판단했었다면 지금의 따사로움도 느끼지 못한 채 싸늘한 주검이 되었겠지 …….

“여보. 당신 서각을 해 보는 게 어때? 황토대리석에다가 당신이 그리고 싶은 걸 조각하는 거야. 당신 그런 재주 있었잖아. 그러다 보면 자신감도 생기고 보람도 느끼게 될 것 같은데.”

“네. 한번 해 볼게요.”

 

며칠 후, 나는 차를 마시다가 우연히 뉴스에서 부부 공갈 단이 붙잡혔다는 기사를 듣게 되었다. 모자이크 처리를 한 남자는 분명 커피숍에서 사진 몇 장으로 나를 협박했던 바로 그 남자였다. 그리고 그 옆에 모자를 푹 눌러쓴 여자는 남편을 유혹하려다 실패한 이영순이었다. 여자는 보험설계사라고 거짓말을 하며 꽃뱀 짓을 하고, 남자는 그 미끼로 금품을 요구하다 꼬리가 길어 잡혔다는 것이다. 나는 헛웃음밖에 지을 수가 없었다.

 

계절이 몇 번 바뀌었다. 환경이 크게 바뀐 건 없었다. 그의 사업은 여전히 바빴고, 지방출장도 잦아 집을 비우는 날도 많았다. 그러나 내 마음은 예전과 판이하게 달라져 있었다. 남편이 별도로 만들어 준 작업실에서 틈틈이 황토대리석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이다. 글씨를 새기고, 그림을 그려 색을 입히자 훌륭한 작품으로 재탄생되는 것을 보면서 나는 남다른 보람을 느끼게 되었다. 내가 만든 작품들을 인터넷에 소개하자 가족사진을 보내오면서 조각해 달라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집안 구석구석 나의 시선이 닿는 곳마다 그이와의 다정한 포즈의 그림이 새겨진 작품을 걸어두었다. 다채로운 모습의 작품들을 볼 때마다 우울함은 사라지고 행복감이 새롭게 밀려왔다. 삶은 조각과도 같은 것이란 걸 깨달았다. 누구에게나 주어진 삶을 어떻게 조각하느냐는 각자에게 달린 것이다. 나는 살아온 날들보다 살아갈 날들에 대해 계획하고 일가월증 성실한 마음을 먹은 후부터 심하게 앓던 우울증이 사라졌단 걸 알게 되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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