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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만남
2013-12-06 11:22:49
sws60

조회:585
추천:67

(단편) 어떤 만남

 

 

 

어느날 그 남자가 내게 말했다.

“사랑하고 있습니다.”

나는 너무도 황당하여 뒤로 쓰러질 뻔했다. 그 남자는 다름 아닌 내 친구 현경을 짝사랑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평소에도 허세가 심하고 열등감으로 속이 좁아터진 쫌생이었다. 진실성이라곤 먼지만큼도 없고 허욕(虛慾)과 가증(可憎)으로 가득했다. 처음엔 자기가 다니는 대학을 인천에 있는 국립대학이라고 했다가 거짓으로 판명나자 다시 모 사립대학으로 했다가 그마저 거짓으로 들통 나자 이름도 알 수 없는 기능대학으로 정정했다.

그는 내가 거부해도 툭하면 전화를 했다. 현경에 대한 소식을 알기 위해서였다.

“저 고상옥입니다. 바쁘시지 않으면 저 좀 만나주시면 안 될까요?”

“저 학기말 시험 공부해야 하기 때문에 바빠요.”

성격이 곧이 곧대로인 나는 둘러댈 것 없이 솔직하게 말했다. 열심히 학점을 따 가을에 실시되는 자격증 시험에 대비해야 했다. 졸업하면 무슨 수를 쓰더라도 취직해 돈을 벌어야 하는 게 내 처지였다. 데이트니 연애니 하는 것들은 사치였다. 그런데 그것도 다른 사람도 아닌 현경이를 짝사랑해 죽어라 따라다니는 남자한테서 사랑고백이라니 너무 기가 막혀 쓰러질 지경이었다.

고상옥은 만날 때마다 내게 현경에 대한 소식을 물었다. 아파트는 몇 평짜리에 사느냐, 아버님 직업은 무엇이냐, 형제는 몇이냐, 살고 있는 아파트 외에 빌딩이나 임야는 없느냐, 혹시 현경씨가 사귀는 남자는 있느냐. 주로 그런 질문이었다. 어찌 보면 그는 현경이 좋아서라기보다 그녀의 배경에 더 관심이 많은 것 같았다.

현경은 살고 있는 집 외에 다른 재산은 없어 보였다. 형제도 오빠와 남동생 합쳐 5명이나 되었고 모두 제 밥벌이 하기에도 바빴다. 내가 아무리 극구 아니라고 부인해도 고상옥은 끈질기게 물었다. 그럴 리가 없다. 현경씨 말로는 아버지가 회사 중역에다 고향에 임야와 건물이 많다던데 솔직히 말해 달라.

말이 앞뒤가 맞지 않았다. 현경이는 고상옥이라면 치를 떨어 한번도 만나 준 적이 없다 했는데 어떻게 그런 재산목록까지 밝혔단 말인가. 이는 필시 고상옥이 꾸며댄 거짓말이리라. 아님, 어디서 헛된 소문을 듣고 와 나름대로 머리 굴린 끝에 하는 말이리라. 고상옥은 그런 식으로 끈질기게 작전을 펼치더니 나중에는 드디어 폭발하고 말았다.

현경이가 고상옥의 친구인 이철현과 교제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이철현은 키가 180센티에다 얼굴은 거의 영화배우 수준이었다. 키 작고 옴팡진 얼굴에 게다가 집안까지 형편없는 고상옥과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이철현은 얼마 전까지 집안이 꽤 유명한 명문가였다. IMF로 망하기 전까진. 그래서인지 이철현에겐 어딘지 모르게 귀공자 분위기가 풍겼다.

집안이 망했어도 그는 씀씀이가 헤펐다. 현경이와 데이트할 때도 꼭 비싼 레스토랑만 이용했고 매너도 항상 겸손하고 친절해 여자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못 생긴 주제에 눈만 하늘같이 높고 거짓말과 함께 툭하면 욕부터 내뱉는 고상옥과는 여러모로 달랐다. 그런 이철현이 현경이와 교제를 한다는 소문이 돌자 드디어 고상옥의 머리꼭지가 돈 모양이었다.

내게 하루에도 몇 번씩 전화를 해 만나달라고 요청했다. 만나봤자 하는 이야기는 똑같았다. 이철현과 현경이 사이는 어느 정도까지 갔느냐. 둘 사이에 무슨 변고라도 생긴 건 아닌가. 두 사람의 교제 사실을 양쪽 집안에서 다 알고 있는가. 내가 만나주지 않으면 그는 하루에도 몇 번 아니 열 번도 넘게 전화를 해댔다.

화가 난 나는 어느날 진실을 말해버렸다.

현경이는 당신처럼 인물 없고 별 볼 일없는 남자는 싫어한다. 현경이는 능력 많고 집안 좋은 남자만 만난다. 그리고 현경이네 집안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부자가 아니다. 재산도 없고 오빠들도 하나같이 백수건달로 먹고 논다. 그러자 고상옥은 그럴 리가 없다며 펄펄 뛰었다. 자기가 확인한 바로는 현경은 상당한 자산가의 딸로 앞날이 보장된 여자라는 것이다.

미친놈이었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저 혼자 김칫국부터 마셔대고 흥분해 날뛰는 꼴이라니. 나는 마지막으로 한마디 해주려다 참았다. 현경이는 니가 알고 있는 것처럼 명문여대 출신이 아닌 고졸자로 평범한 직장생활 하는 중이다. 알겠냐 이 정신 나간 놈아. 그러나 그 말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어차피 고상옥이 안 믿을 것을.

“그런데 도대체 현경이네 집안이 그렇게 재산가라고 누가 그래요? 그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누군 누구예요? 현경씨가 그랬죠.”

“현경이 걔가 얼마나 바쁜 앤데, 언제 고상옥씨에게 그런 말을 했다는 거예요? 현경이 말로는 고상옥씨가 꾸며댄 새빨간 거짓말이라던데.”

“거짓말이라료? 절대 아니에요, 제가 이 귀로 현경씨한테 똑똑히 들었다니까요.”

“이것 보세요, 고상옥씨 다 필요 없고요, 현경이는 고상옥씨한테 절대 관심 없으니까 자꾸 전화해서 귀찮게 굴지 마세요ㅡ 저한테도요, 알았어요, 제발요.”

“그래도 영혜씨는 현경씨 친구이고 제가 세상에서 만난 좋은 분이라.”

“다 듣기 싫고요, 저는 이번 학기만 끝나면 국가고시 준비해야 하니까 다신 전화하지 마세요.”

“국가 고시라니 사법시험 말인가요?”

기가 막혔다.

“국가고시가 꼭 사법시험만 있나요? 보건복지부에서 시행하는 자격증 시험도 거기에 포함된다는 걸 모르시나 보죠?”

정말 무식한 자식이었다. 그런데 얼마 안 가 고상옥이 한 말이 진실로 나타났다. 고상옥이 처음에 접근할 때 현경이가 자신의 처지를 부풀려 말한 게 화근이었다. 자기를 대단한 집안의 딸로 둔갑시켜 말하면 스스로 나가 떨어질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 현상이 나타났다.

현경이의 외모와 배경에 탐이 난 고상옥은 순식간에 거짓말을 둘러댔다. 처음엔 학력만 속이더니 점점 거짓말이 커져 자기 집 재산과 가족의 이력마저 부풀려 잘사는 집안처럼 뻥튀기를 한 것이다. 고학력자라곤 한 명도 없는 집안을 명문가로 둔갑시킨 그는 현경이의 환심을 사기 위해 별별 수단을 다 썼다.

그래봤자였다. 고상옥은 외모부터가 여자들에게 재수 없는 인상으로 통했기 때문이다. 그 주제에 온갖 거짓말까지 주어 댔으니 들통 나는 건 시간문제였다. 나중에 사실을 안 현경이는 고상옥에게 온갖 악담을 하고 헤어졌다. 자기가 거짓말한 건 고스란히 숨긴 채. 똑같은 것들끼리 속고 속이고 한 것이다. 그런데도 고상옥은 아무것도 모른 채 현경이 뒤만 애타게 따라다니며 사랑을 읍소하고 있었다.

현경은 워낙 미모가 뛰어난 데다 애교덩어리라 남자 꾀는 재주 하나는 타고났다. 어떤 사람을 만나도 5분만 되면 웃음보가 터지고 금방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조성된다. 유머감각이 뛰어난 현경의 말솜씨에 모두 녹아나는 것이다. 내가 남자라도 녹아나지 않을 방법이 없을 것이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남자에게 채여본 적이 한번도 없다고 했다. 어떤 남자든 단 한번에 자신을 좋아할 수 있게 만드는 게 자기의 특기라 했다. 그런 그녀에게 가장 큰 약점이 있었으니 그것은 자신의 이력서를 거짓말로 꾸며댄 것이었다. 고졸 학력을 명문여대 졸업자로 둔갑시키고 가족 모두를 엄청난 능력자로 둔갑시킨 것은 물론 재산마저도 억대로 뻥튀기한 것이다. 하도 같은 거짓말을 반복하다 보니 나중에는 자신마저도 진실로 믿어지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거짓말을 사실처럼 보이기 위해 돈 씀씀이도 헤펐다. 옷도 구두도 가방도 모두 명품만을 썼고 헤어스타일도 수시로 바뀌었다. 물론 그에 따라 만나는 남자 숫자도 바뀌었다. 그러던 것이 이철현과 교제하면서 점점 양상이 바뀌기 시작했다. 그녀는 이철현에 비해 거의 모든 면이 뒤떨어졌다. 집안, 학벌, 능력, 인간성 등 모든 면에서.

사실을 알 리 없는 이철현은 현경에게 지극정성이었다. 비록 망하기는 했어도 숨겨 놓은 재산이 많은 것 같았다. 곧 얼마 안 가 재기할 거란 소문도 파다했다. 그걸 미리 파악한 현경이는 이철현을 잡기 위해 공을 들였다. 그 둘의 연애가 절정에 이를 무렵 고상옥의 입대 문제가 터졌다. 이제 더 이상 군 입대를 미룰 핑계가 없어진 것이다.

몸이 단 고상옥은 제 주제도 모르고 현경에게 다가가 온갖 추태를 다 부렸다. 이유인즉 뻔했다. 자신이 군대 가면 면회와 줄 것과 이철현과도 교제를 끊어 달라는 것이었다. 천부당만부당한 말을 하면서 고상옥은 술에 취해 난동을 부렸던 것 같다. 이철현이 달려왔는데 말끝에 둘 사이에 주먹질까지 오갔다.

고상옥은 거의 반 미치광이로 변해 있었다. 막상 입대한다고 생각하니 그 사이에 현경과 이철현이 결혼할 것 같아 미치겠는 모양이었다. 끝까지 발악을 하다가 가족들에 의해 끌려갔다. 그렇지 않아도 추레한 외모가 머리를 삭발하고 나자 완전 꼴불견으로 변했다. 그 꼴을 하고서 고상옥은 눈물을 흘리며 현경이의 이름을 부르다 떠나갔다.

고상옥은 입대한 후 가끔씩 현경에게 편지를 보내 탈영하겠다며 협박했다고 한다. 현경이는 일체 아무 대응도 않고 편지가 오는 즉시 쓰레기통에 버렸다. 내가 생각해도 고상옥은 인간 철면피였다. 쓰레기통 같은 인간성에다 정신마저 회로를 이탈한 이상자였다. 그런데 그 정신이상자 같은 놈이 어느날 내게 나타나 사랑하고 있었다니 기절할 노릇이 아닌가.

나는 너무 기가 막혀 뚜껑이 열릴 지경이었다. 그러나 미친놈 상대해 봐야 나만 이상해지니까 안 들은 척 외면하고 넘어갔다. 그런데 어느날 고상옥이 휴가 나온 날이었다. 어디서무슨 소식을 들었는지 내게 한 달음에 달려왔다.

“현경씨가 철현이와 헤어졌다니 그게 사실이야?”

뜬금없는 말에 나는 정신이 멍할 지경이었다. 그보다 저 인간이 언제부터 내게 반말을 했담. 헷갈리는데 고상옥이 또다시 말했다.

“현경이가 그동안 나를 철저히 속였더군, 나한테는 명문가 딸 행세하더니 그게 다 거짓이었다며? 영혜씨도 다 알고 있었으면서 나 속인 거 아냐?”

이 미친 자식이 어디에서 뺨 맞고 나한테 와서 지랄이람. 나는 기분 나빠 쓰러질 지경인데 저는 저대로 기분이 나쁜지 계속 지껄였다.

“나쁜 년 아냐? 저나 나나 속인 건 매 한가지인데 왜 큰소리치고 그랬담, 어쨌든 그랬으니 철현이한테도 퇴짜를 맞았지, 걔네 집안이 얼마나 짱짱한 집안인데.”

“그래서 이젠 현경이한테 완전히 마음 접은 거예요?”

“아니, 저 하는 것 봐서.”

정말 미친 자식이었다. 이제 이철현과도 헤어졌으니 마치 제 차례라도 된 것처럼 배짱을 부리는 것이었다. 고상옥은 현경이를 만나기 위해 회사 앞까지 찾아갔으나 그녀가 퇴사한 걸 알고는 돌아서야 했다. 현경이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회사를 옮긴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외모는 어딜 가도 화제였다.

일에 대한 능력도 뛰어났다. 눈치 빠르고 말 재간 좋고 외모까지 뛰어나니 그녀에겐 적(敵)이 없는 듯했다. 때마침 그녀가 옮겨간 직장은 광고회사였다. 각종 매체에 종사하는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데 그녀의 외모가 눈에 띠었던 모양이다. 패션 잡지회사 쪽에서 섭외가 들어왔다. 모델 제의였다. 현경이는 당장 뛰어가고 싶었지만 겸손한 양 여유를 부렸다.

글쎄요, 제가 과연 그런 일을 해낼 수 있을까요?

그들은 현경에게 어떤 조건도 내걸지 않고 캐스팅 제의했다. 그 잡지회사는 모 패션회사에서 운영하는 꽤 알려진 곳이었다. 그런데 현경이가 내게 이상한 제의를 하는 것이었다.

“이쪽도 경쟁이 치열해, 내가 너한테 한가지만 제의할게.”

“뭔데?”

이 앙큼한 것이 또 무슨 수작을 벌이려나 겁부터 덜컥 났다.

“너 학교 졸업장 내가 대신 쓰면 안 될까?”

“뭐라구?”

“그러니까 내 예명을 니 이름으로 하고 학교도 너희 대학 졸업한 걸로 하면 되잖아.”

“너 그걸 말이라고 하냐?”

“왜 안 된다고 생각하니, 너한테 섭섭지 않게 해줄게.” “언제는 이대 나온 여자라고 큰소리 탕탕 치고 다니더니 벌써 대학 간판을 바꿔달면 무슨 소문나려고 그래, 나중에 어떻게 감당할 건데?”

“글쎄 그건 내가 다 알아서 할 거니까 걱정 말고.”

“아무튼 안 돼 안 되니까 그런 생각일랑 그만 두셔 알았지.”

“정 그렇다면 할 수 없지.”

돌아서 나가는 현경이의 뒷 모습이 아무래도 심상치 않았다. 벌써 내 이름과 학력을 도용한 걸 아닐까. 그러나 일일이 그녀의 뒤를 따라 다니며 확인할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갑갑하기만 했다. 일단 모델계로 진입한 이상 현경이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서 정상에 서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무엇이든 한번 칼을 뽑았으면 무우라도 자르고 보는 게 현경이 성격이었다. 내가 보기에 현경이는 처음부터 연예계에 욕심을 부린 것 같진 않았다. 그렇다면 진즉 그쪽에 시선을 두었을 것이다. 현경이는 적당히 치장하고 주변 남자들에게 인기나 끌다가 신데렐라처럼 신분상승하려는 평범한 여자들 중의 하나였다.

그런데 일이 잘못 꼬이려고 그랬는지 그 험하다는 모델계에 투신한 것이다. 어느 단체 어느 부류이건 간에 경쟁이 치열한 건 마찬가지이지만 모델계도 결코 만만치 않을 것이다. 현경이 키가 170 센티에 조금 못 미치는지라 그것도 마음에 걸렸다. 높은 하이힐으로 커버 되겠지 싶다가 넘어지면 어떡하지 그러다 부상이라도 당하면?

그러나 내 걱정과 달리 현경은 모델 생활을 잘 해나는 듯싶었다. 최고급 옷도 공짜로 얻어 입고 다이어트도 저절로 할 수 있고 일거양득이라며 기뻐했다. 그러나 수입은 별로 없는 눈치였다. 씀씀이도 줄어들고 날이 갈수록 죽는 소리를 더했다. 일단 공인으로 활동하자 전처럼 남자 꼬이는 일도 쉽지 않았다. 소속사에서 단속하기 때문이었다.

또 자기 이미지 관리도 해야 하기에 함부로 행동할 수도 없다며 잘난 체 하기도 했다. 고상옥은 제대 후 현경이를 몇 번 따라가 대시해 보다가 스스로 포기한 것 같다. 그리고 자신도 이미지 변신을 해야겠다며 머리를 쓰기 시작했다. 자격증을 취득하겠다며 학원을 다니더니 몇 번의 실패 끝에 그래픽 디자인 실기시험에 합격했다.

나는 그가 절대로 불합격할 것으로 믿고 있었기에 약간 충격적이었다. 그의 머리는 보통 이하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상옥은 창업학교에도 다니는가 싶더니 이내 포기했다. 창업할 만큼 그는 배포가 없었다. 물론 경제적 여유는 더더욱 없었다. 그는 어느날 내게 자신은 이제 한계점에 달해 희망이 없는 것 같다며 하소연을 했다.

불쌍하긴 했지만 그의 하소연을 들어줄 시간이 없었다. 지방직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서울을 떠나야 했기 때문이다. 내가 공무원이라는 안정직 직업노선에 들어서자 갑자기 고상옥의 태도가 바뀌기 시작했다. 그 첫 번째가 씨도 안 먹히는 사랑고백이었다. 내가 자기를 받아줄 거라 생각했는지 참 기도 안 차는 발상을 하면서 울먹이기까지 했다.

“사랑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때 하마터면 소리칠 뻔했다.

이 망할 자식아 내가 꿩 대신 닭이냐?

심약한 나는 남에게 심한 소리는 죽어도 못하는 스타일이었다. 나 때문에 다른 사람이 상처받는 건 결코 내 스타일이 아니었다. 대신 엉뚱한 소리가 내 입에서 튀어 나왔다.

“이제 저한테 전화하지 마세요, 전 서울을 떠난답니다.”

“네? 왜요? 어디로 떠나시는데요? 설마 외국 가시는 건 아니죠?”

거의 울음이 터지기 직전이었다.

“그건 아니지만 이런 식의 전화 곤란하거든요, 그 사람이 알면 싫어해요.”

“그 사람이라뇨? 혹시? 설마?”

“왜요? 전 사귀는 사람 없을 것 같나요?”

“그게 아니고, 죄송합니다. 그렇지만 제 마음만큼은.”

나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오! 쾌재라. 고상옥이 충격 받을 모습을 생각하니 웃음이 절로 났다. 길거리를 걷는데 속이 다 시원했다. 이제 다신 전화 하지 않겠지. 저도 자존심 있는 인간이라면. 망할 자식, 나라고 애인이 없을 줄 알았니. 사람 무시하고 있어. 나는 있지도 않은 애인을 정말 있기라도 한 것처럼 씩씩대고 분해했다.

아니 내가 아무리 남자가 없어도 그렇지 저 같은 걸 애인 삼을 것 같애? 3-4년간을 현경이 뒤를 따라다니던 정신 빠진 놈을.

충청도 지방 소도시에 발령을 받은 나는 직장생활 하느라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 공무원 사회라 해도 편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업무도 업무려니와 상사와 상부기관 눈치 보는 건 일반회사보다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 않았다. 쏟아지는 공문만 해도 혼란스러울 지경이었다. 겨우 안정되는가 싶었는데 어느날 느닷없이 고상옥이 찾아왔다.

“저 취직했어요. 오늘 첫 월급 타는 날이라 영혜씨께 한턱 쏘려고 찾아왔어요, 제발 쫓아내지만 말아 주세요.”

비굴한 모습이 더 꼴사납고 못나 보였다. 자기가 취직한 거 하고 나하고 무슨 상관이람. 쏘아부치려다 참았다. 나는 남에게 싫은 소리 더구나 심한 소리는 한마디도 못하는 위인 아니던가. 그리고 아무리 미워도 그렇지. 불원천리 이곳까지 찾아온 손님이 아니던가. 억지로 참고 그와 길을 걸어가는데 직원 눈에 띠었던 모양이다.

평소 내게 싫은 소리 잘하는 상사가 큰소리로 말했다.

“어이! 김영혜씨 서울서 온 애인하고 데이트 가시나? 재미 많이 보셔.”

그가 손짓을 하고 가는데 갑자기 고상옥이 미워 죽을 지경이었다. 왜 하필이면 이때 나타나서 나를 곤란하게 하는가. 냉정해질 필요가 느껴졌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고상옥이 핸드폰을 꺼내더니 곧바로 사진을 찍는 게 아닌가. 기가 막혀서. 왜 허락도 없이 사진을 찍는 거냐며 따지고 싶었지만 참았다.

“전 이만 숙소로 가야겠어요, 여기까지 찾아와 준 건 고맙지만 다신 찾아오지 마세요. 전화도 하지 마시고요.”

“애인 있다는 것 거짓말인 거 다 알아요.”

가슴속에서 쿵소리가 났다. 이 작자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려는 것인가. 순간적으로 공포가 몰려왔다.

“그게 고상옥씨와 무슨 상관이죠? 왜요 현경이가 이제 모델 생활하니까 갑자기 자신이 없어졌나요? 아님 현경이 집안에 재산목록이 가짜로 밝혀지니까 못 먹는 감 찔러나 본다고 내게 흥미가 발동한 건가요? 저도 고상옥씨 관심 없으니까 제발 이제 연락 좀 끊고 삽시다.”

그런데도 고상옥은 별로 충격을 받는 것 같지 않았다. 얼굴 표정에 이상한 자신감 같은 것이 보였다. 너 같은 것쯤이야. 그 표정을 보자 갑자기 속이 뒤집어질 것 같았다. 여태 살면서 애인 한번 없었던 내 과거전력에 스스로 분기탱천했다. 인간이 얼마나 못 났으면. 그때였다. 내 입에서 폭포수같이 악담이 뛰쳐나온 것은.

“야! 고상옥 너 잘 들어, 그래 나 애인 없다. 그래도 너 같은 인간 만나 한가하게 노닥거릴 시간도 없다 이거야. 내가 비록 인물이 없다 치자. 그렇다고 남의 여자 꽁무니나 따라다니던 너를 받아줄 것 같으냐. 그리고 너 똑바로 잘 들어, 나는 현경이와 달리 대졸 출신이다. 알아듣겠냐?”

그는 충격을 받았는지 잠시 멍한 표정이었다. 정말 망할 자식이었다.

“내가 니 마음 정확히 지적해 볼까? 너 나랑 사귀면서 현경이 약올리자는 수작 아니었냐? 내가 니 수작에 놀아날만큼 어리숙해 보였냐? 이 자식이 어디서 개수작이야, 너도 니 처지에 맞는 여자를 만나 대시를 하든가 연애질을 하든가 하란 말이다. 이 멍청한 자식아 알아듣겠냐?”

나는 말을 폭포수같이 내뱉고 돌아섰다. 가슴속에서 우탕탕하고 전쟁이 나는 소리가 들렸다. 가슴이 절벽 아래로 쿵 떨어지는가 하면 예리한 칼날로 찌르는 것 같았다. 난생 처음 내뱉은 모진 말을 두고 나는 한동안 정신이 멍해 있었다.

예상대로 고상옥은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고서 일 년 세월이 지난 어느날이었다. 서울 본가에 갔다가 고상옥에 대한 소식을 들었다. 그가 직장을 그만두고 나서 사업을 시작했는데 날로 번창해 확대일로에 있다고 했다. 물론 믿기지는 않았지만 그는 때깔이 벗겨지고 제법 귀티마저 흐른다는 소문이었다.

그리고 더 믿기지 않는 소식도 들렸다. 그가 나가기 시작한 교회에서 착하고 믿음이 신실한 여자를 만나 결혼한다는 것이었다. 사람 팔자 시간문제라더니 참 희한한 일도 다 있구나 싶었다. 그런데 그 소식을 듣는 순간 내 가슴속으로 뭔가 알 수 없는 싸아한 느낌이 스쳐 지나갔다. 그 모호한 감정의 정체는 외로움이었다.

거리는 봄날답게 개나리와 진달래가 도심을 총천연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겨울의 무채색을 몰아내고서 인고와 희망의 단어를 남발하고 있었다. 골목 끝에 핀 목련은 화사한 꿈을 가슴 속에 전해주며 마음마저 순결하게 씻어주는 듯했다. 또다른 생명의 기쁨을 선사하는 봄은 분명 부활의 계절이다. 죽었던 감성을 일깨우기 때문에.

내가 근무하는 소도시는 산야에 잔설(殘雪)이 남아 있어 을씨년스럽기 짝이 없었다. 사방천지가 낯선 풍광이요 먼지 풀풀 날리는 적막한 곳이었다. 적막함 외에 외로움이 더해 타지로 발령내 달라는 청원서가 빗발쳤다. 짓다 만 아파트 군락이 흉물스럽게 들판을 다 차지하고서 들고양이들만 어슬렁거리고 돌아다녔다.

근무하는 관공서 문턱만 나서도 황량함이 극도의 허무와 함께 가슴속을 파고들었다. 직원들은 이곳을 떠나기만 해도 숨이 탁 트일 것 같다며 윗선에 줄을 대서라도 떠나겠다고 말했다. 국회에서 하는 감사철만 되면 거의 매일 비상이었다. 남들은 안정된 직업이라고 하지만 그것도 다 부서 나름이다.

유행성 감기만 돌아도 외국에서 전염병과 식중독 사건만 나도 곧바로 비상시국에 들어갔다. 한동안은 노로 바이러스 식중독 때문에 비상이 걸린 적이 있었다. 식약청과 함께 비상이 걸렸는데 얼마 안 가 거의 죽음에 이른다는 독감 주의보가 발생해 정신 차릴 겨를이 없었다. 또 직원들 대부분이 본가를 떠나 객지에 홀로 살기 때문에 기러기 가족이 되는 경우가 흔했다.

어떤 직원은 결혼하자마자 기러기 부부가 되어 안타까움을 나타내기도 했다. 나에게 있어 외로움은 체질이었다. 그럴지라도 이런 식의 타관생활은 영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대학원이라도 갈까. 그러나 골백번을 생각해도 나는 학구파는 아니었다. 뭔가 이미지 변신이 필요했다. 내 이력서 위에 새로운 란을 추가하고 싶었다.

그나저나 꽃다운 나이에 남들 다 하는 청춘사업 한번 못하고 살아가는 내 처지가 슬픈 것도 사실이었다. 현경이는 모델계에 진입했으나 별 진전은 없는 것 같았다. 내노라 하는 기라성 같은 미인들 틈 속에 아무리 닳고 닳은 현경이로서도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현경이는 자기의 이력을 부풀려 말할지언정 함부로 몸을 굴리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술만 마시면 그녀가 하는 말이 있었다.

자기한테는 변하지 않는 순정이 있다는 것이었다. 첫사랑에 대한 순애보 같은 것이었는데 자세한 내용은 말하지 않았다. 그녀가 추구하는 성공지상주의도 순애보에 대한 미련을 꺾지 못했다. 그녀는 언젠가 말했었다. 자기의 첫사랑 순애보의 주인공이 늘 주변에서 자신을 지켜본다고. 그러나 이름이나 직함은 결코 발설하지 않았다.

궁금증이 일었지만 더 이상 물어볼 수는 없었다. 누구에게나 간직하고 싶은 비밀 한가지쯤은 있는 법이니까. 나도 생각 같아선 그런 비밀 이야기를 서너 가지쯤 가지고 살아가고 싶다. 앞으로 말이다. 이심전심이었을까. 어느날 현경이에게서 연락이 왔다. 자기가 알고 있는 괜찮은 남자들이 꽤 많은데 소개팅을 할 테니 일단 만나보라는 것이었다.

너 정도의 스펙이면 얼마든지 좋은 남자 만날 수 있으니 이참에 싱글을 확 벗어버리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내가 근무하는 이곳까지 남자를 보내겠다고 했다. 기대 반 우려 반으로 나갔는데 참 소설 같은 일이 벌어졌다. 남자는 내가 대학 들어가서 첫미팅에서 만난 남자였다. 그는 공대로 유명한 대학의 제2 공학관에서 공부하는 컴퓨터 공학과 과 대표였다.

입만 열면 컴퓨터에 관한 지식을 자랑하느라 정작 통성명도 하지 않고 헤어진 남자였다.당시 나는 그런 식으로 잘난 체하는 남자를 제일 싫어했다. 남자는 내 표정도 살피지 않은 채 지식 자랑과 집안 자랑에 몰두하다 내가 일어서는 것도 눈치 채지 못했다. 나중에 그는 내가 화장실 가는 것으로 알았다고 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자 그제야 이상한 낌새를 알아채고는 당황했다는 것이었다. 그 때 이후 심심하면 내가 공부하는 인문관 앞에 나타나 나를 기다리다 가곤 했다. 물론 나는 한번도 만나주지 않았다. 그리고 서로 까맣게 잊고 세월이 흘러갔다.

“저 기억하세요? 컴퓨터 공학과의 정영모, 그런데 이름이 뭐였더라?”

통성명도 안 하고 헤어졌는데 이름을 어떻게 기억하냐, 이 바보야. 나는 속으로만 말했다.

“억지로 생각할 것 없어요, 벌써 세월이 얼만데요?”

“그런데 정말 이건 우연 치곤 대단한 우연인데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글쎄요? 그런데 어떻게 현경이와 알게 되었나요?”

“아! 현경씨와 저는 거래처를 오가다 만났어요, 현경씨 모델 사진을 제가 현상하거든요, 말하자면 포토샵 그런 겁니다.”

“그러세요, 현경이는 모델계에서 잘 나가는 편인가요?”

“그쪽이 워낙 경쟁이 심한 데가 되어서 힘들죠. 그래도 현경씨가 워낙 인물이지 않습니까. 눈치도 빠르고 머리도 좋고.”

“그런데 현경이가 저를 소개할 때 어떻게 말하던가요?”

“대학 동창이고 공무원에다 능력짱이라고.”

“네에? 대학 동창이요? 무슨 과 나왔다고 하던가요?”

삽시간에 남자의 눈빛에 당혹감이 일었다. 뭔가 잘못됐다는 낭패감에다 불안감이 스쳐 지나면서 말투까지 변했다.

“그럼 아니란 말인가요? 현경씨 말로는 자기하고 같은 과에서 공부했다고 하던데.”

더 들을 필요도 없었다. 나는 자리에서 발딱 일어났다.

현경이가 내 학력과 이력서를 도용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언젠가 그녀의 제안을 거부했는데 내 의사와 상관없이 내 동창인 것처럼 행사하고 다니는 것 같았다. 유명 연예인들이 학력을 위조해 사용하고 있는 것처럼 친구인 내 이력서에다 자기를 곁들인 것이다. 그나마 이름까지 도용 안 한 건 천만 다행이었다.

“어떤 정황인지 이해가 갑니다, 그래도 여기까지 내려왔는데 그냥 갈 수야 없지요, 시내 구경도 하고 식사라도 하고 헤어집시다.”

남자는 이왕 내려온 것 구경이나 하고 가자는 셈이었다. 카메라도 최고급으로 준비해 왔다. 자기 전공인 컴퓨터 공학은 어찌 됐는지 하는 짓이 사진작가처럼 예술인 행세였다. “원래 전공이 컴퓨터 아니었나요?”

“그랬죠, 그랬다가 그래픽 디자인을 배우면서 이쪽으로 자리를 옮겼어요. 전 제가 생각해도 예술가 타입이거든요, 영혜씨 이 근처에 경치 좋은 곳이 있으면 안내하세요, 제가 사진 멋지게 찍어 드릴께요.”

“전 사진 찍는 것 별로 안 좋아해요.”

“그래도 나중에 나이 들고 보면 남는 건 사진밖에 없다고요, 홈페이지 올려놓고 두고두고 보면 좋아요, 세상에 추억만큼 좋은 것도 없답니다.”

그는 성큼 성큼 나가더니 카운터에서 값을 치르자마자 역 근처로 걸어갔다. 시(市) 근처의 관광지를 물색하는 것 같았다. 변죽 좋은 건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같군. 세월 따라 감정도 퇴색한 것일까. 스무 살 때 첫 미팅에서 만난 남자인데도 별 감흥이 없었다. 그의 말마따나 우연치고는 기막힌 우연일 텐데.

“저기요.”

내가 부르자 그는 정색하듯 말했다.

“정영모라고 불러 주십시오, 우리가 아무리 구면이긴 해도 그래도 꽃다운 나이 대학 때 만난 청춘 아닙니까?”

마음대로 해라. 누가 뭐라겠냐. 정영모는 첫 소개팅이라 웬만하면 잘 해보려고 자동차도 운전하지 않고 열차를 타고 왔다고 했다. 오면서 많은 생각을 하면서 상상의 나래까지 폈단다. 그는 묻지도 않았는데 자기의 신상명세서를 화려하게 펼쳐 보였다. 집안 자랑과 자기의 미래 비전까지. 버릇은 세월이 흘러도 전혀 변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머지 않아 자기만의 단독 스튜디오 갈게 될 거라며 은근슬쩍 내 반응을 살피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전혀 신빙성도 가지 않을뿐더러 그에 대한 일말의 감정도 생기지 않았다.

그냥 주절주절 이야기하는 데도 그래 너 혼자 실컷 떠들다 가라 하고 딴 생각에 몰두했다. 그도 눈치를 챘는지 양복 안주머니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더니 내 손에 쥐어 주었다.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헤어져 집에 왔다. 나른한 봄날도 지나고 초여름이 가까울 무렵이었다. 친척 결혼식이 있어 서울 본가로 왔는데 이상한 소식이 들렸다.

고상옥의 결혼식이 일주일 앞두고 깨졌다는 것이었다. 그 소식을 듣자마자 생각했다. 고상옥이 뭔가 야료를 부리다 발각 났거나 치명적인 실수를 했거나 둘 중의 하나라고. 고상옥이 사업에 성공했다는 말도 필시 거짓말일 것이다. 고상옥의 인간성에 비추어 생각할 때 그건 거짓말일 확률이 90퍼센트다. 하지만 그렇다고 소문 그 자체를 무작정 무시할 수도 없는 것 아닌가.

그런데 느닷없이 고상옥이 내가 근무하는 곳으로 찾아와 애타는 눈빛으로 호소하던 생각이 났다. 설마 고상옥이…….

그러나 나는 아니라고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내게 그렇게 멸시를 당했는데 설마, 그리고 그는 교회에서 믿음 좋은 여자를 만나 교제하다 결혼까지 생각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다음 순간 또다시 까맣게 잊고 있었던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언젠가 그가 전화에다 내게 고백한 한 문장, “그동안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가슴이 절벽 아래로 쾅! 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렇다면 그 인간이 정말 정말 내게? 설마. 나는 정말과 설마라는 단어를 수없이 반복하며 생각지도 않은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 이 인간이 전에 현경이 때문에 내게 귀찮게 굴다가 어느 한순간에 정(情)이 붙었던 것일까.

더 이상 현경이와 나를 괴롭히는 말라는 말에 그가 한 대답이 생각났다.

“그래도 영혜씨는 현경씨 친구이고 제가 세상에서 만난 좋은 분이라.”

그러나 그렇게 섣부르게 생각할 일은 아니다. 그동안 그를 안 본 동안 그에게 많은 변화가 있었으리라. 그리고 감정이란 수시로 변하는 물 같은 것 아닌가. 나는 본시 감정이란 자체를 믿지 않는다. 그건 순간의 착각과 흥분으로서 얼마든지 이성으로 제압할 수 있는 것이라 믿었다. 흔한 말로 많은 커플들의 연애 따로 결혼 따로란 말이 왜 생겼을까.

그건 이성적 판단으로 감정을 선택한 뒤 미래의 안전을 꾀하자는 것이 아니겠는가. 감정에 이끌려 하는 사랑이나 결혼은 고전적 드라마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리라. 만남 현장에서 말끝마다 순수성 인간성 강조하는 남자들은 하나같이 무능하고 추레한 외모의 소유자들이었다. 자기들이 내세울 게 없으니까 말도 안 되는 인간성 운운하는 것이다.

여자들도 마찬가지다. 외모에 자신이 없는 여자들일수록 남자의 외모와 능력에 집착한다. 한마디로 신데렐라 환상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그럼에도 감정은 수시로 내 이성을 배반할 때가 많다. 정신 차려야지 하면서 어느새 또다시 감정에 빠지고……….

때로 감정은 계절과 분위기를 타면서 일을 그르칠 때도 많다. 감정은 착각과 오류를 낳으면서 파멸의 지경까지 이를 때도 있다. 냉철한 이성으로 감정을 추스르고 판단을 내려야 한다. 그것이 자신을 지키고 미래를 안전지대로 이끄는 견인차가 된다. 이것은 수시로 내가 자신에게 주입하는 명령어였다.

그러나 세상은 나보다 더 영악해서 나를 뺨치고 뒤통수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더구나 대학시절부터 흔한 청춘사업 한번 못해본 나는 경계심만 잔뜩 높았지 사람 보는 안목이 턱없이 부족했다. 아무리 마음을 다잡아 먹어도 감정이 이성을 제압하지 못했다. 한마디로 감정은 자연스럽고 이성을 거스르는 거역할 수 없는 힘이었다.

또 어느 면에서 보면 감정만큼 정확한 것도 없었다. 고상옥은 파혼소식에도 내게 어떤 연락도 취해오지 않았다. 사업에만 전념한다는 소식이었다. 그가 충무로 쪽에 스튜디오를 낸 것은 그래픽 디자인 쪽에 근무한 경력 때문이었다. 그래픽 디자인이라면 정영모와도 같은 계통이었다. 우연치고는 참 우스웠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고상옥이 기능대학을 나온 게 사실이었다.

학력을 자꾸 변조해 그의 말이라면 무조건 거짓말로 치부했는데 사실이었다. 그리고 더 놀라운 건 고상옥이 시골에 전답이 꽤 있다는 소문이었다. 개발지구에 묶여 있었을 뿐, 그런데 그게 갑자기 풀리는 바람에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다는 꽤 신빙성 있는 소식도 들렸다. 그의 새로운 이력이 밝혀질 때마다 내 마음은 가랑잎처럼 흔들렸다.

그렇게 무시하고 인간 하류처럼 취급하다 마음이 변신이라도 한 걸까. 스스로 모멸감까지 느껴졌다. 대학 시절 친구들끼리 모여 앉아 하던 농담이 생각났다.

돈은 사랑도 살 수 있다더라. 돈=능력 능력=사랑 아니겠어? 가난에 한 맺혀 알바에 목숨거는 미옥이가 한 말이었다. 그런 그녀도 키 작고 못난 남자가 나타나자 돈도 싫다면서 줄행랑을 치고 말았다. 감정이 먼저인 것이다. 정영모는 중간키에 얼굴도 그리 밉상은 아니었지만 진실성이 없어 보였다.

만날 때마다 돈 능력 운운하며 속을 긁었다. 운영하는 스튜디오가 잘 안 되는 모양이었다. 그는 되지도 않는 예술을 들먹거리며 자금이 달린다는 말을 곧잘 입에 올렸다. 참다 못한 내가 한마디 했다.

“정영모씨는 봉고족이나 셔터맨을 원하시나 보죠?”

“예?”

그 멍청한 남자는 의외라는 듯 멀뚱한 표정으로 물었다.

“남자들끼리 모이면 그런다잖아요, 약사나 학원하는 와이프를 부러워하면서 직업을 잘 골라야 한다고.”

표정으로 보아 정영모는 아직도 잘 못 알아듣는 것 같았다.

“저는요 희생적이거나 남자 뒷바라지나 하면서 일생을 보낼만큼 봉사정신이 투철하지가 않아서요, 다음부터 만나는 일이 없었음 좋겠네요. 무슨 말씀이신지 아시죠?”

“능력은 저도 웬만큼 있습니다. 그런데 왜 그런 말씀을.”

“제 이상형이 아니라고요? 그럼 됐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나오면서 속으로 욕설을 한바탕 퍼부었다. 재수없는 놈. 흡혈귀 같은 놈. 평생 여자 등이나 치면서 살 놈 등 등. 정영모는 공무원이라는 안정된 내 직업을 두고 흥정을 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한 건 현경이었다. 잘 구슬리고 타이르면 현모양처감이다. 게다가 이 험난한 세상에 남자 한번 못 사귀어 본 숙맥이다.

모르긴 몰라도 모아 놓은 예금통장도 많을 거다. 만나 봐서 웬만큼 싫지 않으면 결혼해도 괜찮을 거라며 둘 사이에 한참 말이 오간 것 같다. 그런데 그 망할 자식이 헤어지고 나서 한 말이 걸작이었다. 사실은 영혜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저쪽에서 만나 달라고 해 억지로 만나 주었다나? 현경이년은 그 소리를 하면서 깔깔대고 웃었다.

“너 정말 정영모가 마음에 들었던 거니?”

“누가 그딴 소릴해? 그 자식이 만날 때마다 능력 타령하더라, 그렇게 능력 많은 여자가 그딴 자식을 뭐하러 좋아해?”

“얘, 너 그딴 소리 말아라, 걔가 여자들한테 얼마나 인기가 높은데. 그리고 정영모가 눈이 얼마나 높은데?”

“그래서 니가 하고 싶은 소리가 뭔데?”

“사실 걔가 너를 많이 좋아하는 눈치더라, 그런데 퇴짜 맞고 나니 감정이 상한 모양이지, 지가 좋아해 놓고 거꾸로 니가 좋아했다고 둘러치더라, 뭐 그건 그거고 이왕 헤어진 거니까 쿨하게 잊어버리고 새 남자 만나. 내 또 소개시켜줄게.”

“너나 많이 만나고 재미 보셔 난 관심없으니까.”

그리고 나서 나는 정영모에 대한 험담과 욕설을 한시간은 했던 것 같다. 더불어 현경이한테 화풀이까지 했다.

“이년아 양심이나 똑바로 하고 살아, 어디서 나오지도 않은 대학을 나왔다고 뻥이나 치고, 허이구 인물 났다 인물 났어.”

그녀는 뻔뻔한 표정으로 말했다.

“니가 어떻게 내 속을 알겠냐. 이 못 배운 한 서린 설움을. 야 그나저나 고상옥 말야.”

“뭐? 고상옥?”

나는 갑자기 귀가 번쩍 띠는 것 같았다.

“아니 얘가 갑자기 왜 이래? 고상옥 하니까 깜짝 놀라고 설마?”

“설마 뭐?”

“아니 됐고, 고상옥이 파혼 당한 게 아니라 지가 파혼했다고 하더라, 웃겨서 지 주제에 무슨…….”

현경이는 말끝에 비웃음을 달더니 내 눈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이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그녀는 망설임 끝에 비아냥 섞인 말투로 말했다.

“뭔데 그래?”

일부러 큰소리로 말하는데 나도 모르게 가슴이 쿵쾅거렸다.

“그게 말야, 고상옥이 너를…….”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재수 없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현경이에게 한껏 눈을 째렸다.

“너 왜 그래? 난 그냥 내 짐작으로.”

“듣기 싫어, 그 인간 이야기라면 한 마디도 듣기 싫어, 재수 없는 자식.”

“왜 그래, 고상옥은 너를 좋은 사람 고마운 사람이라고 칭찬하던데, 둘이서 무슨 일이라고 있었던 거야?”

“일은 무슨?”

“고상옥은 진실인 것 같던데, 걔 옛날하고 달라 재산도 있고 사람도 달라졌어 신앙을 가지면 사람이 달라지나?”

현경이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약간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글쎄 고상옥이 파혼한 이유가.”

“듣기 싫다니까, 너 왜 자꾸 그 인간 이야기 하는 건데? 그렇게 괜찮으면 니가 가져 그러면 되잖아.”

“얘가 왜 이렇게 과민반응 하고 그럴까, 난 그냥 이야기하는 것뿐인데.”

현경이는 한참 망설이는 눈치더니 끝내 이야기를 꺼내지 않고 나가버렸다. 그녀가 나간 자리에 반쯤 마시다 만 커피가 덩그만히 놓여 있었다. 이상하게 가슴이 아파왔다. 갑자기 마음이 외로워지면서 슬프기까지 했다. 내가 왜 이럴까. 나는 그동안 똑똑하진 못해도 비교적 냉정하고 차분하게 감정을 추스르며 살아왔는데 지금의 이 현상은 무엇인가.

전혀 나답지 않은……….

몇 달 뒤, 꿈에도 그리던 전근이 이루어졌다. 빈 들판에 바람만 날리던 객지를 떠나 드디어 수도권에 진입한 것이다. 수원으로 근무지를 옮긴 나는 이내 분위기에 익숙해졌다. 나는 역시 도시 스타일인 모양이었다. 갈곳이 많아진 나는 퇴근 후 헬스장과 컴퓨터 학원에 다니며 심신의 도약을 꿈꾸었다. 전혀 운동을 하지 않았던 나는 헬스장이 마치 외국 같았다.

내가 헬스장에 다닌다고 하자 가족과 친구들은 모두 배를 쥐고 웃었다. 아마 천지가 개벽하려나 보다. 영혜가 운동을 다 하고. 어느날은 운동을 하고 나오는데 길거리에서 정영모를 만났다. 그는 거래처에 왔다 가는 길이라며 엉뚱한 질문을 했다.

“제가 아는 스튜디오에 갔다가 영혜씨 사진을 본 적이 있어요.”

“제 사진을요?”

“예, 남산 쪽에 있는 스튜디오인데.”

그는 말하다 말고 말끝을 흐렸다. 언젠가 현경이가 말한 게 생각났다.

“사실 걔가 너를 많이 좋아하는 눈치더라, 그런데 퇴짜 맞고 나니 감정이 상한 모양이지, 지가 좋아해 놓고 거꾸로 니가 좋아했다고 둘러치더라.”

“그 스튜디오 주인이 제 선배인데 그러는 거예요, 깨끗한 청순한 이미지의 사진이라 일부러 붙여 놓았다고, 그런데 영혜씨를 만난 순간 아! 그 여자구나 싶었어요.”

이 자식이 어디서 또 뻥이야. 할 일도 더럽게 없는 모양이군. 나는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저 바빠요, 그런 얘기 들을만큼 한가하지 않아요, 그럼 살펴 가세요.”

어디서 수작이야. 돌아서면서 생각했다. 내가 왜 이렇게 사나워진 걸까. 어느새 감정이 사막처럼 변해버린 걸까. 어디서 의심과 성질만 잔뜩 돋아서는. 거리는 봄 기운에 바람난 여자들이 잔뜩 성장(盛粧)한 차림으로 어디론가 급히 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하이힐을 신고 유난히 하체를 강조한 스타일을 한 여자들은 하나같이 표정이 당당해 보였다.

마치 현경이 스타일을 보는 듯했다. 현경이는 뛰고 나는 모델계에서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고 도중하차 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것도 경력이라고 중매가 쇄도해 날마다 행복한 비명을 지르다 드디어 가을날 웨딩마치를 올렸다. 그날 모든 사진 촬영은 정영모 스튜디오에서 했고 그는 톡톡한 수입을 올렸다.

현경이는 결혼한 지 5개월도 안 됐는데 아들을 낳았다. 속도위반이었다. 아들의 돌잔치를 유명 업소에서 했는데 그때도 사진 촬영을 정영모가 했다. 현경이와 아들의 사진을 포토샵할 필요도 없이 스튜디오 제일 잘 보이는 곳에 걸 예정이라고 했다. 그가 내게 다가와 말했다.

“저도 다음 달에 결혼하는데 제가 지난번에 말씀 드린 스튜디오 선배가 사진 촬영해주기로 했어요, 영혜씨 사진이 걸려져 있던 그 스튜디오 선배예요.”

이게 또 무슨 소리인가. 영 헷갈렸다.

“그 선배가 안 그랬는데 신앙을 갖고 나더니 영 딴 사람이 되더라고요, 진짜 순정이 무엇인지 알겠다면서, 그러면서 파혼은 왜 했나 몰라. 앞뒤가 안 맞는 말 같기는 해도 괜찮은 선배에요.”

“그 사람 이름이 고상옥 아닌가요?”

“어떻게 아셨어요?”

“그냥 현경이 통해서.”

그냥 어림짐작으로 한 말인데 맞았다. 나는 말을 해 놓고도 스스로 놀랐다. 마치 소설을 쓰는 듯한 착각에 휘말렸다. 나는 정영모의 말을 애써 외면하며 기분이 나빴다. 모두들 가는구나. 솔로의 비애를 느끼며 갑자기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마음이 외로워질 때마다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는 습관이 생겼다.

공연히 오지도 않는 문자메시지를 확인하며 초조한 몰골로 변해갔다. 따스한 안식이 그리웠다. 다시는 서울에 오지 말아야지.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가 잠적한 것처럼 살아야지. 열심히 책도 읽고 성당에도 나가야지. 알 수 없는 다짐을 거듭하면서 마음의 소용돌이는 점점 깊어만 갔다. 국감이 끝나고 어느 정도 안정되었을 때였다.

어느날이었다. 퇴근하고 나서 길을 걷는데 느닷없이 고상옥이 나타났다. 무슨 고민이 많았는지 안색이 핼쓱했다.

“저 이번에 개인 스튜디오를 청담동 쪽으로 옮겼습니다. 내일이 오픈 날짜입니다.”

“그런데요?”

나는 이 자식이 또 무슨 수작을 부리려나 바짝 긴장이 되었다. 그런데 다음 순간 이상한 기대감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그건 내 감정을 뒤흔든 대반전이었다.

“제가 여기까지 내려왔을 땐 그냥 심심해서 온 건 아니란 걸 아실 거예요, 가시죠. 제가 모실께요.”

그는 앞장 서 걷더니 공용주차장 쪽으로 뛰어 갔다. 검은 에쿠우스 신형 세단이 반짝 반짝 윤기를 발하며 서 있었다. 고상옥이 차 문을 열더니 타라고 손짓을 했다. 전 같았더라면 단번에 돌아섰을 나였다. 그런데 이상하게 몸이 스르르 자동차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고상옥이 운전대를 잡더니 말했다.

“안전밸트 매세요, 지금부터 전속력으로 달릴 겁니다.”

“네? 뭐라구요?”

그는 대답도 없이 엑셀을 밟더니 급하게 커브를 틀었다. 고속도로에 진입하면서부터는 아예 속도경쟁을 하듯 속력을 높이기 시작했다. 뒤에서 빵빵! 하고 경적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왜 그래요? 미쳤어요. 죽으려면 혼자 죽지 왜 이러는 거예요?”

“왜 같이 죽자고 할까봐 겁나요? 그럼 타지를 말았어야지.”

“뭐라고요, 당장 차 세워요 빨리요.”

“그래도 죽기는 싫은 모양이죠, 그런 내 말대로 할래요?”

소음 때문에 그의 말이 들리는 듯하다 사라졌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갑자기 눈앞에서 희한한 광경이 펼쳐졌다. 반파된 자동차에 사람들이 모여 웅성대고 있었다. 고속도로 상에서 교통사고가 발생한 모양이었다. 경찰 순찰차와 앰뷸런스 주변으로 끔찍한 사고 현장이 낱낱이 보였다. 가운을 입은 남자들이 들것에 사람을 싣고 있었다. 순간 죽음에 대한 공포가 오싹 느껴졌다.

고상옥이 속력을 멈추더니 말했다.

“어이쿠 사고가 크게 난 모양이군, 그러게 과속은 금물이라니까.”

나는 속으로 말했다. 너나 잘해라. 하마터면 나도 너 때문에 황천길 가는 줄 알았다.

“이제 직장생활 지긋지긋하지 않아요?”

“그건 또 무슨 소리에요?”

“그냥 집에서 주방장 노릇이나 하면서 살 생각 없냐고요?”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인데? 말하려다 난 깜짝 놀랐다. 설마 이 인간이 내게?

“내일 오픈식 할 때 저희 부모님도 오실 건데 영혜씨 인사시켜도 괜찮죠? 전 과거엔 현경씨 같은 스타일 좋아했는데 지금은 아니에요, 또 지금은 엄연히 유부녀잖아요. 영혜씨는 오래전부터 봐왔고 제가 영혜씨에 비해 부족한 건 많지만 마음 하나만은 진실해요 믿어 주세요.”

“그런 이야기를 무슨 이런 자동차 안에서 해요, 제가 그동안 고상옥씨를 얼마나 미워했는지 알아요? 빨리 차 세워요?”

그는 라디오 볼륨을 높였다. 스테레오에서 음악이 흘러나왔다. 그건 유치하게도 7080세대 노래인 심수봉의 ‘난 여자이니까’였다. 노래 가사가 마치 내가 자기에게 프러포즈하는 것 같이 들렸다. 기가 막혔다.

 

「사랑한다 말할까 좋아한다 말할까

아니야 아니야 말 못해 나는 여자이니까

만나자고 말할까 조용한 찻집에서

아니야 아니야 난 싫어 나는 여자이니까

사랑한단 말 대신에 웃음을 보였는데 음

모르는 체 하는 당신 미워 정말 미워 음

미워한다 말할까 싫어한다 말할까

아니야 아니야 말 못해 당신을 사랑하니까

사랑한다 말해요 좋아한다 말해요

아니야 아니야 난 싫어 나는 여자이니까」

“듣기 싫으니까 빨리 꺼요.”

나는 소리를 버럭 질렀다. 기분이 상당히 나빠졌다.

“제게도 다시 한번 기회를 주면 안 될까요?”

“듣기 싫어요, 왜요 제가 나이를 먹다보니 만만해진 건가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제 마음은 그러니까 그러니까……….”

그가 망설이며 말하려는 사이 옆 차량이 갑자기 급커브를 들며 끼어들었다. 그 바람에 자동차가 갑자기 오른쪽으로 기울면서 그의 몸이 내 어깨에 쏠렸다. 순간 당황했지만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이렇게 영혜씨 모시고 고속도를 시원하게 달려보는 것이 제 소원이었습니다. 그래서 자동차 뽑자마자 달려온 겁니다. 주제넘다고 욕하셔도 괜찮아요, 오늘의 이 추억 평생 간직하고 살고 싶습니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그의 목소리는 비굴하다 못해 거의 울다시피 했다. 나는 갑자기 그가 불쌍해지기 시작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저쪽 톨게이터에서 P턴해서 돌아가 주세요, 내일 쉬고 월요일에 출근해야 하니까요.”

생각과 달리 내 목소리는 풀이 죽어 있었다. 그는 밝은 미소를 짓더니 유연하게 핸들을 꺾었다. 차창 밖은 어느새 어둠으로 변해 있었다. 무거운 정적이 그와 나 사이에 흘렀다. 그가 잠시 내 표정을 살피더니 살며시 내 손을 감아쥐었다.

그런데 전혀 생각지도 않은 감정이 내 속에서 일었다. 미안함이었다. 그동안 그에게 했던 수많은 악담과 조롱의 말들이 한꺼번에 내 안에서 소용돌이치며 빠져 나가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 특히 현경과 나에게 모멸감과 조롱의 대상이 되었던 그가 받았을 상처에 대해……… 연민의 감정과 함께 눈물이 되어 솟구쳐 올랐다.

그도 한 사람의 인격체인데 너무 많은 모멸과 멸시의 말을 퍼부은 것에 대해서 회개의 감정과 함께 통한의 눈물이 나왔다.

“그동안 많이 미안했어요.”

나는 그의 손을 놓으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그동안 저를 상대해 주신 것만으로도 저는 만족합니다.”

나는 그때 비로소 그의 진실에 대해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솔직한 심정으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야만 내 마지막 남은 자존심을 지킬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아니 내 마음에 떠오르는 그 모호한 감정의 실체를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래 여기까지다. 여기까지다.

나는 자신에게 되뇌며 자동차에서 내렸다. 그가 자동차에서 따라 내리며 악수를 청했다.

그러나 나는 끝내 그 손마저 외면했다.

“고상옥씨 마음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지만 이제 이런 만남 솔직히 거북하네요, 좋은 인연 만나세요, 전 아무래도.”

나는 말을 채 끝내지도 않고 돌아섰다. 걸어가는데 뒤에서 자꾸 그의 시선이 느껴졌다. 신작로를 향해 정신없이 뛰기 시작했다. 한참을 뛰어 가는데 검정색 승용차가 내 곁을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그였다.

그럼 그렇지. 니가.

그가 백미러를 통해 내 마지막 뒷모습을 확인하며 자신 있게 웃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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