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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1.01 이후)


그 날 이후
2013-04-27 09:16:13
sws60

조회:635
추천:73

(단편) 그 날 이후

신외숙

 

 

어느날 밤 꿈속에서 그를 보았다.

그가 검은 화염으로 뒤덮인 곳에서 많은 사람들과 함께 웅크린 모습으로 서 있었다.

그들은 잔뜩 겁에 질린 표정으로 서 있었는데 검은 너울을 쓴 독수리 같기도 하고 갈 까마귀 같은 것들이 사람들 위를 소리를 지르며 날아다녔다. 이상한 건, 사람들이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공중 부양하는 것처럼 두둥실 떠다니는 것이었다.

개중에는 무어라 함성을 지르는가 하면 안타깝게 울부짖는 사람도 있었다. 후회막급한 탄식과 절망이 그들의 입 사이에서 마구 빠져나왔다. 그런데 그들이 내뱉는 소리는 하나같이 고통이었다. 그는 사람들 사이에서 두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무어라 계속 이야기하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온 힘을 다 해 외쳤다.

“거기 있지 말고 이리 나와, 더 이상 가면 위험해 안 돼.”

그러나 그는 내 소리가 들리지 않는지 여전히 같은 자세로 안타깝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아니 호소하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달려가기 위해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발바닥이 땅에 붙어 전혀 움직이지 않는 것이었다. 발을 움직여 보았으나 얼어붙은 듯 그대로였다.

마치 석고상이 된 것 같았다. 두 팔을 움직여 다시 한번 앞으로 나가길 시도했으나 소용없었다. 더구나 그가 있는 곳과 이곳 사이에는 엄청난 무한공간이 형성돼 있었다. 검은 안개 같은 것이 낭떠러지를 사이에 두고 뭉게구름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는데 점점 핏빛으로 변해가는 것이었다.

불가능이란 단어가 점점 그와 나 사이를 가로막았다. 나는 두 손을 모아 그에게 힘껏 소리쳤다.

“조금만 기다려, 내가 거기로 갈게.”

내 소리는 안개 속에 파묻혀 공중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나는 그를 향해 연거푸 소리쳤다.

“내 말 들리지? 이곳과 그곳은 엄청난 구렁텅이가 있어 그러니 내가 하는 말을 잘 들어, 그곳에서 빠져 나와야 해. 알았지 이 민 재.”

나는 있는 힘을 다 해 또다시 소리쳤다. 순간 내 말은 메아리 현상을 일으키며 그에게 전달된 모양이었다. 그가 갑자기 이쪽으로 고개를 홱 젖히더니 두 손을 마구 흔들었다. 나도 동시에 그에게 손을 흔들며 앞으로 나가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공중부양 하는 것처럼 몸이 두둥실 떠오르는 것이었다.

몸이 새털처럼 가벼워지면서 주변에서 경쾌한 음악이 들려왔다. 흑암 중에 빛을 뿌리는 죽어가는 영혼을 살리는 환상곡 메시아였다.

“조금만 기다려, 내가 가서 구해줄게.”

몸이 낭떠러지를 반쯤 지났을 때였다. 갑자기 하늘이 캄캄해지더니 몸이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정신없이 낙하하기 시작했다. 빠른 속도로, 공포와 죽음의 사슬이 당장 내 온몸을 옥죄기 시작했다. 마음속에서 한 단어가 들려왔다.

무저갱.

발이 닿지가 않았다. 얼마 쯤 더 내려가야 끝이 나올까. 머리칼이 위쪽으로 뻗치면서 누군가 몸을 아래쪽으로 강하게 잡아당기고 있었다. 얼마 쯤 내려갔을까. 속도가 점점 줄더니 이상하게 몸이 가벼워졌다. 아니 그건 순전히 내 착각인지도 모른다. 마음이 이상하게 안정되는가 싶더니 몸이 무언가에 의해 점점 위로 올려지는 것이었다. 든든하고 강한 힘에 의해. 어둠이 물러나면서 빛이 내 온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기뻐하며 찬양하세 만왕의 왕 하나님……….

노랫가락이 마음에 전해오며 안개가 사라지고 있었다. 그러나 내 몸은 여전히 낭떠러지 한 가운데 머물러 있었다. 아, 그곳은 삶과 죽음의 갈림길이었다. 그가 서 있는 곳은 심판의 문이 있는 최후라는 결정장이었다. 나는 또다시 그에게 소리쳤다.

“이 민 재.”

그가 나를 알아보고는 손짓했다. 어서 자기를 구해 달라고. 빨리 건너오라고. 그러나 갈 수가 없었다. 큰 구렁이 가로막고 있어서였다. 설교 시간에 듣던 나사로와 거지 이야기가 생각났다.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먹고 개들이 와서 그 헌 데를 핥던 거지가 죽어 천국에 갔을 때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음부로 들어갔다. 부자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 품에 안겨 있는 나사로를 보고 말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서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말했다.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이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는 큰 구렁이 있어 건너갈 수가 없다.”

그러자 부자가 말했다.

“그렇다면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여 저희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그러자 아브라함이 말했다.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나왔다. 사람들은 심판대 앞에서 얼굴이 점점 흑빛으로 변해갔다. 나는 마지막으로 힘주어 말했다.

“이 민 재 나 따라해 봐. 지저스 크라이스트.”

목소리가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온몸에서 땀이 비오듯 흘러내렸다. 순간 눈이 번쩍 떠지면서 꿈에서 깨어났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그에게 전화를 했다. 그의 휴대폰은 꺼져 있었다. 불길한 예감이 두려움과 함께 가슴속으로 와락 달려들었다. 언젠가 그가 한 말이 생각났다.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왜 그 수많은 악인들을 심판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두는 거지?”

“세상에는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살고 있어. 어떨 땐 가라지가 알곡보다 더 크고 튼튼하게 자라는 경우도 있지, 그런데 가라지 하나 뽑겠다고 하다가 알곡까지 뽑히면 어쩌지? 어차피 추수 때가 되면 알곡은 곳간으로 가라지는 불에 태워 없어져, 또 하나님은 악인도 그 날에 합당하게 지으셨고 그들에게도 회개라는 마지막 기회는 언제든 있는 법이니까.”

“그렇지만 나는 아무래도 신의 처사를 이해할 수가 없어. 왜 인간의 자유를 통제하려 드나 말이지.”

“자유의지는 스스로 책임지는 거야, 악에게 내 마음을 주던 선에게 마음을 주던 결국 내책임이야.”

“복잡한 거 다 필요 없고 그냥 인생은 한번 왔다 가는 거야, 재미있게 즐겁게 살다 가면 되는 거야. 영원이란 없어.”

민재는 항상 자유원칙론자였다. 모든 건 자유의지로 결정해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만 책임지면 된다는 식이었다.

“그렇다면 이 세상의 원칙과 정의는 누가 지켜나간다는 거야?”

“그거야 소수의 정의파가 지켜 나가겠지, 우리는 그때 그때 상황에 따라 협조하거나 외면 하면 그만이고.”

저런 교활한 기회주의자 같으니라고. 세상이 모두 너 이민재 같은 사람만 있다면 어떻게 될까. 세상은 강도의 굴혈이 될지도 모른다. 이기주의 물질 맘몬 사상은 또다른 신적 역할을 하고 있다. 고래로부터 사람들은 돈이라면 양심도 팔아먹고 심지어 목숨과 가족까지도 거래 대상으로 한다.

돈보다 더 지독한 신적 대상이 있다. 명예다. 명예는 인간의 욕구 중 가장 수위를 차지한다. 사람들은 돈보다도 명예를 더 사랑하는지 모른다. 명예는 모든 수단의 최후 목적이 된다. 요즘 불거지는 논문 표절 사건만 해도 그렇다. 뻔히 발각날 것을 알면서도 너도 나도 논문 베끼기에 동참하고 있다.

강남의 유명한 성직자도 이에 동참하여 개망신과 함께 불이익을 자처했다고 한다. 어디 그뿐이겠는가. 유명한 연예인은 물론, 이름 석자만 대면 알만한 지식층까지 동참했다니 기가 막힐 노릇 아닌가. 내 주변사람 중에는 입만 열면 박사 교수 운운하는 사람이 있었다. 자존감이 높다 못해 교만이 하늘을 찌를 듯하다가 어느날 낙마했다.

자신을 적극적으로 밀어주던 담당 교수가 논문 표절로 세간의 이목을 집중하다 못해 개망신을 당한 것이다. 그녀는 당연히 논문심사에서 미끄러졌고 그토록 원하던 명예의 대열에서 후퇴하고 말았다. 그와 조금 다른 경우이긴 해도 이민재 그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뛰어난 두뇌만 믿고서 경쟁 대열에 뛰어 들었다가 엄청난 파고에 휩쓸린 것이다.

그는 학창시절부터 항상 논리적이었고 그러면서도 감성적이었다. 따라서 그의 견해는 항상 변화를 예고하고 있었다. 어떨 땐 철학자 같다가 어떨 땐 시인(詩人)으로 바뀌고 또 어떨 땐 정의로운 사도(師道) 같다가 현실적인 이기주의 아니 냉소주의자로 변모했다. 종잡을 수 없는 그의 행동 때문에 낭패 본 사람도 여럿이라는 소문이었다.

가장 이해가 안 가는 것은 낭만주의자처럼 행동하다가 갑자기 성공지상주의로 변하는 것이었다. 그럴지라도 그에겐 남다른 매력이 있었다. 여자에게 모성 본능을 자극하는 행동이라든가 정확한 사리판단과 위기 대처능력 같은 것이었다. 그런 것들은 그에게 신뢰를 쌓는 역할을 했다.

이기적이지만 순한 눈망울로 상대의 마음을 아우르고 욕구가 강한 듯 보여도 자제심이 강해 순간을 모면했다. 그렇다고 그가 마냥 정직한 것도 아니었다. 아무튼 그는 선인도 악인도 아닌 중간지대였다. 그렇게 철저한 현실주의자인 그에게 영원이란 단어가 먹힐 리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그를 외면할 수 없었다.

“만일 내세가 없다면 삶의 목적도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

내 질문에 그는 한심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너는 성경에 나오는 영생을 믿는다는 거니?”

“그럼 믿지.”

“그래 너나 실컷 믿고 영생해라.”

그에게 두려움 따위는 없어 보였다. 하지만 어려움이 닥치면 달라지겠지.

“세상에서 짓는 죄 중에 가장 큰 죄가 무엇인지 알아?”

“뭔데?”

“그건 교만죄야.” “뭐? 교만죄 그게 무슨 말이야.”

“다른 죄는 사람을 향해 짓지만 교만은 하나님을 향해 짓는 죄이기 때문이야.”

“넌 그걸 지금 내게 말이라고 하니? 나 참 별소릴 다 듣겠네.”

“명심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게 얼마나 큰 죄인지.”

이민재는 대학 졸업 후 군에 입대했는데 거기에서 큰 인생 수업을 받은 것 같다. 시련이 마음을 단련한다고 자신감과 교만이 한풀 꺾인 듯 보였다. 어느날 그가 내게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라며?”

나는 알면서도 모른 체 되물었다.

“누가?”

“누가 나한테 그러더라, 그 말이 맞긴 해. 그런데 가장 큰 교만은 어떤 마음인지 알아?”

잠시 내 마음 속에 긴장이 흘렀다. 무슨 바람이 불어 내게 이 같은 질문을 하는 걸까.

“유명한 심리학자 C S 루이스가 말했대, 교만은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자 사랑받고자 하는 마음속에 가장 많이 숨어 있다고.”

“그걸 어디서 들었는데?”

“군대 있을 때 나와 친했던 군종이 말해주더라, 넌 여적 그것도 모르고 뭘 했냐?”

그는 제법 아는 체를 하며 말했다.

“그래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데?”

“난 너희 기독교인들부터 겸손해졌으면 하는 말이야, 저희들은 온갖 세상 영광 다 구하고 다니면서 진리만 앞세우더라, 넌 아니라고 할 수 있어?”

나는 그의 말에 수긍도 부정도 할 수 없었다. 그나저나 교만의 실체에 대해 다시 한번 깨닫는 순간이었다. 나 역시 부지불식 간에 인정과 사랑에 집착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돌아서는데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래도 군대 다녀오더니 많이 달라졌네. 제법 충고도 할 줄 알고.”

당시 나는 대학 졸업 후 3년을 내리 백수로 놀고먹고 있었다. 비싼 등록금 들여 대학 공부 시켜 놨더니 겨우 백수냐고 날마다 가족들로부터 지청구를 얻어듣고 있었다. 취직을 위해 스펙을 쌓는다고 했는데 면접 볼 때마다 물거품이 되어 날아갔다. 실력도 문제이지만 내게는 뛰어 넘을 수 없는 거대한 장벽이 있었다.

바로 대인관계였다. 사람들 앞에만 서면 나도 모르게 긴장이 되고 떨렸다. 말도 버벅거리고 상대가 위압적으로 나오면 순간적으로 판단력이 흐려져 실수가 잇따랐다. 그러니까 나는 영업직 같은 사람 상대하는 직업은 아예 꿈도 꾸지 않았다. 그냥 앉아서 하는 사무직이 제격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면접에서 번번이 떨어졌다.

그런 일이 반복되고 나자 내 힘으로는 어쩔 수 없다는 자조감과 함께 불신앙이 슬그머니 마음 한 구석을 차지하는 것이었다. 한번 마음이 나락에 처박히자 순식간에 열등감이 몰려왔다. 무능감도 함께 달려와 전능자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리려 했다. 그러나 그것을 말로 발설하는 순간 나는 더한층 몰락할 것이다.

나는 내 무능한 현실을 놓고 날마다 기도의 글을 썼다. 그리고 매일 밤 하늘나라에 글을 발송했다. 글은 날로 일취월장 문장력을 높였고 매수 또한 늘어났다. 거기에다 생각지도 않은 상상력까지 추가돼 소설과 시나리오 형식을 타고 새로 태어나기 시작했다. 어느날 시험 삼아 인터넷 카페에 글을 올렸는데 상상하지도 않은 결과가 나타났다.

내 사이트에 접속한 건수가 늘어나면서 공감대를 호소하는 댓글이 엄청 달린 것이다. 그들은 모두 나처럼 백수신세를 지는 사람들 같았다. 어쨌든 나는 얼마 안 가 작가라는 타이틀을 갖게 되었고 그 덕분으로 출판사에 취직하는 행운도 얻었다. 그러나 진짜 환란은 취직 뒤에 있었다.

우선 월급이 박봉에다 그나마 제 날짜에 나오는 날이 적었다. 날마다 컴퓨터에 앉아 일을 하는데 잠시 딴 생각만 했다 하면 일이 엉망이 되는 것이다. 아! 나는 그때 깨달았다. 내 진짜 문제는 집중력에 있었구나. 근무하면서 깨달은 또다른 사실이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교만하다는 것이었다.

겸손한 체 선한 체 내숭을 떨다가 기회만 오면 악마의 발톱을 휘둘렀다. 그건 지위계층을 망라하고 마찬가지였다. 앞서도 말했지만 교만에는 성직자도 예외가 아니었다. 아니 그들에겐 사람 보는 안목이 있어 더 심한지도 몰랐다. 그런데 교만한 사람들의 특징이 있었다. 그들은 전혀 자기 자신을 들여다 볼 줄 모르는 것이다.

자기 눈에 든 들보는 깨닫지 못하면서 남의 눈에 든 들보를 빼내 주겠다고 난리였다. 따라서 그들에겐 전혀 회개가 없었다. 직장에 근무하면서 내 창작 활동은 뜸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이민재 그는 국내 유수업체에 취직하여 나날이 승승장구에 올랐다. 일단 경쟁구도 속에 진입한 이상 그는 본성으로 돌아가 승진에 집착했다.

한치도 뒤로 물러설 수 없는 전장에 돌입한 것이다. 일중독에 심취한 그는 인정받기 위해 갖은 수단과 방법을 동원했다. 그 특유의 감성도 저버린 채 이성적인 판단만 앞세워 전후좌우 돌아보지 않고 일에만 전념했다.

그가 인정받는 순간마다 나타나는 현상이 있었는데 그건 그가 이전에 주장하던 교만이었다. 어떨 땐 대놓고 사람을 무시하고 아전인수격으로 행동했다. 이상한 건 그럴수록 그에게 브레이크가 작동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에게 남보다 뛰어난 게 있다면 석학(碩學)인 두뇌보다 수려한 외모였다.

회사의 광고모델에 출연하라는 제의를 수없이 받을만큼 그의 외모는 출중했다. 얼굴만 본다면 귀공자 왕자님 스타일이었다. 그는 중직에 오르자 계약 건이 있을 때마다 앞장 서는 역할을 감당했다. 특히 상대 거래처가 여자일 경우엔 그 효과가 극대화 되어 나타났다. 이민재의 외모에 넋이 나간 여자가 따져볼 겨를도 없이 계약서에 도장을 찍어 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계약 건이 성사되면 밤새도록 두주불사(斗酒不辭)했다. 어느날 그가 놀란 목소리로 전화해 나가 보았더니 얼굴이 먹빛으로 변해 있었다.

“얼굴이 왜 그래?”

“술을 너무 마셨더니 그래.”

“술 작작 마셔 그러다 골로 가는 수가 있어.”

“나 사실 맘이 편치가 않아.”

“왜? 한참 잘 나간다며?”

“그럼 뭘 해, 맘이 편치가 않은데.”

“인정받고 하는 일도 잘 된다며, 누군가 시기하는 사람이 있구나 그치?”

“그렇기도 하고 이젠 사람들 만나면 괜히 불안해.”

“왜?”

“그러는 너는 마음 편하니?”

“항상 그런 건 아니지만 그렇게 불안한 것도 아냐.”

“좋겠다, 그런데 나 지금은 마음이 편안해.”

“지금?”

그는 길가에 술집을 가리키며 말했다.

“술 한잔 할래?”

“나 술 안 마시는 거 알잖아.”

“아 참 그렇지, 중요한 할 말이 있는데…….”

“무슨 말인데 그냥 여기서 해 봐.”

“그걸 어떻게 맨 정신으로 하냐?”

그는 눈을 흘기더니 핸드폰의 액정 화면을 만지작거렸다. 그때였다. 내 핸드폰에서 요란하게 벨이 울린 것은.

“정은혜씨. 사무실 나갈 때 컴퓨터 끄고 나간 거야?”

사장이었다. 내가 또 무슨 실수를 한 게 틀림없었다. 사장의 목소리가 질책조로 화가 잔뜩 나 있었다. 이민재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네 컴퓨터 끄고 나왔는데요.”

“무슨 소리야? 컴퓨터 바이러스 먹은 것 같은데.”

“네? 뭐라구요?”

나는 너무 긴장해서 손이 덜덜 떨렸다. 그게 사실이라면 하루종일 입력해 놓은 게 다 날아가는 거 아닌가.

“정은혜씨, 따로 저장해 놓은 유에스비 있지?”

“네? 그게.”

“아니 그럼 그냥 했다는 거야?”

“그 그러니까.”

“암튼 알았고, 기술자 불러서 컴퓨터 수리할 거니까 내일 이야기하자고.”

나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한숨을 내리쉬었다.

“컴퓨터 본체 날아가도 E드라이브에 저장해 놓으면 괜찮은 거 아냐?”

“그런데 내가 가끔 그걸 잊어버려.”

“그러게 일을 할 땐 정신 똑바로 차리고 해야지, 하긴 월급이라고 해봐야 얼마나 받겠어.”

나는 그 말 한마디에 자존심이 팍 상하고 말았다. 그가 자기의 자동차를 가리키며 말했다.

“타, 내가 드라이브 시켜줄게.”

“싫어.”

그때 우리 곁을 지나던 젊은 연인이 말했다.

“쟤네들 둘 다 선수 같지 않니?”

나는 처음에 그 말의 의미를 몰랐다. 그런데 다음 순간 이민재의 표정이 일그러지면서 욕이 터져 나왔다.

“망할 자식들 더 저희들 같은 줄 아는 모양이지.”

그가 자동차 문을 열며 말했다.

“얼른 타, 안 잡아먹을 테니까.”

자동차는 복잡한 시내를 벗어나 한강변을 끼고 달리기 시작했다. 얼마 쯤 달렸을까. 옆을 보니 그의 눈빛이 사납게 변해 있었다. 그런데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어딜 가는 거야?”

“왜 불안해? 널 잡아먹기라도 할까 봐서?”

“그래도 어딜 가는지 알아야 할 것 아냐?”

“넌 도대체 겨우 푼돈 받으면서 언제까지 직장에 다닐 건데?”

“남이사 별 상관을 다 하셔.”

“뭐? 남?”

그가 갑자기 자동차를 우회전하더니 급정거를 했다.

“내려.”

“뭐라구?”

눈빛이 또 사납게 변했다. 왜 저러지? 내가 내리자 그가 따라 내리며 말했다. 양복 안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더니 한숨을 푹 내쉬더니 말했다.

“정은혜 저기 좀 봐, 경치 죽인다.”

그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은 강 건너편 작은 야산이었다. 개나리와 진달래 벚꽃이 현란한 색채로 물들어 있었다. 강물은 봄바람을 타고 돌 사이를 흐르고 있었다.

“도대체 할 말이 뭔데 여기까지 온 거냐니까. 바쁜데.”

“야! 너만 바쁘냐 난 더 바뻐.” “글쎄 바쁘니까 빨리 말해.”

“야! 넌 여자가 어째 그리 무드가 없냐, 남자가 여기까지 와서 할 말이 있다고 하면 척 눈치를 채야지. 저렇게…….”

“저렇게 뭐?”

“야! 너 사귀는 남자 있냐?”

“뭐라구? 왜 없으면 남자 소개시켜 주려고? 좋지, 어떤 사람인데.”

“뭐? 나보고 니 남자를 소개시켜 달라고?”

“아니 지금 그런다며.”

“뭐? 내가 언제?” “그럼 아니었어, 그럼 사귀는 남자 있냐고 왜 물은 건데.”

“없으면 난 어떠냐 그거지, 내가 니 남자친구하면 안 될까?”

“뭐? 노우 노우야. 난 너같은 타입 별루야.” “왜? 여자들은 나만 보면 좋아서 환장을 하는데.”

“그럼 그런 여자들한테 가 보시든가.”

“왜 내가 마음에 안 들어?”

“난 암튼 싫어, 나 갈래 지금 들은 이야기는 안 들은 걸로 할게.”

그는 머리를 쥐어뜯더니 또다시 눈빛이 사납게 변했다.

“나야말로 지금 니가 한 말 안 들은 걸로 할게, 내 살면서 여자한테 퇴짜 맞은 건 처음이다, 그런 의미에서 널 꼭 내 여자로 만들 거야, 그냥 이걸 확!”

“뭐? 뭐? 너 이민재 너 지금 나한테 뭐란 거야 날 그냥 확 어떻게 할 건데?”

“왜 겁나냐 내가 널 어떻게 할까봐, 그냥 하면 재미없지, 서서히 뜸들이다 해야지 너! 아앞으로 내가 전화하면 재깍재깍 받아 알았지, 안 그럼 당장 쫓아가서 개망신 줄 테니까.”

나는 하도 기가 막혀 기절할 지경이었다. 무슨 남자가 하루 이틀 안 것도 아닌데 그것도 프러포즈 비슷한 걸 하면서 이렇게 협박조로 나온단 말인가. 이건 아니다. 이건 이민재 그만의 특유의 교만이다. 어떤 여자든 자기가 손 내밀면 다가와 안겨주어야만 한다는 교만.

“너 내 성격 알지, 난 한번 말하면 돌직구로 그대로 나간다는 거, 내 뜻대로 안 움직여주면 그땐 확!”

“아이구 잘하면 사람 치겠다, 내가 그렇게 만만해 보이냐, 왜 내가 다른 여자들처럼 아이구 좋아요 사랑해요 감사해요 하고 안겨주어야 하냐?”

“그러면 재미없지, 그래도 나같은 남자가 말야 이렇게 나오면 너도 반응이 있어야 할 것 아냐.”

“지금 반응하고 있잖아 아니라고, 왜 니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으니 불만이야?”

“이게 어디서 남자한테 버릇없이.” “뭐야?”

그 순간이었다. 그가 내 입술을 덮친 것은. 그 순간부터 나는 그의 감정의 하수인이 되었다. 그가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감정의 꼭두각시. 너무 쉽게 마음을 열어준 건 아닐까. 그는 여자의 마음을 다루는 요술사 같았다. 그와의 교제가 무르익을 무렵 갑자기 생각이 났다. 그와 함께 길거리에 서 있을 때 지나가던 연인들이 한 말이.

“쟤네들 둘 다 선수 같지 않니?”

천만에 이민재는 선수일지 몰라도 난 아니다. 내가 선수라니 지나던 개가 웃을 일이다. 어느날 그가 가슴이 아프다면 통증을 호소해 왔다. 그가 아프다고 하니까 내 마음은 천갈래 만갈래로 찢어지는 것 같았다. 그가 여자의 모성 본능을 자극하는 것도 모르고.

“그러게 자신을 늘 겸손하게 낮춰야지. 내 몸 내 마음을 내 뜻대로 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 하나님께 맡겨.”

“넌 또 그 타령이냐?”

그런데 이번에는 반응이 달랐다. 왠지 풀이 죽고 목소리가 기운이 없었다.

“나 요즘 매일 악몽을 꿔. 너무 무서워.”

“악몽?”

“응, 잠이 들자마자 꿈을 꾸기 시작하는데 어떤 무서운 힘이 날 막 끌고 다니는 거야.”

“주로 어딜 다니는데?”

“뜨거운 불못도 있고 활활 타는 유황불 같은 곳인데 사람들이 막 아우성치는 소리가 들려, 그리고 얼음 속에 거꾸로 처박혀서 고통당하는 …… 너무 무서워.”

그는 말하다 말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엄청 무서웠겠구나. 그래서 넌 어떻게 했는데?”

“날 끌고 간 사람이 그곳으로 날 밀어 넣을까봐 막 살려달라고 빌었어.”

“그러니까 그 사람이 뭐랬는데.”

“다음번에 기회 봐서 또 데리고 오겠다고, 그런데 그 고통이 꿈에서 깨어났는데도 생생하게 떠오르는 거야, 나 너무 무서워.”

세상에, 담대하고 거칠 것 없는 이민재가 무섭다니 그런 그가 꼭 어린아이 같았다.

“오늘 밤 또 꿈을 꾸면 어떡해야 할지 알려줘.”

“그땐 말이지 그리스도를 외쳐 봐. 그러면 괜찮을 거야.”

“그리스도? 정말 그럴까.”

그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웃었다.

“무슨 드라큐라 영화 같다. 이왕이면 십자가도 가져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더 좋겠지만 꿈에서 그게 마음대로 될까?”

“그렇담 오늘 밤은 십자가를 품에 안고 자야겠군.”

나는 한동안 그의 꿈을 놓고 영적 해석에 골몰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소식이 뜸해 이젠 악몽을 꾸지 않나 보다 하고 안심했다. 나 또한 직장생활에 숨 쉴 겨를조차 없을 정도로 바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날인가부터 내가 이상한 꿈을 꾸기 시작했다. 존 번연이 쓴 천로역정을 대학 다닐 때 딱 한번 읽어 본 기억이 난다.

그때는 감동 깊게 전율을 느끼며 읽은 것 같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영화를 보듯 생생하게 단어와 영상이 겹쳐 시야를 자극했다. 하지만 생활에 바쁘다 보니 어느덧 회색 장면으로 잊혀지고 말았다. 그런데 내가 꾼 꿈은 마치 천로역정에 나오는 회색 장면을 선명한 색채로 바꿔 주는 것 같았다.

어떨 땐 마치 천로역정의 한 장면처럼 생생하게 지옥의 현상들이 벌어지는 것이었다. 그때마다 중간에 등장하는 것이 이민재였다. 도대체 세상에서 얼마나 죄를 많이 지었으면, 꿈에서까지 나타나 내게 도움을 요청하는 걸까. 꿈에서 나는 공중부양과 함께 온갖 끔찍한 형상들을 다 보았다. 그야말로 악몽이었다.

꿈에서 깨어나면 몽롱한 정신상태로 몸이 좌우로 흔들리는 게 꼭 술 취한 사람 같았다. 직장에서도 별일 아닌 것 같고도 실수를 연발해 핀잔을 듣기도 했다.

한번은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서 그가 컴컴한 동굴 같은 곳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손가락질과 비난을 받고 있었다. 온갖 험한 악담과 저주가 그들의 입가에서 새어 나왔다. 말은 비수로 변해 그의 가슴에 꽂혔다. 그들이 주로 내뱉는 단어가 있었는데 하나같이 거짓말이었다. 그는 피가 흐르는 가슴을 움켜잡고서 간신히 한 마디 했다.

“너희들이야말로 거짓말 말어.”

힘들었다. 꿈속에서도 시달리고 현실 속에서도 비몽사몽간을 해매며 산다는 것이. 도대체 그에겐 어떤 죄목이 그렇게 많기에 내가 대신 이 고통을 당한단 말인가. 그는 한동안 잘 나가는지 연락도 없었다. 그러더니 어느날 연락이 왔다. 자기가 다니는 회사 광고모델로 출연하게 됐다는, 그 대가로 엄청난 거래가 오갔던 것 같다.

그는 일단 목표가 보이면 편법도 불사했다. 어느 정도 위험도 감수해 가며 자신이 원하는 바는 꼭 성취하는 스타일이었다. 가끔씩 거짓말도 했다. 약속을 번복할 때였다. 그럴 때면 꼭 술 광란 파티를 벌이는 날이었다. 내가 눈치 채면 못 가게 하니까 아예 약속을 번복하고 술 도가니에 빠지는 것이다.

저렇게 술에 빠져 살다가 몸이 견뎌낼 방법이 있을까. 혹 술 중독에 빠지는 건 아닐까. 내 염려와 달리 그에게 날아온 소식은 이사로 승진했다는 낭보였다. 이제 겨우 나이 삼십을 넘었을 뿐인데 초고속 승진인 셈이었다. 의기양양 희희낙락일 줄 알았는데 의외의 반응이 나왔다. 기고만장일 줄 알았는데 그가 한 말은 허무였다.

“너무 허무해.”

“뭐? 허무?” “왜?”

“사실 무리수를 많이 두었거든, 정직하지 않은 그런 것들이 있어.”

“편법? 그런 거야?”

“아니 그런 건 알 것 없고 암튼 마음이 편치 않아.”

“그렇게 승진이 급했어? 그게 그렇게 중요한 거였어?”

“넌 남자들 세계에 대해 잘 몰라.” 그 말에 난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이젠 내려갈 일만 남았어.”

뭔가 알 수 없지만 의미심장한 말 같았다. 그는 매우 곤혹스런 표정을 짓더니 청천벽력과 같은 말을 했다.

“그동안 나는 고지를 향해 달려왔어, 경쟁은 필수였지만 난 남을 짓밟고 해서는 안 될 많은 일을 했지, 남의 가슴에 상처라는 대못을 박고 심지어 직장에서 내쫓기도 했지, 개중에는 자살했다는 소식도 들려왔어.”

“뭐 뭐라구?”

“뭐 꼭 내가 원인이라고 할 순 없지만 전혀 책임이 없는 것도 아니야, 나 요즘 불면증 때문에 제정신이 아냐, 판단력도 흐릿하고 자꾸 혼동이 와. 것보다도 양심의 가책 때문에 괴로워 미치겠어.”

그는 엄청난 죄책감에 싸여 있었다. 한때는 양심불량자로 낙인 찍혔던 그였다. 그런데 어느 사이에 양심이 살아나고 있었다니, 그것도 마지막 고지에 오른 지금에.

“죄를 용서받는 길이 있다면 말해 줘, 피해자에게 찾아가 용서를 빌까, 위로금을 전해줄까? 아니 그건 안 돼, 그건 해결 방법이 아닐 수도 있어.”

“피해자에게 용서를 구하고 적당한 배상을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일 수 있지.”

“나 이렇게 살다가 죽어 천국 갈 수 있을까?”

그 말에 귀가 번쩍 띄는 것 같았다. 바로 이 때다. 비장의 카드를 꺼내려는 순간이었다. 그가 가슴을 치며 울기 시작했다. 참회의 눈물이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자니 내 가슴이 다 먹먹해지는 것 같았다.

“나를 위해 기도해 줘.”

“응 알았어, 그렇지 않아도 기도하고 있었어.”

“고마워.”

전혀 그답지 않게 고분고분했다. 다음날 그에게 핸드폰을 걸었는데 부재중이었다. 불길한 예감이 가슴을 덮쳐왔다. 당장 그가 다니는 회사로 가고 싶었지만 업무가 바빠 그럴 수가 없었다. 손이 떨리면서 갖가지 나쁜 상상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그리고 그런 현상은 벌써 며칠 째 이어지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그가 날마다 꿈속에서 나타나 고통을 호소했다.

낭떠러지 끝에서 활활 타는 유황불 앞에서 단말마의 고통을 읍소했다. 그건 그 옆에 있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에게 날마다 문자메시지를 보냈는데 한번도 연락이 없었다. 어디서 술이 떡이 되어 나뒹굴어져 있는 건 아닐까. 아님 나 모르게 외국 출장이라도 떠난 건 아닐까. 갖가지 상념으로 머리가 뒤죽박죽이었다.

퇴근 후 무작정 그의 회사로 가는데 마음이 천근만근이었다. 발목에 무거운 쇳덩이를 매단 것처럼 발걸음이 더뎠다. 마악 그의 회사 앞에 이를 때였다. 두꺼운 안경을 쓴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자가 회사 입구에서 소란을 피우고 있었다. 회사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경비가 가로막고 안 보내주자 생떼를 쓰는 것 같았다.

여자는 인상이 매우 혐오스러운 데다 목소리가 아주 기분 나빴다. 흥흥거리는 목소리는 툭 튀어나온 입술과 함께 심한 거부감을 나타내고 있었다. 여자는 잔뜩 흥분해 있었는데 불평 불만이 얼굴에 덕지 덕지 내려앉아 그야말로 꼴불견이었다. 검정색 점퍼에 찢어진 청바지를 입은 그녀는 아예 체면이고 자존심이고 없이 마구 떠들어대고 있었다.

“글쎄 왜 날 안 들여보내는 거냐고요? 난 꼭 만나야 할 사람이 있다니까요.”

여자는 아예 당당하기까지 했다.

“글쎄 그가 누군지 모르지만 핸드폰으로 연락해서 만나면 될 거 아니요”

“그럴 것 같으면 제가 왜 여기까지 찾아 왔겠어요?”

“도대체 그 사람이 누구요?”

여자는 잠시 멈칫거리더니 말했다.

“이 이이사요.”

“뭐 이사요? 참 기가 막혀서 이 여자가 이삿짐 싸다 왔나, 시끄럽게 떠들지 말고 써 물러가슈, 저거 또라이 아냐?”

경비는 주변에서 구경하고 서 있는 사람들에게 동조를 구하듯 말했다.

“글쎄 난 만나야 한다니까요.”

“우리 회사에 이사란 분은 없으니 다른 데 가서 알아보슈.”

“그게 아니고 이이사요.”

경비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여자의 팔을 끌고 공원 쪽으로 갔다. 여자는 끌려가면서도 온갖 괴성을 다 질러댔다. 정신병동에서 막 뛰쳐나온 환자이거나 잠시 정신공황이 와 이성을 상실한 게 틀림없었다. 계단을 지나 회전문을 열고 회사 안으로 들어섰다. 신분증을 대는 판독기가 바로 눈앞에 보였다.

오른쪽 끝에 경비실이 보였다. 5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나에게 눈빛으로 물었다. ‘무슨 일로 오셨수’ 나는 경비에게 이민재의 명함을 보이며 물었다.

“만나러 왔는데 괜찮을까요?”

“급한 일이신가요?”

“네 조금.”

“지금 회사에 안 계세요.”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없다니요?”

“중국에 있는 지사에 출장 갔어요, 벌써 일주일째요, 모르고 오신 것 같은데, 애인이신가?”

경비는 기분 나쁘게 내 전신을 훑어내리며 말했다. 애인 사이일 것 같으면 모를 리가 없을 텐데 공연히 헛물켜지 말고 돌아가라는 뜻으로 들렸다. 그런데 다음에 들리는 말은 더 기가 막혔다.

“애인 사이 같지는 않고, 하긴 뭐 여자가 한둘이어야 말이지.”

“뭐라구요?”

나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졌다.

“아니 왜 그렇게 화는 내고 그러슈, 난 솔직히 아가씨가 아까워서 그런 건데. 아! 말이지 애인일 것 같으면 중국에 출장 간 걸 모를 리 없지 않수, 그리고 이이사 그 인물에 찾아오는 여자가 한둘인 줄 아슈.”

경비는 나를 아예 그에게 따라붙는 그렇고 그런 여자 취급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도대체 이 인간이 얼마나 여자와 염문을 뿌리고 다녔으면 소문이 이렇게 나쁘게 난 갈까. 기가 막혔다. 좀 전의 걱정 근심은 다 사라지고 슬그머니 분노가 올라왔다. 쓸데없이 한 걱정만 한 나 자신에게 심한 모욕감이 끓어올랐다.

기분 나빠 돌아서는데 경비가 마지막 확인 사살을 했다.

“거 일찌감치 냉수 마시고 속 차리슈 나중에 후회 말고.”

내 이 인간 이민재를 당장……….

눈앞에 있다면 당장 요절을 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평소에 여자들에게 인기가 대단하다고자랑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하는 건데. 그런데 이 인간이 다른 직원들도 많을 텐데 왜 중국까지 출장을 갔을까. 회사를 나와 길거리를 걸어가는데 갑자기 등 뒤에서 벽력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아이구 분해라, 망할 놈의 인간 같으니라구. 거짓말쟁이 사기꾼.”

좀 전에 회사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발버둥을 치던 바로 그 여자였다. 흥흥거리는 말소리는 여전히 기분 나빴지만 안타까운 사연을 담고 있음은 분명했다. 여자는 분한 나머지 눈물을 흘리다가 힘없이 전철 역사 쪽으로 걸어갔다. 혼잣말을 뇌까리며. 그런데 그 말끝의 한마디가 내 가슴을 확 뒤집어놓았다.

“이 인간 만나기만 해봐라. 당장 요절을 내고 말 테니. 이이산지 이민재인지.”

순식간에 머릿속에서 혼란이 일었다. 혹 잘못 들은 건 아닐까. 내가 흥분한 나머지 헛소리를 들은 건 아닐까. 저런 여자 입에서 그의 이름이 나오다니 이건 분명 내가 잘못 들은 걸꺼야. 아님 동명이인이던가. 이민재는 일주일 열흘이 넘도록 출장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회사에는 어떻게 연락하는지 몰라도 핸드폰이 해외로밍이 되지 않아 통화할 수도 없었다.

대신 꿈속에서 나는 매일 그와 만났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악몽이 이어졌다. 직장에서 날마다 일의 차질이 생길만큼 나는 기진맥진 혼절할 지경이었다. 드디어 그가 떠난 지 한달이 되었다. 나는 그의 회사에 전화를 걸어 그의 안위를 확인하기에 이르렀다. 가슴에 미리 진정제를 투여하기 위해 전날 심야기도회도 다녀왔다.

갖가지 시나리오가 머릿속에서 써졌지만 그가 무사하기만 하다면 괜찮을 것 같았다. 그럴 리가 없겠지만 만일 백수가 되더라도 내가 먹여 살릴 작정도 했다. 전화벨이 울리는 동안 제발 제발이란 단어가 내 안에서 수도 없이 감돌았다.

“이민재 이사님 부탁드립니다."

전화를 받은 여직원은 잠시 망설이는 듯했다.

“이민재 이사님 자리에 안 계십니다.”

“아직 중국 출장에서 안 돌아오셨나요?”

“그게 아니고……….”

아! 그 말 뒤에 나올 단어 때문에 내 심장은 잠시 출장 나간 기분이 들었다. 가슴이 절망으로 나락치는데 드디어 염려가 현실이 되는 소리가 들렸다.

“회사 그만두셨습니다. 죄송합니다 전화 끊겠습니다.”

손목에서 힘이 빠져 나가더니 저절로 핸드폰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제야 모든 걸 한꺼번에 알 수 있었다. 그가 왜 꿈속에서 그렇게 괴로워했는지. 왜 그동안 핸드폰조차 끊고 있었는지. 바닥에 떨어진 핸드폰을 집어 올리는데 신호음이 울렸다. 액정화면을 보니 이민재 그였다. 가슴 속에서 전율이 느껴졌다.

그건 내가 그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가 하는 징표였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거기 어디야?”

“저…… 전 이 핸드폰 주인이 아니고.”

“네? 뭐라구요?”

또다시 가슴이 나락치는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아예 대형사고를 예고하는 것 같았다. 병고? 사고? 노숙자? 자살? 실종? 범죄?

수많은 단어가 내 가슴속에 휘몰아치는데 지옥이 따로 없었다. 일각이 여삼추란 말이 그렇게 실감날 수가 없었다. 말이 자꾸 헛나왔다.

“거 거기 어딘가요? 이 이 민재 그 사람은요?”

“네, 제가 지금 병원에 옮겨놨습니다. 젊은 사람이 길거리에 쓰러져 있기에.”

“지 지금 거 거 거기가 어 어딘데요?”

“네 을지로에 있는 제일병원입니다. 핸드폰에 제일 많이 찍힌 번호가 있길래 걸었더니 역시나이군요. 어서 오셔서 병원비 계산부터 하시죠, 좀 전까지 응급실에 있다가 이제 막 병실로 올라갔습니다.”

“네 네 감사합니다. 제가 곧바로 가겠습니다.”

택시를 타고 나는 듯이 제일병원으로 가는데 나도 모르게 안도와 환호 감사의 고백이 나왔다. 그가 무사하기만 해도 그간의 모든 행적은 용서가 될 것 같았다. 그를 죽음의 문턱에서 구해준 전능자의 배려에 저절로 감사가 나왔다. 진작 그에게 그리스도를 전했더라면 그가 그토록 방황하지 않고 정신을 차렸을지도 모르는데 뒤늦은 후회가 나왔다.

언젠가 그가 허무를 외치며 절망하던 모습도 떠올랐다. 꿈속에서 내게 고통을 호소하며 구원을 요청하던 기억도 생생하게 떠올랐다. 봄기운이 짙어가던 날 길거리에서 프러포즈를 하며 윽박지르던 모습도 떠올랐다. 택시가 시청 앞을 지나 을지로 입구에 들어설 때였다 갑자기 내 입에서 욕설이 터져나왔다.

“네 이 놈의 인간을 만나기만 해라, 가만 두나.”

회사 경비원이 하던 말이 갑자기 떠올랐던 것이다. 길거리를 지나며 울부짖던 그 험한 인상의 여자도 떠올랐다. 운전기사가 내 얼굴을 흘끔거리며 모호한 표정을 지었다. 택시는 을지로 3가를 지나 충무로 입구에 멈춰 섰다. 기사에게 요금을 지불하고 나서 제일 병원 안으로 뛰어 들어가며 외쳤다.

“그래 이민재 살아줘서 고맙다, 고마워.”

정신없이 병원 복도를 지나는데 누군가 다가와 내 손목을 살며시 잡는 것이 보였다. 환자복으로 갈아입은, 언젠가 TV에서 광고모델을 하던 잘생긴 남자였다. 지나가던 여자들이 그를 알아보았는지 다가와 확인하며 웃었다. 역시나 그는 어딜 가나 인기였다. 이왕 직장 잃었으니 차라리 모델이라도 계속 하라고 떠밀어 볼까.

아니지 아니지. 그를 삶의 저편에서 이편으로 지옥불에서 건져준 전능주께로 인도해야지. 그게 급선무지.

“너 뭘 그렇게 생각하는 건데? 왜 내가 잘못됐을까봐 걱정했는데 이렇게 건재한 걸 보니까 너무 감격스러워 그러는 거니, 걱정마라 걱정 마, 너 혼자 두고 안 죽을 테니.”

그는 마치 큰 인심이라도 쓰듯 거듭 거듭 말했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오는데 창밖에서여름을 알리는 소나기가 거칠게 쏟아붓고 있었다. 지상에 붙은 오염된 죄악의 찌꺼기를 말끔히 씻어 내리기라도 하듯이. 나는 그의 귓가에 대고 살며시 말했다.

“지난 한달 동안 꿈속에서 매일 너랑 만났어, 이젠 안심해도 돼. 잘 들어, 지난번에 니가내게 한 말이 있지 이제 그 대답을 말할게,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에 하실 것이요.”

그의 얼굴에 해맑은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의와 희락과 평강이 그의 삶에 새로운 반전을 예고하고 있었다. ‘전화위복’ 그가 내 귓가에 전해준 말이었다. 복도를 오가는 많은 환자들과 방문객들이 그와 나를 바라보면서 손으로 V자를 그려 보였다. 가슴 벅찬 환희가 그와 나 사이를 오가며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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