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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정연균
2008-07-18 15:29:04
dusrbs0324

조회:2968
추천:173


소년은 언제나 스스로를 불행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사실 소년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자신을 나아준 부모도 형제도 친척도 친구도 그 누구도 없었습니다. 자연히 가족이 함께 사는 집도 없었습니다.

소년의 표정은 항상 우수에 차있었고 눈동자는 촉촉히 젖어 있을 때가 많았습니다.

웃어본 지가 너무도 오래되어 웃음이 뭔지도 다 잊어버릴 지경이었습니다. 싱글벙글 웃으며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이 그래서 오히려 이상해 보이기까지 했습니다.

소년은 언제나 고개를 푹 숙인 채 도회지의 땅만 보며 걸었습니다. 땅은 아무 말이 없었지만 하늘은 자신을 향해 뭐든 꾸중을 할 것만 같아서였습니다. 또 땅만 보고 걸으면 다른 사람들의 웃는 얼굴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초라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이 흉을 볼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걷다가 다리가 아프면 앉거나 누워 쉬는 곳이 곧 소년의 집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이상하게도 앉거나 눕고 싶은 마음이 들지를 않았습니다. 무작정 계속 걷고만 싶었습니다. 소년은 한번 끝까지 걸어보기로 마음먹고 먼 곳을 향하여 뚜벅뚜벅 걷기 시작했습니다.


한참을 가다보니 눈앞에 넓다란 강이 나타났습니다.

저만치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 하나가 보였습니다. 소년은 다리 위로 올라섰습니다. 다리 중간쯤에서 내려다보는 강물은 푸른빛을 띈 채 넘실대며 흘러내렸습니다. 그 모습이 참으로 늠름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강을 다 건너가자 이번에는 드넓은 들판이 눈앞에 펼쳐졌습니다.

밀짚모자를 눌러쓴 농부들이 들에서 분주히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길 가까이의 농부 하나가 허리를 펴며 이마의 땀을 씻어 내렸습니다. 농부의 얼굴에는 주름이 깊게 패이고 피부는 검게 그을려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농부의 표정은 하나도 힘들어보이지가 않았습니다.

또 한참을 걷다보니 높은 산이 소년의 앞을 가로막았습니다.

길은 꼬불꼬불 산을 휘감아 나있었기에 산을 피해서는 갈 수가 없을 것 같았습니다. 소년은 오르막길을 따라 산으로 들어섰습니다. 산에는 수많은 나무들이 바람에 맞춰 출렁출렁 춤을 추고 있었습니다. 나무들의 합창이 새소리와 더불어 마치 경쾌한 연주처럼 들렸습니다. 소년의 이마에는 쉴 새 없이 땀이 흘러내렸지만 왠지 기분은 마냥 좋았습니다.


산꼭대기까지 오르막길을 다 오르니 끝없이 펼쳐진 세상이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소년은 세상이 이리도 넓은지를 그동안은 전혀 모르고 살았습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정말 끝이 보이지 않는 세상이었습니다.

문득 소년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다보았습니다.

하늘은 옥빛을 가득 머금은 채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소년은 뭔가 꾸지람을 듣지 않을까 조금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변했습니다. 그러나 하늘은 소년을 바라보며 그냥 말없이 웃기만 했습니다. 그 미소는 하늘만큼이나 넓고 온화하게 느껴졌습니다.

어디선가 한줄기 바람이 소년의 얼굴을 휘감고는 달아났습니다. 그러니까 유월의 훈풍이었습니다.

소년의 눈길이 사라지는 바람을 따라갔습니다. 바람은 나뭇잎을 간지럼 태우며 숲 속을 달리다가 붉은 인동꽃이 무더기로 피어있는 화원에서는 한참동안 쉬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다시 또 하늘 높이 날아올라 구름을 밀어내더니 어느새 들판으로 내려와 누렇게 익어가는 보리랑 놀았습니다. 소년은 그런 바람이 몹시도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제 소년의 눈앞에 더 이상의 오르막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내려가는 길은 올라올 때보다는 한결 수월했습니다. 이마에 더 이상의 땀도 맺히지 않았습니다. 소년의 입에서 저절로 콧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


큰 산의 반대편으로 다 내려오니 다시 넓은 평야가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소년이 발 디딘 땅은 이미 산 너머의 세상이 아니었습니다. 놀랍게도 그 곳에는 분명 다른 세상 하나가 펼쳐져 있었습니다. 또 커다란 무지개가 다른 세상의 문을 상징 하듯 신비로운 색체로 걸려있었습니다.

소년은 개선장군처럼 그 무지개 빛깔의 문을 통과하여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때 갑자기 어디선가 함성과 박수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깜짝 놀란 소년이 바라보니 그것은 화원에 피어있는 수많은 꽃이었습니다. 붉은 꽃, 주황색 꽃, 보랏빛 꽃, 노란빛을 띤 각양각색의 꽃들이 소년을 환영해 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길게 드리워진 화원을 다 지나자 둥근 연못 하나가 나타났습니다.

연못 속에도 연꽃이 탐스럽게 피어있었습니다. 소년은 물가 능수버들에 기대서 멍하니 연꽃을 바라보았습니다. 그 중 연못의 가운데 유난히 큰 연꽃 하나가 소년의 눈길을 끌었습니다. 아직 꽃잎이 벌어지지 않은 커다란 봉오리였습니다.

소년은 야릇한 끌림으로 그 봉오리만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연꽃의 꽃잎이 서서히 사방으로 펴지나 싶더니 좀전까진 보이지 않던 물안개가 자욱하게 나타나 연꽃 주변을 뒤덮기까지 했습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또 한번 소년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벌어진 연꽃 위에 한 여인이 서 있었기때문이었습니다. 소년은 믿기지가 않아 눈을 비빈 후 다시한번 자세히 바라보았습니다. 분명 그 곳에는 하늘나라의 옷을 입은 고운 여인 하나가 서 있었습니다.

이윽고 연꽃속의 여인이 물위를 걸어 소년에게로 다가왔습니다. 가까이 다가선 여인을 본 소년은 또 한번 소스라치게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여인은 바로 아주 오래전 세상을 떠난 소년의 어머니였던 것입니다. 여인이 다정한 얼굴로 손을 내밀며 소년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 모습은 조금도 변하지 않은 예전의 어머니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소년은 어머니를 부르며 와락 품안에 안겼습니다. 어머니가 소년의 어깨를 감싸 안은 채 토닥거려 주었습니다. 소년의 눈에선 금새 서러운 눈물이 줄줄 흘러 내렸습니다. 그러나 그 눈물은 곧 기쁨의 눈물로 변해가고 있었습니다.

어머니 품에 안긴 소년은 이제 더 이상 불행한 아이가 아니었습니다. 물론 소년도 지금의 어머니와 곧 헤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어머니와 헤어지면 또 넓은 세상속으로 나가 자신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소년은 이미 겁쟁이가 아니었습니다. 뿐만이 아니라 이 넓은 세상에서 오직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이 분명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가까이 선 능수버들이 바람에 출렁이며 소년에게 축복의 아리아를 불러주고 있었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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