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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ksvus) 리허설
2012-12-18 10:14:32
sws60

조회:965
추천:78

(단편) 리허설

신외숙

 

 

TV 다큐멘터리에서 사라져가는 재래시장을 방영했다.

영등포 일대에서 40년 이상을 지켜온 재래시장은 상권의 퇴락과 대형마트에 밀려 완전 퇴출되고 있었다. 수십 년 낡은 상가는 퇴락한 옛 모습을 고스란히 남겨둔 채 퇴장을 눈물로 대신했다. 시장이 번영했을 때는 다닥다닥 붙은 상가만 200여 채가 넘었다고 한다. 상인들은 삶의 터전을 떠나며 끝내 정(情)을 아쉬워했다.

그들은 일평생을 시장에서 보내며 일할 수 있는 터전이 있었음에 감사를 연발하고 있었다. 언젠가 비슷한 프로를 본 적이 있다. 소래 어시장에서 일하는 여자들의 이야기였다. 하루종일 무거운 짐을 들고 나르며 악다구니 쳐가며 장사하는 그녀들은 집안의 가장이자 삶의 전사였다. 하나라도 더 팔기 위해 싸움판이 벌어지다가도 식사 시간만 되면 서로 모여 웃으며 도타운 정을 나누었다.

휴식시간도 마다 않고 달려가는 그녀들은 인생 드라마 그 자체였다. 어떤 젊은 부부는 어머니가 하던 가게를 물려받아 힘든 중노동을 하면서도 연신 웃었다. 그들은 잘 나가던 직장생활을 그만 두고 뛰어든 케이스였다. 가게 앞에 파라솔을 펼쳐 놓고 장사하는 그들은 정작 자신의 힘든 처지보다 어머니를 더 걱정했다.

“옛날에는 이런 파라솔도 하나 없이 그냥 맨 바닥에서 장사하셨대요, 뜨거운 여름날은 물론이고 추운 겨울에도 칼바람 맞아가며 장사 하셨으니 얼마나 고생이 심하셨겠어요. 그런 어머니에 비하면 우린 너무 편하게 장사하는 편이에요.”

며느리는 한사코 시어머니의 노고에 무게를 더하고 있었다. 시어머니는 그런 아들 내외를 향해 눈물을 보이며 말했다.

“잘 나가던 직장도 그만 두고 어미가 하던 것 물려받겠다고 저 고생을 하고 있으니 눈물이 나요, 없는 집안에 시집와 고생하면서도 웃는 걸 보면 마음이 아파요.”

힘든 내색 않고 서로를 아끼는 모습에 콧등이 찡해졌다. 만석꾼은 만가지 걱정을 한다고 재물이 많다고 다 행복한 건 아니지 않는가. 따듯한 가족애가 우선이다. 사랑은 어떤 난관도 다 극복하고 남으니까. 다큐멘터리 속에 등장하는 상인들은 삶에 대해 진지하고도 엄숙한 의미를 달고 있었다.

정직하게 꾸준하게 한눈 팔지 않고 오로지 한 길을 걸어가다가 세태에 밀려 난 것이다. 노인들이 심심파적으로 하던 구멍가게는 편의점에 밀려나고 잡화상은 대형마트에 밀리고 하다 못해 길거리 포장마차 떡볶이도 프렌차이즈 바람에 밀려 짐 보따리를 쌌다. 시대의 바람은 아무도 막지 못한다.

모든 게 인터넷으로 통하는 디지털 시대에 옛 정취나 향수 따위는 도무지 먹히지 않는 시대가 되었다. 문화 쾌락주의에 중독된 사람들은 모든 걸 편의 위주로 생각하다 보니 남에 대한 배려 따위는 아예 깡그리 잊고 산다. 약육강식의 생존원리를 따라 시장에서 퇴출 당한 상인들은 새로운 일자리를 향해 나갈 것이다.

문 닫는 가게마다 새로 이전할 장소를 유리창에 붙여 놓고 여전히 미련을 떨쳐 버리지 못한다. 재래시장이 점점 사라져 가는 세상이다. 한푼이라도 더 싸게 사겠다고 대형마트로 몰리다 보니 골목 상권마저 대기업이 접수해 버리고 만 것이다. 옛날, 아날로그 시대에는 성실과 인내가 인격의 관건이었다.

하지만 세상은 미덕보다 성과를 인정(人情)보다 이익을 우선시했다. 그에 따라 이합집산과 합종연대는 기본이었다.

TV를 끄면서 나는 뭉클한 감동에 사로잡혔다. 생전의 어머니 모습이 떠올랐다. 자식들을 위해 물불을 안 가리면서 헌신했던 어머니, 평생 호의호식은커녕 가난과 질고와 싸워야 했던 어쩌면 그런 어머니의 모습은 내게 희생이란 단어를 터부시하게 만들었던 원인이기도 했다.

누가 그랬던가. 딸은 어머니의 운명을 닮는다고, 나는 그 말을 거역하기 위해 오직 내 중심 내 만족 위주로 살아왔는지 모른다. 내가 택한 건 사랑이 아닌 내 이기심이었다. 집을 나선 순간부터 나는 수많은 상상력에 휘말렸다. 가상현실은 상상력이 만들어 낸 기발한 아이디어와 함께 시간을 앞서 갔다.

공덕역을 출발한 전동차가 디지털시티역을 지나 증산역에 닿았다. 계단을 뛰어 올라 밖으로 나오니 녹색바람과 불광천이 한눈에 들어왔다. 배롱나무와 잡풀이 강줄기와 함께 초록의 향연을 펼치고 있었다. 맑은 물줄기를 바라보며 사람들은 망중한을 즐기고 있었다.

어디서 몰려왔는지 물오리 떼와 원앙새 한쌍이 물가를 유영하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송사리떼와 주먹만한 물고기가 물오리에 의해 먹잇감으로 포획되고 있었다. 색색가지 코스모스가 천변을 따라 걷는 산책객들의 마음을 한껏 힐링하고 있었다.

트라우마와 힐링은 이 시대 최고의 관심사가 되었다. 발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발밑의 감촉이 좋았다. 사뿐한 보료 위를 걷듯 편안한 느낌으로 마음마저 안정시켰다. 한마디로 격세지감이었다. 오염된 폐수를 몰아내고 맑은 물로 바꾸는 세상이다. 오직 돈의 위력으로.

옛날에는 험악했던 인심도 공공기관부터 시작하여 친절모드로 변해 각종 편의시설과 함께 살기 좋은 세상으로 변했다. 돈과 과학의 힘으로 격세지감은 어딜 가나 체감도를 높이고 있다. 수풀과 강물은 병든 마음을 여전히 힐링하고 있다. 자연은 마음의 휴식을 주는 안정제와 같다. 그래서 등산가들은 목숨을 걸고 산에 오르는지 모른다.

자연은 순수와 겸손을 가르쳐 주는 교과서라며.

사람들은 대자연의 웅장함과 신비 앞에 저절로 겸손해진다. 신적 권능과 인간의 나약함이 자연의 아름다움 앞에 복종하게 되기 때문이다.

교각을 건너자 상가가 도로를 중심으로 밀집된 모습이 보였다. 편의점과 고기 냄새 풍기는 음식점, 피자점 소형 마켓과 교회 등이 차도를 끼고 형성돼 있었다. 거리는 대선을 앞두고 어딜 가나 퍼레이드 경쟁을 펼치고 있었다. 매스컴은 물론이고 사람들의 입가에서도 선거의 열기는 대단했다.

사람들은 누구나 할 거 없이 침방울을 튕기며 열변을 토했다. 전직 대통령의 자살은 더욱 이념전쟁을 불러왔고 색깔 논쟁은 정의의 기준마저 흐릿하게 했다.

“누가 정권을 잡든 우리와 무슨 상관이래? 다 똑같은 놈들 아닌감.”

“선거 때만 되면 선심을 남발하다가 일단 되고 나면 안면 싹 바꾸고 나눠먹기 바쁘잖어.”

“요즘 세상에 이념이 다 무슨 소용이래? 국민만 잘 살게 만들어주면 그만이제.”

“젊은 애들이 취직이 안 돼서 난리라는구먼, 모든 일을 아이틴지 컴퓨터인지가 다 해버리는 바람에 사람이 할 일이 없어졌다지 아마, 요즘 사람들은 은행도 안 가고 집에서 다 컴퓨터로 일을 해결하잖어.”

“그러니 요즘 애들이 시집 장가도 안 가고 자식들도 안 낳는 거여, 지 앞가림도 못하는디 자식은 낳아 키울 엄두가 안 나는 것이제.”

“이제 내 자식 대에 가서는 손자 손녀 안아 보기도 힘든 세상이 될 것 같어.”

“왜 아니겠나.”

“요즘은 펭귄족들이 늘어나 오히려 중년층의 취업이 늘어났다는구먼.”

“다 늙은 부모가 장성한 자식들 부양하는 세상이여, 어떻게 세상이 거꾸로 가는 거 같어.”

파라솔에 모여 앉아 술잔을 기울이는 중년들은 입을 모아 한탄했다. 그들이야 말로 베이비붐 세대가 아니던가. 삼겹살 굽는 냄새가 진동을 했다. 횡단보도 앞에 서 있는데 핸드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평론가 우재영이었다.

“지금 어디세요?”

“증산역에 내려서 지금 명지대 쪽으로 가고 있는 중이에요.”

“그럼 지금 사거리 쯤에 계신가요?”

“네 그래요.”

“그럼 거기 그냥 서 계세요, 제가 모시러 갈께요.”

3분도 안 돼 우재영이 나타났다. 언제 구입했는지 신형 ‘모닝’이 연하늘색 옷을 입고 우재영을 안고 있다. 그녀가 차창 문을 내리더니 타라고 손짓을 했다. ‘경기 좋구만, 맨날 돈 없다고 죽는 소리 할 때는 언제고.’ 나는 순간 감정이 상한다. 이건 질투인가. 시기인가.

그녀는 엑셀을 깊게 밟더니 말한다.

“어디 가시고 싶은데 있으세요? 제가 모실께요.”

“원고 쓰다 말고 나와서 빨리 가봐야 해요.”

“그럼 여기 백련산으로 가실래요? 산 중턱에 전망 좋은 곳이 있어요.”

“그러세요.”

그녀는 비탈길을 내리달리더니 좁은 차도로 접어들었다. 거기서 핸들을 왼쪽으로 꺾더니 오르막길을 향해 힘겹게 엑셀을 밟았다. 얼마 안 가 산 중턱이 나타났다. 그녀가 차를 파킹하고 돌아서며 말했다.

“저 아래쪽을 내려다보세요, 서대문구가 한눈에 보여요, 마치 지도를 보는 것 같아요. 저기 저 쪽이 대학 본관 건물이고 저 오른쪽 끝에 보이는 다리가 강화도로 가는 입문이에요, 밤에 이곳에 올라오면 환상적인 분위기가 꼭 영화를 보는 거 같아요.”

과연 주변환경은 녹색 숲과 신선한 산 공기가 어우러져 마음마저 적이 안정되는 것 같았다. 왼쪽으로 웅장한 사찰과 등산로가 보였고 주차장과 소형 음식점도 보였다. 계단 끝으로 올라가 아래쪽을 내려다보니 주택가와 빌딩이 도심의 한 군락을 보는 것 같다. 학교 건물과 빌딩과 주택가가 어깨를 맞대고 인도와 차도를 끼고 서 있었다.

강화도어를 열고 들어서니 탁자와 의자가 원형과 사각형으로 보인다.

“뭐 드실래요?”

우재영은 마치 선심쓰듯 묻는다. 저 여자가 무슨 꿍꿍이속으로 나를 만나자고 한 걸까. 나는 그녀의 의중을 탐색하기에 바쁘다.

“우선생 좋으실대로.”

“이 집이 산채정식을 잘해요, 그거 드실래요?”

“그러세요.”

그녀는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더니 이내 싱글벙글한다. 뭔가 또 자랑거리가 생긴 모양이다. 하긴 그럴 일이 아니면 뭐하러 내게 만남을 신청하겠는가. 자랑이 주 특기인 그녀는 자아도취증 한자다. 입만 열면 자기 자랑이 봇물 터지듯 쏟아진다.

“이번에 제가 모 시인의 시집을 평론했는데 그게 신문에 났지 뭐예요, 여기 여기 좀 보세요, 평론가 우재영 물론 원고료도 톡톡히 받았고요, 그런데 이렇게 신문에까지 나게 될 줄은 몰랐어요.”

“축하해요.”

“저 그래서 말인데요, 제가 한 부탁 말씀 드려도 될까요?”

그러면 그렇지.

“선생님 작품집 내실 때 제가 평론하면 안 될까요? 무 물론 원고료는 안 받고 그냥 그냥 해드릴께요.”

나는 멍하니 그녀 얼굴을 바라보았다. 공짜로 …… 니가 …… 절대 그럴 리가 없지. 만일 그랬다간 여기저기 다니며 얼마나 생색내며 내 흉을 볼까.

“안 들은 걸로 할게요, 내 작품집은 평론 안 넣어도 잘 나가니까 그러니까 다른 작가나 해주세요.”

“왜요? 전 선생님 작품집에 제 평론 넣는 게 소원이에요.”

“됐어요, 내가 왜 공짜로 난 그런 것 원치 않아요, 우선생 형편 뻔히 아는데.”

그 말에 우재영은 얼굴을 확 붉힌다.

“그렇다면 할 수 없죠, 저 사실 내년이면 시간 강사도 많이 힘들 것 같아요, 요즘은 유학파들이 대세라서 달리 알바자리라도 구해야 할지 걱정이에요.”

“차라리 능력 많은 남자 만나 결혼하세요.”

“그거야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죠, 제가 뭐 빠지는 게 있어야 말이죠, 얼굴 되죠 몸매 되죠, 학력 좋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만일 남자가 중간에 마음이 변해서 절 사랑해주지 않으면 어쩌죠.”

“그렇게 자신이 없어요.”

“제 얼굴과 몸매가 원래 국보급이긴 하지만 남자 마음이 어디 한결같나요? 옛날에는 그저 여자 하나 마음에 들면 결혼이 성사됐지만 요즘은 인물보다 능력이 우선이잖아요.”

알긴 잘 아네.

“사실 지난번에 엄마가 병원에 입원하셔서 병원비가 사백만원이나 나왔지 뭐예요, 그동안 적금 붓던 것 다 해약하고 완전 거지 되는 줄 알았어요.”

그러게 평소에 아껴 쓰지, 버는 족족 옷에다 구두에다 화장품까지 최고급으로 써대니 그럴만도 하지. 나는 속으로 실소를 금치 못했다.

“선생님 저 부탁이 하나 있는대요.”

음식이 나오자 그녀는 수저를 들면서 본론을 말할 참인가 보다. 애교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수원에 있는 S여대 김홍식 교수님 잘 아시죠?”

“그런대요?”

“그 S여대에서 이번에 전임강사 뽑는데 저 좀 추천해 주시면 안 돼요?”

그러면 그렇지 나는 밥을 비비다 말고 수저를 내려놓았다.

“그것 때문에 만나자고 한 건가요?”

“선생님 부탁이에요, 이번만 도와주시면 그 은혜 평생 안 잊을게요.”

“그건 내 권한 밖이에요, 내게 무슨 그런 힘이 있다고 부탁하는 거예요? 내가 부탁한다고 해결될 문제도 아니고요.‘

“선생님 남편분 계시잖아요, 두 분 사이가 절친이라는 소문 있던데요, 저 이번에 그 자리 놓치면 평생 시간강사 못 면해요, 그러니까 남편분께 꼭 말씀 드려서…….”

속에서 욕지기가 났다. 지금껏 시간 강사라도 할 수 있게 도와 준 게 누군데 이제와서 또. 우재영은 자기가 필요할 때는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접근한 뒤 목적이 관철되고 나면 뒤통수치기로 유명하다. 나도 그들 중의 하나였다. 그녀는 이미 작정하고 나온 듯 전혀 뒤로 물러설 기세가 아니다. 가만있다간 또 당할지 모른다.

나는 수저를 놓고 일어섰다.

“왜 그러세요?”

내가 우선생을 위해서 왜 그래야 하죠?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사라졌다. 언제나 나는 이 정도에서 그치고 마는 소심증 환자이다. 남에게 싫은 소리는 죽어도 못하는 이런 내 약점을 우재영은 이용하고 또 이용했다.

“왜 그러세요?”

그녀의 얼굴은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거부당하리라곤 상상도 못한 눈치다. 나는 카운터로 가 재빨리 계산을 끝마치고는 밖으로 나왔다. 벌써 어둠이 산 전체를 덮어버렸다. 우재영은 모닝을 몰고 나타나서는 또다시 친절모드로 변한다.

“선생님 타세요, 제가 댁까지 모셔다 드릴께요.”

“됐어요, 택시 타고가면 되요.”

“여기 택시 없어요, 마을버스뿐인데 언제 올지 몰라요.”누가 니 속을 모를 줄 알고. 우리집까지 태워다 주고 나면 차 한잔 마시겠다고 할 테고 그러다 보면 남편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기어코 니 목적을 관철시키고야 말 걸. 내가 어디 너한테 한두번 당하냐. 나는 이미 그녀의 속내를 훤히 꿰뚫고 있다.

“중간에 출판사에 들려서 표지 디자인 하던 것 마저 끝내야 하고 교정보던 것도 마쳐야 해요.”

“저도 가면 안 될까요? 저도 디자인 잘 보는데.”

“됐어요, 나중에 또 만나요.”

“선생님 그러면 아까 말씀 드린 것 꼭 좀 부탁 드릴께요, 그럼 제가 출판사까지만 모셔다 드릴께요.”

“고마워요, 힘은 없지만 우선생 부탁 노력해볼게요.”

“어머 선생님 너무 고마워요, 그럼 될 줄 알고 기다릴께요.”

그녀는 일이 성사라도 된 듯 미리 김칫국부터 마신다. 그녀의 수법에 속아 여러번 도와주었다가 실컷 이용만 당한 내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이번에도 또다시 그녀의 말에 얽매이고 만다. 그녀에게는 어떤 미움이나 분노도 녹이는 신비한 힘이 있는 것 같다. 이번만큼은 당하지 말아야지 했다가도 끝내 당하고 마는 것은 그녀의 끈질김 때문이다.

간이라도 빼줄 것처럼 살랑대며 착 달라붙을 때는 징그러우면서도 어쩔 수 없이 상대하게 된다. 처음에 몇 번 통사정하는 바람에 도와주었다가 낭패 본 적이 있었다. 자기가 속한 단체에 내 이름을 팔고 다니면서 마치 자기와 내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처럼 부풀려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한번 도와주고 나니까 걸핏하면 찾아와 도움을 요청했다.

얼마나 당당한지 마치 빚쟁이 조르듯 했다. 그런데 더 황당한 건 도와주고 났을 때의 일이다. 내 등 뒤에다 대고 온갖 험담을 하고 다니는 것이었다. 물에 빠진 사람 건져주고 나면 보따리 내놓으라고 한다고 꼭 그 짝이었다. 그녀에게 당한 사람이 어찌 나 한사람뿐이겠는가. 인간본성이 악이라는 사실을 그녀 말고도 여러 번 체험한 나였지만 문제는 어리석은 내 두뇌였다.

어느 날 나는 그녀의 정신에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발견했다. 상담 심리학을 공부하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을 때였다. 집을 나서 마악 출판사에 도착할 즈음이었다. 그녀에게서 핸드폰이 걸려져 왔다.

“선생님, 전 아무래도 연예계로 나서야 할 것 같아요, 어제 옛날 제 제자들을 만났는데 저보고 더 예뻐졌다면서 늦었지만 영화배우를 해보라는 거예요, 전에도 그런 소릴 많이 듣긴 했지만 이번에야 말로 결단할 시기가 왔단 생각이 들었어요.”

“우선생 지금 나이가 사십이 넘지 않았나요?”

“그래도 사람들은 저를 삼십 안팎으로 보는 걸요, 또 제 몸매가 원래 섹스어필 그 자체잖아요. 백날 시간 강사 해봐야 그렇고 이참에 연예계로 진출해 볼까 생각중이에요.”

완전히 미쳤군. 입만 열면 제 미모 자랑하느라 제정신 아니더니 이번에야 말로 완전히 미쳤군.

“선생님 제 인기는 나이를 먹어도 식지를 않네요, 어딜 가나 남자들이 어찌나 따라붙는지 귀찮아 죽을 지경이에요, 이럴 바엔 차라리 연예계로 진출하는 게 낫지 싶어요, 선생님 의견은 어떠세요?”

“다른 사람들한테도 이야기해 보았나요?”

“아뇨? 제가 왜요? 저는 선생님 밖에 이야기할 상대가 없는 걸요.”

그 말에 공연히 마음이 짠했다. 누가 그녀의 말을 제정신 가지고 들어주겠는가. 이야기해 봤자 정신병자 취급당하기 알맞으리라.

“혹시 혹시 말이에요, 우선생 어릴 때 사랑을 충분히 못 받았거나 상처 받은 경험 있나요?”

그녀는 잠시 말이 없었다. 나는 공연히 상담심리 내용을 꺼내들었다가 그녀의 기분만 상한 건 아닌지 금세 후회가 되었다.

“제 엄마는 계모 밑에서 구박만 받고 자라셨대요, 그래서인지 자식인 저한테도 사랑을 줄줄 몰라요.”

어쩐지 우재영은 심각한 정서불안에 시달리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인간의 심리구조는 3세를 전후로 결정된다. 유아 시절 어머니의 충분한 사랑을 받음으로 애착관계가 형성되고 나면 심리적 안정기에 접어들면서 원만한 성격으로 자라가게 된다. 그런데 유아시절 애착관계가 형성되지 않으면 그는 정서적 불안과 더불어 성격장애자로 자라나기 쉽다.

자아도취적 성격장애도 그중의 하나이다. 어머니로부터 애착관계에 실패한 사람은 심각한 두려움과 직면하게 된다. 상대방이 자기를 무시하게 될까봐에서 오는 심각한 두려움이다. 그럴 때 그는 좌절하며 자신을 초라하게 느낀다. 모태로부터 받지 못한 사랑을 메우기 위해 갖가지 시도를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첫 번째가 가면의 탈을 쓰는 것이다. 남들에게 인정받고 사랑받기 위해 자신의 약점을 최대한 감추고 수없는 위선의 탈을 쓴다. 이중인격이 그의 본심이고 그에게 무엇이 진실인지 자신조차도 의심스럽다. 언젠가 우재영이 한 말이 생각난다.

“저는 누구한테나 인정받고 높임받고 싶어요, 잠시라도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지면 괴로워서 미칠 것 같아요.‘

그녀의 애정결핍증은 아예 병적이었다. 그런데 어느날 뜻밖의 말을 했다.

“선생님 사실 저는 낮은 자존감 때문에 얼마나 울고 지내는지 몰라요.”

처음에는 그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입만 열면 자랑거리부터 쏟아내던 그녀였으니까.

“자존감이 낮다니? 전혀 그렇지 않은 것 같은데, 오히려 그 반대 아닌가요?”

“아니에요, 오히려 그걸 숨기기 위해 반대로 행동하는 거예요, 한번도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저희 엄마는 아버지와도 사이가 안 좋았는데 그건 사랑하는 방법을 몰라서 더 그랬던 것 같아요, 흔한 말로 사랑받아 본 사람이 남을 사랑한다잖아요, 반대로 시집살이 해본 시어머니가 더 며느리 시집살이 시킨다고 저도 사실 그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아요. 사랑받기 위해 몸부림치면서도 정작 남을 사랑할 줄 몰라요.”

동병상련이었다. 나 역시 어릴 때부터 감정기복이 심하고 걸핏하면 불안증세에 시달렸다. 남들은 항상 기가 세고 당당한데 나는 소심하게 뒤로 물러나고 스스로 자괴감에 빠질 때가 많았다.

“선생님 저는 가끔 제 인생을 후회할 때가 많아요, 너무 겁이 많아서 제대로 된 사랑을 경험해 본 적이 없어요, 상처받더라도 진정한 사랑을 해봤어야 하는데 이제 제 나이 내일 모레면 사십 중반이에요, 나름대로 열심히 달려왔는데 이 나이에 집도 없이 연로한 엄마 모시고 살려니.”

우재영은 그녀답지 않게 신세타령을 한다. 늘 자랑거리를 끊이지 않던 입에서.

"그래도 원하던 학부 다 마치고 나름대로 목표도 이루었잖아요.“

“그러면 뭘하나요? 제 손은 이렇게 가난한 걸요, 인생에는 리허설이 없다더니 참 많이 후회가 돼요.”

리허설……… 언젠가 남편이 내게 하던 말이 생각났다.

“실패할 때마다 난 자신에게 말했지, 이건 리허설이다. 실제가 아닌 리허설, 그러다 어느날 깨달았지 내가 자신한테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심약한 남편은 교수 사회에서도 약진하는 방법을 몰라 여간 애를 태우지 않았다. 논문의 거의 절반을 내가 써주던 때도 있었다. 사람을 믿지 못해 늘 내게 조언을 구하며 안으로만 돌았다. 연구논문을 쓰기 위해 서재에 처박히고 강의 준비를 위해 거의 하루종일 서재에 살다시피했다.

젊은 시절, 남편은 알코올 중독에 빠져 살던 때도 있었다. 그때는 심약한 남편의 성격이 도무지 성이 안 차 이혼까지 결심할 정도였다. 그런데 한술 더 떠 알코올 중독이라니, 상담심리 공부를 하고 나서야 알았다. 남편에게는 고통을 견디는 힘이 약했다. 그래서 그 고통을 빨리 해결하고자 중독이라는 증상에 의존한 것이다.

고통을 견디는 힘이 약한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나는 남편처럼 술에 의존하지는 않았다. 대신 절대자에게 나의 마음과 의지를 의탁했다. 고통은 무엇인가. 살아 있다는 증거다. 심리학 측면에서 보면 고통은 현재 처해 있는 상황과는 반대이기를 열정적으로 소원하는 마음상태를 말한다. 또다른 측면에서 말하면 고통은 내가 원치 않는 것을 경험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사람들은 모두 고통을 두려워한다. 가능하면 고통을 피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고통은 부지불식 간에 찾아와 사람을 괴롭히는 악마 노릇을 하는 것이다. 이때 새로운 악마가 나타나는데 그것이 바로 중독이다. 중독은 견디는 힘이 약하고 고통을 빨리 해결하고자 하는 데에서 시작된다.

중독에는 크게 일 중독, 사람과의 관계에서 오는 중독과 놀이에서 오는 중독이 있다. 불행히도 중독은 고통을 해결해 주지 않는다. 오히려 더 큰 폐혜를 나타낼 뿐이다. 그렇다면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은 무엇인가. 그것은 무엇보다 고통의 원인을 찾아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중독은 고통을 잠시 잊게 해주는 마약과 같은 효과가 있을 뿐이다.

헤어날 수 없는 고통을 해결하는 또다른 방법이 있다. 그건 고통 가운데 신의 은총을 끌어 들이는 것이다. 중독보다 더 큰 힘인 신의 권능은 가장 선한 의지이며 효력 또한 가장 안전하다.

남편에게 우재영 이야기를 할까말까 망설이다 한달이 지나갔다. 그동안 우재영은 전화통에 불이 나게 전화를 해댔다. 나는 남편이 힘쓰고는 있는데 가능성이 불투명하다는 말로 얼버무리고 말았다. 우재영은 나날이 초조한 빛을 띠더니 어느날 기가 막힌 말을 했다.

“전 선생님께서 제가 부탁드린 일 꼭 해주실 줄로 알고 지난번에 백화점에 가서 할부로 옷과 구두를 샀지 뭐예요? 대신 선생님께서 돈 좀 빌려 주실래요?”

이런 뻔뻔한 년. 나는 하마터면 욕이 터져 나올 뻔했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나를 무슨 지 봉으로 아나? 앞으론 어떤 일이 있어도 도와주지 말아야지. 마음에 다짐을 하는데 우재영이 또다시 말했다.

“선생님, 제가 평론할 시인들 좀 소개시켜 주세요. 요즘 영 용돈이 딸려서요.”

이건 또 무슨 황당한 부탁이란 말인가. 우재영은 나를 아예 지 종 취급하고 있다.

“내가 왜 그래야 하죠? 내가 우선생한테 무슨 신세지거나 빚진 일 있나요?”

나는 드디어 부아가 솟구쳐 올라와 할 말을 하고 말았다.

“선생님은 원래 제게 멘토 같은 분이시잖아요.”

멘토? 나는 잠시 멘토라는 단어에 집중했다. 전혀 생소한 단어가 그녀 입에서 나오다니.

“나는 우선생의 멘토라고 생각해 본 적 없어요, 그리고 멘토면 그렇게 모든 부탁을 다 들어주어야 하나요?”

들을수록 역겨웠다. 생전 싫은 소리 한마디 않다가 직격탄을 날리니 그녀는 당황한 모양이다.

“어머! 오늘 기분이 영 안 아닌가보다. 기분 나빴다면 사과 드릴게요, 그 대신…….”

그녀는 또다시 조건을 부쳐 뭔가를 요구할 작정인 것 같았다. 정말이지 얼마나 뻔뻔한지 치가 떨릴 정도였다. 도대체 내가 우재영에게 어떻게 대했기에 저토록 당당하고 뻔뻔스럽단 말인가. 속에서 자책이 일었다. 나는 순간 핸드폰 뚜껑을 그대로 닫아버렸다.

곧 다시 연락이 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 잠잠했다. 이튿날도 그 이튿날도 연락이 없었다. 성격으로 보아 가만있을 그녀가 아니었다. 어떤 식으로든 다시 연락을 취해 무언가를 반드시 얻어내야만 직성이 풀리는 그녀이다. 그렇게 한달쯤 되던 어느날이었다. 평소에 잘 알고 지내는 평론가에서 연락이 왔다.

“우재영이가 그러는데 자기가 이번에 S여대 전임강사 못 된 건 순전히 선생님 농간이라고 하던데 사실이에요?”

“뭐라구요?”

나는 하도 기가 막혀 쓰러질 뻔했다.

“우재영이가 그런 소릴 해요?”

“그럼 아닌가요?”

상대는 아예 우재영의 말을 사실로 믿고 있는 눈치였다.

“우재영이가 하도 신신당부하고 매달리기에 그냥 참고 들어주었더니 제 딴에 된 걸로 알고 있다가 안 되니까 그러는 거예요, 세상에 내가 농간을 부리다니 그런 억지를.”

“우재영이 수법이 원래 그렇잖아요, 제 부탁 안 들어주면 온갖 협잡을 다 하고 뒤통수 치고 다니는데 선수잖아요, 선생님은 한두번 당한 것도 아닐 텐데 어떡하다가 그런…….”

망할 년, 어디서 해코지 할 사람이 없어서 나한테 내가 저를 도와준 게 어디 한두 번인가. 심장이 방망이질을 하고 열이 솟구쳐 뒤로 쓰러질 것 같았다.

“지금 우재영이가 남자 평론가들 불러내서 선생님에 대한 온갖 악소문을 다 퍼뜨리고 다녀요. 제 딴엔 될 줄로 알고 백화점에 가서 카드 긁어서 고가 제품도 많이 구입했다지 뭐예요. 아마 선생님을 철썩 같이 믿었나 봐요.”

인간말종 같은 년. 은혜를 원수로 갚는 년. 천하에 몹쓸 년. 속에서 별별 욕이 다 생각났다. 머리가 뜨거워지더니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그런데 더 기가 막힌 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선생님 그보다도 남편 단속 잘 하셔야겠어요, 우재영이 그게 몸매 하나는 환상이잖아요,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 교수님 단속 철저히 하세요, 우재영이가 마음만 먹으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르잖아요.”

그 말에 나는 정신이 한동안 왔다 갔다 하는 것 같았다. 너무나 충격적인 말이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우재영과 남편의 관계를 현재진행형으로 받아들이고 말았다. 원래부터 심리추리 소설이 전공인 나는 의심병 환자였다. 조그만 빌미만 보여도 온갖 상상력을 동원해 소설과 드라마를 써 댔다.

일단 의심이라는 그물에 걸리면 제일 먼저 나타나는 현상이 정서불안이었다. 현실과 상상은 엄청난 차이가 있음에도 나는 상상을 현실로 착각해 일을 그르치는 경우가 많았다. 과거의 나쁜 기억에다 현실에서 만들어 낸 상상을 덧붙여 착각과 오해를 남발했었다.

“글쎄 그건 당신이 꾸며낸 소설이야. 아니 어떻게 소설과 현실을 동일시하는 거야? 당신 소설은 컴퓨터 앞에서만 쓰라구? 아무 때나 소설 갖다 부치지 말고.”

그렇게 남편이 말할 때마다 쥐구멍이라도 찾아 들어가고 싶었다. 왜냐하면 내가 꾸며낸 상상은 전혀 사실과 달랐기 때문이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도 유학 떠나기 전까지 내 소설의 희생양이었다. 아들은 내 욕구를 따라 움직이는 아이가 아니었다. 철저하게 현실적이었고 사리분별이 분명했다.

그래서 내가 상상으로 꾸며댄 말에 결코 반응하지 않았다. 한마디로 의심은 내 상상력이서 빚어지는 폐혜이자 직업병이었다. 나는 전화를 끊고 나서 남편의 서재로 가 서랍과 컴퓨터를 뒤지기 시작했다. 한번 발병된 의심병은 결코 수그러들지 않았다. 서재를 뒤지던 중 책상 뒤쪽에서 술병을 발견했다.

한동안 술을 끊고 잠잠한 줄 알았는데 언제 또 술을 입에 대기 시작했을까. 술병 옆에 성경책도 보였다. 먼지가 켜켜이 쌓인 채로. 나는 곧바로 상상력을 갖다 부쳤다. 심약한 남편이 우재영의 유혹을 뿌리치기 힘들어 술에게 자기 마음을 하소연했을 것이다. 남편의 여자 취향은 언제나 글래머 스타일이었다.

언젠가 인터넷에서 야동을 보다 내게 들킨 적이 있었다. 유방이 수박 만한 여자가 권투 시합을 하는 장면이었다. 한동안 몰입하다 아내에게 들켜버린 그는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나는 당장 컴퓨터를 끄면서 이놈의 컴퓨터를 당장 뿌셔 버리겠다고 하면서 남편의 등짝을 후려쳤다.

사람의 죄악은 보는 데서 출발한다. 그것이 내 지론이었다. 다시 한번 야동을 보았다간 남편 이름과 함께 인터넷에 공개해버리겠다고 협박한 뒤 일단락하고 말았다. 그러고 난 뒤 나는 한동안 남편과 야동에 나오는 여자가 섹스하는 꿈을 꾸었다. 그때마다 남편은 내게 온갖 악담을 들어야 했다.

나는 컴퓨터에 들어가 사이트 검색을 실시했다. 이메일도 들어가 보았다. 남편은 아이디는 평소에 저장해 두었다가 사용하는 버릇이 있어서 비밀번호만 알아내면 되었다. 핸드폰 번호를 눌렀지만 열리지 않았다. 생일을 비밀번호로 했는데 역시 열리지 않았다. 다음에는 대학 입학년도를 눌렀는데 마찬가지였다.

혹시나 싶어 내 생일을 눌렀는데 의외로 열렸다. 이메일을 점검하는 동안 나는 남편이 글래머 스타일인 우재영과의 사이를 불륜으로까지 확대해 놓고 별별 시나리오를 다 썼다. 잘 하면 추리소설 한쯤 건지고도 남을 내용이 머릿속에 차곡차곡 쌓여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메일을 차근차근 찾아 가던 중 눈에 띠는 게 있었다.

이메일 제목이 ‘교수님 사랑해요’였다. 눈이 당장 뒤집어지는 것 같았다. 클릭을 하는데 저절로 손가락이 떨렸다. 틀림없이 우재영일 것이다. 내용을 들여다보는데 심장이 탁! 멈추는 것 같았다.

역시……….

그런데 글을 읽어 내려가는데 내용이 이상했다. 나의 상상과는 거리가 먼 내용이었다. 처음에는 상투적인 인사말이더니 갈수록 사무적인 내용이었다. 그동안 우재영은 남편에게 전임강사 채용 문제를 놓고 나름대로 끈질기게 공세를 펼치고 있었던 것 같다. 나한테 부탁하는 것도 모자라 어떻게 알았는지 남편의 이메일 주소를 알아 내 읍소를 거듭했던 것이다.

나중에는 남편이 아예 열어 보지도 않자 자극적인 문구를 사용함으로 시도한 것이었다. 보낸 편지함을 열어 보았는데 깨끗했다.

컴퓨터를 끄고 막 일어서려는데 밖에서 인기척이 났다. 남편이 돌아온 것이다. 나는 도둑질하다 들킨 심정으로 얼굴이 확확 달아올랐다. 밖에서 문 따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태얀을 가장한 체 남편에게 물었다.

“나야, 그런데 왜 이렇게 일찍 온 건데?”

“아침에 나가면서 말했잖아, 오늘 세미나 있어서 일찍 들어온다고. 그런데 당신 또 내 이메일 검색한 거야?”

“또라니? 내가 언제?”

“내가 당신 속셈 모를 줄 알아? 심심하면 내 이메일 검색하잖아, 나 잠든 사이 내 핸드폰도 뒤지고 내가 모를 줄 알았지?”

나는 너무 놀란 나머지 뒤로 넘어가는 줄 알았다. 남편이 눈치 채리라곤 상상도 못했었다. 이게 바로 내 상상력의 한계인가?

“이번엔 또 무슨 건수가 있어서 내 이메일을 뒤졌을까?”

“내가 그럴 줄 알고 중요한 건 다 삭제해버린 거 아냐?”

“어어! 왜 또 이러시나? 또 소설 쓰고 있네?”

“요즘도 야동 보고 그러는 것 아니지? 또다시 봤다간.”

나는 손톱으로 얼굴을 확 긋는 시늉을 했다.

“대한민국 남자치고 야동 안 보는 남자 있음 나와 보라 그래.”

“뭐야? 그럼 아직도 본다 그거야?”

“야! 그런데 지난번에 우리 학교에 우재영이가 왔는데, 우와 몸매 죽이더만, 완전 섹시 그 자체더라구.”

그 말에 나는 정신이 확 달아나는 줄 알았다. 그때 혹시 둘이서?

“그래서 그때부터 둘이서 이메일 주소 주고받았던 거야?”

“아니?”

“아니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이메일 주소야 그 이전부터 알았지, 우재영이가 여간 애교 있는 게 아니잖아, 하도 살랑대면서 매달리기에 가르쳐 주었더니 어찌나 많이 보내던지, 나중에는 아예 열어 보지도 않으니까 ‘교수님 사랑해요’란 제목으로 이메일을 보냈지 뭐야, 지금은 스팸처리 해버렸어. 근데 당신 그것 놓고 소설 쓴 거 아냐? 그럼 아까 그때?”

“아냐 아니라니까.”

얼굴이 확확 달아오르자 나는 그 자리를 피해버렸다. 한참 후 마음속에서 모닥불이 꺼지는 소리가 들렸다. 겨울방학이 끝나가던 어느날이었다. 이제 겨우 현실과 상상의 혼돈 속에 마음이 가라앉는가 싶은데 우재영에게서 문자가 왔다. 지방에 있는 모 전문대학 전임강사로 가게 되었다며 남편에게 감사의 표시를 전해 달라고 했다.

감사의 표시라니? 이건 또 무슨 시츄에이션인가.

또다시 상상의 의혹이 독버섯처럼 뇌리에서 돋아나기 시작했다. 나는 당장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따지고 싶었지만 참았다. 지방에서 세미나를 마치고 고속도로를 달리는 중이라고 조금 전에 연락이 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재영은 무슨 심사로 내게 이런 문자를 보냈을까. 니가 도와주지 않아도 내 목적을 성취했다는 일종의 시위인가.

아님 그 일에 남편이 깊숙이 관여라도 한 걸까. 그렇다면 우재영은 무슨 의도로 내게 그런 문자를 보낸 걸까. 상상에 의심의 불길이 타오려는 순간 나는 우재영에게 문자를 날리고 있었다.

“니가 직접 전해라.”

그러자 곧바로 문자가 왔다.

“교수님이 제 문자를 안 받으시니까 그렇죠.”

이건 무슨 시츄에이션?

잠시 아연해 있는데 남편에게서 문자가 왔다.

“여보 나 곧 서울에 도착 예정이야, 날씨가 너무 춥네 우리 오늘 밖에서 따끈한 오뎅이나 먹을까 옛날 생각 하면서.”

외출 준비를 하는데 우재영에게서 또다시 문자가 왔다.

“선생님 생각나세요? 선생님께서 제게 그러셨잖아요, 인생은 리허설이 아니라고, 그래서 저도 이제부턴 리허설이 아닌 진짜 인생을 살려고요,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우재영”

나는 그녀의 문자를 받고 나서 한참 생각했다.

내가 언제 그녀에게 인생은 리허설이 아니라고 말한 적이 있었던가? 그 말은 남편이 내게 한 말 같은데. 이상하다. 이상하다. 생각 끝에 나는 상담학 이론을 꺼내 들었다. 그건 다름 아닌 피해망상이었다. 누구 무슨 말을 했든 그게 무에 그리 중요한가. 다만 인생은 리허설이 아니라는 사실이 중요할 뿐이지.

길거리를 걷는데 언젠가 우재영이 한 말이 생각났다.

“제가 어렸을 때 어머니는 시장 바닥에 앉아 노점을 하셨대요. 생선 한 퀘 갖다 놓고 그 흔한 파라솔도 하나 없이 뜨거운 땡볕과 비바람 다 맞아 가면서. 단 하나뿐인 딸 자식을 위해서 어쩌면 그게 자식을 사랑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는지 몰라요, 엄마는 지금 저를 너무도 자랑스러워 하세요, 어릴 때 잘 먹이지도 입히지도 못했는데 지금은 딸이 대학교 교수가 되었다면서 입만 열면 자랑하세요.”

남편을 만나기 위해 걸어가는데 길거리마다 노점상들이 가득했다. 겨울 한 철을 맞아 오뎅 장사도 곳곳에 진을 치고 있었다. 남편은 힘들었던 어린 시절을 생각할 때마다 오뎅 먹는 걸 좋아했다. 벌써 포장마차 안에 들어가 한 꼬치 들고서 먹고 있었다.

“어서 와 춥지? 당신도 어서 하나 먹어 봐.”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남편은 얼굴에 화색이 가득했다.

“좀 전에 우재영에게서 문자가 왔었어요, 지방 대학에 전임으로 가게 되었다고.”

“그곳 주임교수와 잘 아는 사이라는구먼, 무슨 꿍꿍이 속인지.”

“그런데 당신 우재영한테 인생은 리허설이 아니라고 그런 말 한 적 있어요?”

“리허설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아 아님 됐고요.”

“그런데 당신 왜 갑자기 존댓말을 하고 그래, 살다 별일을 다 보겠네.”

“내가 그랬나.”

나는 지금도 소설을 쓰고 있는 건 아닌가 자신을 의심했다. 남편과 포장마차를 나와 천변을 걷는데 유행가 가락이 흘러나왔다.

‘얼굴은 V라인 몸매는 S라인 아주 그냥 죽여줘요.’

문득 우재영이 생각났다. 입만 열면 몸매 자랑에 외모자랑 하던.

언젠가 TV 다큐멘터리에서 방영하던 사라져가는 재래시장도 떠올랐다. 평생을 호의호식은커녕 죽을 고생만 하단 간 내 어머니의 모습도 떠올랐다. 천변을 걷던 남편이 문득 말했다.

“이젠 우재영도 정신 차리고 살아야 할 텐데. 인생은 리허설이 아니니까 말야.”

“이젠 전임도 되고 했으니까 정신 차리겠지.”

남편이 개울가에 앉아 있는 원앙새부부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저 원앙새 좀 봐. 색깔이 아주 곱네, 아무리 새지만 참 사이가 좋아 보여. 안 그래?”

“정말 그러네, 그런데 겁도 없지 사람들이 지켜보는 데도 태평해.”

“그러니까 새지.”

남편의 말에 지나가던 행인들이 웃으며 말했다.

“저 원앙새 좀 봐, 머리를 물속에 처박고 먹이를 찾나 봐.”

머리를 물속에 처박은 원앙새는 이윽고 물고기 한 마리를 잡아 올렸다. 빠른 솜씨였다. 곧 눈이 오려는지 하늘이 칙칙했다. 찬바람이 목을 타고 들어왔다.

“어이 춥다 빨리 집에 가자.”

남편이 팔을 잡아채며 말하는데 원앙새 부부가 공중을 향해 힘차게 부양하는 모습이 보였다. 어느사이엔가 천변에 눈발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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