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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탄은 죽지 않는다 (신외숙 단편)
2011-07-09 09:59:00
sws60

조회:1196
추천:88

(단편) 사탄은 죽지 않는다.
신외숙

  고속도로 인터체인지에서 ○○시로 빠지는 길목으로 들어섰다.
  도로 양편에 가로수가 빽빽이 둘러서 마치 숲 속 한 가운데를 지나는 것 같았다. 차량들은 거미줄처럼 뒤엉켜 정체 현상을 빚었다. 어둠이 내리면서 차량이 뚫리기 시작했다.

 

어둠의 기세가 짙을수록 차량은 빠른 속도로 질주했다. 직선 코스로 난 도로를 한참 달리자 직사각형의 아파트 단지가 나타났다. 운무 속에 보이는 아파트는 마치 공중에 떠있는 애드벌룬 같았다. 
 
 그곳을 조금 지나자 마치 성곽 같은 모양의 큰 군락이 나타났다. 그곳은 모든 길이 미로로 연결돼 차량으로는 도저히 지날 수 없었다. 사람들은 일단 그곳에서 내린 다음 성곽으로 통하는 대형 철제문 앞에 섰다. 문 앞에는 짐승의 형상을 한 천사들이 사람들의 머릿수를 세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들의 지시에 따라 핸드폰과 시계를 내놓았다. 가지고 있던 돈과 귀중품도 다 내놓았다. 입고 있던 옷도 다 벗어버리고 푸른 수의복으로 갈아입었다. 마지막으로 신을 벗고 바닥에 구슬이 박힌 검은 구두로 바꿔 신었다. 그러자 현재는 사라지고 영겁으로 바뀌고 말았다.

 

 어둠이 금새 그들을 에워쌌다. 그들은 이마에 표를 받고 손에 인장을 찍은 채 성곽 안으로 들어섰다.

  성곽은 이미 모여든 사람들로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그들은 점점 붉은 색조를 띄어 가는 하늘을 바라보며 두려움에 떨었다. 당장이라도 귀기스런 공포가 덮쳐올 것 같았다. 싸아한 추위가 전신을 감싸는 순간, 그들은 꽈꽝거리는 굉음에 놀라 모두 뒤로 나자빠졌다.

 

폭풍우 같은 음악과 함께 하늘에서 커다란 용이 춤을 추며 내려오고 있었다. 어둠의 세력이 질식할 듯이 사람들의 마음을 덮쳤다. 그들 귓가로 우렁 우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희들은 모두 자발적인 선택에 의해 이곳에 들어온 자들이다. 따라서 너희들은 우리의 명령에 절대 순종해야 하며 이곳에 들어온 이상 절대 밖으로 나갈 수 없다. 이곳에선 사탄의 법칙만 통할 뿐, 그 어떤 법도 통용되지 않는다."

 

  "사탄의 법칙이란 도대체 어떤 것이오?"

 

  "법칙이란 따로 없다. 여러분은 무조건 우리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극도로 흥분하며 두려움을 나타냈다.

 

  "그렇다면 우리에겐 선택할 자유도 없다는 것이오?"

 

  그러자 용은 여유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 이곳에서도 선택할 자유는 있다. 여러분은 각자의 자유의지에 따라 단 한번 선택할 기회가 주어질 것이다. 기회는 단 한번뿐이다. 더이상 사용할 기회는 없다. 그러니 신중을 기해 주기 바란다. 그리고 또 한가지 이곳에선 통성명은 물론 모든 대화를 금지한다. 단, 문장을 제외한 단어는 말할 수 있다. 그것도 단 일회뿐이다. 그럼 모두 다음을 기약하며……."

 

  용은 입에서 불길을 내뿜으며 엄청난 기세를 토했다. 그는 입김을 사람들 머리 위에 쏟아 놓고는 하늘로 사라졌다. 그러자 자유가 사람들 마음 속에서 일시에 사라졌다. 대신 불안과 공포, 속박과 지겨움이 마음을 차지했다. 이제 그들에겐 몸을 움직이거나 말할 자유가 없어졌다.

 

 깊은 그물 속에 갇힌 그들은 퍼덕이는 물고기와 같았다. 그들 중에는 후회라는 단어를 생각하며 극한 공포를 나타내는 사람도 있었다. 갑자기 남자들이 깔깔대며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비명을 지르며 뒤로 넘어지는 여자도 있었다. 얼굴이 화상으로 이지러진 여자는 고통에 못 이겨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용의 입에서 나온 불로 그녀는 완전히 구운 시체처럼 변한 것이다.  한 젊은 남자는 스스로 몸을 난자하며 분노를 터뜨렸다. 그들은 모두 사방을 휘둘러보며 정신 없이 울부짖었다. 그러나 그들의 고통에 관심을 갖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타인에게 절대 무관심, 그건 그곳에서의 또다른 계율이었다.

  갑자기 그들 앞에 커다란 화면이 나타났다. 화면의 한 가운데가 갈라지면서 문이 나타났다. 황금으로 장식된 선택의 문이었다. 편법과 불의와 술수로 가득찬 사람들이 제일 먼저 안으로 들어섰다.

 

화려한 보석으로 장식된 실내는 마치 낙원과 같았다. 부드러운 카펫트와 각종 실과 나무는 사람들의 마음을 평온과 기쁨으로 이끌었다. 그들이 발길을 옮길 적마다 온갖 칭찬과 격려와 찬사들이 쏟아졌다. 그들 눈앞에 무대가 보였다. 무대 중앙엔 금빛 찬란한 왕관들이 있었다. 가까이 갈수록 부와명예와 이익과 유혹이 봇물 터지듯 터져 나왔다. 팡파르가 계속 터져 나왔다. 마음 속에 축하 메시지가 들려왔다.

 

  그들에겐 어느새 화려한 드레스가 입혀져 있었다. 천사 같은 몸짓으로 정상으로 올라섰을 때 환호와 열광은 극에 달했다. 그들에겐 지상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영예가 주어졌다. 각종 상패와 트로피 메달과 금빛 찬란한 봉투가 손에 쥐어졌다. 그들의 입에서는 만족의 미소가 흘렀고 얼굴에서는 광채가 비쳤다.

 

  축하 음악이 끝나자 갑자기 하늘에서 검은 손이 나타났다. 검은 손은 사람들 머리마다 금빛 찬란한 왕관을 씌워 주었다. 왕관은 청보석 홍보석 다이어몬드 루비로 장식돼 지상에서 볼 수 없는 가장 화려한 것이었다. 왕관을 쓴 사람들은 만족한 미소를 지으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또다시 요란한 팡파르와 함께 함성이 터졌다. 그들은 정상에 서서 아래를 내려보았다. 거기에는 환호하는 무리가 있었다. 두 팔을 들고 환호하는 무리들은 어느 사이엔가 칼을 들고 서 있었다. 그것을 본 그들은 모두 놀라 두려움에 떨었다.

 

  "어서 내려가라."

 

  용의 음성이 들려왔다.

 

 " 못 내려가겠소, 아니 난 안 가겠소." 그러나 그들은 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들에겐 침묵만 있을 뿐 말할 자유가 없었다. 명령에 대한 순종만 있을 뿐이었다. 마음은 움직이지 않는데 몸은 벌써 계단을 향해 한걸음씩 내려서고 있었다.

 

한 계단 한 계단 내려 설 때마다 질시와 모멸감과 수모가 그들 위로 쏟아졌다. 야유와 욕설과 저주도 함께 쏟아졌다. 이윽고 마지막 계단을 내려섰을 때 그들의 왕관은 잿더미로 변했고 가슴에는 칼날이 깊숙이 꽃혀 있었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나머지 사람들은 다음 관문으로 들어섰다. 그곳에는 넓은 목욕탕이 보였다. 뜨거운 김이 피어오르는 목욕탕에는 아름다운 여인들이 온갖 자태를 뽐내며 앉아 있었다. 우유빛 살결과 탐스런 몸매는 남자들의 탄성을 자아내게 했다. 여인들은 한껏 가슴을 부풀리고 미끈한 다리를 쳐들면서 음욕을 내뿜었다.

 

목욕탕은 그녀들이 내뿜는 체취로 가득했다. 마력에 이끌린 듯 남자들은 벗은 몸이 되어 탕 안으로 들어갔다. 교태 어린 웃음소리가 남자들의 정신을 삼켜 버렸다. 그들의 정신과 육체는 한 덩어리가 되어 쾌락의 절정으로 치달았다.

 

  여기저기서 짐승들의 웃음소리와 통곡소리가 들려왔다. 바로 그 옆, 한 어둠의 공간 속에서 어디론가 계속 전화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있었다. 칸막이 된 그곳에서는 수많은 남자들이 누군가에게 끊임없이 메시지를 보내며 의사를 타진하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한쪽에서는 메시지를 주고 받는 신종 채팅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대형 화면에서는 계속 음란쇼가 벌어졌다. 전화가 연결될 때마다 술병을 든 여자가 문을 열고 나타났다. 음습한 세균과 검은 바람도 함께 따라 들어왔다.

 

  술이 부어질 때마다 쾌락이 음란을 부채질했다. 그들이 쾌락의 절정에 달할 때마다 각색 병균이 몸과 뇌리 속으로 침투했다. 혼란과 광기에 휩싸인 그들이 문 밖으로 나서자 곧바로 미로가 나타났다. 미로는 휘황찬란한 네온과 함께 각종 아크릴 간판으로 뒤덮여 있었다.

 

취객들이 쏟아 놓은 오물과 시끄러운 음악이 그들의 발걸음과 정신을 어지럽혔다. 이윽고 한 골목길로 접어들자 유리케이스 앉아 있는 여자의 반나의 모습이 보였다. 짙은 화장에 담배까지 꼬나 문 여자는 긴 다리를 쳐들며 일부러 선정적인 포즈를 취했다.

  여기저기서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이상하다. 이상하다. 전에는 이렇지 않았는데."

 

  사람들은 사방을 휘둘러보며 뇌까렸다. 어디선가 여자의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들려왔다. 유리병 깨지는 소리와 함께 쾅! 하는 폭발음이 들렸다. 자욱한 연기가 사방에서 몰려왔다. 사람들은 출구를 찾아 헤매었지만 사방이 미로였다. 앞 뒤 사방 에서 계속 폭발음이 들려왔다.

 

어디선가 새까만 날짐승들이 날아와 그들의 머리를 덮었다. 독수리였다. 죽은 시체를 먹기 위해 날아온 것이다. 사람들은 계속 출구를 찾았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미로는 모든 길을 차단한 채 사람들을 외면했다.

 

  갑자기 와! 하는 함성이 들려왔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여자들이 남자들의 팔을 낚아채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씩 채집 당하듯 어둠 속으로 끌려갔다. 그리고 다시는 그곳에서 나오지 못했다.

 

  또다시 넓은 목욕탕이 보였다. 그곳에서는 여자들이 뱀과 뒤엉켜 온갖 쇼를 다 연출하고 있었다. 뱀이 혀를 날름거리며 여자의 몸과 정신을 핥았다. 여자뿐만이 아니었다. 언제 달려 왔는지 남자들도 하나가 되어 뒤엉켰다. 뱀은 여자의 입과 자궁 속에 깊은 혀를 들이밀었다. 치명적인 독소도 함께 빨려 들어갔다. 남자의 사타구니를 핥고 있는 뱀도 있었다.

 

  뱀의 차가운 감촉이 지날 때마다 그들은 깊은 전율을 일으켰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음욕의 기운을 따라 점점 더 깊숙이 탕 안으로 끌려 들어갔다. 뽀글 뽀글…….

 

  물이 빠지면서 그들은 모두 깊숙한 곳에 수장되었다. 두 팔을 내저으며 허우적거리던 그들은 마지막으로 "허무"를 외쳤다. 그러나 그 소리마저도 그 어떤 기운에 가로막혀 이내 잠잠해졌다. 쾌락의 절정을 향해 내지르던 교성도 음욕의 향기도 함께 사라졌다. 정적이 한동안 그곳을 맴돌았다.

 

  사람들은 다음 관문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곳에는 온갖 무시무시한 살인도구가 보였다. 날이 선 칼과 창, 탄약이 장착된 각종 총포와 화약이 무더기로 쌓여 있었다. 그리고 시한부 폭탄을 장착한 여자가 무대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가운데에는 유황불이 치솟고 있었다. 춤을 추던 여자가 가끔씩 그곳에 입김을 하얗게 불어넣었다.

 

그럴 때마다 유황불은 하늘 높이 치솟아 올랐다. 죽음의 축제를 앞두고 마지막 경연대회가 시작되고 있었다. 머리에 검은 두건을 쓴 남자가 어린아이의 손을 잡고 나타났다. 춤을 추던 여자는 그들 주변을 맴돌며 창을 휘둘렀다. 남자가 아이의 손을 끌고 유황불 가까이 갔다. 그리고는 아이를 번쩍 안아 올렸다. 아이는 완전히 공포에 질려 있었다. 다음 순간 아이는 제단에 타오르는 불길 속으로 사라졌다.

 

  "아악! 아빠."

 

  악마들의 웃음소리와 함께 축제는 계속 이어졌다. 다음 순간 그들 눈앞에 동물 형상의 수많은 조각상이 보였다. 해와 달과 별 모양의 조각상도 보였다. 그 조각상 앞에서 사람들은 무엇인가 잔뜩 차려놓고 이상한 주문을 외웠다. 그러다 신명이 나면 한바탕 춤을 추었다.

 

기괴한 복장을 하고서 피를 뿌려 대면서 너풀너풀 춤을 추는 사람도 있었다. 울긋불긋한 옷을 입은 수많은 여자들은 커다란 짐승 형상 앞에서 춤을 추었다. 날카로운 창 끝을 딛고서 사뿐사뿐 춤을 추는가 하면 불이 활활 타오르는 계단을 올라서며 자유자재로 춤을 췄다. 그들의 몸은 새털처럼 가벼웠다. 시퍼런 칼날 위에서 무쇠칼을 휘두르며 춤을 추는 여자도 있었다.

 

  그러다 신명이 나면 용이 불을 뿜듯 엄청난 말을 했다. 그들은 그 말을 예언이라 했다. 사람들은 그 예언 앞에 숨도 제대로 못 쉬었다. 춤이 계속될수록 어둠의 기세는 점점 커졌다. 사람들의 몸과 마음도 점점 결박되어 갔다. 그리고 마지막 예언이 선포되었을 때 그들의 영혼은 땅속에 깊이 매장되었다.

 

  한쪽 방향을 향해 끝없이 절을 하는 사람들도 보였다. 몸을 앞뒤로 흔들면서 그들은 계속 무어라 주문을 외워댔다. 촛불 앞에서 머리를 숙인 채 흐느껴 우는 여인들도 있었다. 해와 달과 별 형상 앞에서 자신의 몸을 칼로 자해하며 주문을 외우는 무리도 있었다. 그들은 몸에서 피가 흐르는 데도 조금도 그 동작을 멈추지 않았다.

 

불이 타오르는 제단 앞에서 난삽한 섹스를 벌이는 사람들도 있었다. 짐승이 흘레 붙듯 돌려가며 짝짓기를 하는데 갑자기 큰 천둥소리와 우레가 들렸다. 번개가 치면서 그들은 더욱 광란에 취해갔다. 그들이 누운 바닥 위로 빗물이 차올랐다. 빗물은 점점 거대한 물줄기로 변해 그들은 광란과 함께 깊은 수렁 속으로 함몰되었다.

 

  밧줄에 묶인 여자를 커다란 짐승 형상 앞에 내려놓고 함성을 지르는 무리가 있었다. 여자는 공포에 질린 채 아예 눈도 뜨지 못했다. 짐승들의 표효 소리에 갇혀 여자의 숨소리는 점점 가늘어졌다. 여자가 놓인 제단은 이미 피로 얼룩져 있었다. 그 주변에는 칼과 쇠갈고리와 창이 보였다. 짐승을 잡을 때 쓰는 기구였다. 함성이 끝나자 높은 계단 위에 앉아 있던 우두머리로 보이는 남자가 내려왔다.

 

  그는 여자 곁에 다가서더니 익숙한 솜씨로 그녀를 묶고 있는 밧줄을 잘랐다. 여자가 눈을 떠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의 입가에서 잔인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죽여주마. 죽음의 의미를 실감하도록.

  남자가 창을 높이 쳐들었다.

  와우!

 

  다시 함성이 울려 퍼졌다. 남자가 창을 힘껏 내리 꽂는 순간 피가 분수처럼 튀어 올랐다. 여자의 동맥을 끊은 것이다. 제단 위로 피가 흥건하게 고이기 시작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사람들은 다음 장면을 주시했다. 남자가 기묘한 표정을 짓더니 창을 다시 높게 쳐들었다.

  팍!

 

  여자의 가슴에 창이 꽂히면서 또다시 피가 분수같이 뿜어져 나왔다. 터진 심장 혈관에서 흘러나온 피가 제단 주변으로 퍼져 갔다. 남자가 잔인한 미소를 짓더니 여자를 향해 입김을 불어넣었다.

  확!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붉은 불꽃이 악마의 혓바닥처럼 여자의 몸을 사르기 시작했다. 순간이었다. 여자의 몸이 꿈틀거렸다. 감았던 눈이 다시 떠지면서 여자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아악 아악…….

 

  처절한 여자의 비명은 끝도 없이 이어졌다. 여자는 아직 살아 있었다. 불이 계속 타오르는데도 여자는 죽지 않고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었다. 남자가 다시 한번 여자를 향해 입김을 하얗게 불어넣었다. 그러자 아까보다 더 새빨간 불꽃이 여자의 몸을 사르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여자는 죽지 않았다.

 

  넌 영원 불멸의 고통 속에 떨어진 거다. 넌 죽지 않는다. 절대로.

  여자는 꺼지지 않는 불꽃 속에서 천천히 잿더미가 되어갔다.

 

  사람들은 몸서리를 치면서 다음 선택의 문으로 들어섰다. 휘황찬란한 무대가 보였다. 뽀얀 안개가 무대를 덮으면서 비키니 차림의 여자와 온몸이 쫙 조이는 옷을 입은 남자가 나타났다. 그들은 두 팔을 벌려 관객을 향해 정중하게 인사했다. 관중석에서 환호와 함께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다. 남자가 한켠으로 물러서더니 여자에게 커다란 유리병을 건넸다.

 

  여자는 유리병에 계속 물을 따랐다. 물이 가득 채워지자 여자는 두 팔을 활짝 벌렸다. 그러자 가슴 중앙에 커다란 별이 보였다. 금빛 찬란한 왕별을 보자 관객들의 입에서 탄성이 나왔다. 이상하다. 좀 전까지는 보이지 않았는데.

 

  다음 순간 여자가 유리병을 가슴에 대자 물이 포도주 색으로 바뀌었다. 관객들의 눈이 휘둥그래지면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병 뚜껑을 따자 포도주 향기가 진동을 했다. 여자가 잠시 향기를 맡더니 언제 준비했는지 투명한 크리스털 술잔을 꺼냈다.

 

그리고 한잔씩 술을 따르기 시작했다. 그것을 골고루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붉은 액체는 짙은 포도주 향기가 되어 사람들의 가슴에 안겼다. 유리병에서는 끝도 없이 포도주가 나왔다. 마침내 포도주를 다 받아 마신 사람들은 "포기"라는 단어를 외치며 쓰러졌다.

 

  여자가 무대에서 사라진 다음 아까부터 그 장면을 보고 있던 남자가 무대 중앙에 나타났다. 그는 긴 쇠막대기 두 개를 가지고 나타났다. 그것을 공중으로 집어 던지더니 가볍게 되받았다. 와우! 관중석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놀라운 힘이었다. 쇠막대기는 보기에도 육중할만큼 큰 것이었다. 남자는 다시 한번 쇠막대기를 공중으로 집어 던졌다. 그러자 쇠막대기가 공중에서 붕 뜬 채 똑바로 서는 게 아닌가.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남자는 이어 화살촉과 권총 단검을 꺼내 차례로 공중에 던졌다. 그때마다 똑같이 공중에서 물구나무 서기를 했다. 그러자 관중석에서 한 남자가 무대 위로 뛰어 올라왔다. 그는 공중에 서 있는 화살촉에 손을 갖다 댔다.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이어 권총과 단검에도 손을 갖다 댔다. 역시 움직이지 않았다.

 

  이게 어찌 된 노릇이지. 의아해 하는 순간 얍! 하는 소리와 함께 화살촉과 권총, 단검이 바닥에 내리 꽂혔다. 그것을 지켜보던 관중석에서 올라온 남자는 제 눈을 의심했다.

  분명 내가 만졌을 때 공중에 얼어붙은 듯 서 있었는데.

 

  그가 내려가자 새로운 쇼가 벌어졌다. 역시 이번에도 비키니 차림의 젊은 남녀가 나타났다. 그들은 바퀴가 달린 투명한 프라스틱 박스를 무대 중앙에 가지고 나왔다. 남자가 박스 뚜껑을 열자 여자가 몸을 안으로 들이밀었다. 여자의 작은 몸이 프라스틱 안에 갇히자 남자가 박스를 한바퀴 빙그르르 돌렸다. 그리고 다시 여러번 계속 반복하여 돌렸다. 그러자 투명했던 박스 색깔이 까맣게 변하기 시작했다.

 

  아! 관객들 사이에 짧은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박스가 돌기를 멈추고 드디어 멈춰섰다. 남자가 박스를 향해 손짓을 했다. 그러자 위쪽에서 여자의 손이 불쑥 튀어 올랐다. 다음 순간 박스 양옆에서 손이 아니 여자의 팔이 뻗쳐 나왔다.

 

  이게 도대체 어찌된 일이지. 관객들은 또다시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다음 순간 남자는 날이 시퍼런 칼을 가지고 나타났다. 그 칼로 박스를 사정없이 찔러댔다. 핏물이 박스에서 점점 흘러내렸다. 바닥에 흥건하게 흘러내린 핏물을 보는 순간 관객들은 눈을 돌려 외면했다. 핏물이 흐르는 칼날을 높이 쳐들며 남자가 기괴한 웃음을 흘렸다. 남자가 다시 박스를 손으로 돌리기 시작했다.

 

  반복해서 돌아가는 동안 박스를 점점 투명한 색깔로 변해갔다. 박스를 점점 빠르게 돌리던 남자가 갑자기 박스를 움켜쥐더니 기염을 토했다.

   얍!

 

  박스가 멈춰서더니 여자가 처음에 들어갔던 그 모습 그대로 나왔다. 비키니 차림으로 다시 나타난 여자는 두 팔을 벌려 관객들의 환호에 답했다. 이어 남자가 무대 뒤로 사라지더니 잠시 후에 작은 박스를 가지고 나타났다. 박스를 여는 순간 동전이 우르르 쏟아졌다.

 

그것을 여자의 손바닥 위에 쏟아놓은 다음 남자는 다시 무대 뒤로 사라졌다. 동전을 받아 쥔 여자는 그것을 손안에 들고 몇 번인가 흔들었다. 그러더니 다시 손을 펴는 순간 동전이 깜쪽같이 사라지고 말았다.

 

  이게 어찌된 일이지 그 많던 동전이 어디로 사라진 걸까. 관객의 의아심에 답하기라도 하듯 여자가 하늘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여자가 다시 손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그러더니 또다시 손을 펴 보이는데 이번에는 깜쪽같이 사라졌던 동전이 다시 보이는 게 아닌가.

 

  사람들은 자신들의 눈을 의심하며 다음 순간을 기대했다. 여자는 동전을 손에 넣고 한참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이윽고 여자가 만족한 미소를 보이더니 손을 쫙 펼쳐 보였다. 그러자 금빛 찬란한 반지가 보이는 게 아닌가. 그것도 영롱한 다이어가 박힌 것으로 동전 수와 똑같은 반지의 숫자가.

 

  여자는 반지를 들고 객석으로 가 하나씩 나누어주었다. 계속 나누어주는 데도 반지는 그녀의 손끝에서 계속 나왔다. 사람들은 모두 환호성을 질러댔다. 그들 중 일부는 기쁨에 들떠 반지를 들고서 출입구 쪽으로 마구 뛰어갔다.

 

  무대 위로 다시 올라온 그녀는 이번에는 흰 백지를 가지고 나타났다. 백지는 어른 키만한 매우 큰 것이었다. 그녀는 그것을 여러번 접은 다음 칼을 대고 정확하게 등분하여 잘랐다. 그런 다음 그것을 두 손에 들고 공중에 흩날렸다.

 

 그런 다음 사뿐히 종이 위에 내려앉았다. 그리고는 손을 머리 위에 얹고는 이상한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종이의 색깔이 점점 변하기 시작했다. 또다시 관객들 사이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종이가 지폐로 변한 것이다.

 

  주문을 끝낸 여자는 지폐로 변한 종이를 관중들에게 다가가 뿌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정신없이 돈을 주웠다. 그들은 돈을 줍느라 정작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어둠을 깨닫지 못했다. 어둠이 그들을 휩쓸고 낮은 계단으로 끌고 갔다. 계단이 끝나는 마지막 지점에서 그들은 돈을 머리 위로 흩날리며 깊은 수렁으로 떨어졌다. 

 

  나머지 사람들은 다음 선택의 문을 향해 걸어갔다.

 

  들어서는 순간 사람들은 낙담과 우울에 사로잡혔다. 슬픔과 애통과 절망이 그들의 심령을 꿰뚫고 지나갔다. 자포자기가 미래를 삼키면서 그들은 점점 더 벼랑 끝으로 달려갔다. 발 밑에는 깊은 강이 흐르고 있었다. 이따금 악어 떼가 출몰하는 걸로 보아 그곳은 수심 깊은 바다인지도 몰랐다.

 

때마침 폭풍우가 거세게 몰아 닥쳤다. 그리고 그들의 귓가에 엄청난 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은 그 소리에 따라 추풍낙엽처럼 물 속으로 떨어졌다. 그들의 육신을 삼켜 버린 물은 악어의 집합소였다. 육신이 떨어지자마자 악어는 단번에 삼켜버렸다.

 

  타오르는 불길 속으로 가스통을 지고 뛰어드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 역시 귓가에 들려오는 강력한 음성에 따라 프로판 가스를 가슴에 안은 채 정신없이 불길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들에게는 실패라는 멍에가 복수심으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직장에서 쫓겨나고 애인에게 버림받은 분노로 가슴이 불길이 되어 활활 타오르는 사람도 있었다. 버림받았다는 상실감과 분노로 그들은 자신마저 버렸다.

  콰광!

 

  폭발음과 함께 그들의 육신은 한줌의 재가 되어 사라졌다. 권총을 자신의 머리 위에 대고 쏘는 사람도 있었다. 그의 뻥 뚫려버린 두개골 사이로 흥건한 핏물이 흘렀다. 숨죽인 어둠 속에서 목을 메는 사람도 있었다.

 

그가 발 밑에서 의자를 걷어차는 순간 죽음이 그의 목을 물고 늘어졌다. 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흘렀다. 목욕탕에 물을 틀어 놓은 채 동맥을 끊는 여자도 있었다. 그녀의 손목에서 분수같이 피가 뿜어져 나왔다. 여자는 웃다 울다를 반복하며 무언가를 향해 강력하게 호소하며 서서히 죽어갔다.

 

  달려오는 전철을 향해 뛰어드는 남자도 있었다. 굉음이 남자의 몸뚱이를 삼키는 동안 다른 사람들도 다투어 뛰어 들었다. 죽음에도 러시현상이 이는 모양이었다. 전염병처럼 번져 가는 죽음 앞에 사람들은 속수무책으로 뛰어들었다. 죽음의 비명과 살아남은 자의 탄식소리가 레일 위에서 아스라이 번져갔다.

 

사람들은 왜 죽음의 장소로 하필이면 전철을 택했을까. 왜 죽어가면서까지 그런 식으로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싶어했을까. 그건 일종의 알 수 없는 자기 투시현상이었다.


  커다란 수통 앞에서 죽음의 파티를 벌이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모두 죽음에의 잔치에 초대된 사람들이었다. 여자들은 모두 흰옷을 입었고 남자들은 검정색 통옷을 입었다. 그들은 교주의 명령에 따라 일제히 해골 표시가 되어있는 수통으로 달려갔다. 죽음의 향기가 사람들의 의식 가득히 몰려왔다. 그들은 무언가에 잔뜩  취해 있었다. 일사불란 천편일률적으로 모두 하나가 되어 있었다.

 

  게중에는 엄마의 손을 잡고 따라가는 어린 아이도 있었다. 치마를 뒤집어 쓴 채 마구 흐느끼며 달려가는 여자도 있었다.

 

  혹여 죽음의 대열에서 이탈할까 봐 검은 복면을 한 사내들이 끝까지 따라 붙었다. 그들은 일체의 흐트러짐 없이 일제히 죽음의 잔을 마셨다. 그리고 모두 손을 맞잡고 죽음의 고통을 즐겼다. 마지막으로 교주도 독극물을 마셨다. 똑같이 죽음의 터널을 통과한 그들은 영원한 절망으로 빠져 들어갔다. 

  나머지 사람들은 다음 선택의 문으로 들어섰다.

 

  밝은 불빛 아래 커다란 공간이 보였다. 그곳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컴퓨터에 앉아 무엇인가 계속 지시사항을 하달하고 있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세계 지도 화면에서는 빨간 불이 켜졌다. 이어 화면에 폭파 장면이 보였다. 미사일이 전투기를 요격하면서 폭발음과 함께 검붉은 불꽃이 터졌다.

 

거대한 연기와 함께 빌딩 한 채가 그대로 주저앉는 장면도 보였다. 공중전이 벌어지는 하늘에서는 불꽃놀이 하듯 계속 섬광이 터졌다. 전투기가 연기를 내뿜으며 낙엽처럼 떨어졌다. 지축을 뒤흔드는 폭음과 함께 살상이 이어졌다. 거리에 있던 장갑차와 탱크, 군용트럭이 순식간에 날아갔다.

 

유전에서는 거대한 불기둥이 화마와 함께 타올랐다. 바다에서는 함대가 요격 당해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침몰하고 있었다. 거대한 선체가 일순간에 날아가면서 사람들이 손을 허우적거리며 바닷속으로 빠졌다.

 

  생물체는 모두 화마가 되어 타올랐다. 짐승도 나무도 꽃도 사람도 모두 죽음의 사신을 만났다. 사지가 찢겨져 나간 사람들이 바닥을 나뒹굴면서 호소하는 장면이 보였다. 집과 부모를 잃은 아이들이 거리를 헤매며 우는 장면도 보였다.

 

 아이들은 배고파 울고 무서워 울다가 이윽고 검은 손길에 의해 하나씩 어둠 속으로 끌려갔다. 죽은 자식의 시체를 끌어안고 우는 여인들도 있었다. 여인들은 비통한 심경으로 아이를 끌어안고 몸부림쳤다. 그리고 하늘을 향해 원성을 날리며 쓰러져 갔다.

 

  컴퓨터에서는 계속 명령이 하달되고 있었다. 그들의 손길은 너무 빨라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들의 손가락이 움직일 때마다 살상과 인명사고가 봇물 터지듯 터졌다. 게임하듯 살인을 원격조정하는 그들은 모두 검은 두건을 쓰고 있었다.

 

  천장에 매달린 채 고문당하는 전사도 있었다. 그 밑으로 각종 무시무시한 고문 기구가 보였다. 살점이 뜯겨져 나간 핏덩어리가 쇠창살 끝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었다. 희미한 전등 아래, 전사는 온몸이 발가벗기운 채 한 마리의 짐승이 되어가고 있었다. 짓이겨지고 불에 태워지고 물에 거꾸로 처박혔다. 사람들은 그 잔혹한 장면을 보면서 스스로 지옥의 현장으로 걸어 들어갔다.

 

  공포와 전율 속에 그들은 악마의 웃음을 띄운 채 천천히 들어갔다. 가학적인 웃음과 피비린내가 그들의 전신으로 퍼져왔다.

  나머지 사람들은 다음 선택의 문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모두 나태와 무기력에 사로잡힌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들어서자 운동장 같은 넓은 방이 보였다. 가운데 칸막이를 두고 남녀가 모두 바닥에 누워 있었다. 그들은 누운 채 꼼짝도 않았다. 마치 살아 있는 시체 같았다. 자세히 보니 그들은 튜브에서 공급되는 음식물을 먹고 있었다.

 

바로 옆에 음식상이 차려져 있었지만 쳐다보지도 않았다.

바닥은 뜨거운 열기로 절절 끓고 벽에서는 에어컨 바람이 시원하게 불었다. 이윽고 튜브에서 공급이 끊기자 그들은 너나할 것 없이 잠에 빠져들었다. 흉몽을 꾸는지 얼굴이 이지러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깜짝 깜짝 놀라며 우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가위가 눌리는지 몹시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리 괴로워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잠시 후 그들은 모두 잠에서 깨어났다. 그러나 눈만 떴을 뿐 자리에서 꿈쩍도 안 했다.

 

음악이 들려왔지만 아무 반응이 없었다. 콰쾅거리는 굉음이 들려와도 마찬가지였다. 어디선가 여자의 통곡소리가 들려왔다. 귀기스런 느낌이 방안 전체에 흘렀다. 애간장을 녹이는 여자의 흐느낌은 남량특집 영화를 보는 듯했다.

 

  뇌리를 뒤흔드는 듯한 소리가 한바탕 지나가고 나자 찬장 위로 새까만 바람이 지나갔다. 검은 기운은 그들의 몸과 마음 속에 파고들어 광기를 나타냈다. 그래도 그들은 미동도 안 했다. 마치 몸을 바닥에 붙여 놓은 것 같았다. 그들의 눈과 귀는 열렸어도 전혀 그 기능을 하지 못했다. 표정은 있으나 몸을 움직일 줄도 말을 할 줄도 몰랐다. 나태의 그물 속에 갇힌 그들 눈앞에 대형 화면이 나타났다. 거기에는 수많은 글자가 적혀져 있었다. 생명과 안식과 평강이 글자들 사이에서 묻어났다.

 

  그것은 그들에게 주어진 마지막 선택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선택의 기회마저 귀찮아했다. 그들은 위에서 찍어 내리는 중압감으로 그대로 침몰했다. 어둠의 세력에게 포획된 그들은 지하 땅속으로 저절로 매몰되었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사람들 중 일부는 스스로 그곳으로 걸어 들어갔다.

 

  나머지 사람들은 다음 선택의 문을 향해 들어섰다.

 

  그곳에는 사람들이 모여 시끄러운 소리로 떠들고 있었다. 그들은 상대의 이야기에는 관심도 없었다. 오직 제 이야기에만 심취된 채 발광하듯 떠들었다. 그러다 흥분이 지나치면 서로 얼굴을 쥐어뜯으며 욕을 해댔다. 시간이 갈수록 소리는 점점 더 켜졌고 욕설과 함성으로 변했다. 그들은 귓가에 들려오는 말로 점점 정신을 잃어갔다.

 

  수많은 함성 속에 가슴을 찔러대며 외치는 소리가 있었다.

 

  "거짓말 거짓말이다."

 

  온갖 거짓말과 술수로 떠드는 그들 앞에 대형 화면이 나타났다. 불과 유황불이 타는 연못이었다. 뜨거운 열기가 온몸에 전해졌다. 머리에 검은 두건을 쓰고 칼과 창을 잡은 남자들이 화면 속에서 뒤쳐 나왔다. 그리고 그들은 거짓말하는 사람들은 하나씩 유황불 속으로 끌고 들어갔다. 비명도 잠시 그들은 곧 재로 변했다. 그리고 난무하던 거짓말도 이내 사라졌다.

 

  사람들은 다음 선택의 문으로 들어섰다. 그곳에선 온갖 게임이 벌어지고 있었다.  커다란 원판이 돌아가면서 사람들이 환호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끊임없이 패를 던지고 열광했다. 그런가 하면 한쪽에 있는 기계에서 동전이 우르르 쏟아졌다. 이어 계속 동전 넣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의 눈과 귀는 닫혀서 도무지 제 기능을 못했다. 오직 동전에만 사활을 걸었다.

 

  한쪽 대형 화면에서는 TV 경마 대회가 벌어지고 있었다. 트랙을 달리는 말들은 운명을 따라 사력을 다해 달렸다. 그것을 지켜보는 관중들도 환호와 낙담의 길을 함께 달리다 쓰러졌다. 카드놀이를 하면서 옷벗기 경쟁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어떤 남자는 아예 나체가 되어서도 끊임없이 카드를 던졌다. 손에 피를 잔뜩 흘린 채 카드놀이에 열중하는 여자도 있었다. 그녀의 한손은 카드를 또 한손에서는 비수가 끊임없이 바닥을 찧고 있었다. 그때마다 그녀의 허벅지에서는 피가 조금씩 흘러나왔다.

 

  네온이 휘황한 거리에서 사람들이 긴 줄을 서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한손에 기다란 종이를 들고 있었다. 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낸 그들은 종이 위에 대고 한참을 긁적거렸다. 다음 순간 그들의 입가에서 탄성과 환호가 터져 나왔다. 그러나 그 옆에 있던 사람들은 탄식과 더불어 종이를 찢어 공중에 날려버렸다.

 

들고 있던 가방도 신고 있던 신발과 함께 달려오는 차량을 향해 던져버렸다. 어느덧 맨발이 되어버린 그들이 길거리를 지나자 새로운 진풍경이 벌어졌다.
 
남자들이 모여 서서 뭔가 한참 골몰하고 있었다. 바닥에 가마니를 깔아놓고 뭔가
를 계속 던지며 탄성을 올렸다. 그들 한가운데서 담배 연기가 계속 피어올랐다. 그 담배 연기 사이로 돈이 보였다. 바닥에 깔린 건 돈이었다. 새로 나온 오천 원짜리 지폐와 만 원짜리 지폐가 수북히 쌓여 있었다.

 

그 돈을 한꺼번에 움켜쥐는 손이 있었다. 그의 손에는 갈고리 같은 날카로운 연장이 매달려 있었다. 그 손이 돈을 무한정 끌어 모으며 사람들에게 후회감을 심어 주었다.

 

  어두컴컴한 공간 속에서 남자들이 책상 위에서 뭔가 열심히 적는 모습이 보였다. 자세히 보니 그들은 모두 한패였다. 한두 명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들러리인 셈이었다. 그들은 귓가에 들려오는 음성에 따라 열심히 받아 적다가 한꺼번에 패를 던졌다. 그러다 한명씩 자리에서 일어서다 말고 바닥에 쓰러졌다.

 

한번 쓰러진 그들은 다시 일어서지 못했다. 중독은 먼저 사람들의 의지를 점령했다. 그리고 그들의 귓가에는 같은 소리가 반복적으로 들려왔다. 따라서 그들의 영혼은 속임수에 따라 끊임없이 조종당했다. 몸과 마음이 전혀 제 기능을 상실하고 만 것이다.

 

  선택이라는 계명을 잃어버린 그들의 영혼은 이미 마수에 걸려 옴쭉달쭉 할 수가 없었다. 미래마저 상실한 그들은 마지막 코스를 향해 전력을 다해 달려갔다. 그 끝에는 죽음의 계곡이었다. 그 죽음의 계곡 앞에서 그들은 마지막 숨을 거두면서 외쳤다.

  "파멸"

 

 
  사람들은 다음 선택의 문 앞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곳에서는 술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사람들은 물탱크 같은 대형 술통에서 끊임없이 술을 받아 마셨다. 술은 마셔도 마셔도 동이 나지 않았다. 사람들은 점점 술에 취해갔고 이성을 잃고 흔들렸다. 술 취한 그들은 괴성을 지르며 난동을 부리기 시작했다.

 

벽에 걸린 시계를 던져버리는가 하면 술잔을 깨 부시고 서로의 옷을 집어던졌다. 어느샌가 알몸이 되어버린 그들은 강간과 폭력을 일삼았다. 어린 아이에게까지 성폭력을 일삼던 그들은 점점 몸이 새까맣게 타들어 갔다. 한쪽에서는 쇠파이프를 휘두르며 질주하는 차량으로 그대로 돌진하는 경우도 있었다.

 

  온몸이 뱀에게 친친 동여 맨 채 술을 마시는 남자도 있었다. 그는 꺼이꺼이 울면서 술을 마셨다. 뇌세포가 까맣게 타들어 가는 줄도 모르고 그는 울면서 술을 마셨다. 그 옆에서 같이 술을 마시던 여자는 아이가 배고파 우는 데도 계속 술잔을 기울였다. 그녀는 가슴이 터져 버릴 것 같다며 괴성을 질러가며 울었다. 아이가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어떤 여자는 빨간 신호등이 켜진 앞에서 그대로 옷을 벗고 널브러졌다. 뒤이어 달려온 남자들도 모두 옷을 벗고 널브러졌다. 자동차가 그들 위로 휙휙 지나갔다. 파란 신호등으로 바뀌고 어둠이 물러갔을 때도 그들은 여전히 널브러져 있었다. 죽은 시체가 될 때까지. 어쩔 수 없는 질곡이었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나머지 사람들은 다음 선택의 문으로 들어섰다.

 

  그곳에는 검은 복면을 한 사람들이 자리에 누워 있었다. 부끄러움을 가면으로 가린 그들은 자리에 누워 무언가 끊임없이 입으로 빨고 있었다. 그때마다 푸른 연기가 뿜어져 나오면서 괴성이 들렸다. 주머니에서 본드를 꺼내 흡입하는 사람도 있었다.

 

 흰 가루를 술에 타서 연신 마셔대는 여자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알약을 입에 넣고 계속 삼켜대는 사람도 있었다. 맑은 액체가 흘러나오는 주사기를 들고 자신의 허벅지에 찔러대는 여자도 있었다. 그녀는 짐승 같은 울부짖음을 흘리면서 점점 광기를 나타냈다.

 

  쾌락과 몸과 정신을 뒤바꾼 그들은 같은 동작을 반복하며 가사(假死) 상태로 들어갔다. 땅끝까지 추락한 그들 영혼 위로 검은 폭풍이 덮쳐왔다. 그러나 그들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바닥에 똑바로 누운 채 천장을 바라보았다. 천장에는 시한폭탄이 장착돼 있었다. 시계 바늘이 마지막 초점을 향하는 순간 꽝! 하는 폭발음과 함께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그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미 모든 언어중추 신경이 마비돼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광경을 보면서도 그곳을 향해 걸어가는 사람이 있었다. 강력한 힘에 이끌리듯 그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도 함께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나머지 사람들은 다음 선택의 문을 향해 발걸음을 내밀었다.

 

  그곳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불을 뒤집어 쓴 채 공포에 떨고 있었다. 그들은 너무도 두려워 눈도 뜨지 못했다. 온몸을 벌벌 떨며 수치심과 두려움에 떠는 그들 마음속에서 짐승의 소리가 들려왔다. 좌절과 포기, 혼란과 미혹의 소리였다. 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그들 영혼은 나락으로 곤두박질쳤다.

 

불신의 형벌에 따른 초기 증상이었다. 희망이 끊겨져 나간 그들 영혼은 두려움과 함께 지옥으로 침몰했다.

 

  십자가를 꺾으며 환호하는 무리도 있었다. 그들은 꺾은 십자가를 화로 속으로 던져 넣었다. 발로 짓밟고 그 위에서 춤을 추는 축도 있었다. 꺾이고 짓밟혀진 십자가를 들고서 뭐라고 지껄이며 공중에 날려버리는 남자도 있었다. 심지어 십자가에 박힌 가시를 가시고 상대를 찔러가며 싸우는 사람도 있었다.

 

  십자가를 향해 침을 뱉고 조롱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것을 뽑아 들고서 어린 아이를 때리는 사람도 있었다. 그것을 흉악한 짐승 우상에게 던지는 인간도 있었다. 그들은 혼미한 정신에 이끌려 점점 타오르는 불길 속으로 사라졌다.

 

  그곳에서 살아 남은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그들은 모두 이마에 표를 받고 손에 인장을 찍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선택한 결과로 각자에게 해당한 값을 받았다. 그들이 모두 사라지자 철제문이 철거덕하고 잠겼다.

 

  그리고 성곽 바깥에서는 새로운 사람들이 선택을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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