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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의 지나가버린 시간
2010-12-02 10:52:38
tanchon

조회:1731
추천:103

 

  중편소설


                                                                     여자의 지나가 버린 시간


                                                                                

                                                                                                                                                                탄천   이종학

 

 

장대 같은 비가 내리꽂히고 있다. 짙은 회색으로 낮게 가라앉은 하늘 아래 시야가 모두 부옇게 물보라에 지워져 버렸다. 관상대는 장마전선이 북상 중이라고 발표하더니 드디어 서울에까지 다다른 모양이다. 어제 오후 늦게부터 무더운 바람이 세차게 불면서 새벽부터 장대비가 지붕을 뚜드리기 시작했다.

  현숙은 창문을 열고 서서 마냥 시선을 밖에 던진 채 꼼짝도 하지 않는다. 이따금 바람에 쫓긴 빗방울이 처마 밑으로 휘몰리면서 얼굴을 적셔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녀의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울고 있었던 것이다. 빗물과 눈물이 얼굴을 타고 내려 팔짱 낀 옷소매에 떨어졌다. 이따금 현숙의 머리가 좌우로 크게 도리질할 때마다 드리워진 머리카락들과 함께 물방울이 사방으로 흩날렸다. 강한 부정의 표현이었다. 무엇인가 잊고 싶은 사연을 털어내려는 간절한 몸짓이었다.


  바로 어제 토요일 오후 청평호 유원지는 행락 인파에 시달리고 있었다. 30도를 넘어선 폭서에 쫓겨난 난민의 무리가 여기저기에 텐트를 치고 질펀히 앉아서 노세 노세를 즐겼다. 음식과 술에 탐닉되거나 화투판에 열중하는가 하면 노래와 춤바람에 휘말린 신명이 찜질하는 태양에 삿대질하듯 거역했다. “오늘이 네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 생각하고 살아라.”라고 말한 철학자가 있는데 그야말로 마지막 인생을 즐기기라도 한듯 그 열기가 처절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여름은 사람을 밖으로 내모는 계절이다.

  해마다 훈풍이 불기 시작하는 봄에서부터 여름 가을에 걸쳐 수많은 행락객은 산으로 강으로 몰려 나가 광란에 가까운 행태로 자연을 만끽한다. 그 정도가 너무 지나쳐 사회질서 유지에 문제가 있다는 여론이 빗발치자 고성방가 등 행락을 자제하도록 경찰은 단속하고 방송국은 계도하는 방송을 하고 신문 또한 대서특필하지만 창공에 흩날리는 헛소리에 불과하다. 민주 국가에서 내 돈 가지고 내 흥에 겨워 스트레스 좀 풀려고 약간의 탈선을 했기로서니 그게 무슨 대단한 잘못이라고 떠들어대느냐고 콧방귀를 뀌고 만다.

  현숙도 바로 행락에 완전히 침잠 되어 버린 청평호 유원지에 있었다. 회사에 출근하자마자 직원들은 더위에 헉헉거렸다. 에어컨으로 부족해서 선풍기까지 자지러질 듯이 돌아 댔지만 사무실 안은 찜통을 면치 못했다. 일하기보다는 땀을 닦는데 정신을 팔아야 했다. 치솟은 불쾌지수는 권태감과 짜증을 몰고 왔다. 열한 시 가까이 되자 외출했다 돌아온 사장은  맹위를 떨치는 더위로부터 탈출을 선언했다.

  “자, 여러분 주목하세요. 어차피 능률이 나지 않을 바에는 일을 걷어치우고 모두 밖으로 나가 더위를 피하기로 합시다.”

  직원들은 일손을 멈추고 의아한 얼굴을 일제히 사장에게 돌렸다. 사장은 장난수럽게 코를 찡긋하더니 말을 다시 계속했다.

  “왜들 정신 나간 사람들처럼 이러고 있는 게야. 밖으로 나가자는 말 못 들었어?”

  “사장님, 그럼 그게 정말입니까?”

  “어디, 어디로 가게요, 사장님.”

  사원들은 그제야 벌떡 일어나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시원한 곳으로 갔다가 막바로 퇴근할 테니 그런 줄 알아요.”

  “야-호!”

  “와, 신난다!”

  사원들은 일제히 뛸 듯이 환성을 질러대며 기뻐했다. 그렇지 않으면 토요일이라도 평일과 다름없이 오후 다섯 시까지 근무해야 한다. 요즘 일거리가 계속 밀리고 있어서 자칫하다가는 야근이나 일요일 근무도 해야 할 판이다. 이 광고회사 ‘미래’의 직원들은 남녀가 반반씩 여덟 명이다.

  사장은 미리 유념이라도 했음인지 행선지를 청평 유원지로 정했고, 차편도 자신의 승용차와 서 부장의 차를 이용하기로 결정해 놓고 있었다. 서 부장을 만나 그런 약속을 이미 해놓은 모양이다. 서 부장은 요즘 잘 나가는 가전제품 생산 회사의 판매부장이다. 광고 제작 업계의 다크호스로 아려진 미래(未來)의 사활을 좌우할 만큼 영향력을 갖고 있는 대고객이다. 서 부장은 비록 판매부장이지만 자기 회사의 실권자의 한 사람이다. 그래서 회사 선전 광고 업무를 자신의 뜻대로 좌지우지하고 있다.

  직원들은 사장과 서 부장이 모는 차에 분승하고 폭염에 짓눌린 서울을 벗어나 경춘 가도를 달렸다. 현숙을 비롯해서 여직원 네 명은 서 부장의 차에 탔다. 차가 출발하기가 무섭게 여직원들은 창문을 모두 열고 바깥바람을 한껏 마셔 댔다. 차에 속력이 붙자 이글거리는 태양열에 쫓겨 어딘가에 숨어 있던 시원한 바람이 차안으로 몰려들었다. 그녀들은 그 동안 시달린 더위에 복수라도 하듯 긴 머리채가 바람에 휘둘려도 상관하지 않고 연방 탄성을 질러 댔다. 신나는 콧노래도 흘러 나왔다.

  청평호 유원지는 수많은 사람으로 메워져 있었다. 이들은 어렵게 주차를 하고 차 밖으로 나왔지만, 어디 적당히 자리 잡을 곳이 있을 성싶지 않아 걱정이 되었다. 그것은 공연한 기우였다. 청평호의 한 호텔에서 마련한 장소로 이내 안내되었다. 서 부장이 서울을 떠나기 직전에 예약했던 것이다. 피서객들이 쇄도하는 와중에서도 자리를 비어 낼만큼 그 의 영향력이 여기에까지 미치고 있다는 증거였다.

  호숫가 나무가 우거진 곳에 이미 왕골자리를 깔아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득실거리는 행락 인파와는 좀 거리가 떨어져 있는 아주 아늑하고 특별한 장소였다. 직원들은 또 한 번 환성과 감탄사를 연발하며 자리에 가서 제각기 편안하게 앉았다. 기다렸다는 듯이 호텔에서 교자상에 차려진 음식이 운반되었다. 역시 예약된 것이다.

  언뜻 보기에도 고급스러웠다. 소위 수라상 오골계백숙을 비롯해서 청평 호수에서 잡았다는 생선 매운당 과 청평 인근에서 뜯은 각종 산채 나물, 더덕구이 등 여러 음식이 한결같이 입맛을 돋우었다. 인근인가에서 은밀하게 빚은 토속주 또한 입안을 현혹하면서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일행은 정신없이 먹어댔다. 한 달 가까이나 계속된 유별나게 더운 날씨로 해서 사람들이 식욕을 잃고 탈진했던 게 사실이다. 경관 좋고 시원한 호숫가에 나와 앉아서 일급요리사의 솜씨로 만들어진 음식을 대하니 식욕을 되찾을 만도 했다. 그리고 쇠 조각도 녹인다는 젊은이들이고 보면 어느 음식인들 마다하겠는가. 

  식탐 수위가 어지간히 올라가자 이번에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노래와 춤이 터져 나왔다. 호텔 측에서는 마침 마이크도 준비해 주었다. 남녀 직원은 젊음이 터져나는 2,30대들이다. 신바람이 하늘에 치솟았다. 사장과 서 부장도 40대 초반이긴 해도 직원들에게 밀리지 않았다. 아직도 저력이 대단했다. 여직원들도 만만치 않았다. 가창력도 대단하고 발랄했다. 현숙은 좀 내성적인 성격이라 조신하는 편이었지만 분위기를 훼손하지 않으려고 제 깜냥에는 애를 썼다. 술도 몇 잔 받아 마셨고 노래도 몇 곡 불렀다.

  새로운 음식과 술이 서너 차례 나왔다. 사장이, 직원들의 기분을 풀어 주는 자리이기도 했고 겸사해서 서 부장을 대접하기 위해 마련한 야유회이기도 해서 인색하지 않게 기분을 팍팍 풀었다. 이런 사장의 사업적인 의도를 충분히 간파하고 있는 직원들은 기분에 들뜬 척하면서도 언행에 조심성을 잃지 않았다. 서로가 이심전심으로 서 부장을 의식했다. 그가 회사의 절대적인 고객이면서도 평소에 그의 인간성에 호감을 가졌기에 이런 자발적인 배려가 가능했던 것이다. 오늘만 해도 자기 차를 동원했고 호텔의 특별한 서비스를 끌어내지 않았는가.

  서 부장은 교만하지 않았다. 회사 미래의 사업 수익 절반 이상을 커버해 주는 대단한 수입원이지만, 그렇다고 남들처럼 거들먹거리며 군림하려든 적이 한 번도 없다. 언행이 항상 부드럽고 정겨웠다. 서 부장은 기업 판매 전략에서 광고 효과가 차지하는 비중을 잘 인식하고 있고 한편으로는 광고 제작에 남다른 아이디어와 노력을 겸비했다. 관계 업계에서는 일명 광고장이로 불릴 정도이다.

  이런 서 부장이기에 광고회사의 능력을 제대로 평가하고 애로도 인정하는 아량을 가졌다. 광고 전문 대행업체 운영이 쉽지 않다. 크고 작은 업체가 난립함으로 벌어지는 극심한 경쟁 속에서 생존하기란 어려운 상황이다. 남다른 기능과 섭외가 공존하지 못하면 일감을 얻기가 하늘의 별따기에 비유된다.   

  긴 여름 해가 산마루를 향해 비스듬히 기울기 시작했다. 햇빛을 받은 청평 호수의 잔물결 또한 서녘을 향해 자지러질 듯이 너울거렸다. 용광로처럼 끓어 대는 행락의 열기는 시간의 흐름 따위에는 전연 관심이 없는 듯이 좀처럼 식을 줄을 몰랐다. 모터보트들은 여전히 호수를 누비며 곡예 하듯 질주하고, 노래와 춤과 환호는 조금도 수그러들 줄 몰랐다. 이대로 밤을 새울 듯이 기세가 등등했다.

  여기서도 역시 사람들은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했다. 갑자기 호수의 물결이 조금씩 거칠어지고 나뭇가지가 심하게 흔들린다 싶더니 동쪽 하늘에서 검은 매지구름을 불러냈다. 하긴 예상된 일기 변화였다. 관상대는 태풍을 동반한 장마 전선이 북상하고 있음을 예보한 바 있다. 사람들은 가끔 관상대의 일기예보가 엉터리이기를 바라기도 하고 태풍이든 장마든 닥쳐오면 대수냐, 놀 수 있을 때까지 놀아보자는 낭만파들이 많은 편이다. 

  광고회사 미래의 직원들은 신나는 여운을 아쉬워하면서 귀로에 올랐다. 서 부장이 재빠르게 서두른 덕택으로 바람이 더 거세지기 전에 청평유원지를 빠져나와 경춘 가도로 접어들었다. 이런 경우 우물거리다가는 갑자기 돌아가는 차들과 사람에 밀려 도중에서 정체되기 십상이다.

  역시 돌아가는 길도 여직원들은 서 부장의 차를 탔다. 사장이 모는 차하고는 청량리 역 광장에서 만나기로 했다. 일단 그곳에 도착해서 각기 집에 돌아가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차들은 머리를 서울로 향하고 각기 악세레이터 패달을 밟았다.

  귀경하는 경춘 가도는 차의 행렬이 이어졌다. 전세 관광버스와 승용차가 꼬리를 물었다. 사람들 사는 형편에 여유가 있음을 입증하는 광경이다. 주책없이 써대는 경향을 한탄하지만, 그래도 사람 사는 맛이 풍요롭다.

  완전히 어두워져서야 일행은 청량리역에 도착했다. 거무뎅뎅한 빛으로 무겁게 내려앉은 하늘을 이고 세찬 바람은 금방이라도 소나기를 몰고 올 듯이 몰아쳤다. 두 차에서 내린 일행은 아직도 들뜬 기분을 묻힌 채 서로 아쉬운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남자 직원들은 이차라도 갈 요량인지 귀엣말을 나누며 무춤거리는 게 보였다. 여직원들은 각기 집에 돌아가는 버스정류장이과 전철역 쪽으로 헤어져 갔다. 누군가가 다방에 들어가 차라도 마시고 가자는 제의를 했지만, 비가 쏟아질 것 같아 아쉽게 작별을 했다.  

  현숙도 사장하고 서 부장에게 머리를 숙이고 전철역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러자 서 부장이 급히 불러 세웠다.

  “미스 윤, 집이 어는 쪽이지?”

  “노량진이에요.”

  “그럼 내 차를 타라구. 나는 영등포니까 가는 길에 내리면 되겠네.”

  “부장님 감사합니다. 하지만, 괜찮아요. 전철을 타면 금센걸요 뭐.”

  현숙은 고개를 약간 숙여 사양하고 나서 몸을 돌리려 했다. 그러나 다시 서 부장의 권유가 따라왔다.

  “빈 차로 가는데 사양할 것 없어. 어서 와 타라구.”

  형숙은 머뭇거렸다. 서 부장에게 더는 폐를 기치는 게 송구스러웠다. 회사에 큰 도움을 주고 있는 분이 아닌가.

  “마침 잘됐군. 미스 윤, 부장님의 호의를 감사하게 받아야지. 데려다 주십사 부탁드려.”

  사장이 옆에서 거들었다. 그제야 현숙은 용기를 내어 서 부장의 차 쪽으로 다가섰다. 업무 관계로 회사에서 자주 만나는 편이라 친면이 두터운 사이고 또 오늘만 해도 청평호수를 다녀 올 때 차편 신세를 졌던 터라 조금도 거북하지는 않았다. 다만, 여자 혼자 타고 간다는 게 좀 계면쩍고 송구할 따름이었다.

  현숙이 조수석에 앉자 서 부장의 차는 곧 출발했다. 청량리역에서 신설동 로터리까지는 시외에 나들이하고 돌아오는 차들로 아직까지도 얼마간 체증 현상이 있었지만 그곳을 지나고부터는 차가 아주 잘 빠졌다. 서 부장은 동대문을 막 지나고서야 입을 열었다.

  “오늘 일기 관계로 늦게까지 놀다 오지 못해서 아쉬웠나?”

  “아니에요. 부장님 덕택으로 아주 마음껏 재미있게 놀았는걸요.”

  “내 덕택이긴, 사장이 나 때문에 과용했어.”

  잠자코 있자 서 부장이 옆으로 힐끔 눈길을 보내고 나서 다시 말했다.

  “오늘 미스 윤을 다시 봤어. 노래 솜씨가 보통이 아니더군.”

  “어머, 부장님도.”

  현숙은 얼굴이 뜨거웠다. 신나는 분위기에 휩쓸려서 있는 용기를 다 끌어내서 대여섯 번인가 마이크를 잡았다. 노래를 못하는 편은 아니지만, 숫기가 없어서 많은 사람 앞에서는 노래 부르기를 사양하는 편이다.

  서 부장은 허허 웃으면서 카스테레오의 버튼을 눌렀다. 차에 세차게 부딪치는 바람 소리와는 상관없이 클래식 음악이 조용히 흘렀다. 클래식은 언제 들어도 감성을 자극한다. . 차가 남대문을 지나 용산 사거리에 가까워지자 그는 다시 입을 떼었다.

  “우리 어디 가서 저녁이나 먹고 들어갈까? 몇 시간 동안 차를 몰았더니 배가 출출한데. 미스 윤도 그렇지?”

  “저는 시장한 줄 모르겠어요.”

  현숙은 저녁 식사보다는 일찍 집에 가 쉬고 싶었다. 그러나 차는 이미 삼각지를 지나  이태원 쪽으로 머리를 돌리고 있었다. 현숙은 거절할 틈도 없고 그럴 경황도 허락되지 않았다. 

  이태원 복판쯤으로 짐작되는 한 양식집 앞에서 차를 세웠다. 서 부장은 차에서 내리자 성큼 앞장서 걸었다. 현숙의 의사 따위는 아예 아랑곳없다는 몸짓이다. 하긴 현숙으로서는 서 부장의 호의를 거절할 입장이 못 된다. 같이 어울려 야유회를 즐기다 온 처지에 저녁을 사겠다는 데 굳이 마다할 이유가 없다. 고맙게 여겨야 할 처지이다.

  식당은 고급스러웠다. 종업원들은 서 부장을 익히 아는 듯 아주 정중히 맞았다. 조용한 자리로 이내 안내되었다.

  웨이터가 다가와 물수건을 갖다 놓고 갔다. 서 부장은 물수건으로 손을 닦으며 현숙을 건너다보고 말했다.

  “자, 우리 뭐로 할까? 맛있는 걸로 먹고 가자구. 이집 음식이 꽤 괜찮은 편이야.”

 현숙은 서 부장을 따라서 물수건을 펴들었지만, 할 말을 찾지 못했다. 고급 양식을 먹어 보지 못했으니 메뉴를 선택할 안목도 없으려니와 식욕도 별로였던 것이다

  잠시 후 주문 받으려고 웨이터가 다시 허리를 깊이 숙이고 나타나자 서 부장은 재차    그녀를 힐끔 건너다보고 물었다.

  “이집 음식은 내가 잘 아니까 미스 윤 구미에 맞을만한 걸로 골라볼게. 그래도 되겠지?”

  이렇게 물어놓은 서 부장은 자기 멋대로 와인과 여러 가지 음식을 주문하는 것을 보면서 현숙은 고개를 약간 주억거리며 얼굴에 웃음기를 담아 보였다. 기왕에 호의를 받아들이기로 한 바에야 즐거운 표정은 상식적인 예의가 아니겠는가. 그러면서 학교에서 양식 식탁 매너에 관해 배웠던 기억을 되살려 내려고 고개를 갸웃해 보았다.  

  오래지 않아 여러 음식이 나왔다. 모두가 처음 보는 것이다. 서 부장은 먼저 와인을 현숙의 잔에 따르고 자기 잔에도 자작을 하고 나서 말했다.

  “자, 건배하자고. 우리의 뜻있는 만남을 위하여-”

  서 부장이 잔을 높이 들자 현숙도 어쩔 수 없이 와인 잔을 들었다. 그리고 입으로 가져갔다. 마침 갈증이 나 있는 터라 그녀는 와인을 서너 번으로 나누어 다 마셨다. 향기와 감칠맛이 괜찮다고 느꼈을 뿐 도수는 없는 듯했다. 와인 두 잔을 마시고 나서 대하는 음식도 삼삼했다. 처음 먹어 보는 것이지만 이내 입맛이 당겼다. 현숙은 서 부장이 놓여 있는 음식을 일일이 설명하는 소리를 들으며 조심스럽게 음식을 먹는 동안 어느새 철부지가 되어 갔다. 도수가 있는 와인도 겁 없이 마시고, 서 부장의 농담에 허리를 꺾으며 웃기도 했다. 현숙도 고급스러움과 분위기에 약한 여자였다.

  식사를 마치고 양식집 밖으로 나왔을 때 현숙은 발아래가 불안정하다고 느꼈다. 눈앞이 갑자기 빙빙 돌면서 혼미해 보였다. 난생 처음 겪는 일이, 와인에 취한 탓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몸이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는다는 것도 어렴풋이 의식했다. 그것이 전부였다. 현숙은 부축하는 서 부장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편안함이 잦아들었다. 서 부장이 뭐라고 말하는 소리가 가물가물 들렸고 호텔로 들어가는 자신을 본능적으로 제어하려 했다. 이러는 게 아닌데!, 발길을 단호하게 돌리려고 했다. 마음뿐이었다. 어머? 어머! 연신 체내에서 반항인자가 자지러짐을 감지하면서도 속수무책이었다. 침대가 출렁했고 동시에 약간 현기증이 이는가 싶었는데 곧 편안해지고 말았다. 현숙은 술과 잠에 흠뻑 취해서 인사불성이 된 여자였다.

  숲속의 잠자는 미녀를 내려다보는 서 부장의 입가에 음흉한 웃음이 번졌다. 옷을 입었을 때와는 판이하게 현숙의 몸매는 외설적인 서 부장의 시선을 만족시킬 만큼 농밀하게  아름다웠다. 육감적인 젖무덤과 풍만한 하반신은 사내의 욕성을 불태우기에 손색이 없었다. 배덕(背德)과 욕망은 어떤 인간의 마음속에도 있는 원시적인 충동의 하나라고 했는데 서 부장이 바로 이런 가면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그동안 평소에 그가 보여 왔던 지성적이고 중후해 보이기까지 했던 내면에 이렇듯 가증한 야수 같은 탐심이 숨었을 줄은 몰랐다. 오직 먹이를 앞에 둔 굶주린 야수에 불과했다. 그는 아주 여유만만하게 미답의 여체를 마음껏 농락했다. 서 부장은 가정이 있는 몸이다. 자신으로 인해 겁탈당해 더럽혀진 가엾은 여인의 앞날은 전연 안중에 없었다. 한 인간 속에는 백 명의 각기 다른 인간이 내재되어 있다고, 이태리의 어느 극작가가 말한 적이 있다.

  아련히 술 취한 의식 속에서 가슴 답답한 중압감과 아랫배에 아련한 통증을 느꼈고, 귀 가까이에서 멀어졌다가 가까워지고 가까워졌다가는 다시 멀어지는 헐떡이는 가쁜 숨결의 진동만이 희미하게 귓가를 맴돌았을 뿐인 현숙, 스물세 살의 존재가 어이없게 무너지는 순간임을 깨닫지 못했으니 얼마나 안타까운 노릇인가.

  얼마나 자났을까. 현숙은 두통과 갈증을 느끼면서 눈을 떴다. 아주 낯선 환경이다. 거기다가 알몸이 되어 있는 자신과 서 부장을 동시에 발견하자 적을 만난 고슴도치처럼 온몸을 잔뜩 도사리고 두려움이 다달다달 돋아났으나, 현숙은 나락에 떨어진 자신을 절망과 함께 깨달아야 했다. 사람은 극도의 상황에 처하게 되면 입을 열지 못한다. 

  “이건 우리의 우연한 사고였어. 그러니까 마음 쓰지 말라구.”

  옆에서 서 부장이 어린애 달래듯 말했을 때 비로소 현숙은 눈물을 하염없이 흘렀다. 엎질러진 물 위에 흥건하게 젖어 누워 있는 자신의 엄청난 실수가 너무나 참담했다. 적당한 기회가 오면 삽시간에 야수로 변하는 게 남자라는 말을 수없이 들었으면서도 밤늦게 남자와 술잔을 같이 기울이다니 이런 자살 행위가 어디에 또 있단 말인가. 겁탈자를 바로 눈앞에 두고서도 눈 한 번 흘겨보지 못했다.  

  현숙은 어떻게 집에 돌아왔는지 모른다. 만류하는 서 부장의 손을 뿌리치고 쫓기는 사람처럼 겨우 몸을 수습하고 호텔을 뛰쳐나와 몽유병자처럼 달렸던 기억만이 있었다. 집 앞에 당도해서야 겨우 제 정신으로 돌아왔다. 온몸이 경직된 채 얼굴만이 화끈거렸다. 시궁창에 빠진 몰골로 가족들을 대할 용기나 나지 않았다. 낌새를 알아차릴 것 같은  시선이 두려워 전신을 살피고 또 살피고 나서야 어렵사리 대문을 열었다.

  “다녀왔습니다.”

  직장에서 갑자기 청편호로 야유회를 가게 되었다는 전화연락을 했었지만 너무 늦은 시각이라 식구들은 현숙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머니가 먼저 대청으로 나오며 물었다.

  “늦었구나. 그래 야유회는 재미있었니?”

  “예, 잘 놀고 왔어요.”

  “저녁은 어떻게 했니? 먹어야지?”

  “아니, 저녁까지 다 먹고 왔어요. 엄마, 나 피곤해서 먼저 들어갈게요.”

  “오냐, 어서 시원하게 몸 씻고 쉬거라.”

  현숙은 고개도 제대로 들지 못하고 서둘러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불안해서 빨리 몸을 숨기고만 싶었다.

  현숙은 이태리타월로 미친 듯이 온몸을 문질러 닦았다. 악마의 더러운 냄새가 묻어 있는 것만 같아 견딜 수가 없었다. 닦고 또 닦아도 성에 차지 않았다. 그렇게 겨우 몸을 씻고 나서 이부자리에 들었지만 잠을 이루지 못했다. 서 부장의 몸이 자신의 몸을 마음대로 덮치고 희롱했다고 생각하니 진저리가 쳐지고 온몸이 석고상처럼 굳어지는 느낌이었다. 이 더럽혀진 몸으로 어찌 산단 말인가! 현숙은 후회와 불안과 분노로 몸부림치며 울고 또 울었다. 그러다가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당장 그자를 강간으로 경찰에 고발해서 응분의 처벌을 받게 해야 한다고 어금니를 악물었다. 여자를 아무렇게나 여기는 뻔뻔한 사내는 사회에서 매장시켜야 한다. 그러나 생각뿐이었다. 그랬을 때 자신이나 자신의 가정에 오는 오욕과 창피를 어찌 감당한단 말인가. 한편 생각하면 밤늦게 어떤 이유이든 남자를 따라다녔다는 사실 앞에 머리만 쥐어뜯고 말았다.               

 

  나뭇가지를 휘감고 요동을 치던 바람이 달려들며 창가에 있는 현숙의 얼굴에 비를 뿌리고 달아났다. 잇달아 이번에는 번쩍 섬광이 일면서 우르르 꽝! 천둥이 창유리를 흔들었다. 순간 현숙은 지구의 종말이 걸레처럼 너절해진 자신을 싸안아 가기를 기원했다. 피를 토하는 이런 심정을 알기라도 한다는 듯이 비는 천지개벽이라도 할 기세로 사정없이 퍼부어 댔다.

  원망과 자책과 번뇌로 얼룩진 일요일을 보낸 현숙은 월요일 아침 평상시와 다름없이 회사에 출근했다. 밤새도록 고민한 끝에 내린 어려운 결정이다. 무엇보다도 필사적으로 서 부장과의 악몽을 숨겨야 했다. 사장과 몇몇 직원은 청평호 유원지에서 돌아온 날 밤 현숙이 서 부장의 차를 타고 집에 돌아갔음을 알고 있는 터였다. 만일 특별한 이유 없이 결근하면, 의혹의 눈길이 쏠리기 십상이다. 무덤까지 가지고 가야할 비밀이 아닌가. 그리고 하루속히 그 치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일에 몰두하고 싶었다. 그와의 치욕적인 일은 그의 말따나 정말. 정말 우연한 사고였음을, 일상과 다름없이 직장에 나와 앉아 있음으로 해서 자신에게도 결사적으로 일깨우고 또 일깨워야 했다. 

  한편 서 부장은 술에 취해서 기대 오는 현숙의 발랄한 몸을 안는 순간 화산처럼 분출하는 욕정의 화신이 되어버렸던 지난밤에 대한 자책으로 번민했다. 현숙은 문자 그대로 순결한 처녀였다. 그래서 양심이 더욱 편치 못했다. 그러면서도 어느새 현숙의 향긋한 살냅새가 강렬한 힘으로 아랫도리를 경직시켰다. 그 나긋하고 싱싱한 여체의 유혹이 전신을 휘감고 돌았다. 마침, 아내가 부산 친가에 내려가 있어서 호젓하고 외로운 심정이 풀무질하는 역할을 더 했는지도 모른다. 하룻밤의 우연한 사고였다고 거듭 다짐하면서도 자신도 감당하기 어려운 미혹의 흡인력을 갖는 사고였다.

  일주일쯤 있다가 서 부장의 당돌한 욕정은 현숙을 향해 다시 발동하기 시작했다. 서 부장은 퇴근하고 막 집에 돌아가려고 버스 정류장에 서 있는 현숙에게 나타났다. 이런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어머?”

  깜짝 놀라 어쩔 줄을 모르는 현숙에게 서 부장은 싱긋이 웃으며 다가왔다. 그리고 아주 태연하게 말했다.

  “미스 윤, 퇴근하는 길이군. 나하고 잠깐 얘기 좀 할까? 자 저쪽으로 가지.”

  현숙은 몸을 움츠리며 강하게 거절했지만, 부질없는 짓이었다. 서 부장은 주위를 한 번 휘 둘러보고 나서 아주 능청스럽게 현숙의 손을 잡으며 은밀히 그러나 다부지게 재촉했다.

  “왜 이래? 사람들이 보고 있잖아. 우리 서로 망신당해도 되겠어?”

  이 한마디에 현숙은 다리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누군가 눈치라도 챘을 때 밀려올 수치를 감당해야 할 공포로 인해서 끝내 냉혹한 거부 능력을 잃고 말았다. 어떤 이유에서 거나 순정의 아성이 무너지고 난 여자는 자기 방어의 능력이 약해지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현숙은 그 길로 어처구니없게 다시 서 부장의 색정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색마의 철면피한 난무는 이것이 시작에 불과했다. 현숙의 심약한 약점을 간파한 서 부장은 툭하면 현숙을 불러내어 몸을 탐했다. 이것은 전율과 실의에 바짝 위축된 현숙에 대한 명령이고 강제였다. 서 부장은 욕정을 채운 다음에는 입버릇처럼 이렇게 장담하는 것이었다.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우리가 이렇게 만나 것은 절대 우연이 아니야. 나도 처음에는 우연한 사고라고 여겼는데 그게 아니더라고. 운명 같은 느낌이 드는 게야. 그래서 미스 윤에 대해서는 끝까지 책임을 지기로 했어. 마음을 편히 가지라고. 알겠어? 그리고 말야. 이번에 우리 회사에서 신상품이 쏟아져 나온다는 소식 들었지. 그 신상품에 대한 광고를 미스 윤이 나가는 미래에 모두 맡길 생각이야. 이게 다 미스 윤 때문이라구.”

  현숙은 어의가 없었다. 처자식이 버젓이 있는 유부남이 어떻게 책임을 진다는 말인가. 결국 꽃노리개 노릇이나 하고 살라는 더러운 수작이 운명이라고. 어디다 운명이란 말을 함부로 붙이는가. 그리고 광고 수주를 구실 삼아 치사하게 몸값을 흥정하려는 작태이다. 설령 현숙이 운영하는 광고회사라고 해도 일감을 놓고 어쩌고 하는 대가성 행위는 치졸하고 비도덕적인 짓거리이거늘 하물며 회사의 한 여직원에게 그따위 감언이설이 당키나 한 소린가. 아무 여자나 돈에 혹한다고 여기는 남자들의 유치한 여성관이 그 사람이라고 예외일 수가 없었다.  

  문제는 현숙에게도 있었다. 입 발린 치사한 소리임을 알면서도 어설프게 만들어진 장난감처럼 서 부장에게 쉽게 망가지고 있다. 색마의 손아귀에서 움쭉달싹 못 하고 그 엄청난 윤간에 현숙이 순응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사실이다. 육체를 점유하고 난 후에는 정복자라도 된 양 멋대로 군림하려드는 속물적인 사내들의 정욕에 희생된 현숙은 소나기 맞은 암탉처럼 후줄근한 꼴이 되어 갔다. 여자의 운명이라고 받아드리기에는 너무나 가혹하고 처량했다.

  날이 가면서 현숙은 그나마 후회하고 절망할 기력조차 잃어 갔다. 장밋빛 미래를 포기한 허탈감 속에서 서 부장이 하자는 대로, 시키는 대로 서리 맞은 갈대처럼 흔들렸다. 서부장의 뒤를 따라 다방이나 식당에 마주 앉았고, 호텔에 들어가 몽유병자처럼 멍청한 얼굴을 하고 옷을 벗었다. 몸서리 처지게 불쾌하고 괴로운 처지에서 하루속히 도망쳐야 한다는 다짐을 수없이 되풀이하면서도 그녀는 번번이 결단의 바로 앞에서 주저앉곤 했다.

  

  현숙의 아버지는 중앙관서의 성실한 3급 공무원이다. 그러나 3남 1녀를 둔 그는 지나치게 청렴했다. 월급 이외는 단돈 십 원도 집에 가져온 적이 없다. 그래서 살림이 어려웠다. 아이들이 자라서 진학하게 되면서 학비 조달이 막연했다. 자연히 살림에 쪼들리는 어머니의 한숨이 자주 터져 나오고, 왜 남들처럼 적당히 세속에 물들어 살지 못하느냐는 원망을 들어야 했다.

  이런 가정에서 고교를 졸업한 현숙은 가계를 돕기 위해 자진해서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지금 근무하는 광고 전문회사 미래에 들어갔다. 제대로 배우지 않아 전문적인 기능은 없지만, 본시 그림에 남다른 재질이 있음을 알고 있는 사장이 먼 친척이어서 입사가 가능했다. 그리고 의외로 대학에서 전공한 사원들 못지않게 광고 디자인의 재능을 인정받고 있다.

  이 같은 현숙의 가정 형편이 서 부장으로부터의 결연한 탈출에 제동을 건 한 요인이 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서 부장은 현숙의 옷을 벗길 때마다 회사의 광고 제작 운운하면서 선심을 내세웠다. 비위가 상하면 거래를 끊겠다는 언외의 공갈을 내비친 것이다. 서 부장의  비열한 앙심으로 회사가 창졸간에 넘어지는 불행을 참아 어찌 보겠는가. 현숙으로서는 지금의 광고회사가 최상이었다. 특별한 자격 요건이 갖추어지지 않은 현숙은 다른 곳에서 지금과 같은 인정을 받기가 쉽지 않다는 현실을 잘 알고 있다.      

  현숙은 한 달에 두 번 정도 서 부장에게 끌려 성희의 제물이 된 지 그럭저럭 반년이 흘렀다. 그러던 어느 날, 현숙은 몸에 이상이 생겼음을 알았다. 한 번인가 피임에 방심했던 결과였다. 현숙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후회하고 오욕에 몸을 떨었다. 여인으로서 돌이킬 수 없이 망가져 버린 자신이 한없이 미웠다. 자신의 몸을 학대했다. 그리고 당장 산부인과 병원에 달려가려고 했다.  

  그렇게 며칠을 지내던 현숙은 갑자기 다부진 결심을 하고 다시 이를 바드득 소리가 나게 갈아 물었다. 서 부장에게 임신 사실을 알리기로 했다. 책임을 묻고 당황하는 꼴을 보고 싶었다. 절대적인 원인 제공자가 아닌가. 현숙은 그를 만나자 마자 선언하듯 말했다.

  “나, 몸에 이상이 왔어요.”

  “이상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설마?”

  ”그래요. 홀몸이 아니에요. 삼 개월이래요.“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고 있는 거야? 자신의 몸 관리 하나 못할 정도로 현숙인 바보였어?”

  예상한 대로 펄쩍 뛰는 서 부장을 보자 전에 없이 복수심 같은 앙심에 휘감기는 자신에 놀라는 현숙이었다. 여자로서 임신이라는 새로운 과정은 또한 정신적인 큰 변화의 계기가 되기도 한다. 현숙의 입에서 정말 당돌한 말이 튀어나왔다.

  “나 아이를 낳겠어요. 물론 책임지시는 거죠?”

  “미쳤어? 지금 제 정신으로 하는 말이야?”

  백짓장처럼 변하는 서 부장의 얼굴을 보면서 그녀는 배신감에 다시 한 번 떨었다. 분기가 온몸에 팽팽히 번졌다.

  “나에 대해서 모든 책임을 지겠다고 몇 번이나 말했는지 기억하세요? 그게 다 새빨간 거짓이었군요.  좋아요. 그럼 낳아서 내가 혼자 기르지요.”

  현숙은 이렇게 내뱉듯이 말하고는 벌떡 일어났다. 그러자 예상한 대로 서 부장이라는 작자, 황급히 현숙을 붙잡으면서 무릎이라고 꿇 것 같이 애원조로 돌변했다.

  “이봐 현숙이, 앉아서 차근차근 얘길 하자구. 내 입장을 현숙이가 너무나 잘 알고 있잖아. 그런데......”

  “그런데, 처음부터 왜 나를 이렇게 만들었어요. 아무튼 나는 아이를 낳을 거예요. 그런 줄 아세요.”

  현숙은 당당한 기세로 자리를 피했다. 마음이 여려터진 자신에게도 이런 당돌한 반항심이 있었나, 내심 놀랐다. 그러나 한편으로 서글픈 심정을 감추지 못했다. 눈물이 자꾸만 흘렀다. 자신의 추락을 어디까지 보아야 끝이 날 것인지 슬프고 두려웠다.

  서 부장은 안달이 났다. 매일 만나자고 전화질을 했고 산부인과에 가도록 사정사정하고 성화를 댔다. 엄연히 처자식이 있는 그로서는 용납할 수 없었다. 사회적인 체통에도 결정적인 흠집이 되고 만다. 성인 남녀가 한 방에 있으면, 그 결과는 빤한 노릇이다. 그럼에도 당장의 말초적 향락에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은 게 현실이다. 산부인과별원이 많은 까닭이기도 하다. 

  현숙은 여러 날 그의 애간장을 태우다가 종내는 서 부장의 요구를 선심 쓰듯 들어 주기로 했다. 하긴 처음부터 작심했던 바다. 서 부장의 입장보다도 오히려 임신 사실은 그대로 현숙에게는 죽음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불륜의 씨앗, 원치 않는 샹묭은 임신부의 본능적인 모성애나 존재이유를 의식케 하기 어렵다. 현대여성의 의식구조는 많은 변화를 가조오고 있는 게 현실이다. 

  억지로 끌려가듯 서 부장을 따라 산부인과병원을 찾았다. 태초부터 사람에게 성적 희락을 즐길 생태를 허락했으니 당연한 결과인 임신과 낙태 또한 자연스러운 수순이어야 한다. 종교적, 윤리적 제약 따위는 한낱 구두선에 불과하다는 말이 설득력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노릇인가. 현숙은 원치 않은 임신을 했고 탁태수술을 하고 나서부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은연중 서 부장과의 불결하고 부도덕한 접촉에 차츰 길들여짐을 깨닫고 또 한 번 소스라치게 놀랐다. 동화되어 가는 게 아니라 같은 일이 여러 번 반복되면서 동물적인 습성이 생겼고 천만 뜻밖에 원초적 육신의 쾌락에 탐닉되어 점점 이성(理性)을 잃어 가고 있었다. 서 부장의 뒤룩거리는 몸에서 사내의 체취를 깨달았고, 애정과는 상관없는 성적 충동임에도 가끔 몸을 흔드는 희열로 화답하기까지 했다. 현숙은 참담한 이율배반에 자맥질하는 자신을 보면서 죽음을 구체적으로 생각한 적도 여러 번 있었다.

  여자는 평생에 크게 세 번 바뀐다고 한다. 결혼했을 때 즉 남자를 알았을 때, 그리고 임신했을 때와 아이를 출산했을 때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한다는 것이다. 현숙도 원한 일은 아니었지만, 서 부장이라는 남자를 받아드렸고 또한 서 부장의 아이를 잉태함으로 인해서 여자로서 두 번의 본능적인 변화를 겪은 셈이다.    

   

  불가항력적인 처지에서 심신에 여러 번 변화가 있었다 해도 현숙은 손상당한 연인으로 자조하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음이 사실이었다. 다시 새봄이 돌아왔다. 만발한 꽃들이 화사한 자태를 뽐내며 하늘거렸다. 거리의 여인들에게서 활기가 충천했다. 봄은 여인들을 통해 온다지 않는가.

  어느 날 현숙은 초등학교 동기 동창들의 모임에 나갔다. 나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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