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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이라는 이름
2010-08-23 13:31:21
sws60

조회:1671
추천:92

(단편) 추억이라는 이름
신외숙

옛길이 보였다.

편의점 뒤로 난 골목길에 분식점과 미용실, 오밀조밀한 주택가가 미로처럼 형성돼 있었다. 그 좁다란 골목길을 마을버스가 곡예를 하듯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다녔다. 고시촌과 세탁소, 문구점 앞으로 오토바이가 찢어지는 파열음을 내고 지나갔다. 그 앞 사거리는 예나 지금이나 젊은이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당연했다. 종합대학이 그 동리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니까. 전에는 한강변이 보이는 도로에만 버스가 다녔는데 지금은 대학입구까지 다닌다. 거리도 옛날보다 많이 화려해졌다. 전에는 포장마차와 리어카 행상이 많았는데 지금은 샹들리에 불빛이 환한 고급 음식점과 수제품 옷가게도 보인다.

뿐만 아니라 중고등학교가 있던 자리에 대학병원이 웅장한 빌딩으로 들어섰다. 병원은 유리로 만든 공예품 같다는 느낌이 든다. 마치 위락시설처럼 꾸며져 고급스럽기 짝이 없다. 맹추위가 몰아닥친 거리에 겨울 불빛이 흐른다. 불빛은 사람들의 마음을 타고 시간을 거꾸로 회전시키고 있다.

예술대학으로 유명한 J대학은 경기도에 있는 모 소도시에 예술대학의 본거지를 옮겨놓았다. 나와 남동생은 그 종합대학을 나와 그곳에서 오 리쯤 떨어진 곳에 둥지를 틀었다. 나는 모교의 부설 중학교 교사로 4년간 근무했고 남동생은 ROTC장교로 군대를 다녀온 뒤 국내 굴지 재벌그룹에 몸담았다.

한강은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여의도로 흘러가고, 죽음의 최고 명예 장소로 꼽히던 국립현충원은 이십 년 전부터 대전으로 자리바꿈을 하고 있다. 해마다 현충일이면 검은 휘장과 애국을 알리는 글귀가 현충원 담벼락을 메우고 강남으로 가는 요충지 역할을 하면서 항상 러시아워를 방불케 한다.

그 길을 지나 강남에 있는 직장에서 십 년을 근무했다. 학원강사로 일하면서 나는 철저한 생활인으로 살았다. 살면서 한반도 미래니 소망이니 하는 단어를 생각해 본 일이 없다. 무언가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마음의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월은 냉정하고 나이는 성과라는 단어를 요구했다.

흑석동 거리에 개나리와 진달래, 단풍과 은행잎이 수없이 피고 질 때마다 감성은 시들어 무감각으로 변해갔다. 어느날 나이 사십이 넘어 명동 길을 걷는데 문득 떠오르는 단어가 있었다.

추억이었다.
한때 유명했던 '추억이라는 이름의 전차'라는 연극제목이 생각난다. 동숭동 거리를 장악하다시피 했던 꽤 유명했던 연극이었다. 나는 그때 연극광이었음에도 그 연극을 보지 못했다. 생각해 보면 그 많은 세월동안 무엇을 하고 살았는지 모르겠다. 열심히 일했는데 통장은 텅텅 비었고 정신은 빈곤하기 짝이 없다.

빈곤한 정신은 한때 우울증을 촉발시켰다. 원래 내 정신은 지고는 못사는 경쟁의식이 팽배했다. 매사에 승리냐 패배냐에 집착했고 다툼이 일 때마다 흑백논리에 사로잡혀 죽기살기로 싸웠다. 처음에는 그것이 정의감의 발로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나는 점점 삶의 의욕을 잃어갔다.

자신감이 없어지고 대신 울분이 가슴 한복판을 차지하기 시작했다. 이상하게 사람들과의 다툼이 많아졌다. 아무것도 아닌 걸 가지고도 죽기살기로 싸웠고 한번 틀어지면 다시는 상종하지 않았다. 싸움판에 나선 전투사처럼 거의 매일 싸웠다. 집에서도 직장에서도 마치 싸우기 위해 인생을 살아가는 것 같았다.

어느날인가부터 나는 결단을 미루기 시작했다. 그러다 서서히 기력이 소진되기 시작했다. 경쟁의식에 시달리느라 마음의 피멍이 든 때문이다. 더 이상 경쟁을 치러낼 자신도 없었고 만사가 귀찮았다. 현실도피를 택한 내가 내린 처방은 여행이었다. 여행지로 남해안 일대와 동해 끝자락을 주로 다녔다. 다혈질 성격 탓에 자가용 운전을 포기했다,

대중 교통을 이용하는데 돈이 배 이상 더 들어갔다. 까짓 한번뿐인 인생, 죽으면 쓰지도 못할 것 다 쓰고 죽어버리자. 숙소는 호텔을 이용했고 식사는 유명한 업소만 찾아 다녔다. 머릿속이 텅 비는 것 같았다. 방종의 세월 동안 나는 감정이 점점  타락해 갔다.

신(神)의 방관 속에 나는 무기력의 종이 되어 갔다. 낯선 도시 낯선 고장을 떠돌면서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면 사람 꼴이 우스웠다. 수중에 돈이 떨어지면서 지식적인 수준도 현저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젠 누가 학원 강사로 와 달라고 해도 못 갈 판이었다. 그 와중에 나는 끊임없이 자아정체성에 시달렸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태어나 무엇을 위해 살아가며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이 방종의 끝은 무엇일까.

내 인생의 역마차는 어디에 종지부를 찍을 것인가. 낯선 길, 그것도 길고도 어두운 길을 가면서 나는 침잠의 늪에 빠져들었다. 방랑은 쉼이 없었다. 평강이나 희열은 더더욱 없었다. 나는 멈추고 싶었다. 그래서 상실된 자신감을 되찾고 진정한 사회인이 되고 싶었다. 아니 나는 더 이상 보헤미안을 포기하고 싶었다.

무언가에 단단히 얽매이고 싶은 욕구에 긴장이 높아졌다. 문득 고향이 그리웠다. 서울 토박이인 나는 초중고 대학을 모조리 한 동리에서 나왔다. 살면서 한강 다리를 건너본 적이 소싯적에 몇 번이나 있었던가. 방랑을 시작하기 전까지 나는 한강

아래쪽에서만 산 것이다. 조급증이 인 나는 당장 서울로 돌아왔다. 방랑의 후유증도 접지 못한 채. 돌아오고 나서도 엄청난 후회와 자책감에 시달렸다. 잃어버린 세월을 두고서 나이에 대한 공박이 이루어졌다. 20대인 줄 알았는데 어느새 나이가 40을 넘어서고 있었다. 동생은 흑석동에 살다 아이 교육을 핑계로 강남의 역삼동으로 이사 가버리고 없었다.

나는 흑석동에 동그마니 혼자 남겨졌다. 세든 사람을 내보내고 집수리를 시작했다. 인테리어 업자를 불렀는데 묘한 미소를 짓더니 엄청난 가격을 요구했다. 그는 입을 쩍쩍 벌리며 놀라는 내게 말했다.

"달나라에서 살다 오셨나 뭘 그리 놀라는 거요?"

"뭐요?"

동생을 불러 의논하자고 했더니 바쁘다며 신경질을 냈다. 올케는 조카 학교에 일일교사로 초빙 받았다며 급히 전화를 끊었다. 나는 집수리를 포기하고 그냥 눌러 앉아 살기로 했다. 그리고 날마다 동네를 돌아다니며 지나간 세월의 흔적을 찾았다. 초등학교는 어디로 이사 갔는지 아예 보이지 않았다. 내가 초등학교 다닐 30년 전만 해도 사립학교가 많지 않았었다.

일반 초등학교는 모두 공립인데 내가 다니는 학교는 사립학교로 감색 교복을 착용했었다. 감색 교복에 베레모 모자에다 까만 구두. 학교 마크가 찍힌 가방에다 스쿨버스를 타고 다녔다. 나는 집이 가까워 그냥 걸어 다녔지만 상도동이나 방배동에 사는 아이들은 스쿨버스를 타고 다녔다.

공립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은 이런 우리들을 부러워 어쩔 줄을 몰라했다. 후줄근한 옷차림에 못 먹어 빼빼 마른 아이들은 얼굴에 버짐이 가득했다. 손목이 때에 절어 흐르는 코를 연신 닦아내는 아이들도 많았다. 그들은 우리가 스쿨버스를 타고 소풍을 가면 부러운 눈빛으로 쳐다보며 웃었다. 그렇지 않아도 눈이 높은 나는 그들을 은근히 무시하고 하대했다.

가진 자로서의 특권의식을 발휘하고 싶어 안달을 했다. 골목에서 놀 때도 공립학교에 다니는 아이들과는 상대하지 않았다. 엄마에게 매일 새옷을 사내라고 떼를 썼다. 유행하는 옷을 입지 않으면 몸살이 날 정도였다. 피아노는 물론 무용과 태권도 심지어 특수과외까지 받으러 다녔다. 절대 지고는 못사는 성격이었으니까.

엄마는 이런 나를 기특하게 생각해 내가 원하는 거면 무조건 다 해주었다.

"어쩌면 저렇게 나 어렸을 때와 똑같은지."

"엄마 나 이담에 커서 여자 대통령 될 거야."

"그래? 우리 딸 아무렴 그래야지 그래야 말고."

욕심이 커 열심히 공부했지만 고등학교에 들어가자 성적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날고 뛰는 아이들이 막판에 두각을 나타냈기 때문이었다. 엄마는 입만 열면 일류대학, 그것도 꼭 이화여대를 노랠 불렀었다. 그러나 이대는커녕 웬만한 대학은 명함도 못 낼 지경이 되었다.
욕심이 많아 지고는 못 사는 나는 점점 지쳐갔다.

"얘야, 난 우리 딸이 서울에 있는 어떤 대학이라도 좋으니 가서 열심히 공부하고 사회에 이바지하는 인물이 되었으면 좋겠다."

아버지는 겉으론 그렇게 말했지만 그 속내를 모를 내가 아니었다. 소위 일류대에 보내 동네 방네 일가친척들에게 자랑하고 싶으면서. 결국 나는 동네에 있는 대학에 합격했다. 많은 예술가들을 배출했다는 엎드리면 코 닿는 거리였다. 동생 역시 가족들의 열렬한 성원에도 불구하고 나와 같은 대학에 입학했다. 정경대학 경제학부에 입학하면서 여학생들과 수많은 염문을 뿌렸다.

동생은 요샛말로 얼짱 몸짱이었다. 동네에서는 물론 어쩌다 캠퍼스에서 한번 만난여학생들까지 집으로 들이닥쳐 우리집은 언제나 문전성시였다. 군대 가는 날은 동네에서 난리가 났다. 온통 여학생들이 몰려나와 눈물바람을 뿌려대는 통에 구경거리가 따로 없었다.

"차라리 아드님을 영화배우로 내보내슈."

동네 어른들은 엄마 아버지의 귀에 대고 말했다. 그때 우리가 사는 골목길 끝에 루핑으로 지붕을 얹은 하꼬방에 사는 부부가 있었다. 부부는 한눈에 보아도 모자란 티가 났다. 사람들은 그들을 반편이라 불렀다. 헤벌래 하며 웃는 폼이 모자라도 한참 모자란 천치 수준이었다. 체구는 조그마한데 그런 힘이 나는지 아무리 힘든 일도 척척 해냈다.

그들 부부에게 외딸이 있었다. 한쪽 눈이 짜브러지고 돼지처럼 입 부분이 툭 튀어나와 아이들은 그애만 보면 돼지 입이라 놀렸었다. 그애도 부모를 닮아 반편이었다. 반편이란 사전적인 의미로 지능이 매우 낮은 수준이다. 그래서 그들은 겨우 까막눈 신세를 면했고 동네에 재개발 바람이 불자 제일 먼저 퇴출당했다.

그들이 동네에서 쫓겨나던 날, 나는 동네 어귀에 서서 똑똑히 보았다. 낮은 자의 설움을. 못 배우고 못살던 그들은 결국 그렇게 쫓겨 나 봉천동의 산동네로 이사가버렸다. 그들의 외딸 봉자는 아무것도 모른 채 입을 헤 벌리며 웃었다. 찢어진 치맛단을 붙잡고 깡충깡충 뜀을 뛰면서. 봉자는 동네 사내아이들한테도 좋은 장난감이었다. 남자아이들은 봉자의 치마를 들추고 주먹으로 그녀의 머리통을 쥐어박고 발로 걷어찼다.


누가 말했던가.
동심천국이라고, 계산되지 않은 순수한 동심은 배려 자체가 없기에 오히려 악이 더 자주 분출된다. 왕따와 집단 폭행이 가장 심한 곳이 초등학교라는 분석도 있다. 때론 여자 아이들까지 가세해 봉자는 동네북이 되어 얻어맞았다. 그중에는 어리석은 나도 끼어 있었다. 봉자 부모는 딸을 껴안고 하염없이 울었다. 그러나 우리에게 다가와 싫은 소리를 하거나 눈 한번 흘기지 않았다.

봉자.
나는 그 이름을 방랑의 세월동안 한번도 잊지 않았다. 이상하게 봉자라는 이름이 생각 끝에 꼭 머물러 있었다. 슬픔과 후회라는 양심의 가책과 함께. 그녀는 지금쯤 어디서 살고 있을까. 사람 구실 할 수 있을까 라며 그녀를 향한 어른들의 걱정도 떠오른다. 험한 세상, 그녀는 어떻게 의식주를 해결하며 살아갈까. 별별 걱정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너무 순해 항거조차 할 줄 모르는 그녀의 여린 심성을 두고서,  

난 지금 마을버스가 지나는 골목길에 서 있다. 매운 겨울바람이 날카로운 유리조각처럼 살갗을 스치고 지나간다. 대학병원 전광판에선 모두를 환자로 만들기 위해 애를 쓰는 것처럼 보인다. 시간이 열시가 지났음에도 사람들은 내부로 들어가고 있다. 아직도 스팀이 나오는지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들 모습이 유리문 밖으로 보인다, 그러고 보면 저 병원은 행인들을 위한 쉼터 역할을 하는지도 모른다.

병원 밖 거리는 수많은 꼬마전구로 장식된 전자랜드 같다. 포장마차와 옷가게 노래방 음식점들 사이마다 세월이 흐르고 있다. 차도와 인도는 한뼘 차이도 안 난다. 택시와 버스가 무단으로 흐르면서 동리를 한 평면처럼 압축시키고 있다. 입체감 없이 거리는 손바닥만큼 좁아 보인다. 한강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목을 휘감고 있다.

행인들마다 옷깃을 여미며 추워를 연발한다.

"전 춥고 배고픈 화가입니다."

언젠가 행사에서 만났던 화가가 자기 소개를 하면서 한 말이다. 추상화를 주로 그린다는 그는 말끝에 명언을 했다.

"추상에는 리얼리티가 없다."

대학 시절 소설 평론을 하면서 리얼리티에 대해 격론을 벌인 적이 있었다. 새빨간 거짓말의 대명사인 소설에 리얼리티가 살지 않으면 그건 그야말로 허구일 뿐이다. 역사소설을 놓고도 의견이 분분했었다. 어디까지 사실로 볼 것인가. 작가의 관념으로 역사를 마구 파헤치고 왜곡시켜도 무방한 것인가. 한때 작가가 되겠다고 나서는 나를 두고 주변사람들은 말했었다.

왜 굳이 춥고 배고픈 예술가의 길을 가려고 하느냐.
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포기했었다. 허영기로 똘똘 뭉친 내 정신은 춥고 배고픈 것과는 영 무관했기 때문이다. 방랑의 세월을 접고 나서 후유증을 가라앉히기 위해 한동안 글을 쓴 적이 있었다.

꽤 철학적인 논조로 썼는데 나중에 탈고하고 보니 순 핑계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핑계는 자기 위안도 되지 않는다. 또다른 혐오감을 뒤집어 쓸 뿐이다. 책임감이라는 올가미를 씌워야 한다. 거기에는 능력이란 단어가 추가된다. 물론 성공이란 단어도 뒤따른다.

어릴 적 초등학교 다닐 무렵이었다. 나는 성공이란 단어를 놓고 무진장 고민에 빠졌었다. 그때 나는 벌써 알고 있었다. 인생은 성공을 위해 태어났고 성공을 위해 살아간다. 그래서 어떡케 해야만 성공할 수 있을지 매일 머리를 싸매고 고민했다.

"아빠, 난 이담에 커서 무엇으로 성공하지."

"일단 공부를 열심히 한 다음 니 소질에 맞는 걸로 결정하자."

학교에서 빈 노트에다 바둑판 그림을 그려놓고 오목 게임을 한 적이 있었다. 옆에 앉은 남자 짝과 했는데 번번이 지는 것이었다. 한번쯤 져주어도 되련만 친구는 눈치도 없이 매번 이겼다. 화가 난 나는 남자 친구의 머리칼을 움켜잡고 때렸다. 화가난 친구는 주먹으로 나를 때렸고 싸움은 엄마 아빠들의 싸움으로 이어졌다.

"난 지고는 못 살아."

내 말에 엄마는 웃으며 말했다.

"아암 그래야지 그래야 말고."

나는 편의점 앞을 지나 대학병원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갑자기 누군가 내 앞을 가로막는다.

"헤! 까꿍."

눈이 움푹 들어가고 앞니가 튀어나온 여자가 산발한 머리를 하고서 웃고 있다. 회색 외투를 아무렇게나 휘둘러 입고 맨발이다. 동상에 걸렸는지 발등이 푸르등등하다. 놀라는 내 눈빛을 보자 재미있는지 여자는 한손을 내저으며 근처의 편의점으로 들어간다. 나도 모르게 따라서 들어간다.

편의점 안으로 발걸음을 디밀자 따듯한 기운이 얼굴을 덮친다.

"어서 오십시오."

젊은 남녀 직원이 반가운 미소로 맞는다. 어디로 숨었는지 여자는 보이지 않는다. 어디로 간 것일까. 이 좁은 공간에서 숨을 곳도 없을 텐데. 으핫핫핫핫……. 어디선가 기분 나쁜 웃음소리가 들린다. 갑자기 뒤쪽으로 시선이 집중된다. 여자가 컵라면 코너에서 수저로 햇반을 퍼먹고 있다. 무엇이 그리 좋은지 입을 헤벌쩍 벌리며.

나는 쫓기듯 편의점을 나와 길거리를 걷고 있다. 밤 공기가 겨울바람과 함께 발목을 잡아챈다. 수많은 쇼윈도우의 글자가 눈앞으로 다가온다. 현실이라는 압박감과 함께. 방황할 때는 전혀 보이지 않던 글자가 이 순간 무언가 결단을 요구하는 것처럼 보인다. 차도는 갑자기 횡단보도가 사라지고 사람들의 발걸음이 난무하다.

길 끝에 성처럼 우뚝 솟은 건물이 보인다. 무작정 발걸음을 옮기는데 이번에는 길과 건물이 작은 평면처럼 좁아지고 있다. 대학 전경이 눈에 들어오고 있다. 옛날에는 보이지 않던 수많은 차로(車路)가 형성돼 어디가 어디인지 분간하기 힘들 정도다. 궁궐을 연상케하던 정문이 사라지고 각종 행사를 알리는 현수막이 나부끼고 있다. 각종 국가고시에 합격해 명예를 높였다는 재학생들의 이름이 사람들의 시선을 당기고 있다.

자세히 보니 본관으로 향하는 계단이 세월의 변화 속에서도 여전히 자리하고 있다. 세월의 바람이 불고 있었다. 찬 겨울바람이 내 목을 휘감고 나더니 말했다. 너가 그동안 한 일이 무엇이냐고.  
추위에 쫓겨 나는 허겁지겁 건물 안으로 몸을 숨겼다.

"혹시 민혜윤?"

얼마 만에 들어보는 내 이름인가. 나는 너무도 반가워 주인공의 얼굴을 쳐다본다. 얼굴이 해맑은 남자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키가 훤칠하게 크고 잘생긴 미남자였다. 순간 나는 영화 촬영하는 줄 알았다. 아님 운명의 장난이 시작되는 드라마의 한 부분인 줄 알았다.

자세히 보니 남자는 흰 가운을 입고 있다. 흰 가운 중간에 파란 글씨로 이름이 보인다. 정형외과 전문의 최문기. 나는 멍하니 그를 올려다본다.

"여긴 웬일이야? 어디 아파."

남자가 반말을 하고 있다,.

"나 알아요?"

"알지 민혜윤, 내 초등학교 동창, 내 이름 기억하니."

"명찰에 나와 있네, 최문기라고."

나도 모르게 반말이 나왔다.

"나, 이 병원 닥터야, 넌 지금 뭐하니?"

말투가 너 백수지? 하고 조롱의 의미를 달고 있었다.

"난 난……."

"너 백수 맞지?"

순간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다. 그제서야 내 신분이 땅에 추락한 사실을 알았다. 망할 자식. 겨우 하꼬방에 살면서 내게 쥐어터지던 녀석이…….

녀석이 내게 꼬집히고 멍자국이 든 채로 집에 가자 야단이 난 모양이었다. 녀석의 부모님이 수소문 끝에 우리집에 찾아왔다. 그들은 한강변으로 통하는 하꼬방에 간신히 몸이나 붙이고 살던 공사장에서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살던 잡역부였다. 그의 어머니는 편물공장에서 스웨터를 짜는 공장 근로자였다. 그래도 교육열은 그 누구보다 높아 외아들을 사립학교에 보냈다. 그들은 다짜고짜로 내게 꿀밤을 먹이며 말했다.

"네가 혜윤이니? 쬐그만 계집애가 왜 그리 드세, 사내 얼굴에 이 멍 자국 좀 봐라, 얼마나 꼬집었던지 세상에……."

그러자 엄마가 득달같이 달려나오며 말했다.

"누구야? 내 자식 야단치는 게."

엄마의 목소리에 대문간을 들어서던 아버지가 토끼눈을 뜨며 말했다.

"무슨 일인데 그래?"

"아, 글쎄 계집애가 우리 하나뿐인 귀한 아들래미한테 생채기를 냈지 뭐예요?"

"뭐? 계집애?"

엄마 아빠의 눈에 쌍심지가 켜졌다.

"우리 대통령감 딸한테 뭐어 계집애?"

아무튼 그날 엄청 티격태격 싸우며 자칫하면 동네 싸움으로 번질 뻔한 걸 마실 온 영희 엄마의 중재로 간신히 마무리 됐다. 그들은 막노동을 하면서도 오직 아들 하나 잘 키우겠다는 일념으로 비싼 등록금을 감당하며 사립학교에 보냈던 것이다. 그후 최문기는 한강 너머에 있는 중학교를 나와 서대문 쪽에 있는 고등학교를 나왔다. 그리고 억세게 운이 좋은 탓에 의대에 진학 마침 부모가 소원하던 대로 의사 선생님이 된 것이다.

소문에 의하면 그는 어릴 때 못살던 게 한이 돼 돈이 많은 집안의 외동딸과 결혼했다고 한다. 오직 재산 하나에 눈이 멀어 인물도 학벌도 보지 않고서. 그런데 막상 결혼하고 보니 장인이 수전노도 보통 수전노가 아니어서 재산에는 손 한번 대보지 못했단다. 그는 월급쟁이 의사가 되어 저 혼자 잘난 체하며 사는 것이다.

이상이 내가 그에 대해 얻어들은 지식이다.

초등학교 6학년 어느날 나는 최문기와 또래의 악동들과 함께 강북에 있는 미아리로 여행을 떠난 적이 있었다. 어른들이 술만 마시면 신나게 불어제치던 단장의 미아리 고개가 어떤 곳인지 무척 궁금했었다. 동네에서 버스를 타고 한강 다리를 건너는데 우리들은 너무도 신나 야호!를 연발했다. 버스가 용산을 지나고 남대문을 지날 때에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에 서 있는 사람들을 향해 손을 흔들기도 했다.

버스가 혜화동을 지날 때는 함께 손을 잡고 노래를 불렀다. 그런데도 아무도 우릴 향해 눈살을 찌푸리거나 야단 치는 사람이 없었다. 우리는 모두 기가 셌고 천하무적이었다. 버스에 내려서는 떡볶이 오뎅, 아이스케키 등을 사먹었다. 중국집에 들어가 자장면을 시켜 놓고 노래를 부르며 먹기도 했다. 레파토리는 당시 대학생들이
즐겨 부르던 "나 어떡해"였다.

우리는 대학생 오빠들처럼 서로 어깨를 부둥켜안고 가수 흉내를 내며 불렀다. 가수 이은하가 불렀던 밤차를 부르며 엉덩이를 흔들던 최문기가 생각난다. 최문기는 "멀리 기적이 우네 쿵짝 쿵짝"하며 손으로 연신 하늘을 찔러댔다. 당시 아버지가 중앙정보부에 다니던 경숙이는 심수봉의 "그때 그 사람"을 부르며 요기(妖氣)를 부리기도 했다. 어린 나이였지만 우리에겐 거침이 없었다.

미아리에서 군것질을 실컷 한 우리들은 정릉으로 놀러갔다. 겁도 없었다. 길을 잃어버리면 택시를 집어 탈 작정이었다. 미로처럼 형성된 점집들 사이를 지나 정릉 숲속으로 접어들었다. 멀리 국민대가 보였다. 당시 정릉도 변두리에다 하꼬방촌이었다. 우거진 숲 사이로 시냇물이 그림같이 흘러가고 있었다.

"난 이 담에 커서 여자 대통령이 될 거다."

나는 큰소리로 말했다.

"난 커서 훌륭한 의사 선생님이 될 거야."

최문기가 말했다. '돈도 없으면서 피이' 나는 속으로만 말했다.

"난 커서 심수봉 같은 가수가 될 테야."

경숙이가 손으로 마이크 모양을 내더니 노래하는 흉내를 냈다.

"난 이담에 잘생기고 멋진 남자를 만나 결혼할 테야, 우리 엄마가 그러는데 여자는 결혼만 잘 하면 왕땡이랬어."

그러자 우리는 모두 와!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말한 사람은 다름 아닌 나였다.

"그러면 여자 대통령은 어떡하고."

"그건 그건 그러니까."

내가 말을 못하고 우물쭈물하자 최문기가 말했다.

"여자 대통령 말고 영부인하면 되겠다."

"난 이담에 목사님이 될 거야, 우리 엄마가 그러랬어."

형철이가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 그러자 우리는 모두 깔깔대고 웃었다.

"야! 못난이 형철이가 목사가 된대요, 목사."

날이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우리는 숲속에서 놀다가 밖으로 나왔다. 집에 갈일 큰일이었다. 간신히 도로까지 나왔는데 버스가 보이지 않았다.

"어떡하지?"

경숙이는 울상이었다.

"아빠한테 전화해서 우릴 데리러 오라고 할까?"

"그러다 말도 없이 놀러 갔다고 혼나면 어떡해."

"그래 맞어, 우리 택시 타고 집에 갈까."

"너 돈 있니?"

"돈 모아서 타면 되지, 너희들 돈 가진 것 다 내나봐."

우리는 가진 돈을 털어 택시비를 하기로 했다. 그때 마침 버스가 도착했다. 우리는 누구랄 것 없이 와! 소리를 지르며 버스 위로 뛰어 올라갔다. 버스 안에서도 서울 야경을 바라보며 신나게 떠들고 노래했다.

"난 인디아나 존스를 만든 스필버그 같은 유명한 영화감독이 될 테야."

경숙이는 또 장래희망이 바뀌었다.

"그래서 리챠드 기어 같은 유명한 영화배우를 만나 결혼할 테야."

우리는 또다시 와!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버스 안에 있던 승객들도 다 함께 웃음을 터뜨렸다. 그때 버스 창 밖으로 스치는 무리들이 있었다. 군사독재에 항거하는 데모대의 일행이었다. 그들은 머리에 검은 띠를 두르고 무언가 열심히 외쳐대고 있었다. 그러자 어디서 나타났는지 전경들이 그들 주위를 삥 둘러쌌다.

이어 피융! 하고 최루탄이 터지기 시작했다. 분수처럼 터지던 최루탄을 피해 대학생들이 상가 골목으로 뛰어 갔다. 버스는 성균대 앞을 지나 창경궁을 향해 엑셀을 밟고 있었다.

"아빠 아빠한테 말해서 나 데리러 오라고 할 테야."

경숙이는 또 아빠 타령을 했다. 대학생들은 얼굴에 마스크를 쓰고 화염병에 불을 부치고 있었다. 어둠 속에 불꽃이 빨갛게 타오르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아스팔트는 불바다로 변했다.

"엄마 엄마 무서워."

우리들은 버스 안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울었다. 집에서 얼마나 난리가 났을까. 아마도 경찰서에 연락하고 사방 팔방으로 찾으러 다니느라 야단이 났을 것이다. 버스가 간신히 창경궁 앞을 지나 종로로 진입했다. 그러나 그곳에는 더 많은 데모꾼의 행렬이 있었다.

"진짜 큰일났다. 어쩐다니?"

"할 수 없지 뭐, 대학생 언니 오빠들이 저렇게 데모하는 것 보면 나라에서 뭔가 잘못한 게 있는 가봐."

"아냐, 우리 아빠가 그러는데 데모하는 놈들은 모두 빨갱이랬어."

경숙이는 눈에 핏대를 세워가며 말했다. 그러자 우리는 서로 수근대며 말했다.

"경숙이 아빠는 뭐하는 분이라니?"

"간첩 잡는 형사래."


그러자 분위기가 싸악 바뀌었다. 그때 우리 눈앞에 현수막이 등장했다.
군부독재 타도. 살인마 전두환은 물러나라. 민주화 결사항쟁.

대학생들은 용감했다. 와! 함성을 지르며 전경 버스를 향해 돌진하기도 했다. 버스가 남영동을 지나 한강다리를 건넜다. 그제서야 우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밖을 내다보니 깜깜했다. 밤늦게 어딜 쏘다니다 왔느냐고 야단맞을 게 뻔했다. 그래도 우린 천하무적 악동들이었다. 아무리 야단쳐도 절대로 기죽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드디어 버스가 비계에 닿았다. 우리는 누구랄 것 없이 버스에서 뛰어 내렸다.

"엄마, 아빠."

언제부터였을까. 엄마 아빠들이 버스정류장에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들 와라, 어디들 갔다 오느라 이렇게 늦은 거냐?"

아빠들은 자식을 품에 안으며 말했다.

"좀 일찍들 다녀라, 부모님들 걱정하시지 않니?'

엄마들은 자식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엄마 언제부터 여기서 기다린 건데?"

"한 시간도 넘었어, 어서 가자 밥은 먹었니?"

"응 낮에 자장면 사 먹었어."

"뭐? 자장면?"

"응, 엄마 나 배고파."

"그래 얼른 집에 가 밥 먹자."

다른 엄마 아빠들은 나왔는데 유독 최문기의 부모만 보이지 않았다. 최문기는 울상이었다. 혼자 우두커니 서 있는데 불쌍할 정도였다.

"야! 최문기."

우리는 최문기를 향해 용용 죽겠지를 했다. 최문기는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저런 문기 엄마 아빠는 아직 일이 안 끝나신 모양이구나, 문기야 우리집에 가서 밥 먹자."


엄마가 문기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뿌리치고 거절할 줄 알았는데 순순히 따라오는 것이었다. 우리집 앞에 이르렀는데 문기가 내 손목을 잡더니 은근히 말했다.

"너 여자 대통령 되고 싶다고 했지, 그 대통령 내가 할 테니까 넌 그냥 영부인 해."


"뭐라구?"

나는 손목을 홱 뿌리치며 말했다.

"싫어 싫단 말야."


"무엇 때문에 그러니, 둘이 싸웠니?"

엄마의 물음에 최문기는 딴소리를 했다.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내 방에서 문기와 나는 겸상을 했다. 밥상에는 계란프라이와 소고기 장조림, 셀러드와 멸치볶음이 있었다. 밥상을 받자 문기의 눈빛이 휘둥그래졌다. 젓가락을 들어 반찬을 있는 대로 다 집어먹었다. 이 모양을 보고 있던 엄마가 말했다.

"문기가 배가 많이 고팠던 모양이구나, 밥 더 줄까?"

"네 아줌마."

문기는 밥 한공기를 또 뚝딱 해치웠다.

"아줌마, 밥 너무 너무 맛있어요."

볼따구니가 터지도록 밥을 쑤셔 넣으면서 문기는 말했다. 다 먹고 나더니 하는 말이 걸작이었다.

"아줌마, 나 이담에 커서 혜윤이한테 장가들어도 돼요?"

"뭐야?"

그 말에 우리는 모두 배를 쥐고 웃었다. 문기의 부모는 오직 외아들 잘 키우겠다는 일념으로 막노동 현장과 편물공장에서 밤늦도록 일하고 있었다. 그 이후 어쩐 일인지 문기는 나만 보면 슬금슬금 피했다. 남의 집에 가서 밥을 얻어먹었다고 혼이 난 모양이었다. 이후 문기의 가족은 동리에서 사라졌는데 알고 보니 문기가 다니는 중학교 근처로 이사갔다고 했다.

인생은 무엇으로 존재하는가.

나는 30년 세월이 지난 지금 자신에게 묻고 있다. 어린 날 아버지에게 했던 말이 생각난다.

"아빠, 난 이담에 커서 무엇으로 성공하지."

그때 아버지는 말했었다.

"일단 공부를 열심히 한 다음 니 소질에 맞는 걸로 결정하자."

그때는 인생의 목적이 오직 성공하는 거였다, 남을 제치고 정상의 고지에 우뚝 서 승리의 깃발을 날리는 게 성공인 줄 알았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고 나자 생각이 달라졌다. 승리의 깃발을 꼽지 못한 때문만은 아니다. 그렇다면 나는 패배한 것일까. 대학 다닐 때 어린이 대공원 옆에 있는 대학에 놀러간 적이 있었다. 팔뚝만한 잉어가 호수를 떼지어 놀고 있었다.

그때 내 옆에 있는 남자가 물었다.

"인생의 목적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나는 당연히 성공하는 것이라 말했다.

"성공이라면 어떤 분야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목표치가 있는 건가요?"

그가 한꺼번에 그것도 자세하게 묻는 바람에 나는 당황했었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나는 말을 얼버무리며 그에게 딴지를 걸었다.

"그러는 그쪽은 성공할 자신이 있나 보죠?"

"전 전 자신은 없지만 인생의 목적은 행복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순간 극심한 혼미를 느꼈다. 성공=행복이라는 등식이 이 순간 맞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내 관심사는 성공에 있었지 행복은 그냥 부차적으로 따라 오는 것으로만 생각했었다. 그런데 순서가 바뀌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나마도 철이 들자 성공이라는 의지도 점점 사라져 가는 것만 같았다.

"성공과 행복은 불가분의 관계 아닌가요?"

"그렇지 않죠, 마음의 평안이 먼저입니다."

그는 안타까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는 사람들의 마음에 평안을 주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병든 마음을 치유하고 회복하는 그 일에서 보람을 느끼고 행복을 창조해 나갈 작정입니다."

도무지 알아듣지 못할 말이었다. 나는 그 얼굴에서 진지함을 보았다. 그러나 외면하고 말았다. 그 대학 캠퍼스에는 유난히 잔디가 많았다. 그는 잔디 위에 앉으며 내게 말했다.

"저 다음달에 군대 갑니다. 기다려 주실 수……."

"전 졸업하면 대학원, 아니 유학가게 될 거 같아요, 지금 하신 말씀 안 들은 걸로
할게요."


거절한 이유는 우선 기다려줄 만큼 그에게 정이 가지도 않았고 외모라든가 그가 가진 조건이 형편없어 보였다. 그는 겉보기에 가난한 고학생 같았다. 단벌 검정 바지에 청커버를 입고 비쩍 마른 몸매에 빈티가 줄줄 흘렀다. 생각도 달랐다. 나는 항상 고지만 바라보는데 그는 낮고 낮은 사람들을 향해 구원의 손길을 내미는 나와는 달라도 한참 달랐다.  

한마디로 차갑게 결별 의사를 밝힌 나는 뒤로 안 돌아보고 뛰어 달아났다. 설마 했는데 그가 내게 그런 엉뚱한 상상을 할 줄은 몰랐었다.

"세상에는 많은 부조화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회적인 구조악일 수 있고 이념의 대결일 수도 있습니다."


그가 말하는 의미를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그가 생각하는 유토피아 같은 것에는 관심 없었다. 정치는 정치가에게 경제는 경제 전문가에게 맡기는 것이 옳다는 게 내 주장이었다. 나는 그의 말을 귓등으로 흘려 들으며 그가 에프터를 할 때 응해 준 걸 내내 후회하고 있었다.

세상에 별종도 다 있지 싶은 마음으로 응해 주었는데 결국은 데모꾼이나 선동꾼 같은 말을 주워대는 것이었다.

"저는 정치니 이념이니 한 그런 것에는 관심 없거든요. 그리고 앞으로 우리집으로 전화를 한다거나 학교로 찾아오는 일 없으면 좋겠네요, 무슨 뜻인지 아시죠?"

"네에."

그는 거의 울먹거리며 말했다. 그러고도 모자라 나를 다시 한번 자기 학교 캠퍼스로 불러 뜻도 통하지 않을 고상한 이야기를 주워댄 것이었다. 나는 태생이 정감이 깊거나 동정심이 많은 편이 아니었다. 오히려 냉정하고 까다롭고 이기적인 편이었다. 그런 내게 대고 사회 정의나 지껄여대고 알량한 정서를 호소했으니 내 귀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내 인생의 역마차가 끝나던 날, 왜 하필이면 그 말이 생각난 걸까. 하긴 그뿐이랴, 수많은 기억들이 내 무의식을 뚫고 출몰했다. 그들은 지금 어디서 어떡케 살아가고 있는 걸까. 최문기는 만날 때마다 내게 약을 올리며 꼭 복수를 하고 있는 꼴 같다. 성공한 사회인으로 가정의 행복을 발판으로 삼아 내게 복수하는 것 같다.

뭔가 한참 뒤바뀐 느낌이 든다. 세월의 수레바퀴가 거꾸로 돌아도 한참 잘못 돈 것 같다. 얼마 전 TV 뉴스 시간에 보았던 중학교 동창 윤기량은 대학 교수가 되어 해박한 전문지식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녀는 중학교 다닐 때 우리반에서 반장을 했었다. 엄마가 여고 선생님이었고 아빠는 고위 공무원이었다.

그녀는 4남매 중 맏이었는데 모두 수재였다. 그녀는 어린 나이였지만 다부지게 자기의 꿈을 밝혔다. 나는 명문대를 나와서 유학을 다녀온 다음 꼭 대학교수가 될 테야. 꿈을 이룬 윤기량은 당당하다. 얼굴에 자신감이 넘쳐흐르고 성공이라고 말하고 있다. 인생을 허비하고 산 내게 무언의 채찍을 가하며 책임소재를 묻고 있다.

어릴 때 장래희망을 여자대통령이라고 했던 민혜윤이에게 성공의 의미에 대해 가르치며 공박하고 있다.

30년 세월이 흐른 지금 나는 고향으로 돌아와 서성이며 과거를 헤매고 있다. 인생의 반을 살아낸 나이에 남은 삶에 대해 결단을 촉구하고 있다. 거리에 세월의 바람이 불고 있다. IMF보다 더 혹독하다는 경제 혹한의 바람이 사람들 몸을 움츠리게 하고 있다. 대학은 낭만이 사라져 취업 준비소로 변하고 각박해진 인심은 희망마저 도태시키고 있다.

어느 사이엔가 나는 포기에 익숙해져 있었다. 경쟁의식과 이분법 사고에 목숨 걸던 내가 더구나 지고는 못 살던 내가 포기라는 그물에 갇혀 옴쭉달쭉 못하고 있었다. 임박한 현실 앞에 아! 정말 세월 앞에 장사 없다더니 성격도 변하고 마는 것인가.

어느날 동생이 찾아와 어린이 영어 교습소를 내라고 했다. 아울러 글짓기 교실도 함께 열라고 했다. 내 전공을 살릴 별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대답 대신 어린 조카를 품에 안았다. 내 핏줄이 흐르는 살아 있는 생명체. 어느 유명한 여성 정치지도자도 조카를 품에 안고는 기뻐 어쩔 줄 몰랐다고 한다.

자기의 소생이 없으니까 조카가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하고 기쁨을 제공하는 것이다. 대학 병원과 마주 보이는 곳에 학원을 열었다. 30평 남짓한 공간에 강사는 따로 두지 않고 내가 직접 뛰기로 했다. 아직 머리가 녹슬지 않았다는 걸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선생님 무슨 대학 나오셨어요?"

초등학교 4학년인 초롱이가 나를 빤히 올려다보며 물었다.

"이 근처의 대학을 나와서 중학교 교사 4년에다 강남에 있는 학원에 10년 간 다녔지, 이만하면 된 거 아닌가."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난 또."

아이는 알 듯 말 듯 한 말을 삼키며 핸드폰으로 게임을 시작했다, 그때였다. 누군가 문을 삐죽이 디밀며 들어왔다. 앞니가 흉하게 튀어나온 여자가 손을 벌리며 입이 찢어지게 웃었다. 빨리 적선을 하라는 표시였다. 여자는 언 듯 보아도 정신병자 같다. 눈의 동공이 풀어져 초점을 잃고 있다. 순간 내 안에 떠오른 문장이 있다.
다시는 후회를 않으리라, 다시는 후회를 않으리라.

"현주야, 돈 천 원 가진 것 있니? 있음 선생님 빌려 주라, 이따 갚아줄게."

아이가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여자 손 위에 올려준다. 여자는 고마운지 입을 헤 벌리며 웃더니 이내 돌아서 나간다. 갑자기 그 남자의 말이 떠오른다.

"마음의 평안이 먼저입니다."

"저는 사람들의 마음에 평안을 주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병든 마음을 치유하고 회복하는 그 일에서 보람을 느끼고 행복을 창조해 나갈 작정입니다."


학원 문을 닫고 언덕배기에 있는 집으로 올라갈 때였다. 갑자기 등뒤에서 와! 하는 함성이 들렸다. 동네 남자 아이들이 낮에 학원에 들렀던 여자를 향해 내지르는 함성이었다. 그들은 여자의 치마를 들추고 주먹으로 얼굴과 등을 마구 때렸다. 그러면서 즐거워 어쩔 줄 모르는 것이다. 여자는 동네 미치광이였던 것이다.

편의점에서 포장된 밥을 반찬도 없이 물에 말아먹으며 즐거워하던. 난 갑자기 눈물이 핑 돈다. 가까이 다가갔다. 아이들은 놀라 뒤로 물러간다. 나는 여자의 모습에서 옛 추억을 떠올린다. 여자의 모습이 어딘지 낯익다. 세월의 수레바퀴를 건져 여자의 모습을 추억해 낸다.

슬픔과 고난의 인생길이 여자의 얼굴에 담겨져 있다. 여자는 나를 바라보며 히죽이죽 웃는다.

봉자.

나는 지난 문장을 또 떠올린다. 그때 우리가 사는 골목길 끝에 루핑으로 지붕을 얹은 하꼬방에 사는 부부가 있었다. 부부는 한눈에 보아도 모자란 티가 났다. 사람들은 그들을 반편이라 불렀다. 봉자는 동네 사내아이들한테도 좋은 장난감이었다. 남자아이들은 봉자의 치마를 들추고 주먹으로 그녀의 머리통을 쥐어박고 발로 걷어찼다.

아이들이 사라지고 난 거리에 정적이 머문다. 여자는 아니 봉자는 어디론가 향해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골목 끝에 흰 담벼락이 보인다. 나무 대문을 열고 들어서는 봉자. 십자로 난 길이 보이고 가운데 건물 안으로 그리스도의 상(像)이 보인다. 봉자는 신발을 벗고 그리스도가 보이는 강대상 앞으로 다가서고 있다.

마루 바닥에 꿇어앉으며 울음을 토하는 그녀. 누군가 나타나 그녀의 등을 두드려 주고 있다. 흰옷 입은 천사인가. 그는 봉자를 위해 그리스도께 간절히 빌고, 그러다 문 뒤에서 엿보고 있던 내게 눈길을 돌린다.
아! 당신은 당신은.

마지막 부분에 나는 생각한다.


나는 경쟁에서 패한 게 아니다. 진정한 승리는 나중에 있다. 진짜 성공은 승리가 아닌 행복에 있다. 그것도 마음의 평안. 평안을 주시는 절대자 앞에 나는 숨죽인 채 부복하고 있다. 그리고서 그에게 승리의 결말을 묻고 있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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