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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국 장편소설 <꿈꾸는 설악> 연재 마지막 회
2010-05-17 21:02:45
38hwakook

조회:1578
추천:113
소설 <꿈꾸는 설악> 마지막 회|시와 소설 / 이화국

 

 

 

                  25. 먼 약속

 

 

  

    가을은 점점 깊어가고 10월 초순부터 단풍은 붉게 단장하고 싶어 안달이었다.

    단풍은 10월 스므 날께라야 극치를 이루어 일주일 정도 곱다가 금방 오그라 붙거나 퇴색했다.

그중 제일로 아름다운 날이 민호가 떠나는 날이어야 했다.

하지만 편한대로 10월 말일로 날을 잡아놓고 있었다.

 

    그 무렵이면 단풍도 시원치 않고 산에 올라가면 어름이 얼어있거나 하루 밤 사이에 기온이 급강하

하여 장비 없이 가벼운 차림으로 산에 올라 갔다가는 동사하는 수도 있었다.

 

    또 눈이 내리기 전까지는 산불 조심한다고 등산로를 막아놓는다. 이래저래 10월 말까지가 관광

시즌인 셈이었다. 그래서 보통은 업소의 문을 10월 말일에 닫는다. 종업원도 다 떠나가고 다음 해를

기약한다. 그것은 마음 뿐이지 확실한 것은 아니었다.

   먼 약속

    선희는 내일로 다가온 이별 앞에서 사랑에 대해 곰곰 반추해보았다.

사랑이란 말도 실은 무의미한 것이 아닐까. 네가 어떤 역경에 처한다고 해도 네 인생을 내가 대신

살아 줄 수 없고, 책임져 줄 수도 없다.

알고 보면 사랑한다는 말보다 더 공소한 헛소리는 없는 거 같았다.

 

    뭔가 주어야 할 텐데 사랑하는 사람에게 줄 것이 없다. 끓는 마음 같아서는 목숨이라도 내어주고

싶지만 죽은 목숨을 받아 무엇에 쓸 것이냐! 한 그릇의 자장면이 나으리라.

언뜻 바람에 나부끼는 깃발이 연상되었다.

 

 

          막상 주려니 줄 것이 없다

          네가 원하는 것이 내겐 없다

          내가 원하는 것을 너는 모른다

          한 조각 뜬 구름으로 가슴이 비어서

          바람에 나부끼기만 한다

 

 

 

    선희는 민호가 떠나는 뒷 모습에 대고 깃발처럼 하염없이 손을 흔들 작정이었다.

눈물을 한 방울 뿌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선희는 이별을 준비하는 마지막 시간에 누구의 침입이란 말이냐고 퉁명스럽게 물었다.

 

  “누구요?” 

  “저 민호예요.” 

  “왜?” 

  “문 좀 열어도 되죠?”

깃발    

    어서 빨리 열어라. 아무렴 벌컥 열어도 되지. 조심스럽긴…

문이 빨리 열리기를 바라면서도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좋을 대로.” 

 

    문은 열렸는데도 도어 손잡이를 잡은 채 민호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서 있었다.

선희가 눈물을 떨구며 앉아있으니 당황했나 보았다. 선희는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들어와.” 

 

    민호는 방에 놓인 작은 찻상 윗쪽으로 조심스럽게 앉았다. 그러고 보니 그는 두 번째 선희의

방에 들어선 셈이었다. 그리고 지금 앉은 자리는 선희가 혼자 커피를 마실 때 민호와 함께 마신

다는 의미로 빈 잔을 놓아두겠다던 바로 그 빈 커피잔 앞이었다.

 

    그래서 민호는 이다음 자기도 선희를 생각하며 주위에 아무도 없이 혼자서 쓸쓸히 찻잔을 들게

될 때는 그렇게 하리라는 마음을 굳혔었다.

    슬픔의 강은 소리 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선희가 커피를 준비하여 빈 잔에 따르며 물었다.

 

  “지금 떠나려고?” 

    민호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이더니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어 1999년 9월 9일.” 

 

    선희는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리야?” 

    민호를 정면으로 쳐다보았다. 원래 아리숭한 점이 있는 줄은 알았지만 무슨 주문을 외우는가.

저런 주문도 있는가. 암호인가.

 

  “이십 년은 너무 길어요. 생각해보았는데요. 십오 년 뒤면 1999년이죠. 아주 기억하기 좋게

9월 9일로 해요. 그때 여기서 꼭 만나요. 꼭이요. 그리고.” 

  “그리고?” 

    1999. 9. 9.

  “열심히 공부해서 다시 시도해 보겠습니다. 그동안의 보살핌 정말 감사합니다.” 

    민호는 고개를 정중하게 숙였다. 선희는 눈물이 마구 흘러서 주체할 길이 없었다.

결국 야만의 손때를 묻히고 말지 않았던가.

 

    그래서 그를 장난감으로 생각한 것은 아니었더냐고 양심에 몇몇 번을 물었던가.

그때마다 선희는 아니라는 결론에 닿았다. 그래서 이별은 더욱 더 슬프지 않을 수 없었다.

감당할 수 없는 광기를 달래며 그동안 선희는 책을 읽고 사유했으며 남모른 고뇌 속에 살았다.

 

    작렬하는 태양 아래 땀 흘리던 정신의 단련이라니 형벌 같았지만 오늘의 결과를 보며 그나마

다행으로 여겼다. 유치한대로 거룩한 연애는 운명적이었던 것… 참된 사랑이 본능적인 사랑만큼

달콤한 것은 아니었지만 쓰디 쓴 희생의 동반 없이 아름다움과 귀한 가치는 찾아오지 않는다.

 

    순수한 사랑은 타인의 운명을 보다 선으로 이끌려는 염원이란 말을 가슴에 새겨 두길 잘 했다

싶었다. 나무줄기에 간당거리며 매달려 붙어있는 마지막 잎새 하나로 죽지 않고 살아난 사람이

있듯이 적어도 15년은 선희가 사경을 헤매면서라도 살아야 할 이유가 분명하게 주어진 셈이었다.

 

  “민호가 말이지.”  

    선희는 목이 메었다.

  “내가 한 말을 지나치는 말로 듣지 않아줘서 고마워. 그리고 1999년 9월 9일, 그 날을 내가

어찌 잊을 수 있겠니! 하지만...” 

 

    선희는 민호에게 돌려주려고 간수한 돈을 꺼냈다.

타인의운명

    “이건 받아줘. 그 마음만 영원히 감사할게.” 

    민호가 놀랐다. 얼굴이 붉어졌다. 선희가 그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꼭 기억해 줘. 우리 15년이 아니고 20년 뒤에 만나는 거야. 내 피가 좀더 식어졌을 때, 아무도

거들떠 보기 싫어하는 주름살이 얼굴을 뒤덮었을 그 때 민호가 나를 만나줘. 얼마나 고마울까.

민호는 착한 사람이니까. 20년 뒤 그 해의 마지막 날에. 여기서... 설마 잊지는 않겠지?”

 

    그렇게 말하는 선희의 얼굴에선 주체할 길 없이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꼭꼭 접은 종이 한 장을 그의 손에 쥐어주었다. ‘더 큰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선희가 지은

시 한 편이 그 속에 적혀있었다.

    민호가 다가와서 그녀의 눈 위에 입술을 대었다.

 

  “꼭 기억 할게요. 절대로 잊지 않을 거에요.” 

    결연함을 보이며 말한 후 민호는 조용히 일어서 나갔다. 선희는 눈을 감은 채 앉아 있었다.

조금 있자 카운터 방문 여닫는 소리가 들려왔다.

 

    선희는 가만히 일어서서 문을 조금 열고 내다보았다. 민호는 그가 처음에 이 집에 올 때처럼

조그만 가방을 손에 들고 방금 현관문을 열고 마당으로 내려서는 중이었다.

선희가 신발을 끌며 현관문 앞에 섰을 때 그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무슨 깊은 생각에 젖었는지

고개를 숙인 채 천천히 걸어나가고 있었다.

 

    그의 등 뒤에 대고 선희는 말 없이 손을 흔들었다. 마당 한 쪽에 서있는 은행나무에서 노랗게

물든 은행잎이 팔랑 팔랑 춤추듯 떨어져 내렸다.

한 계절의 마감을 그렇게 온몸으로 연출하는 모양이었다.

노란 은행잎

    아름다운 계절의 끝에 그 여자는 서있었다.

 

                                       

 

    총 천연색 시네마스코프 영화 한 편이 끝났다.

    선희는 오랜 회상에서 깨어나 거울 앞으로 다가갔다. 자기의 얼굴을 드려다보았다.

성글게 세어버린 머리털은 이마에 흘러내렸고 뜨거운 사랑을 주고 받을 수 있던 20년 전의 모습은

온데 간데 없었다. 

 

    바로 어제 일처럼 실감이 나다가도 영원 전에 있었던 일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그 아득함 넘어 저쪽 동해가 바라다 보이는 설악산 자락에서 민호가 얼굴을 내밀었다. 선희가 가슴에 새겨 넣은 그때의 그 모습 그대로였다. 20년이라는 세월의 비중이 도무지 감지(感知)되지 않았다.

 

    선희만이 울며 웃으며 살아온 세월의 누적(累積)을 증거처럼 거울 속에 흔적으로 남기고 있었다.

하지만 20년 뒤 그 날이라고 못 박은 약속은 선희에게 아직도 유효했다.

졸음 쏟아지는 오후에 반추하는 추억이었고, 흐린 날에 세상을 내다보는 창이었다.

 

    아직도 남아있는 꿈이었고 희망이었다. 버거운 삶을 아름답게 지탱해주는 힘이었다.

그 힘을 받아서 선희는 먼 길을 끌고 온 수레를 다시 손질하고, 설악산 자락에 방목 해둔 사슴 같은

애인을 찾아 떠날 차비를 하고 있었다.

 

    잘 포장된 평평한 길이 아니라 요철(凹凸)로 가득한 자갈길을 오래 끌고 다닌 그 수레가 너무

낡아서 좀 쉬어야 할지 모르는 채로……

소설 끝   

 

                                                   장편소설 <꿈꾸는 설악> 끝 

 



   메모
ID : reverend1    
2012-08-09    
16:30:20    
마침표를 찍으셨군요. 존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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