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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국 장편소설 <꿈꾸는 설악> 연재 65회
2010-05-15 09:32:14
38hwakook

조회:1510
추천:102
소설 <꿈꾸는 설악> 연재 65회|시와 소설 / 이화국  

 

   관광객도 없는데 공연히 일찍 일어나 소란을 피워서 늦잠을 즐길 주방장이나 민호나

노군을 괴롭힐 일은 아니라서 요위에 가만히 다시 앉았다.

문갑 위에 있는 성경책에 저절로 손이 뼏쳤다.

 

    아무데나 펼치니 책 갈피에서 얇은 종이가 떨어졌다.

    어디선가에서 보고 오려 넣어둔 모양이었다. 헤르만 헷세의 기도였다.

 

 

            하느님, 나로 하여금 나 자신에게

          절망하게 해주십시오

          그러나 당신을 향해서는

          절망하지 않게 해주십시오

          방황의 탄식을 모조리 맛보게 해주십시오

          온갖 고뇌의 불꽃으로 나를 사르게 하시고

          나로 하여금 온갖 욕됨을 받게 하십시오

          내가 자신을 유지하는 일을 돕지 말아주시고

          내가 자신을 확대하는 일을

          돕지 말아주십시오

          하지만 나의 자아의 모든 것이 분쇄 되었을 때면

          그것을 분쇄하신 분은 당신이라는 사실과

          당신께서 불길과 고뇌를 만드셨다는 사실을

          내게 가르쳐 주십시오

          왜냐 하면 나는 기쁘게 멸망할 수 있고

          기쁘게 죽겠으나

          나는 당신의 품안이 아니고서는

          죽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피나는 절규가 그곳에 있었다. 몇 번이고 되뇌어 읽었다. 가슴이 찢어졌다.

나는 기쁘게 멸망할 수 있고, 기쁘게 죽겠으나 나는 당신의 품안이 아니고서는 죽을 수가 없습니다

라고 선희도 그렇게 기도했다.

당신 품안 

    그러나 참으로 뻔뻔스럽다고 생각되었다. 바로 엊저녁의 기억이 너무나 생생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기쁘게 멸망할 수 있고, 기쁘게 죽겠으나 나는 민호의 품안이 아니고서는 죽을 수가

없습니다 라고 기도해야 정직할 것 같았다.

 

    다시금 민호의 방으로 달려가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이렇게도 인간은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파

그 욕망이 무한대이며, 그 욕망의 노예로 살아야 하는 어쩔 수 없는 동물이란 말인가.

그 동물성 앞에서 부끄럽고 한탄스러워 통한의 눈물이 줄줄이 흘러내렸다.

 

   머리가 터질듯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너무 이른 새벽에 일어났던 참이라 다시 누웠다.

   어느 새 새벽잠에 떨어졌나 보았다. 꿈을 꾸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대고 하는 말은 민호이기도 했고,

불특정 다수이기도 했다. 그녀의 지나간 젊음을 향한 독백같은 것이기도 했다.

그녀는 생각의 갈피에서 나오는대로 무어라고 중얼거렸다.

 

 

          이름도 어찌 그리 예쁘냐 너 젊음이여!

          그 이름이 내게 왔을 때 나는 전율하였다.

          나의 작은 애인 같으면서 우주보다 더 큰 존재여!

          가슴에 품기도 하며 그 가슴에 한없이 안기고픈

          사무치는 욕구를 그대는 모른다

          아름다운 세상을 물려주기 위해

          해야 할 일에 대한 피나는 노력과

          해선 안될 일에 대한 극기(克己)가 어떻다는 것

          사랑하는 사람 앞에 좋은 것을 주기 위해

          허기지며 기진해도 항상 배 부른 체

          의연해야 하는 모습은 가혹한 배우의 수업이다

          저 푸른 잎사귀가 눈 앞에서 흔들릴 때 느끼는

          끝 없는 갈증과 위태함과 번거로움

          그 많은 치기(稚氣)들을 감당할 수 없어

           밤마다 기도의 문을 열어야 하고

  기도의 문

          봄나무 새순 같이 청순한 이파리여

          갓난 애기 살결 같은 고운 명주 옷감 같은

          부드러운 입술의 애틋함과

          바라보기에도 눈이 부신 싱그런 자태여

          창공을 향해 금시 날아 가버릴 것처럼

          도약(跳躍)의 몸짓 그 활력

          불화로 같은 정열 앞에서 뜨겁다가는

          금시 추워져 어깨를 움츠린다

          변화와 성장을 지켜보다 두려워 떨리는

          기다림의 형벌이 내게 있으리니

          사랑하는 사람아 사랑의 묘약은 없는가

          자타(自他)는 이렇게도 분명해야 하는가

          쓴 열매의 맛과 인내의 쓴 뿌리가 내 몫이구나

          운명이 언제나 내 편 아닌 세월 많이 살았다

          물 속에 잠겨 이끼 낀 숨막히는 돌의 가슴이여

          너희는 떠올라야 하고 나는 가라앉아야 하는

          세월의 명령이 어깨를 누르며 다가온다

          좌절에서 일어서는 몇 번의 탄생과

          한 고비 넘어 맞는 절망에 이르는 죽음

          앗긴 것 같지만 돌아보면

          내가 함부로 써버린 세월 아니냐

          누구 탓이리 그건 내 책임이니

          가버린 세월 가운데 미숙하게 익어

          오늘도 울고 날마다 참회해도 부족할 뿐

          사랑하는 사람아! 차라리 낙뇌(落雷)되어 오라

낙뇌   

          부서지고 싶다 모든 의식의 끈을 놓고 싶다

          돌아서 가는 뒷모습은 그 어떤 것이라도

          무서운 난타의 매질이 될 것이라

          한여름 녹음처럼 무성했던 젊음아

          오기만 하고 가지는 말아라

          많은 이별 겪으며 살았어도

          이별에 길 드는 법 익히지 못했다

          탐정 소설처럼 사는 인생이라지만

          걷기 보다 뛰기를 즐기는 젊은 그대여

          사유의 열매 한 입 베어 물고 천천히 가라

          서로가 떨어져 서서 마주 보는 이 관망(觀望)이

          신의 축복이랴? 축복은 아니겠지만

          그의 허락 없이 어찌 만났으리요

          그래서 더욱 소중한 인연 앞에 미소 지을 뿐이다

          우리의 그리워 함이 창공에 이르기까지

          단심(丹心)이 절절하면 신께서도 허락하여

          가까이 만나게 해주시는 후의(厚誼)를 입으리라

          그대를 내게 줄 때 거두어가신 웃음 잊지 않을란다

          한 가지 얻으면 한 가지 잃는 평범한 이치 속에

          고요히 미소 지으며 기다림 속에 살란다

          그렇다 고통 가운데서도 기쁨 있음은

          피멍울진 목의 울대로 허공에 날려

          구천으로 보냈던 내 기도가 답을 얻은 것

          나는 또 기도해야 할 일만 남았구나

     허공

          사랑하는 사람아 움트라 움텄으니 자라라

          자랐으니 찬미하자 우리가 부여 받은 생명

          낙엽 깔린 길 오색 영롱하고 하늘 푸르다

          억새꽃은 세어버린 내 머리털처럼 하얀데

          나는 이 길 혼자 걸으면 눈물 나리라

          아니 울며 울며 가리라 그리고 말해야지

          뜨겁게 영원히 사랑한다고

          세상이 저 대청봉에서 불어내리는

          한겨울 바람처럼 차가워도

          너를 사랑하는만큼

          네가 속한 이 세상까지 사랑하겠노라고

          내가 살고 있음은 찰라에 목숨 걸듯

          그대와 함께 했음의 추억 때문이라고

          그대를 곁에 세우지 못하면

          추억의 향연 속에 잠들 것이며

          또한 나의 눈물은 슬픔만은 아니라고

          한시절 살아옴에 대한 찬미와 감사라고 말해야지

          오! 사라진 젊음이여!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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