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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국 장편소설 < 꿈꾸는 설악> 연재 62회
2010-05-13 06:51:32
38hwakook

조회:1476
추천:142
소설 <꿈꾸는 설악> 연재 62회|시와 소설 / 이화국

  

22. 타오르는 불꽃

 

  

 

 

 

 

 

   선희는 마음이 한결 부드러워져 산과 바위, 나무와 산새들, 개울물과 풀꽃들과 이야기

하면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넓은 바위가 나타나면서 사람의 발길로 길든 좁은 길이 끊어지지만

않았다면, 해가 제 갈 길을 서두르지 않았다면 선희는 끝도 없이 걸었을 것이다.

산새들  

    발길을 돌리다가 선희는 개울의 뿌리가 어느 바위 틈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심장이 뛰었다.

    큰 강을 만드는 시원(始原)은 그렇게 작은 바위 밑에 있는 듯 없는 듯 숨어 있었다.

 

    선희는 자기가 거대한 강을 만드는 물의 작은 근원이 되어 목마른 이들의 목을 축여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 것이냐고 소망했다. 그 근원은 너무나 작았기 때문에 몸과 마음을 낮추어 길을 찾으면

어딘가에 길이 있을 것 같았다.

 

    그 때에 이상한 목소리가 바람결에 실려왔다.

   ‘너의 시작은 미약 하였으나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그 목소리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보통 작으마한 규모의 식당이나 미용실 같은 장소에서 만났던 성경구절이었지만 개업할 일도

없는데 그 성경 구절이 왜 들리는지 알 수 없었다. 분명히 목소리를 들은 것 같아 주위를 둘러보아도

역시 아무도 눈에 띄지 않았다.

 

    참으로 이상하였다. 내일도 모레도 산에 오르리라는 결심을 굳히며 산을 내려왔다.

현관문을 밀치고 안으로 들어서니 어지간히 권태로운지 민호는 아직도 음악을 틀고 있었다.

선희는 그동안 그를 떠나보내는 연습을 한 것으로 충분하다고 여겼다.

 

    이제 깊은 산 속에 밤이나 낮이나 말없이 엎드려 있는 바위를 닮을 수가 있겠다 싶었다.

바위들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찾을 수 있었다.

 

 

            사연 있는 인연 설명할 수 없어

          앞 산의 내 동무와 떨어져 앉아

          자족(自足)을 만족(滿足)으로 살지

 

          오랜 날 먹어온 양식은

          항복하지 않으리란 인내의 쓴 뿌리

 인내의 뿌리

            앞만 바라볼 뿐이란 딱딱한 강령 뿐

 

          앉은 자리 벼랑 끝

          가슴에 씨 뿌린 꿈은 잘 개켜진 깃발

          펴질 날 멀지만

 

          시간의 톱날들 잇사이에 물고

          머리털 날리지 않는 구도자 되어

            앞 산을 응시하다 태산이 되어가는 중이다.

 

 

    선희가 바위를 닮은 것인지, 바위가 선희를 닮은 것인지 모른채 그럴 듯 했다.

선희는 다른 모습의 바위를 찾아보았다. 공책에 적어 넣었다.

 

 

            햇빛에 본다 노란 떡잎

          낌새부터 뻔한 승부를

          옹고집 틀어쥐고 예까지 왔으니 끝까지 버텨야지

          물길이 비켜 가고 산길이 돌아 나간다

          따뜻한 피의 손길 맥박 치는 심장 없는데

          눈 먼 새는 앉아서 쉬었다 가고

          등 굽은 소나무는 사랑은 운명이라며

          옆구리 비집고 들어와 다리 뻗는다

          수선수선 억새들 머리 숙여 굽어드는 듯 해도

          돌아 앉으면 뭐라고 흉보아쌌는지

          영롱한 구슬 이슬 금 간 가슴 적시다가는

          구르면 그만 마르면 그만

          배당 받은 대로 지켜갈 길 그게 다인 줄 알고

          책임져 줄 이 없어 밤낮 죽은 듯 엎뎌 있다.

 

 

    선희는 자기가 쓴 글에 반해서 가만히 탄성을 올렸다. 재미 있었다.

그래서 바위의 모습을 또 한 편 그렸다. 바위가 선희 속에 녹아 든 모양이었다.

이번에는 제목을 붙여 보았다. ‘바위는 살아있다’라고.

 

            바위는 숨쉬며 살아 있다

          주먹 쥔 손 풀지 않음에서

          생명의 굳은 의지를 보네

          무거운 그 입 앞에 가슴을 여네

          되다 만 사람 만나기보다

          더 기쁜 듬직한 만남

          귀기울이면 땅이 입을 열어 말하는 듯

          저음의 목소리 들을 수 있네

          나도 바위처럼 주먹 쥔 힘으로

          센 물살 거친 비 바람 견디는 법 배우네

          나는 살아 있네.

 

 

 

    깨달음

    깨달음이 왔다. 바위가 되리라. 기쁨이나 슬픔, 행 불행에 쉽게 동요되지 않으리라.

인생은 감정을 낭비할 만큼 길지 않다. 이 계절이 가면 봄은 올 것이다. 희망을 위하여 절망은

반드시 거쳐야 하는 통과의례다. 있어야 한다면 절망이여 있어라.

 

    이제 겁나지 않는다. 사랑은 못 생긴 학자의 가르침보다 훨씬 더 훌륭한 인생의 교사였을 것이며,

궁핍은 사유의 식량이 되었을 것임이라 선희는 담담하고 담대해지기로 했다. 그러나 그것은 선희가

바라는 희망 사항이었지 벌써 그렇게 되어있는 뜻은 아니었다.

 

    아직도 민호를 향한 노여움은 남아 있었다. 아무리 무심하기로서니 그럴 수가 있나. 그리고 돌아왔으면 무어라고 변명이라도 한 마디 있어햐 하는 게 아닌가 말이다. 

사랑이 무례로 변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손주를 사랑하면 할아버지 상투를 흔든다는 속담을 알고는 있었지만...

 

    사랑을 빙자하여 방자하게 굴어서는 절대로 안 되는 일이었다.

살과 살이 맞닿는 사랑이라도 예의는 있어야 했다.

피치 못해 동물성에 함몰 될 때에라도 사람이 동물과 다르다는 증거는 있어야 했다.

 

    선희는 민호로부터 가볍게 취급 되고 모욕을 당한 것 같아 수치스럽고 기분이 상당히 언짢았다.

참지 않기로 했다. 그러자 망설이지 않고 민호가 있는 카운터로 다가가 말했다.

  “정군, 내가 할 말이 있어요.” 

 

    선희는 화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민호는 놀라는 것 같았다.

  “210호가 말하기 좋을 거야. 끝방이니까. 그 방 키 이리 줘요.” 

 

    행복이 가득하지 못하고 우울과 낙담으로 찌들어 있을 게라고 느끼고 있었으므로 선희는 민호가

자기 방으로 들어오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외 누구라도 내실에 함부로 들이는 일은 예의가 아닐 것이다.

 예의    

    민호가 건네주는 열쇠를 받아 들고 2층으로 오르는 계단을 또박또박 밟았다. 210호는 2층에서 왼쪽으로 제일 끝에 있었고 특실로 꾸며진 방이었다. 선희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손님을 별로 받지 못해선지 이부자리는 깨끗한 채 깔려 있었다.

 

    얼마 기다리지 않아서 민호가 올라왔다. 그는 서있었다. 선희는 올려다 보면서 말했다.

  “앉아.” 

 

    짧은 말에도 싸늘한 무게가 실려 있었다. 민호는 선희 앞에 앉았다.

    선희는 앞 뒤 정황 설명 없이 그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직선으로 말을 던졌다.

 

  “혹시 내가 민호에게 너무 가볍게 보였던 것은 아닐까.” 

    “……” 

    민호는 무슨 의미인가 싶은지 선희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기는 눈치였다.

한참 있다가 고개를 좌우로 천천히 가로 저었다.

 

  “도대체 어디를 갔던 거야?” 

    따져드는 선희의 두 눈은 파랗게 떨리고 있었다. 뜸을 들이다가 민호는 대답했다.

  “서울에요.” 

 

  “강릉이 아니었어? 그럼 왜 나한텐 강릉이라고 거짓말 했어?” 

  “처음엔 강릉에 잠깐 다녀오려고 했어요. 그런데 생각이 바뀌었어요.” 

  “왜 그래야 했지? 나는 강릉에 다녀온다고 해서 그날로 돌아오는 줄 알았잖아.” 

  “죄송해요.” 

     죄송

  “그렇게만 말하면 안 되지. 내가 얼마나 기다린 줄 알아? 비는 억수로 퍼붓는데 무슨 사고가

일어난 것은 아닐까 하고.” 

 

    선희는 너를 사랑하는 마음이 그렇게 애태우며 기다린 것이라고는 말 못했다.

그녀가 하도 노엽게, 정말로 화가 나서 다그친다고 생각되었을 때에야 민호는 답변을 비켜 갈 수

없음을 알아차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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