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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국 장편소설 <꿈꾸는 설악> 연재 61회
2010-05-13 06:48:41
38hwakook

조회:1448
추천:104
소설 <꿈꾸는 설악> 연재 61회|시와 소설 / 이화국  

 

   그것은 너무 멀리 있어서 희미하기만 했던, 그래서 잊을 뻔 했던 사랑의 얼굴을

정면에서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 사랑을 몸과 마음속에 깊이 새김으로 앞으로의 인생은 그 사랑

과 함께할 것이며, 세월이 지나면 모든 사물이나 감정이 희미해지는 시간의 법칙 속에서 추억

만은 아무도 훔쳐갈 수 없는 보물로 남을 것이었다.

 

    그러한 보물은 많이 가질수록 행복일 수 밖에 없었다.

    보물

    안팎으로 들끓던 무더위는 사라지고 밤이면 풀벌레가 합창하는 가을. 그 가을이 왔음을 진하게

피부로 느끼면서 산을 제대로 한참 바라보는 것도 처음이라 여겨졌다.

 

 

            달이 암만 밝아도 쳐다볼 줄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이제금 저 달이 서름인 줄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그랬다. 미처 모르고 살아온 일들이 너무 많았다. 오직 사랑 때문에 다 주고 싶고, 다 갖고 싶은

것도 몰랐었다. 그냥 아이 낳고 살았다. 세월 따라 같이 안 가려는 고삐 없는 마음도 미처 몰랐었다.

주고 받으며 사는 세상, 주고 받는 일이 그토록 어려운 줄을 예전엔 미처 몰랐었다.

 

    조금만 엉큼한 마음을 품어도 세상이 우주만한 감옥인 줄도 예전엔 미처 몰랐었다.

그런데도 세상 것 다 안다고 자부하며 겁없이 살았다. 모든 일이 잘 되어갈 때는 제가 다 잘 나서

그런 것이라고 자만했다. 모든 통회가 한꺼번에 올라와서 선희는 개울가로 내려가 눈물을 펑펑

쏟으면서 물소리에 묻히라고 흐느끼며 조용 조용히 울었다.

 

    돌 한 개를 집어 아무 생각 없이 흐르는 물을 향하여 던졌다. 어떤 무의식의 발로였을까.

바로 민호가 앉았던 자리에 자기가 앉아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래 맞아. 사람이 앉았던

자리와 걸어간 발자국도 추억의 목록이 되겠구나!

발자국  

    한 번의 보배로운 입맞춤도 추억속엔 한 장의 명화처럼 걸리겠구나. 들었던 목소리도,

딩동 기타 소리도 귓속에 저장 되겠구나. 그리고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면 되겠구나!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 하자

          저기 저 가을 꽃자리 초록이 지쳐 단풍 드는데

          눈이 내리면 어이하리야 봄이 또 오면 어이하리야

          네가 죽고서 내가 산다면 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

 

 

    한창 노래로 불리고 있는 한 편의 시를 읊고 나니 아하! 시인이란 이렇게 남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사람들이로구나! 그 시인이 자기 마음을 대변 해주는 것 같아 고맙고 위로가 되었다.

 

    불행이 크면 인생살이도 그만큼 크다고 했다. 조만간에 거덜 날 사업, 떠나갈 민호, 그리고 어미가

어떤 마음 상태로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도 모를 순진한 세 아이들과 건강의 문제를 안고 있는 남편,

그 어느 것도 무거운 짐이었다.

 

    그러나 큰 인생살이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피할 길이 없음으로 결국은 그 짐을 다 지고 비틀

거릴 게 뻔했다. 비틀거린 발자국의 진폭 만큼 인생살이가 커진다고 무엇이 달라지며 어디다 써먹

을 것인가. 그건 아직 알 길이 없었다.

 

    사랑도 인생도 영원히 미완성인 것을 무엇을 찾아 방황하다가 여기에 이르렀는지 되짚어 보며

사물이 모두 눈과 귀와 입을 가지고 다가서는 푸짐한 행렬 속에서 선희는 보이는 길, 보이지 않는 길,

열심히 길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길을 찾아

    혼자서 불현듯 산으로 내달았다. 저 큰 산속에는 뭔가가 있을 법했다. 뛰다간 걸었다.

걷다간 앉아 쉬었다. 눈을 들어 주위를 보니 산길을 가는 사람은 모두 혼자서 걷고 있지 힘들다고

업혀가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 평평한 길은 빨리 걸을 수 있고 경사가 심한 길은 천천히 걸을 뿐

이었다. 인생이 마치 산길 같았다.

 

    선희는 산길을 가며 혼자 걷는 법을 배우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높은 고개도 혼자서 넘

어야 했다. 그러니 결국 혼자 사는 법을 산길이 가르쳐주는 것 같았다. 혼자 걸어가야 하며 혼자

고개를 넘지 않으면 누가 대신 해줄 수 있단 말이냐.

 

    철저한 고독 속에 모든 문제를 혼자 힘으로 풀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선희는 산길에서

보았다.

    나무 사이를 지나니 바위가 길을 가로 막고 있었다. 바위등에 기대어 섰다. 바위 짬으로 수정같이

맑은 물이 뭐라고 새소리처럼 지줄대며 계속 흘러가고 있었다.

바위는 듣는지 마는지 똑같은 표정으로 말이 없었다.

 

 

              내 사연 바위에나 적으려고 산에 왔더니

           개울물 넉두리에 귀 먹은 바위

           끄적이는 나의 사연 두 손으로 밀어낸다

 

 

    결국 자기의 사연은 자기 외엔 들어줄 사람이 없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앞으로는 부족한 대로 시를 빙자해서 마음을 열고 나아가리라. 자기가 한 말에 자기가 위로 받는

다는 사실은 행운이고 행복일 터였다.

선희는 신 들린 듯이 발길 닿는 대로 바위등을 기어오르고 나무 사이를 걸었다.

행운    

    화단이나 정원에 가꾼 함박꽃이나 목단꽃은 대접만큼 커도, 산에 핀 꽃들은 유난히 작다는 사실

앞에 발을 멈추었다. 새로운 발견이었다. 겸손하고 조촐하게 있는 듯, 없는 듯 풀섶이나 큰 바위

모서리에 깔려 있는 것이 신기했다.

 

    어찌 목숨이 이름 있어 거대하고 화려한 빛깔로만 치장해야 가치가 있으며, 이름 없는 잡풀의

생명은 짓밟아 뭉개어도 괜찮을까보냐고 새로운 인식이 선희에게 왔다.

그래서 그녀는 작은 꽃을 밟지 못하고 비켜서 걸었다.

 

    용서해다오. 용서해다오. 정말 몰랐었다. 이토록 작은 꽃들이 사랑스러운 줄을 몰랐었다.

까짓 살림 거덜 나면 이 산에 들어와 거적 치고 산과 함께 살리라는 용기가 저 깊은 내면으로부터

불쑥 올라왔다. 저 이름 없는 꽃들처럼 살면 될 것을…

 

    약초 보따리를 들고 행상하면서 자식 대학 공부를 시킨다던 약초 장수의 말이 생각났다.

단체 관광객이 들기만 하면 용케 알고 찾아와 현관에 진을 치던 약초장수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몸 재고 눈치가 빨라 갑자기 들이닥친 단체 손님으로 일손이 모자라 쩔쩔 맬 때,

시키지 않아도 주방에 내려가 그릇이라도 씻던 돼지 엄마의 말이 뇌리에 남아있다가 떠올랐다.

약초를 많이 판 날은 말린 산나물도 한 뭉텅이 씩 주고 가던 돼지 엄마의 목소리였다.

   약초장수

    도회지에서 살다 친구에게 사기 당하고, 하던 일조차 안 되어 폭삭 망해서 빚도 못 갚을 처지가

되자 큰 산자락으로 몰래 숨어들었다는 것이다. 굴을 파면 집이 되고, 큰 바위 밑은 어느 것이나

눈, 비를 비켜가게 하는 지붕이었다.

 

    흐르는 개울물은 식수였으며 마른 삭정이는 땔나무가 되었단다. 나물을 뜯으면 반찬이요 내다

팔면 쌀과 옷이 되었단다. 산에는 부지런만 하면 먹을 것이 얼마든지 있다고 했다.

 

    사람은 거짓말 하고 속이지만 산은 정직하게 부지런히 사는 사람을 절대로 배반하거나 해코지

하지않는다고 말했었다. 그 돼지 엄마의 목소리가 작은 종소리처럼 선희의 귀속에서 쟁쟁 울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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