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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1.01 이후)


애틋한 향수와 이국정서
2017-05-17 21:31:57
assa410

■ 김성열 시인
△전북 남원 출생(1939)
△건국대 정치외교학과
△건대신문. 단편소설 <唯情> 당선(1961). ≪시문학≫에 수필 <父子> 발표(1985). ≪월간 문예사조≫ 시조(1993), 문학평론(2003), 소설(2007) 신인상
△문예사조문인협회 이사장. ≪문예사조≫ 편집국장. 중국조선민족문학대계(전26권) 편찬위원. 한국시대사전(자료집필) 편집위원
△한국문인협회, 국제펜 한국본부, 한국시조시인협회 회원
△춘천 신촌중 교감으로 명예퇴직. (전)경기대 사회교육원 시창작과 주임교수 *월간문예사조 신인상 심사위원
△한국자유시인상, 문예사조문학상 대상, 세계시가야금관왕관상 수상
△시집 『그리운 산하』,『귀향일기』,『농기(農旗)』 외 다수
조회:4748
추천:46

<서평>

애틋한 향수와 이국정서  / 최숙녀 시집 “등대”

1. 흐르는 세월

 최숙녀 시는 애틋하고 이국적이다. 그의 시정(詩情)은 개인적인 삶의 여정이나 생활환경과

무관치 않다. 20대 후반의 젊은 나이로 만리타국에서 지금까지 살아온 세월의 흐름 속에서 비롯된 각별한 정서이다.

 20kg 가방 하나 들고 독일로 온지 50년이 흘렀다. 교육자와 의료인 가족 중에 나는 유별난

문학소녀였고 국문학을 전공했다. 고향을 떠나와 라강변에 자리집고 삶에 충실하는 동안 내 문학의 꿈은 흐르는 세월에 가려져 왔고,

모국어와 한글마저 깊이를 잃고 문학적 상상력도, 성장체험의 토속정서도 많이 쇠퇴해져 가는 느낌에 조바심이 들었다.세상 모든 것을 사랑으로 채워 남은 생을 살면서 문학소녀의 꿈이 담긴 시도 수필도 쓰면서 나를 정리하는 여유를 갖게 된 지금, 삶에 만족하고 행복하다.

                                                                                                                                                                                       -시인의 말 중에서

 대강은 짐작하겠지만 이 시인의 인생여정과 문학정신은 외국생활에 폭 넓게 기반을 두고 있다. 그의 시세계는 우리 시대의 정신사적 의미를 부여할 수도 있을 것이다. 대중의식의 광역화나 개개인의 정신적 세계화에 기여한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유년기의 성장체험이나 최고학부까지 정규교육과정을 고국에서 이수한 내력이 50년 이상의 외국 생활경험과 융합된 의식세계는 이 시대를 사는 우리의 정신적 시공(時空)을 넓혀주고 있다. 이러한 삶의 여정에서 형성된 가치관과 인생관이 그의 문학적 상아탑을 구축하고 있음은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성장체험과 이국적 생활감정이 융합된 의식세계는 고독감과 향수로 짜여진 수예품(手藝品)처럼 촘촘한 유기적 시공간을 이루고 있다. 이 시인이 모국어로 시를 쓸 수 있는 능력은

조국에서의 정규교육을 통하여 연마된 지적(知的) 숙련의 결과이며 독일의 문물을 노래할 수 있는 힘은 일상적인 삶에 대한 문학적 진지성에서 비롯된 점이라 할 수 있다.

 최숙녀 시의 핵심 키워드는 (1)애틋한 향수, (2)이국정서, (3)삶의 성찰과 고독의 반추 등으로 도출될 수 있다.

 1. 애틋한 향수


 고향에 대한 향수는 누구나 갖는 보편적인 정서라 하겠지만 최숙녀 시에서 표출되는 향수의 정서적 색채는 각별한 느낌을 준다.

이역만리의 물리적 거리를 두고 요원하게 들려오는 천상의 메아리 같은 아득함이다. 장기간의 해외 연수중에 핸드폰으로 전해오는 고향의 애경사 소식처럼 듣고 새겨야만 하는 어쩔 수 없는 막막함이다. 시인의 인생여정에 고향의 향수를

결부시키면 묘한 감정이 복합적으로 생성된다. 최숙녀가 아닌 본국의 다른 시인의 글이었다면 평범하게 지나칠 수 있는 내용도 이 시인의 시에서는 더 폭 넓은 의식의 파문을 일으키고 있는 점은 시인의 영상과 시적 화자가 크로즈업 되기 때문이다. 이 시인의 영상은 그 자체로

하나의 시적 이미지로 형상화 되어 있다. 시인의 말 중에서 밝혔듯이 모국어와 토속정서가 쇠퇴해 감을 안타깝게 여긴다는 심경의 토로는 이 시인에게는 반백년의 세월을 돌아와 멍울로 맺힌 흉금(胸襟)의 절규 일 것이다. 국문학을 전공한 문학소녀의 꿈이 고희를 넘긴 지금에 모국어로 된 개인 시집을 엮는 일은 뜻 깊은 일이며, 향수에 젖은 애틋한 정서는

고독한 절규의 몸부림일 수밖에 없다.

 

 꿈길로 찾아가는

내 고향 진양호반

피어오르는 물안개 속에

한 그루 수양버들

홀로 서 있네

 

모진 비바람

날카로운 찬 서리

오랜 세월 하루같이

가냘프게 허우적거리면서도

묵묵히 견뎌온 고향 지킴이

 

잔잔한 물결 위로

햇빛 반짝이면

푸르게 머리 풀어 내린

물 속 제 그림자에 홀려

말을 잃어버리네

 

반평생을 살았어도

언제나 낯선 라인강 언덕에서

한낮의 꿈길에 들어서면

감은 눈앞에 떠오르는

진양호반의 수양버들

                                        -“향수” 전문

 이 시에서 화자(話者. persona)가 위치한 지점과 주시하는 시점은 어디인가. 진양호반인가

라인강변인가 시적 화자가 자리한 특정한 장소는 명시적으로 노출되어 있지 않고 있다. 라인강의 언덕에 서 있는가 진양호반의 물안개를 보면서 수양버들 아래를 거닐고 있는 것인가 시에서 묘사된 외부적 장소 개념은 논리적으로 설명이 불가능한 의식의 공간이다.

시인의 정서가 파닥거린 시적 공간은 무한한 세계로 이어져 있고 시간과 공간의 제약 없이 자유롭게 유영하는 의식의 날갯짓이다. 시에서 묘사된 이미지 이를테면 “진양호반에 피어오르는 물안개” “홀로 서 있는 수양버들” “모진 바람과 찬서리” “잔잔한 물결” “낯선 라인강 언덕”

등은 시적 정서로 채색된 향수의 구체적 형상물이고, “꿈길로 찾아가는 “ 오랜 세월 하루같이”“말을 잃어버리는” “반평생을 살았어도”“한낮의 꿈결에 들어서면” 등의 시적 진술을 통하여 향수의 추상성을 구체적으로 형상화 시키고 있다.

서정시의 시제(時制. tens)는 본질적으로 현재라는 점에서 시인의 시선은 현재 자신의 의식 내부이며 회상되는 모드(mode)는 애틋한 향수이다. 군소리 없이 간략하게 문맥화 된 시적 진술과 이미지는 서정시의 특징을 잘 보여준 작품이다. 애틋한 향수에 젖어 낯선 라인강 언덕을 꿈길로 걷고 있는 이방인 시인의 영상은 바로 눈앞에서 본 듯 선명하다.

 

 17년 전에 하늘나라로 가신 어머니

세상에 오신지 꼭 100년입니다

 

진주알같이 광채나던 깨알 같은 글씨로

꼭꼭 접힌 항공편지 여백에

한자라도 더 채워 넣던

어머니의 손 편지

 

다시는 더 볼수 없는 유언장이 되어

아득한 그 시절의 슬픈 사연으로 남아

50년간 백의의 천사 가슴을 후벼파고 있다

 

다시는 받아볼 수없는 눈물의 항공편지

어떤 보석으로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유산으로 남았다

 

모정으로 다져진 글자마다

사무친 외로움이 번지고

눈물로 흠뻑 젖어 잉크 번진 파란 편지

아침에 다시 보며 가슴에 안고 말리던

그리운 어머니의 손 편지

 

때가 되어 내가 떠나는 날

빛바랜 항공편지를 가슴에 안고

어머니 찾아가리라

 

그립고 애절한 어머니의 항공편지

                                                              -‘어머니의 항공편지“ 전문

 부분 생략 없이 전문을 인용한 이 시는 애절한 사모곡이면서 그리운 추억과 눈물 맺힌 향수의 소야곡이다. 모정을 그리워하는 여식의 심경은 하늘이 준 숙명의 세계이며, 어머니 손길로 자라난 과정은 성장체험의 감각적 세계이다.

유년시절의 성장경험은 어머니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고 어머니를 둘러 싼 환경은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각인된 심리학적 판단이다. 평생토록 자식의 흉금을 울리는 사모의 정은 성장과정의 때와 장소가 바늘과 실의 관계로 늘상 함께하는 것이다. 최숙녀의 어머니의 항공편지는 내용의 애절함과 함께 그리움의 향수가 물씬 풍기는 추억의 미학이다.

50년간 백의의 천사 가슴을 후벼 파는 잉크 번진 어머니의 항공편지를 가슴에 안고 말리던 시인은 지금 어떤 모습일까. “때가 되어 내가 떠나는 날 어머니의 항공편지를 가슴에 안고 어머니 찾아가리라(6연)는 의지를 다지고 있다. 어머니 찾아가는 길이 하늘 길에만 국한되어 있을까. 출생이후에 어머니와 함께 했던 고향의 산천초목 구비구비 어디에나 찍혀 있을 발자욱과 손길, 눈길이 함께 어울린 향수의 애틋함이 함께 이어진 그런 길도 읽어낼 수 있다. ”아득한 그 시절의 그리움으로 남아“(3연2행)에서 그 시절과 슬픈 사연 속에는 간절한 사모의 정과 함께 애틋한 향수의 그림자가 너울거리고 있다. 표면상으로 들어난 표현과 이미지가 선명하고 애절하지만 문맥의 이면에 함축된 추억과 그리움, 50년 묵힌 향수의 정이 시의 공감영역을 넓혀주고 있다.

 

 (1) 애써 멀리하려 해도

검은 연기 뿜어내는 열차의 기적처럼

지난날의 추억은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추억” 부분

 

(2) 진달래꽃 피는 내 고향의

촉석루 처마 끝에

무지개빛 젊은 꿈 매달아 두고

우리 모두 떠나왔다

 

하염없이 울던 밤

눈물의 나이팅게일(nightingale)

가고 싶어도 떠날 수 없는

이국의 하늘 아래 터를 잡았다

(중략)

이제는 서로를 못 알아 볼 나이가 되었구나

우리는 고국을 떠나온 백의의 천사

밤낮 시 때 없이 그리운 내 고향땅

언제 쯤 그날의 옛 동산을 다시 밟을 날 있을까 -향수(2) 부분

 

 (3)다시 돌아갈 수 없는 강물에

마음의 조각배 하나

바람따라 떠내려가네

 

천 년의 세월

무구한 자연 속에서

뛰어놀던 어린 시절의 그 강물

그립고 아쉽네 -“조각배” 부분

 예시한 (1) (2) (3)의 시는 모두 그립고 애틋한 향수의 정서를 노래한 작품들이다.

 

(1)에서는 열차의 기적에 실린 향수 어린 추억의 노래이고,

(2)에서는 진달래꽃과 무지개빛 꿈의 실루엣이 아른거리는 회한의 그리움이며,

(3)에서는 돌아갈 수 없는 강물에 마음의 조각배 하나 떠내려 보내는 향수 어린 마음의 은유적 표현이다.

 

3. 50년 세월의 이국정서


 외국에서 50년을 살아보지 못한 사람은 최숙녀 시에서 다소 생경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 이유는 평범한 일상어 속에 묻어 있는 이국정서에 친근하지 못한 점과 타국의 하늘 아래서 살아온 생활감정이나 낯선 이국의 풍물에 대한 정서적 감응(感應)의 차별성에서 기인한 때문일 것이다. 최숙녀 시를 즐겁게 읽기 위해서는 한국적 감정에서 한 발작 물러서서 시의 배후에 일렁이는 이방인의 모습을 그려놓고

보면 좋을 것이다. 고국을 벗어나 외국생활경험이 없는 사람으로서는 타국의 일상어에 담긴 이방인의 정서를 직감적으로 수용하지 못한 심리적 거리는 최숙녀 시의 장점일 수 있다. 이방인의 평범한 언어가 시의 언어로 문맥화 되어 창조적으로 변용된 최숙녀 시의 에너지는 문맥 속에 용해되어 안 보이는 이국정서의 힘이다. 이러한 정서는 생경한 느낌을 줄 수 있지만 그 생경함 자체가 신선하고 참신하게 수용될 수 있는 점은 시의 장점이 될 수 있다.

번지르르한 수사적 꿈임 보다는 진솔하게 울려오는 색감 다른 감동이 참신성을 줄 수 있다는 의미다. 한국의 현대시사에서 한 때 외국의 지명이나 풍물을 소재로한 시작품이 지적 소산이라는 명분으로 많이 쓰여진 때가 있었다. 그러한 시들을 지금 읽어보면 조금은 억지스런 면이 없지 않지만 직접적인 삶의 체험으로 쓰여진 최숙녀의 시는 상상적 감흥보다는 현장감에서 오는 절실한 면이 더 깊은 울림을 주고 있다. 시대가 바뀌고 글로벌 지구촌 시대에 사는 모국인 에게도 외국체험은 보편화 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짧은 여행경험이나 들은 이야기를 글로 쓰는데는 내면의식의 한계가 있지만 이국정서의 생경함에 감응하는 접근성이 용이한 시대가 되었다.


 짙은 해무(海霧) 가운데

홀로 서 있는 등대여

 

거센 바람 몰아쳐도

꿋꿋이 서 있는 너

 

그 누구를, 그 무엇을 기다리나

지칠 줄 모르는 미련스런 등대여!

 

햇빛 찬란하면 잠잠히 있다가

어둠 속에서 밝게 빛나는 너

 

거센 파도에 시달려 온몸 젖은 어부들을

반겨주는 든든한 아버지 같은 너

 

짙은 해무 가운데

홀로 서 있는 등대이고 싶어라

                                             -“등대이고 싶어라” 전문


 일반적 의미의 등대는 항해하는 배들을 안내하는 항로 표지(光塔)이겠지만 최숙녀 시에서의 등대는 의인화 된 정서적 등가물(等價物)이다. 이 시에서 등대는 시인의 정서가 투사되어 유기체로 부활하고, 감정이입 된 등대는 시적 자아와 동화(同化) 된 물상이다. 최숙녀가 감정을 입혀 그려낸 등대는 어떤 모습인가. 해무 가운데 홀로 서 있는 등대는 시인의 모습과 겹치고, 거센 바람에도 굽히지 않고 서서 버티는 “너”는 시의 화자와 동일 선상에 있다.

 “지칠 줄 모르게 기다리는 미련한 등대”(3연) “어둠 속에서 빛나는 ”너“(4연) ”어부들을 반겨주는 아버지 같은 너“(5연)는 모두 시인의 감정이 이입 된 등대의 생물학적 모습이다. 이처럼 시인의 마음이 투사되어 감정이입 된 등대의 정서적 요소를 들여다보는 것이 이 시의 감상 포인트다. ”해무“의 시적 의미는 예측 불가능한 이방인의 현실적 고뇌이며, ”거센 바람“은 타국생활의 고통과 시련이며, ”미련스런 등대“는 50년 세월의 아득한 회한(悔恨)이며, ”밤에만 빛나는 너“는 희생과 봉사의 겸손이며, ”아버지 같은 너“는 자신에 대한 믿음의 소망으로 읽어낼 수 있다.

이 시인이 등대를 통하여 그려낸 시적 문맥에서 그의 인생관과 삶의 가치관을 보여주는 면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등대의 굳센 철탑처럼 곧고 바르게 망망대해를 바라보며 고독한 불빛으로 남겠다는 의지가 역역하다. 짙은 해무 가운데 홀로 서 있는 등대이고 싶다는 결구가 예사롭게 읽혀지지 않는 이유는 이방인의 감정적 화자가 시인의 실제 시인의 영상과 겹쳐서 아른거리기 때문이다. 피를 토하듯 절규하는 시인의 모습은 고독한 감회 속의 당당한 의연함이다.

 

 라인강의 물안개로 피어오르는

물씬 풍겨나는 물내음

사랑의 기쁨을 일깨눠 주네

영혼 속에 접어 둔 그리움이

강변의 벤치에 바람으로 스쳐가네

 

라인강 로렐라이 언덕의

아늑한 밤에 엮어진

슬픈 사연의 사랑 이야기 하나

깊이 묻어두고

외롭게 홀로 서 있는

가슴 아픈 이방인

 

수많은 배들이 강을 오르내리면서

얼굴에 물방울 튀겨 얼룩져도 좋을

 

라인강은 스스럼없는 사랑의 몸짓으로

그날처럼 말도 없이 유유히 흐르고 있네

                                                                 -“라인강‘ 전문

 

 오랜 세월 동안 라인강의 물안개에 젖어보지 않는 사람이 어찌 그 물 냄새를 음미할 수 있을까. 로렐라이 언덕의 벤치에 스치는 바람의 결이나 밤의 언덕에서 엮어진 이국적 사연이나 지나가는 배가 튀기는 물방울의 감촉을 어떻게 말로 다 할 수 있을까. 이러한 점을 고려한다면 최숙녀의 라인강은 구구절절한 이국적 삶의 애환이 더 간절하게 울려오고 있다.

“물 내음과 사랑의 기쁨”(1연)에서 서양의 키큰 백인도 연상 되고 첫사랑의 그리운 추억도 회상된다. 그것이 라인강의 로렐라이 언덕의 밤에 일렁이는 이국의 감각적 이미지이기 때문에 더 아련한 것이다. “라인강은 사랑의 몸짓으로 그날처럼 말도 없이 유유히 흐르고 있네”(끝연)는 대단히 함축적인 표현이다. 사랑의 몸짓과 그날처럼의 함축적 이미지는 눈물 젖은 이방인의 사랑과 고독감이다. 그날처럼의 “그날”은 지정되지 않은 막연한 어느 시점이며, 그 시점은 고국에서의 추억과 사랑의 시간일 수도 있고 현지에서 엮어진 사연의 시점일 수도 있다.

이러한 다의적(多義的) 함의(含意)는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가. 그것은 화자와 라인강과 로렐라이 언덕이 크로즈업 되어 생성되는 복합적인 이미지에서 오는 것이다. 국내의 어느 시인이 여행시로 이렇게 썼다면 그런가보다 하고 그냥 지나칠 수도 있을 터이지만 이 시에서의 경우는 다르다. 50년 세월을 가슴에 품은 이방인의 감정 토로는 이색적일 수밖에 없다. 라인강의 물안개와 물내음은 그 결과 음색과 향취가 섬세하고 은은하며 애절하다.

 

 철썩 철썩 검푸른 고난의 항구에

지친 듯 힘없이 먹이 찾아 둥둥 떠가는

짝 잃은 오리 한 마리

 

먼 바다 바람에 세차게 부대끼고

맨몸으로 파도와 맞서 싸우며

항구의 비바람에 시달리는 너는

날개 활짝 못 펴고 물에 떠 있구나

 

붉게 타던 저녁놀은 사라지고

어제 같은 어둠은 밀려오는데

외롭게 홀로 서 있는 나처럼

기다리는 임도 너는 없나 보구나.

 

하늘의 별 하나 둘 눈빛은 가물거리고

항구의 이방인 나그네와 이별 하자는데

물빛에 지친 나는 오래도록 떠나지 못하고

멍하니 바라보는 항구의 오리 한 마리

                                                          -“함부르크 항구의 오리 한 마리” 전문

 

 왜 하필이면 함부르르크 항구이며, 오리 한 마리일까. 그것은 머나먼 고국의 향수이며 투사된 이방인의 외로움이다. 이국적인 지명과 낯익은 오리가 결합된 정서적 갈등의 산물이다. 추억의 향수와 타국생활의 고독감이 소용돌이치는 정서적 갈등을 겪고 있는 화자는 물 위에 떠 있는 한 마리 오리처럼 오랫동안 떠나지 못하고 멍하니 서 있을 뿐이다.

기다리는 임도 없이 날개 활짝 펴지도 못하고 하염없이 출렁이는 물결따라 한들거리는 오리는 동일시 된 시인 자신의 모습이다. 함부르크 항구에 서 있는 한국 태생의 한 여류 시인의 모습은 쓸쓸하고 한스럽게 연상된다. “붉게 타던 저녁놀은 사라지고 어제 같은 어둠은 밀려오는데 홀로 서 있는 나처럼”에서 이 시인이 겪는 외로움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최숙녀의 시가 그려낸 이방인의 소외감과 막막한 고독감은 그 끝이 어디인지 보이질 않는다. 멀고, 희미하고, 길고도 넓다.

 

 (1)라인-마인 두물머리에 서면 강물 소리 들리지.

반질거린 장독대의 질항아리처럼 반짝이는 강물 소리

(중략)

라인-마인 두물머리에 서면 새삼스런 강물소리 실컷 들을 수 있지

고향의 여울에 남겨두고 온 봄날의 꽃구름 한 자락 흐르고,

촉석루 처마 끝에 걸린 낮달처럼 희미한 기억 속을 흘러가는 남강 물소리,

(중략)

갈래머리 세라복에 새하얀 깃이 눈부시던 여고생 민낯에

물고기 비늘처럼 반작이며 젖어오던 물소리-

(중략)

머나먼 이국의 하늘 아래

라인-마인 두물머리 갈대밭 언덕에서 저무는 물소리 듣고 있네.

(중략)

낙화에 노을 비친 라인-마인 두물머리에 나 홀로 서서

이승의 마지막 소리인양 물소리 듣고

                                               -“낙화에 노을 비치다“ 부분

 

 (2)그대는 50년 전 김포공항 떠난

파독 근로자 광부 아저씨

지팡이 짚고 하늘보고

무거운 다리 끌고 걸어가네

(중략)

다른 땅 다른 하늘 아래

흔들리는 다리에 기대며

책 속에서 살아가는 문인

외국 땅 이곳이 고향인 것을.

                                         "문패 없는 노인“ 부분

 (1)의 시에서는 라인-마인 두물머리에서 듣는 이향(異鄕)의 물소리와 고향의 남강물 소리를 연상작용으로 결부시킨 정서적 콜라쥬 기법을 활용하고 있다. 시공을 초월한 한 순간의 정서를 집약적으로 표출해내고 있다.

각기 다른 두 강물 소리의 음향(音響)은 이 시인만이 소화해 낼 수 있는 개성적이고 독창적인 여운으로서 생생하게 귓전을 울려주고 있다.

 (2)의 시에서는 동병상련(同病相憐)의 소외감을 진솔하게 노래하고 있다. 재독한인의 노시인에 대한 화자의 인식은 가식 없는 자아의식의 절실한 공감 영역이다. 간접화법을 이용한 자기 드러냄의 통렬한 시적 울부짖음이다.

 4. 삶의 성찰과 고독의 반추


 최숙녀 시의 또 다른 기류는 삶의 성찰과 고독의 반추이다.

이 시인의 성찰된 삶의 방식은 반듯한 외길이다. 그 외길에서 감당해야 하는 고독감은 순리적으로 받아드리는 침묵 속의 되새김질이다. 이러한 삶의 방식은 그의 시에서도 잘 나타나며, 타인이 흉내 낼 수 없는 개성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이 시인의 시적 성향은 그의 삶의 과정에서 생성된 자연스러움이다. 억지 부리지 않는 순리적인 조화로움은 최숙녀 시의 진솔성을 더 넓게 확장시키는 시정신의 요체가 되고 있다. 굽어질 수도 굽힐 수도 없는 반듯한 삶의 외길에 서서 자신의 삶을 진지하게 성찰하며 음미하는 한 여류 시인의 모습은 그윽하고 아름답다.

이러한 시적 영상이 50년의 세월과 이국의 하늘 아래서 아른거리는 그림으로 그려지면서 더 절실한 시적 감응(感應)을 이르키게 한다.

 

 어디서 왔을까?

욕조 안의 거미 한 마리

밖으로 나오려고 발버둥 치네

 

하늘이 보이는 창문을 향해

몇 번이고 기어오르다 떨어지곤 하네

 

목숨 걸고 허우적대는 거미를 보면서

아팠던 나의 지난 삶을 생각한다.

 

인간의 삶도 동물의 본능도

생명의 몸짓으로 바둥대는 것

창틈으로 찬바람 무심하게 새어드네

 

피 냄새 돈 냄새 잘 챙기는 너, 거미야

창 넘어로 너를 넘겨주면 독거미 될 거지.

입으로 네 다리를 물고 독을 품는

앙큼한 암컷의 거미야!

                                             -“욕조 안의 거미” 전문

 욕조 안에 갇힌 거미의 발버둥을 통하여 삶에 대한 성찰된 의식을 시의 양식으로 구현한 것이다. 첫 구절부터 “어디서 왔을까”라고 삶에 대한 깊은 회의를 드러내고 있다. 밖으로 나오려고 발버둥치는 거미의 몸짓을 바라보는 시적 화자는 삶의 극복의지를 비애스럽게 회상하고 있다. 자신이 겪어온 삶의 과정에서 어렵고 험난했던 고갯길의 회한을 거미에 투사시켜 동일시하고 있는 것이다.

창문을 향해 몇 번이고 기어오르다 떨어지면서 목숨 걸고 허우적대는 거미는 화자의 의식 안에서 고물거리는 형국이다. 눈앞에서 바둥거리는 거미의 생존본능의 몸부림을 시인 자신의 모습으로 치환하여 의미심장하게 주시하고 있다. 창틈으로는 생노병사의 자연법칙인양 찬바람이 무심하게 새어든다.

 피냄새 나는 생존경쟁의 가혹한 현실의 벽을 뛰어넘을 수 없다는 음미된 삶의 진실을 새겨보는 것이다. “창 너머로 너를 넘겨 주면 독거미 될거지, 네 다리를 물고 독을 품는 앙큼한 암컷의 거미야”(4연)라는 시의 문맥에서 삶에 대한 현실과 이상의 간극을 독거미와 창 너머 밝은 세계를 대비시켜 비유적 이미지로 표출하고 있다. 여기서 왜 하필이면 “암컷의 거미“일까. 그것은 시적 화자의 여심(女心)에서 오는 자연스런 욕구의 발로일 것이다.

 

 북풍한설 혹한 가운데

눈 쌓인 정원 한 모퉁이에

눈의 요정처럼

하얀 눈을 헤집고 꽃을 피워내는

사파이어 같은 눈초롱꽃

 

 모든 것이 얼어붙은

눈밭 속에서

생명의 움을 싹 틔우는 눈초롱꽃에서

나는 인고의 세월을 살아온

내 모습을 봅니다

 

얼어붙은 흙을 뚫고 나와

쌓인 눈을 헤집으며

꽃을 피워내는 눈초롱꽃이

생명의 끈질김을 속삭이듯

내게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눈초롱꽃” 전문

 눈초롱꽃은 애처럽고 잊을 수 없는 삶의 고난을 이겨온 회자의 삶을 은유적으로 그려낸 시다. 애처롭게 빛나는 눈초롱꽃의 생명성에 대한 화자의 삶을 빗댄 표현방식이다. 인고의 세월을 살아온 시인 자신의 모습을 눈초롱꽃을 보듯 사색의 심안으로 응시하고 있는 것이다.

눈 쌓인 동토의 겉살을 헤집고 꽃을 피워내는 끈질긴 생명의 숭고함을 일깨워주는 깨달음의 환희를 새기는 시인의 영상은 지성적으로 아름답다. 경이롭고 신비로운 생명의 꽃, -눈초롱꽃은 하늘이 내려준 시인 자신의 꽃다운 삶(생명)의 모습이다. 순백한 눈을 헤집고 피어난 지상의 눈초롱꽃은 최숙녀 시인이 그려낸 선망의 꽃으로 다른 사람의 의식 내에서 거듭 피어나는 관념의 꽃이기도 하다.

 

 어겼던 약속을 내 눈물로 적시고,

먼 후세에서 다시 만나자는 굳은 언약으로

기린처럼 목을 빼고 기다리기도 했었다

길고 험한 세월의 강물에

조바심은 강풍으로 몰아치고,

피할 수 없는 시련에 마음도 흔들리고,

어두운 이향의 하늘 아래서

돌아갈 수 없는 한 마리 할미새로

슬피 울었다

사랑한다고

그립다고

텅 빈 하늘에 대고 절규했던 한 가닥 순정도

되돌아오는 메아리는 오해였다

어긴 것도, 잊은 것도 덧없이 흘러가고

지금, 나의 온몸을 감싸고도는

그리움의 물망초는 가슴속에서 회오리친다.

                                                                -“물망초” 전문

 물망초에서 읽어낼 수 있는 시적 메시지는 관념화 된 사랑과 비애의 형상물이다.

의식 내에서 싹튼 관념적인 물망초는 기린처럼 목을 빼고 기다리는 모습의 형상이고, 세월의 강물에 조바심치며 쓰러지는 꽃대에 매달린 풀잎이며, 돌아갈 수 없는 한 마리 할미새로 절규하는 오해의 갈대풀이다. 어두운 이향의 하늘 아래서 슬픔에 쌓여있는 화자는 사랑한다고, 그립다고 텅 빈 하늘에 대고 절규하고 있다.

 티 없이 맑은 순정은 오해로 되돌아 온 메아리가 되었다. 순정과 오해가 빚어낸 갈등의 물망초는 최숙녀가 걸어온 삶의 깊은 계곡에서 잊혀지지 않는 마음의 꽃으로 남아 지금도 잡초속에서 거듭 피어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삶의 긴 여정에서 미해결의 과제로 남은 그리움의 물망초는 최숙녀의 시적 자화상으로 읽혀지는 또 다른 면모를 보여주기도 한다.

 

 억울한 마음 하소연 할 곳이 없지만

괴로운 나를 달래주는 뜨거운 눈물의 강에

슬픔도 함께 띄워 보낸다.

 

고향이 그리워 미칠 것 같은 가슴 안고

네모진 방안에서 어쩔 줄 모르고 헤맬 때

가슴속 응어리를 풀어주는 너, 눈물-

 

삶이 힘겹고 고달플 때,

이승과 저승을 저울질하는 구름다리에서도

소리 없이 흘러내린 너, 뜨거운 눈물

 

기다림에 지치고 갈 길은 멀지만

흥건히 적셔주고 달래주는 보석 같은, 너

평생의 반려자가 되어버린 뜨거운 눈물

 

사막처럼 황막한 내 가슴에

오아시스의 샘물 같은 선약의 눈물...

                                                -“뜨거운 눈물” 전문

 이 시에서 “너”와 “눈물”과 “화자”는 의식화 된 동일체이다. 의인화 된 눈물은 시인의 슬픔이며 고독의 상징물이다. 뜨거운 눈물의 강에 띄워 보내는 비애스런 화자의 마음과, 네모진 방안에서 뒹굴면서 흘리는 뜨거운 눈물과, 평생의 반려자가 되어버린 눈물의 현란함과, 오아시스 샘물 같은 선약의 눈물과 같은 눈물의 총체는 외로운 시인의 고독한 자화상이다. 이 시에서 눈물의 온도는 죽음에 이를 수 있는 높은 온도이다.

이승과 저승을 잇는 구름다리에서 흘러내린다는 표현에서 죽음까지 예견되는 뜨겁게 달궈진 눈물임을 말해준다. 고독한 시인의 자화상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은 그만큼 강렬하다. 이러한 눈물의 뜨거움은 생의 에너지이며 외로움의 카타르시스다.

 

 미나리 화분에 매일 물을 줍니다.

물과 햇빛으로 자라는 내 사랑초

오랫동안 눈 맞춰 바라보면서

삶의 꿈을 심어놓고 울보가 되었습니다.

(중략)

내 마음의 터전에 삿뿐이 들어와

당신의 향기 피워 주기를 바라지만

비안개로 덮인 당신의 호수에 닿지 못합니다.

 

오늘도 미나리 꽃을 응시하며

그대 모습 그립니다.

해종일 화분을 쓰다듬어 닦으면서

그대의 호숫가를 서성입니다.

                                        (끝연 생략)

 이 시에서 미나리 화분, 당신, 울보, 당신의 호수, 미나리꽃 등의 이미지는 모두 시인의 고독감으로 채색된 구체적인 물상이다. 외롭고 쓸쓸한 정서로 물들여진 시적 사물들은 모자이크된 시인의 고독한 형상이다. 미나리 화분에 물을 주는 동작에서 펼쳐지는 사유의 파문은 고독을 반추하는 화자의 내면이 유동적임을 알 수 있다.

고독한 모습의 동영상은 긴 이야기를 이끌어내는 고독의 장구성(長久性)을 암시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삶의 꿈을 심어놓고 울보가 되었습니다(2연)는 이 시의 핵심 주제라 할 수 있고, 울보가 된 시인은 화분의 미나리꽃으로 고독하게 피어나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언급한 시는 최숙녀 시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서두에서 밝힌 핵심 키워드에 적합한 시를 선택적으로 분석한 것이다.

최숙녀의 “등대”가 국내외의 여러 곳에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더 멀리, 더 밝게 비춰지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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