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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국 장편소설 <꿈꾸는 설악> 연재 59회
2010-05-08 12:26:58
38hwakook

조회:1367
추천:100
소설 <꿈꾸는 설악> 연재 59회|시와 소설 / 이화국
 

           

                   21. 1984년 9월 1일

 

   다음 날, 그러니까 정확하게 1984년 9월 1일부터 왼 삼일간을 폭우가 내렸다.

    대단한 빗줄기였다. 대홍수였다. 뻘건 흙탕물이 다리를 삼키면서 바다로 투신했다.

기상청엔 기록이 남아있을 것이다.

 

    홍수가 몰려오는 그 때에 민호는 강릉에 볼 일이 있어 다녀온다면서 집을 나섰다.

관광객이란 개미도 없으니 붙잡을 구실을 끌어대기도 뭣하여 선희는 그러라고 풀어주었다.

이미 바지도 다려 입었고, 구두도 닦아 신고 방문 앞에 서 있는데 뭐라 말하랴!

 

    외출복으로 깨끗이 차려 입고 나선 민호는 키가 훤칠 더 커 보이고 아주 어른스러워 보였다.

비가 오기 시작한 것은 세 사람이 산에 갔다 돌아온 날 새벽 부터였지만 그토록이나 심한 홍수가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일분은 고사하고 일 초도 쉬임 없이 똑같은 강도와 리듬을 타고 줄기차게 쏟아졌다.

이 세상을 내려다보고 계시던 하느님이 잘못 돌아가는 꼴들이 보기 싫어 싹쓸이 할 요량이신

모양이었다.

싹쓸이   

    선희는 양양행 시내버스에 몸을 실었다. 물구경 간다는 핑계였지만 민호가 사라져간 그 행방의

반이라도 가보고 싶은 심사였다. 시내버스는 양양에 들어서지 못하고 중간에서 회차되었다.

흙탕물이 행길 위까지 범람하여 그 속도로 비가 내리면 양양에 들어갈 수는 있으나 돌아올 수 없는

지경이 된다는 운전기사의 설명이었다.

 

    전후좌후에 넘실대는 흙탕물의 황토 일색은 생명에 대한 위협이었다. 두려웠다. 지옥에서 올라온

사자의 붉은 혓바닥이 저럴 것이었다. 푸른 바다, 푸른 파도는 어림없는 옛날 얘기다.

바다도 빨갛고 파도도 빨갰다. 빨갛게 변한 파도가 해안선을 넘어올 듯한 기세로 파도의 갈기를

높이 세우며 달려들었다.

 

     털이 빨간 미친 짐승이 떼를 지어 날뛰는 것처럼 보였다.

    선희는 민호를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국에서도 속초 강우량이 최고로써 631미리라고

뉴스가 나온 후 TV도 끊어져서 모든 소식이 두절되었다.

 

    비가 미워서 비소리 보다 더 크게 전축의 볼륨을 올려 놓았지만 불안은 가시지 않았다.

일찍이 이런 비와 홍수를 만난 적이 없지만 또한 이렇게 조바심치며 사람을 기다린 기억은 더더욱

없었다. 안전부절이란 말이 적절했다. 대문 밖을 나서 옷이 홈빡 젖어 들어오기 몇 번인가.

우산을 써도 빗줄기가 하도 세어서 옷이 다 젖었다.

 

    B지구로 올라가는 청봉교의 교량 한 쪽이 센 물살을 견디지 못하고 쓸려 내려갔다.

대문 밖 신작로까지 차오른 물이 넘실넘실 발목을 적셨다. 이대로 계속 되다가는 지하에 있는 식당

으로 먼저 물이 쓸려 들 위험에 처해 있었다.

    홍수

    속초에서 강릉은 가까웠기에 민호가 행선지를 강릉이라고 말했을 때 선희는 막연히 당일에 돌아

온다고 믿었다. 그러나 비 내리기 하루, 이틀, 사흘 그리고 나흘, 닷새 동안

민호는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서울에도 비가 많이 왔을 텐데 선희는 서울에 두고온 애들이 걱정되었다.

살림집도 팔아서 안 되는 사업에 보태 넣었기 때문에 남의 집에 세들어 사는 주제에 집이 떠내려

간다 한들 걱정할 입장이 아니었지만 제일 사랑하는 막내아들 훈이는 금방 젖 떨어진 어린애 같이만

여겨져서 염려되는 마음이 더욱 컸다.

 

    정민호도 결국은 막내 같은 놈일 뿐인데 참으로 이해가 안 되는 감정의 행방이었다. 기분 전환을

위하여 민호가 얹어 놓고 자주 듣던 마이클 잭슨의 빌리 진을 듣기로 했다.

막내도 이 노래 배우느라고 한창 열을 올리던 모습이 보고 싶었다.

 

    제 친구들이랑 여름 방학에 내려왔을 때 술은 어른 앞에서 배워야 한다면서 맘놓고 마시라고 했

더니 술이 취해서는 마이클 잭슨의 춤을 춘다고 한 손에만 하얀 장갑을 끼고 뒷발걸음질을 치면서

춤추던 꼴이라니 우습고도 이뻐보였었다. 눈에 사진 박힌 그 모습을 속으로 불러보았다.

 

    공상이나 상상은 좋은 거였다. 마법의 양탄자를 타고 어디를 날으든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인생이 비극이라고 생각될 때 공상과 상상속의 세계로 잠입하는 일이야말로 링거병을 매달고 침대

위에 누워 있는 것 보다 숨통을 여는 첩경일 터였다.

 

    환상과 현실 사이에 놓인 가교를 우리는 건너야 한다. 그럴 때 사람은 꿈을 꾼다.

그 꿈꾸는 사람들을 시간은 때가 되면 가장 알맞은 자리에 옮겨다 놓는다.

그러한 신뢰만 있으면 된다. 그는 기다릴 줄 아는 사람임이 분명하다.

신뢰    

    사람을 사랑하면서 사랑이 인생이란 걸 배우며, 사람을 떠나보내면서 슬픔이 인생이란 걸 느끼고,

 떠난 사람이 돌아오길 기다리면서 우리는 기다림이 인생이란 걸 깨닫는다.

 

 

           너를 사랑하다가

          사랑이 인생이란 걸 처음 알았다

 

          너를 보내고

          슬픔이 인생이란 걸 처음 느꼈다

 

          너 돌아오길 기다리다가

          기다림이 인생이란 걸 처음 배웠다

 

          사랑하고 이별하고 기다리는 일로

          세월이 다 간다

 

          선 나무에 우두커니 기대서서

          나는 선 자리에 못 박히는 중이다.

 

 

    그녀는 그렇게 글로 적어보았다.

    기꺼이 기다린다는 것은 지혜이며 예술이고 기술이다. 기다림이 곧 삶이다.

병이 나을까를 기다리고, 더 좋은 날이 있을까를 기다리며, 마지막엔 천국에 간다는 소망으로

그 날까지도 기다린다. 선희도 예외일 수 없었다.

 

    그래서 기다리고 있었다. 민호는 이대로 안 돌아올지 모른다.

언제 떠날 것인가를 곰곰 생각해왔던 터였으니까 그가 안 돌아온다 해도 크게 상처 받거나 문제될

일은 없었다. 선희는 민호가 이젠 안 돌아올 사람이라고 체념하기로 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것은 사랑 받느니 보다 행복하다는 시를 읽으며 위로 받을 일만 남았다.

자기만을 사랑하는 것은 이기적이지만 타인을 사랑함은 신을 닮아 가는 지름길이다.

사랑했음으로 신에게 가까워졌다면 영광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사랑에는 영광이 있을 진저!

 

    다만 지금은 아무도 없다. 고독하고 슬프다. 그리고 배가 고프다. 무한한 공복감 때문에 모두들

자기를 버리고 떠났다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죤 두이의 실용주의에 기울었던 현실적인 선희가 감히

사랑에 빠졌다고는 말 못하고, 감상과 허상의 노예가 되었다고 자책했다.

 감상과 허상

    자기를 학대하면서 ‘그래 나는 노예다. 신의 노예, 운명의 노예, 시간의 노예, 환경의 노예, 돈의

노예, 사랑의 노예, 무의미의 노예, 허무의 노예, 그래 그 모든 것의 노예다.’

그렇게 뱉고 나니 사지가 나른히 무너져 내리는 무력감이 와서 선희는 스스로를 방구석에 몰아넣고

밀폐시켰다.

 

    비를 맞고 들어와 젖은 옷을 갈아 입었지만 오한이 엄습했다. 추웠다. 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

써도 추울 뿐이었다. 하도 춥고 외로워서 선희는 홀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찾아낸

노래가 어머니의 자장가였다. 다음은 고향 노래였다. 내 고향으로 날 보내주, 나의 살던 고향은…

 

    그 다음이 초등학교 때 부르던 동요였다. 그 다음은 가곡, 그 다음이 찬송가였다.

가사를 외워 아는 노래는 입속으로 다 불렀다. 그리고 마지막에 가서는 자기가 가사를 지어서 불렀다.

생각나는 대로 만들어 읊은 가사는 곧 잊어버림으로 선희는 그것을 종이 위에 썼다.

그런 것을 시라고 하는지 모르지만 꽤 괜찮았다.

 

    써놓고 한참 후에 보면 자기가 쓴 글 같지 않았다.

이렇게 멋있는 생각을 누가 했을까 할만큼 의아했다. 선희는 무병(巫病)을 앓다가 신을 받아서

예언하는 사람처럼 예언자의 목소리로 노래하고 있었다.

 

    하늘이 하는 말과 땅이 하는 말과 나무가 하는 말들이 귀속으로 들어오면 그 말을 종이 위에 받아

적는 것이다. 무생물 조차도 표정이 있고 마음이 있으며, 서로간의 애환을 교감할 수 있다는 신비를

깨닫는 경이 속에서 선희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계속)

 



   메모
ID : pbj3515    
2010-05-14    
06:29:12    
이화국시인님. 작품 보고 갑니다. <신비를 깨닫는 경이> 가슴에 색이고 갑니다. 박명자
ID : 38hwakook    
2010-06-23    
08:47:51    
언제 다녀가셨습니까? 주인공과 차 한 잔 마시라고 성금까지 주셨던 일을 잊지 못합니다. 그 주인공은 가짜일 뿐인데... 아름다운 연애를 못 해보아서 아름답게 그려보았을 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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