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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국 장편소설 <꿈꾸는 설악> 연재 58회
2010-05-08 12:24:18
38hwakook

조회:2504
추천:98
소설 <꿈꾸는 설악> 연재 58회|시와 소설 / 이화국  

 

   십자가를 대신 져달라면 내가 져주마.

    그러나 선희는 민호를 위해 무엇을 해줄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에 절망했다.

낮게 드리운 구름이 삼켰는지 메아리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 낮은 구름 사이로 선희는 하늘에 부웅 떠 있는 산을 보았다. 산이 공중에 매달린 것처럼

보였다. 오직 시커먼 물체로 비를 잔뜩 머금은 구름덩이라고 생각했다가 그것이 산이라고 깨달

은 것은 한참 뒤였다.

금시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릴 것 처럼 가까이 있었다. 가슴이 뛰었다. 놀랍고 두려웠다.

구름덩이 

  “야 저 산 좀 보세요. 밑뿌리가 하나도 없이 꼭 공중에 매달린 것처럼 보여요. 산이 아니라 엄청

큰 바위 같아요. 시커먼 바위요.” 

   그랬다. 사람의 느낌은 닮은 데가 있나 보았다.

 

   큰 바위덩이 하나가 전연 거리감도 없이 바로 머리 위 공중에서 비행물체처럼 맴도는 것이었다.

무슨 착시 현상이었을까. 산인 줄 알면서도 압사할 것 같은 공포로 가슴이 두근거리면서 현깃증이

일어났다.

    그때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가까운 건물의 추녀 밑을 찾아 들어섰다. 케이블 카 매점 쪽이었다.

  “의심 받아. 가게 앞에 서성이면 도둑인 줄 알고... 저기 저쪽으로 가자.” 

    선희가 말했다. 가게를 떠나 반대 켠 문 닫은 식당 쪽으로 왔으나 비를 가려줄 추녀가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었다.

 

    마음과 몸이 떨리는 속에 서성이노라니 불이 환히 켜진 공중 변소가 눈에 들어왔다. 관리인의

소흘이었을까. 사람도 없는데 밤새 불을 켜 놓다니 부주의한 관리를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군이 냅다 그리로 달려갔다. 용변이 급한 모양이었다.

 

    선희는 추녀가 있는지 없는지 모를 건물의 벽을 의지하여 섰다. 민호가 가까이로 걸어왔다.

선희가 입을 열었다.

  “영아는 죽었지만 참 행복한 아이구나. 민호가 그토록 사랑해주니까.”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가 사뭇 떨려 나왔다. 무슨 감상인지 몰랐다. 어둔 밤은 모든 것을 숨겨

줄 수 있어서 참 다행이었다. 그 때 천둥 소리도 내지 않은 번개가 번쩍 했다.

밤이라서 잘 보이진 않지만 엄청난 비가 준비되고 있는 모양이었다.

     행복

    선희는 민호에게 숨이 막힐 정도로 정신을 잃기까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온갖 것으로 정말로

정말로 영아를 사랑했더냐고 묻고 싶었지만 참았다. 선희가 두 손을 뒤로 돌려 벽에 기대면서

고쳐서는 찰라에 민호의 억센 두 팔 안에 감금이 되었다.

 

    오래 묻어둔 욕망이 표면으로 나오려고 안간힘을 썼다.

배워서 익혀온 그럴 듯한 그 모든 가치에 위배되는 욕망은 단순하면서도 그 힘은 강렬한 것이

었다. 수세기에 걸친 문화에 의해 적절하다고 검증되어진 가치들과 문명인의 엄정한 질서에 저항하는 욕망은 사나운 것이었다.

 

   하지만 히스크리프 품에 안겨 숨을 거둘 때 캐시의 두 팔이 힘없이 내려져 있었던 것처럼 선희

의 두 팔도 힘없이 늘어져 있기만 했다. 그 두 팔이 어느 방향으로 가야할지 난감할 따름이었다.

 

    그렇게 원했었는데도 편안한 의탁을 느낄 수 없는 채로 시간이 멈추기를 소원했다.

가변 위에 시간을 매두려는 몸짓은 가엾지 않을 수 없었다. 할 말이 많았던 것 같은데 모든 말이

실종된 상태였다. 아무 말도 못하고 서있는 선희의 입술 위로 민호의 입술이 포개졌다.

 

    드디어 선희는 두 팔을 들어 그를 껴안았다. 그것은 찰라였지만 고압선에 감전된 듯 뜨거운

전류가 머리 끝에서 발 끝으로 순간에 흘러내렸다.

  “때로는 엄마처럼, 때로는 연인처럼.” 

 

    그렇게 뇌고 있는 민호의 뜨거운 숨결이 선희의 오른 쪽 귀밑을 스쳐갔다.

독백을 하는 것 같았다. 선희는 굳이 자기가 지켜온 성(城)을 부술 용기가 없었다. 진부한 통념

으로 위장된 표면이 두터워서 그 껍질을 깨기에는 시간이 모자란지도 몰랐다.

통념    

    말을 잃어버린 벙어리이기나 한 것처럼 선희는 마냥 서있을 뿐이었다.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 말은 너무 가벼운 것 같았다. 마음을 가벼운 말에 실으면 상대

에게 그 의미가 전달되기도 전에 어딘가로 진정한 마음이 새어 나가버릴 것 같았다.

 

    민호가 두 번째로 선희의 눈 위에 입맞춤을 했다. 선희는 갑자기 민호가 써놓았던 작은 공책

속의 글귀를 떠올렸다. 입은 거짓말도 하지만 눈은 입술보다 더 진실한 마음을 담기 때문에

정한 사랑을 다시 하게 되면 그 때는 눈에 입맞출 거라던 그의 말이 생각나서 선희는 감격했다.

그 감격으로 온 몸이 떨려왔다.

 

    아직도 비룡교 입구에 자리한 자판기에서는 빨간 불이 감시자의 눈길처럼 반짝였다.

그때 이군이 돌아왔다.

  “어떻게 하죠?” 

 

    선희는 꿈을 꾸다가 깬 사람처럼 갑자기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찾지 못했다.

  “빗줄기가 심하진 않으니 우선 뉴설악 호텔까지 가보죠.” 

    이군이 그렇게 말했다. 참 어두웠다.

 

    어둠의 공포와 잠시 전 두 다리에서 아래로 쓸려내려간 모종의 기운으로 하여 발에 돌을 매

달은 듯 무거웠다. 빗줄기가 심해질 기미를 보임으로 빨리 내려가야 할 참이었다.

셋은 부지런히 걸었다. 역시 침묵은 민호가 아니라 선희가 먼저 깨야만 했다.

 

  “이군 시간 좀 보지.” 

    이군이 라이타를 켜 시계를 보았다.

  “네 시에요.” 

  “몇 시에 해가 뜨던가?” 

   라이타

  “다섯 시는 넘어야 할 걸요.” 

  “우리가 잘못 했네. 세 시에 출발했으면 일출까지 보는 건데.” 

  “일출이야 바다에 나가 봐야 근사하죠.” 

 

  “그렇군.” 

    별로 긴한 얘기도 아닌 것을 지껄이며 걷는데 이상하게 신작로가 훤해왔다.

소공원으로 올라갈 때보다 어둡지 않았다. 호텔 파크에서 새어나오는 빛에 길을 분별할 수 있었

는데 올라갈 때는 빛을 등에 졌기 때문이었을 게다. 그 때 선희의 머리에 한 생각이 떠올랐다.

 

  “저 말이야. 우리 20년 뒤에 다시 만나보면 어떨까. 오늘이 1984년 그리고 8월 말일이니 꼭

이십 년 뒤 오늘 여기서.” 

  “그것 참 재미 있겠는데요.” 

 

  “재미가 아니고 오늘의 이 시간을 그만큼 의미 있게 생각하느냔 뜻이지.” 

    구름 위의 방랑객 같은 민호가 물었다.

  “그 사이 한 번도 안 만나고요?” 

 

  “그거야 내년에 만나면 19년 뒤가 되고, 후년에 만나면 18년 뒤가 되는 거지.” 

  “후후후 제가 오십이 다 되겠네요.” 

    이군이 웃었다.

 

  “이 열병 앓는 정군의 변화된 모습도 궁금하고, 이군은 그 때 쯤 머리를 잘랐을라나?

아이는 몇을 낳고… 재미있겠지? 그런 만남 그 일이 실제로 가능할까?” 

가능     

  “오늘 우리 여기서 맹세해요. 상상이 안 가지만 환갑 넘긴 사모님의 모습도 보고 싶으니까요.” 

  “혹시 머루술 취해서 하는 소리 아니겠지? 그래 약속하자. 그런데 말야.” 

    선희는 토를 달았다.

 

 “우리 오늘 산에 왔었다는 얘기는 영원히 비밀로 하기야. 이 야밤에 여길 왔다고 하면 사람들이

우리를 미치광이 취급할 거 아니야? 꼭이다.” 

    발걸음을 멈추고 민호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셋은 손도장을 꼭꼭 찍어 약속했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현관에 들어서기 무섭게 거센 빗줄기가 바가지로 퍼붓듯 쏟아지기

시작했다.

  “우리 공원에 갔다오라고 하느님도 봐주셨는데요. 집에 오자 마자 쏟아지니.” 

    이군의 말이었다.

 

    이군은 민호의 방에서 함께 자고 아침에 자운 모텔로 돌아갔다.

    아무 일 없었던 듯 모두는 일상의 자기 자리를 찾아간 셈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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