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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국 장편소설 <꿈꾸는 설악> 연재 57회
2010-05-08 12:21:29
38hwakook

조회:1474
추천:113
소설 <꿈꾸는 설악> 연재 57회|시와 소설 / 이화국  

 

  길가에 선 나무들이 일제히 머리 풀고 어딘가로 줄을 서서 가고 있었다.

   그렇게나 많이, 넓게 자리한 검정색을 본 일이 없다. 단 한 가지 색으로만 칠해진 그림을 본 일이

없듯이. 검정이 아니라도 단색이 주는 강렬함에 빠지는 일은 공포이다.

 

   흰 눈이 끝도 없이 쌓인 길에서 길을 잃고 속수무책이던 그 밤의 느낌도 아마 지금 같은 공포였다고

기억되었다. 사막도 그렇지 않은가? 다른 점이 없으리라. 무수한 검은 실타래들이 풀어져 귀신의 머리

형상을 하고 있는 길을 걷노라니 시커먼 동굴 속에 갇혀 있는 느낌이었다.

 

    한낮에는 하늘이 안 보이던 숲의 터널이었는데 검은 깃발만 상장(喪章)처럼 꽂혀 있었다. 수많은

혼백들의 잔치가 벌어진 것 같았다. 이쪽에서는 안 보이지만 저쪽에서는 잘 보이는 눈들이 주시하는

것처럼 여겨져서 오싹했다. 나무는 밤에만 머리를 감는 모양이었다. 모두가 산발을 하고 있었다.

喪章

    만약에 바람이 휘휘 불어왔다면 선희는 귀신의 휘파람 소리로 착각하여 까무라쳤을지 모른다.

이런 밤의 방황 없이, 이런 색깔의 의미를 읽을 줄 모른 채 안일하게 살아왔다는 일이 다행인 채로

민호에게 부끄러웠다.

 

    일찍이 연애를 한 민호는 일찍이 철이 들어 있었을 터였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겪으면서

불가사의 하며 아픈 인생을 사유했을 것이고, 그 아픔으로 불면의 나날을 겪기도 했음이 자명했다.

 

   시인은 사랑에 빠져야 한다고 한다. 시인은 신세가 처참해야 한다고 한다. 민호는 사랑에 빠졌었고

애인의 죽음까지 겪는 신세였으니 비록 나이가 어리다고 해도 선희가 댈 게 아니게 성숙한 사람,

곧 그가 시인일 터였다.

 

    선희는 그 어둠 속에서 뭔가 어렴풋한 빛을 보았다. 새 생명의 탄생을 예고하는 빛일 것이라고

그 빛을 가슴으로 받았다. 사방이 무한히 깜깜한 속에서 선희는 머리를 돌려 민호를 보았지만 그는

하나의 형상에 불과했다. 눈과 코와 입이 안 보이는 얼굴은 유령과 진배 없었다.

 

    민호가 밤마다 유령이 되어 이 길을 헤매고 다녔다는 사실이 새삼 믿기지 않았다.

무언가에 완전히 몰입해 들어가는 그 단순성이야말로 어린 아이와 같은 경지가 아닐까.

그 어린 아이는 신의 나라로 들어갈 수 있는 축복 받은 존재다.

     유령

    그러므로 사랑하고, 사랑을 잃고 시인이 된 그는 신의 세계에 동참할 자격이 주어졌을 것임이

분명하다.

    선희는 그러한 논리의 전개를 자기 앞으로 돌렸다. 사랑을 했고 이제 곧 사랑은 떠나갈 것이다.

그러면 시인이 될 것이고, 그렇게 시인이 된 선희는 신의 세계에 동참할 자격이 주어지는 구원 받은

존재가 될 터이다.

 

    아전인수격인 해석인지 모르지만 엄청난 발견 속에서 선희는 소리를 지를 뻔 하였다.

선희는 자기가 시인으로 재탄생되는 예고를 감지하게 된 것 같았다. 그러므로 신은 선희를 사랑하여

그 앞에 민호를 보내준 것이리라.

 

    앞으로 많은 시를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가슴 속에서 출렁이는 싯귀들이 먼저 나오겠다고 아우성

치는 것 같이 감정이 벅차오름을 느꼈다.

 

    민호 쪽으로 눈을 던졌다. 여전히 그 얼굴이 안 보였다. 하지만 마음으로 다 볼 수 있는 길이 이미

열려 있었다.

이제 그가 이 길에 눈물을 뿌리며 밤마다 영아 영아 외치고 다닌 일을 상기하기만 하면 된다.

 

    외곬의 성품을 타고난 사람들의 특징대로 지금까지 한 가지 생각에 빠져 주위를 볼 수 없었지만

이 밤에 민호도 방황의 끝을 보리라. 아직도 민호는 신들린 사람처럼 뭔가에 이끌려 체중 없이 걷고

있다. 그 영혼이 지금 그의 몸에서 떠나 영아를 만나는 시간인지 모른다.

 

    지금 영아가 산에서 내려와 민호를 안았는지도 알 수 없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뒷 등이 으스스 했다. 가만 있다가는 가위 눌릴 것 같았다.

  “이군, 자는 거야? 얘기 좀 하지. 그 말재주 다 어디 갔어?” 

 

    이군은 한참 만에야 대꾸를 했다.

  “이 독한 새끼. 여기를 맨 날 혼자 쏘다녔단 말이지?” 

    이군도 무서웠던가 보았다. 그 말을 들었는지 말았는지 민호는 혼잣말을 했다.

혼잣말   

 “오늘은 영아가 오기 틀렸다. 너무 어두워. 다른 날은 별도 많았고 달도 있었지.” 

    그 말이 끝나자 앞이 약간 훤해졌다. 뉴설악 호텔 건물이 나타나고 있었다.

선희는 가쁘게 숨을 내 쉬었다. 심호흡을 했다. 열병 앓는 사람의 열기가 전해졌는지 숨이

가빠왔던 것이다.

 

  “좀 쉬었다 가자.” 

    선희는 호텔 입구 행길에 털썩 주저앉았다. 오금이 저렸다. 눈이 온 날은 그 새하얀 세계에 반해

가끔 걸어서 소공원에 다다른 적이 있긴 했다.

 

    사십여 분이 걸렸는데 달도 별도 없는 이 밤길은 네 시간이 좋이 걸리는 것 같았다.

  “우리 그냥 돌아 갈까?” 

    꽃 한 송이, 풀 한 포기, 산새와 다람쥐 한 마리 보이지 않는 산길은 길이 아니었다.

 

    음산하게 돌아가는 기류가 마왕이 내뿜는 입김 같았다

  “소공원 다 왔어요. 금방이에요.” 

    이군의 말이었다. 뉴설악 호텔에서 소공원은 의외로 가까웠다. 드디어 소공원에 닿았다.

 

    그리도 북적대던 낮의 인파들은 다 어디로 잠적했는지 세 사람만이 유일한 구경꾼이었다.

케이블 카 탑신의 붉은 등이 마왕의 눈빛처럼 빛을 발했다. 비룡교 쪽으로도 반짝이는 불빛이 보였다.

탁구공만한 크기가 붉은 빛을 쏟아내는데 도깨비불이 저럴 것이었다.

 

    놀라웠다. 도대체 어둠속에서 더욱 강렬하게 내뻗는 저 빛이 무엇이란 말인가.

상상이 미치지 못했다.

 마왕의 눈빛

    일행 세 명 외에 누가 또 있는가. 이군도 민호도 그 빛이 무엇인지 모른다고 했다. 기분이 언짢은

채 두려운 발걸음으로 고양이처럼 가만가만 다가가니 커피 자동 판매기에서 내쏘는 불빛이었다.

안심했다. 그만 웃음이 나왔다. 이군이 입을 열었다.

 

  “야, 민호야. 불러 봐. 네 애인 이름.” 

    꿈꾸는 듯한 민호의 눈이 보이지 않아서 안타까웠다.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 걸까.

그의 입술이 바짝 타고 있지나 않을까.

 

  “왜 말이 없어? 밤마다 여기 와서 영아를 부른댔잖아.” 

  “오늘은 날이 흐리고 너무 어두워서 못 올 거에요.” 

    누구를 향하여 하는 말인지 ‘못 올 거에요’ 라고 공대를 쓰고 있었다. 선희가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 셋이서 큰 소리로 함께 불러보자. 새벽 잠에서라도 만날 수 있게 해주고 싶군.” 

  “사모님, 그게 좋겠네요.” 

    이군이 동의했다.

 

  “하나 둘 셋 시작. 여엉 아아아, 여엉 아아아, 여엉 아아아… ” 

   정신 나간 세 사람의 목소리가 합쳐져서 여운을 길게 끌고 산으로 하늘로 울려퍼져 올라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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