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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국 장편소설 <꿈꾸는 설악> 연재 43회
2010-05-02 10:20:07
38hwakook

조회:1248
추천:83
소설 <꿈꾸는 설악> 연재 43회|시와 소설 / 이화국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일이 내가 지금 처해 있는 환경이나 또 어떻게 할 수 없는 곤란한 처

지를 내가 모르는 다른 어떤 사람들은 능히 이겨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데에 눈을 돌려야만

하는데 김은태는 자기 선 자리가 어디쯤인지 분간을 못하는 것 같았다.

 

    무능을 착함으로 호도해서는 안 되고, 사람 좋다는 칭찬을 듣는 것이 모든 잘못을 사면 받는 면죄부

가 되어서도 안 될 일이었다. 사람살이엔 크고 작은 어떤 일들이 벌어지기 마련인데 김은태는 언제나

사건의 현장에서 몸을 사렸다.

 

   할 수 없이 앞으로 돌출할 수밖에 없는 선희는 그만큼 힘이 들고, 외로울 수밖에 없었다. 일이 잘 마

무리 되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을 때 김은태는 뒤에서 군시렁거리는 게 다반사였다. 전쟁터에서 일선

에 서서 싸우는 사람들은 전쟁에서 이기거나 지거나 둘 중 하나이고, 죽음 아니면 겨우 목숨을 부지하

거나 상처를 입기 마련이다.

 

    그런데 후방에 서있는 사람들은 상처 하나 입지 않고 가만히 앉아서 이렇게 싸웠으면 이겼을 걸,

저렇게 싸웠으면 손실이 적었을 걸 하면서 원망과 불평만 늘어놓는다.

그 얼마나 비겁한 자의 모습인가. 선희는 가장 가까이 손 잡아야 할 남편이란 사람이 그런 비겁자의

대열에 들어있다고 생각될 때 경멸스럽고 그만큼 외로움 속으로 추락함을 맛보아야 했다.

 

    어려움을 당해서 제 몸보다 큰 한 알갱이 보리를 입에 물고 담벼락을 기어오르는 개미를 닮을 수는

없는 일인가. 적어도 초점은 그렇게 맞춰져야 옳을 일이었다.

개미    

    혼인집에 가서는 내게 슬픈 일이 있더라도 웃어야 하고, 초상집에 가면 내게 기쁜 일이 있더라도

슬픈 척 해야하는 정도는 알아야 할텐데 김은태는 그렇지 못했다. 이미 숙박업 장사는 질서가 없고,

재주껏 벌어먹어야 하는 젊잖치 못한 난장판임이 뻔한데 김은태는 얼마나 예의 바른지 어쩌다 찾아온

운전 기사들은 사장님이 어려워서 다래 모텔엔 올 수 없다는 말을 내놓고 할 정도였다.

 

    손님이 많이 들라 해서 다래(多來)라고 지은 상호가 무색했다. 운전기사가 오면 나이가 많은 경우

에는 형님 하면서, 나이가 적으면 아우님 하면서 그렇게 친한 척, 다정한 척 굴어서 이 다음에도 다시

찾아오도록 우선 인간적으로 묶어두어야 하는데 김은태는 그렇지 못했다.

 

    예의 바르고 너무 점잖아서 정이 떨어지는 경우도 있는 법이다. 적어도 자기가 현재 처한 입장을

안다는 것은 중요했다. 어쨌던 살기 위해서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한 내가 맡은 역할의 연기를 해

야만 하는 것이다.

 

    어떻게 편하고, 내 맘에 쏙 드는 좋은 역할만 고집하겠는가. 그런데 김은태는 그럴 줄을 몰랐다.

타고난 성품인지 위선인지는 모르지만 그런 그를 보고 사람들은 젊잖다느니, 정직하다느니, 인심이

후하다느니, 인격자라느니, 예의 바르다거니 온갖 말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처한 입장

    울산바위를 다시 올려다 보았다. 산 꼭대기에 당당하게도 버티고 서있었다.

    선희는 고개를 숙여 사이다를 한 모금 삼켰다. 시원했다. 설악동에 묶이지 않고 저 먼데서 관광차

여행 나온 나들이였으면 얼마나 기분 좋을 것인가. 그런 날이 앞으로 내게 다가올 날이 있을까.

 

    선희가 그런 생각을 하니 잠시의 즐거움이 숨을 죽였다. 노루목 고개를 다시 넘어왔다. 어느덧 저녁

때가 되어있었다. 몇 십 명, 또는 몇 백 명의 밥을 하는 업소엔 먹을 것이 지천이지만 김은태가 저녁을

사기로 했다. 점심을 대접 받은 답례이기도 했다.

 

    상가 내에 있는 덕성관에 들러 탕수육 한 접시에 간단히 자장면을 먹기로 했다. 어쩌다 먹는 자장면

은 맛이 있었다. 집에 들어오니 조용했다. 주방장 아들 대식이가 현관에서 놀고 있는 것으로 보아 주방

장도 자리를 비운 것 같지 않고, 인기척이 나자 정민호도 카운터 방에서 나왔다.

 

    책을 읽고 있었는지 무슨 책인가 손에 들려있었다.

   방에 들어와서였다. 한일장에서 자기네가 보낸 단체를 잘 대접해주어 고맙다고 오히려 점심을 샀는데, 구태여 이런저런 얘기를 다 털어놓을 이유가 없어 다행이라고 넘어갔지만, 그 교장이 왜 고맙다고 인사

를 했는지 이상한 생각이 들었던 선희는 김은태에게 물었다.

 

  “아니 아저씨라고 불리면서 모욕을 당한 그 교장이 왜 그랬을까요?” 

  “이 사람아 왜긴. 잘못 대접 받았다고 하면 이말 저말 있었던 일들이 다 튀어나올 것 아냐. 그럼 더

망신이지. 미리 입막음 하느라고 선수를 쓴 거야.” 

  “딴은 그렇네. 교장이 역시 교장감이네.” 

  “뭐가 교장감이야? 인격은 개떡이고 잔머리 굴리는 작자가.” 

 잔머리  

    김은태의 입에서 평소에 쓰지 않던 개떡이란 말이 튀어나와 선희는 깜짝 놀랐다. 김은태는 함경도

사람치고는 사투리도 없었고, 언어나 행동이 반듯해서 가까운 주위에서는 교양 있는 도덕군자로 인정

받고 있었는데 그 말의 사나움을 보면 그도 속으론 어지간히 못마땅했던 모양이었다.

 

  “왜 여자하고 놀아서요? 남자들 다 여자 좋아 한다던데. 교장은 남자 아닌가. 당신은 통일상회 과부

댁하고 좋아 지낸다문서?”

  “누가 그딴 소리를 해?” 

  “애끼가 그러던데.” 

 

  “심심했던 모양이군. 장난치려는 게”.

    적어도 선희는 그런 문제에 대해서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과연 통일

상회 과부댁하고 좋아 지내기 때문에 선희를 향해서 냉정한 것인가 그런 의문도 가져보았다.

 

    차라리 그 편이 나을 것 같았다. 그가 건강함을 증명하는 셈이 될 테니까.

  “그렇다 치고 받은 돈은요.” 

    내놓으라는 뜻으로 선희가 손을 내밀었다.

 

  “원주상회에 외상 쌀값 갚으니 남는 게 없더군. 쌀값이 밀렸었잖아.” 

  “서울 애들한테 부칠 돈도 조금 안돼요?”

 

    장사는 언제나 그 모양이었다. 여름은 막바지에 이르고 여러 날이 아무 예약 없이 공치고 넘어가고

있었다. 뜨거운 태양을 직접 쏘이는 것 만큼이나 마음이 바작바작 타들어갔다. 초조한 나날들이었다.

    막바지

    그때 비가 한줄금 오려는지 날이 꾸무럭 했다. 곧 이어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무겁고 우울한

날이었다. 민호가 카운터에 들어가더니 전축을 작동시켰다. 저번에 들은 그 노래였다.

그런 슬픈 눈으로 나를 보지 말아요. 가버린 날들이지만 잊혀지진 않을 거에요

생각나면 들러봐요 조그만 길모퉁이 찻집…

 

    선희는 내가 이 다음 설악동을 떠나면 이 시절을 절대로 꿈에도 떠올리지 않으리라 다짐에 다짐을

거듭 했는데, 저 노래는 가버린 날들이지만 잊혀지진 않을 것이란다. 바로 민호가 있어서 잊혀지지

않는 날들이 될 것임을 선희는 알아차렸다. 노래가 전해주는 암시였다.

 

    하지만 선희는 그 암시가 민호에게로도 갔다는 점을 의심하지 않았다. 민호가 써놓은 일기에서

그의 마음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오늘처럼 비가 내리면

            창문 넘어 어렴풋이 옛 생각이 나겠지요

            흘러 나오는 노래는 옛 향기겠지요

 

 

노래의 가사 끝에 이어서

‘그래 맞다. 너에게도 나에게도 어렴풋이 옛 생각이 날 것이야’ 라고 선희는 중얼거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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