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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국 장편소설 <꿈꾸는 설악> 연재 38회
2010-04-30 10:04:16
38hwakook

조회:1239
추천:80
소설 <꿈꾸는 설악> 연재 38회|시와 소설 / 이화국

  

15.얼굴 바뀌는 시간  

 

 

 

   오한이 나는 것 같았다. 춥다고 느꼈고 이마에 손을 대어보니 열기가 느껴졌다. 약을 찾기도 귀찮

아서 가만히 있었다. 그런대로 잠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 주방장이 노크를 했다.

  “사모님, 주무셔유? 우리 파티 해야쥬. 큰 방에다 다 준비해 놨는디유.” 

파티    

    선희는 몸이 무거워 그대로 누워 있고 싶었지만 억지로 밖으로 나왔다. 파티라고 해야 삼겹살을 구

워서 상추쌈에 싸먹는 게 고작인데 먹는 일보다는 그렇게 휴식을 갖는 일이 더 즐거웠다. 자유롭게 노

래 하며 의미 없는 말도 지껄여 보는 것이다.

 

    녹슨 파이프를 청소하듯이 상추쌈에 고기를 싸서 목구멍도 청소하고, 몸둥어리를 악기 삼아 노래를

불러야 한다. 내가 부르는 노래는 나의 생명이다. 그대가 부르는 노래는 그대의 생명이다. 내일 구하지

말고 오늘 주어진 삶을 노래해야 한다.

 

    밤하늘엔 별이 빛나고 새들도 오늘을 노래하고 있지 않는가. 죽은 새는 노래 할 수 없으리라. 파티

는 그렇게 노래 부르는 시간이었다. 다른 집에서는 어떤지 모르지만 다래 모텔에서는 단체 나가면

끔 벌어지는 광경이었다. 그럴 때는 선희도 잡다한 생각을 떨쳐버리고 흥얼거리기도 해보는 것이다.

 

    큰 방으로 건너오니 언제 일어났는지 민호가 벌써 와 있었고, 노군도 앉아 있었다. 선희는 민호를

바로 보기가 민망해서 외면 했다. 개스불을 올리고 고기를 굽기 시작했다. 파란 상추의 싱그런 잎새가

식욕을 부채질 했다. 소주가 한 잔씩 돌아갔다. 돌아가며 노래를 부르기로 했다.

 

  “자, 주방장이 먼저 노래의 테프를 끊읍시다. 원래 채 썰고, 자르고, 토막 치고 하는 일이 주방장 몫

이니까. 안 그래요? 이번엔 테프를 끊어 봐요. 그런 의미에서 술 한 잔 먼저 받으시고.” 

 

    선희가 그렇게 말하며 술잔을 권하자 모두 웃었다. 어쩔 수 없이 선희가 자리의 분위기를 이끌어 나

갈 책임이 있었다. 주방장이 거절하는 척 하다가 잔을 받았고, 무릎에 기대어 앉은 대식이를 옆으로 밀

쳐놓으며 일어섰다.

     술잔

            아무도 날 찾는 이 없는 외로운 이 산장에

          단풍잎만 차곡차곡 떨어져 쌓여 있네

          세상에 버림 받고오

 

 

 

    그때 선희가 손으로 제지했다.

  “그 노랜 하지 말라고 일렀는데 또 해? 전에도 부르더니… 세상에 버림 받고 사랑 마저 물리친 몸

들어 쓰라린 가슴을 안고라니 그게 뭐 좋다고.” 

 

    그랬다. 그 산장의 여인인지 뭔지를 들을 때면 마치 세상에서 버림 받고 쫓겨와 사는 신세가 선희,

바로 자기 자신 같아 처량한 생각이 들어서 그 노래가 듣기 싫어지는 것이었다.

  “깜빡 했네유, 그럼 연분홍 치마루 헐께유.” 

 

    선희도 따라서 불렀다. 술잔이 돌아갔다. 정군이 기타를 가지러 간다고 나가더니 조금 있다가 이군

이랑 함께 들어왔다. 이군에게도 술잔을 권했다. 둘러 앉은 사람들의 얼굴이 연분홍 치마처럼 분홍색

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민호가 말했다.

 

  “이 친구가 노래를 잘 불러서 제가 오랬어요.” 

  “그래? 잘 했군. 그럼 이군이 한 곡조 불러 봐요.” 

  “사모님이 먼저 하셔야죠.” 

 

  “난 노래 잘하는 사람 앞에서는 기가 죽어서.” 

  “전 사모님이 가수라고 생각한 적 한 번도 없는데요. 그렇게 말한 적도 없구요. 하하하하.”

    모두 웃었다. 그 바람에 선희가 일어섰다.

 

가수    

            잘 있거라 나는 간다 이별의 말도 없이

          떠나가는 새벽 열차 대전 발 영시 오십 분

 

 

 

    그 다음 가사가 생각나지 않았다. 그래서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했다. 잘 있거라 나는 간다 이별

의 말도 없이 떠나가는 새벽 열차… 선희는 끝을 맺지 못하고 앉아버렸다. 다음 가사는 여전히 생각나

지 않았지만 어서 떠나야겠다는, 공책속에 써놓은 민호의 말이 기억났기 때문이었다.

 

  “그 새벽 열차는 언제 떠난대유. 떠날려면 아직 멀었나 봐유.” 

    주방장이 웃겼다. 노군이 속초 사람답게 에헤야 디야 뱃노래를 힘차게 불렀고, 민호는 기타를 집어

들었다.

  “사실 저도 노래엔 소질이 없지만요.” 

 

    토를 달고야 민호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감정을 조율하는지 천정을 한동안 응시했다.

 

 

               그런 슬픈 눈으로 나를 보지 말아요

            가버린 날들이지만 잊혀지진 않을 거에요

            오늘처럼 비가 내리면

            창문 넘어 어렴풋이 옛 생각이 나겠지요

 

 

  창문 넘어

   선희는 세상에서 처음 듣는 노래 같았다. 좀 전에 민호가 써놓은 글들을 읽었던 터라 그런지 그 가사

는 마치 민호의 마음 처럼 여겨졌다. 슬픈 눈, 가버린 날들, 옛 생각, 조그만 길 모퉁이 찻집이라니…

그리고 곡조는 왜 그리도 애조를 띄고 있는지 선희는 진한 감동으로 심장이 쿵쾅거리며 뛰어서 가슴을

손으로 가만히 눌렀다.

 

    이군은 대니 보이를 불렀다. 목청이 좋을 뿐더러 고음도 잘 소화하고 있었다. 이군의 노래솜씨는

일품이어서 사시라는 결함을 보충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여름은 가고 꽃은 떨어지니

              너도 가고 나 또한 가야지

 

 

  선희는 거기까지는 부드러운 목소리에 젖어들며 잘 듣고 있었다. 그런데 그 다음 가사를 부를 때였다.

 

 

              저 목장에는 여름날이 가고

             산골짝 마다 눈이 덮혀도

             나 항상 오래 여기 살리라

 

 

 

    이 부분에서 그만 브레이크가 걸렸다. 선희는 앞뒤 분별 없이 싫어 싫어 다른 노래 부르라고 격앙된

목소리로 노래의 중간을 잘랐다. 모두들 어리둥절 했다. 이군이 노래를 멈추고 서있었다. 갑자기 자리

가 조용해졌다. 그때서야 선희는 자기의 감정이 경솔하게 저지른 결례에 생각이 미쳤다.

 

  “미안해. 미안해요. 나 항상 오래 여기 살리라란 가사 때문이었어. 이해 해줘.” 

  “그 가사가 맘에 안 드신다구요?” 

    이군이 의아한 듯 물었다. 선희는 어떻게 하든 대답할 처지에 몰려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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