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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국 장편소설 <꿈꾸는 설악> 연재 27회
2010-04-21 16:43:49
38hwakook

조회:1275
추천:90
소설 <꿈꾸는 설악> 연재 27회|시와 소설 / 이화국  

   선희는 직선의 단거리 코스를 놔두고 우회하는 자신의 바보스러움을 나무랬다.

    아무래도 나이의 영향이거나 생존 방식의 차이에서 오는 상이함 때문일 거였다.

 

    이제 진짜 신경질은 선희 쪽에서 났다. 남의 단잠을 그런 식으로 무참히 깨워도 되느냔 말이다.

거의 마무리가 다 된 집 한 채가 무너진 만큼이나 화가 나서 현관을 밀치고 나가 마당에 서서 심호

흡을 했다. 대문을 나서 뒷짐을 지고 행길을 오르락 내리락 해본다.

     심호흡

    밤 3시. 고요하기 짝이 없다.

    화안한 불빛도 없고, 명료한 사유가 되지 않는다. 캄캄한 미래를 다만 자기의 전조등에 의지하고

지하 갱도를 내려가야 하는 사람들 속에 자기가 끼어있는 듯했다.

 

    얼마나 외로운 행보인가.

    얼마나 어려운 결정을 수시로 내려야 하는가. 다만 혼자서…

    고독이 뼈저리게 다가들었다.

 

    대청봉 쪽을 올려다보니 커다란 짐승이 웅크려 앉은 것 같았다. 무슨 깊은 생각을 품고 앉은 수도

승일런지도 모른다 싶었다. 검은 덩치가 커서 위압적이었다. 날이 흐린 모양인지 수많던 별들이 한

개도 없었다. 어둠 속에서 숲이 걸어나오는 듯 검은 그림자들이 가까이 이르는 게 두렵기도 하다.

 

    짐승의 이빨에겐 듯 갈가리 찢겨버린 시간들이라니 선희는 자기가 판 함정에 자기가 빠진 것을

알고 있었다. 그따위 무례한 전화야 한두 마디면 다시 걸지 못하게 하는 수가 얼마든지 있다. 더구나

밤 2시라는 시간이야말로 모두가 단 잠에 빠지는 시간대가 아니냔 말이다.

 

    바다 밑같이 정적만이 흐르는데 소공원에라도 동행이 있다면 갔다왔으면 싶었다. 하지만 사업의

경쟁자는 있을지언정 진심한 마음을 나누거나 발걸음조차 같이 해줄 동행자는 아무데도 없었다.

어둠을 가르며, 새벽을 맞으며 나란히 걸을 수 있는 동행이 있는 사람은 행운아임이 확실했다.

 

    청봉교 쪽 다리몫까지 오르락 내리락하고 있는데 대문 옆에 민호가 서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민호는 선희를 보고 있었다. 언제부터 지켜보고 있었던 것일까.

 청봉교  

    순간 선희의 가슴이 갑자기 방망이질을 해댔다.

    숨이 가빠졌다. 혈압이 400을 넘었을 거였다. 선희는 그래, 너도 보아야 해. 내가 누구 때문에 이렇

게 잠 못들고 헤매는 지를 알아야 해. 네가 바보가 아니라면 아마 알 것이야.

 

     혀 밑에 모든 말을 묻고 그가 서 있는 곁을 말없이 지나치려는데 민호가 막아 섰다.

  “저어.” 

    선희는 쳐다 볼 뿐이었다.

  “저어.” 

 

    선희는 참으려고 했지만 의지와는 다르게 입술이 가벼웠던지 열리고 말았다.

  “미쓰 김이란 사람 전화에 그만 잠이 깨었어.” 

  “죄송합니다.” 

 

  “다 괜찮은데 밤 두 시엔 전화 걸지 않게 해줬음 좋겠어. 정말 부탁이야.” 

    민호는 뭔가 변명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 말문이 열리지 않고 있었다. 선희 쪽에서 뭐라고 더 말을

하려다가 그냥 자기 방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곁을 스치는 그 찰라에 하마터면 민호를 안을 뻔한 감정의 파장을 용케 비켜 나온 것이 대견하기도

하고, 한편 후회스럽기도 했다.

    선희는 기슭에서 찰싹거리는 물이 아니라 소리 없이 흐르는 깊은 강이고자 했다.

 

 

 

   깊은 강

  

  

 

12. 파란 바다 파란 노래

   

 

 

 

 

    김은태가 차를 몰아 경찰서 수사과로 향했다. 민호는 이미 그곳에 와 있었다.

    예비군 훈련을 제대로 이행 못한 일이든 뭐든 간에 경찰서에 가는 사람이 주민등록증을 안 가지고

나간 모양이었다.

 

    선희는 민호의 전화를 받고야 그의 가방을 뒤져야만 했다. 공연한 호기심 때문에 그 가방을 열어

보고 싶은 적이 많았지만 손대지 않았었다. 선희의 눈엔 잡동사니로 보이지만 민호에겐 참으로 소중

할 물건들이 들어있었다.

 

    사람마다 재산 목록이 다르니까. 가치 기준이 다르니까. 실은 그 가치 기준이 다르다는 데에 문제

의 심각성이 도사리는 법이지만, 그 가치 기준이 백인 백색으로 다르기 때문에 세상은 심심하지 않고

살아 볼만한 것인지도 모른다.

 재산목록 

    주민등록증은 일기장 비슷한 공책 갈피에 끼워져 있었다.

    시집 몇 권과 사진도 한 장 튀어나왔다. 손때가 많이 묻었는데 어여쁜 여자의 얼굴 사진이었다.

주민등록증엔 역시 상상한 대로 본명이 따로 있었다. 정궁석, 그것이 그의 호적 이름이었다.

 

     ‘정궁석’ 하고 입속으로 불러보니까 별로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

    사랑은 사랑해서가 아니라 사랑하기로 작정하는 마음의 상태인지 모른다.

 

    그렇지 않고야 어째서 하는 일마다, 또 그에 관련한 것이 다 고와보일 것이냐 말이다. 밉기로 하면

며느리 발뒤꿈치가 계란 같아도 흉이 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보면 절뚝발이가 걷는 모습이 춤추는

모습으로 보인다고 하지 않는가 말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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