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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국 장편소설 <꿈꾸는 설악> 연재 26회
2010-04-21 16:38:24
38hwakook

조회:1894
추천:97
소설 <꿈꾸는 설악> 연재 26회|시와 소설 / 이화국  

   현관으로 나와 쏘파에 앉았다.

    아직 그녀의 흥분은 사그라지지 않고 있었다. 책을 펴 들었다. 읽긴 읽는데 무슨 의미인지 한마디

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일기 삼아 잡문을 끄적여 보아도 시간은 지루하기만 했다.

  잡문   

    현관 밖에 나서서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위험한 밤이었다. 음지에서 번식하는 세균들처럼 빛을 외면하여 무한한 일들이 잉태되고 낳아질

가능성으로 팽창되어 있는 밤 속에 불 붙은 그녀의 육체가 무방비 상태로 외로히 노출되어 있었다.

 

    그러나 미지에 대한 매력이나 미래에 대한 기대가 없었다. 다만 하늘엔 별이 초롱초롱할 뿐이었다.

육체의 주문을 어루만져 줄 아무런 방도가 없고, 구태여 무슨 이유를 달고 싶지 않아서 별에 눈 맞추

고 한참을 서있기만 했다.

 

    한밤의 찬 공기에 차츰 열기가 식어내리기만 기다렸다.

    한순간 선희는 한낮의 푸른 하늘 같은 파란 드레스 보다는 별 무늬가 총총 박힌 검정색 비로드

드레스를 걸친 아름다운 여인을 눈앞에 세워보았다.

 

    입으면 어울릴 것 같은 자기 모습이 거기 있었다. 그것도 화려한 조명을 받는 무대의 중앙에 서있

었다. 싸구려 나일론 슬리퍼짝이나 끌면서 때구정물 흐르는 시장 바구니나 들고 다니는 신세지만 예

옷에 민감한 여자들의 속성 때문인지 생각의 방향을 엉뚱한 쪽으로 옮겨 놓자 즐거운 상상이 되었다.

 

   하지만 춤추는 카르멘은 비켜가기로 했다. 그 요염함이 죽음을 불러올 것 같아서였다. 사랑으로

하여 지나치게 극적인 죽음을 맞기에는 해야 할 의무가 더 많았다. 선희는 그런 여자였다.

 

    아베 마리아, 성모 마리아, 그래 그 쪽이 더 좋다. 자꾸 밤하늘만 올려다 보노라니 자리 바꿈이 없

는 별들 속에 별똥별 하나가 긴 꼬리를 끌며 지나갔다. 그 많은 별 중에서 길 잃은 자임에 틀림 없어

보였다. 어디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날 것임이 분명했다.

 

    선희는 길 잃은 그 별똥별이 자기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어딘가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나는

비극을 불러와선 안된다고 자신에게 타이르면서 아는 찬송가 한 구절을 읊조렸다.

 

    별똥별

          하늘 가는 밝은 길이 내 앞에 있으니

          슬픈 일을 많이 보고 늘 고생하여도

 

 

    선희는 찬송가 구절을 읊조리다가 눈물이 찔끔 나오려고 해서 방으로 들어왔다. 선희는 김은태가

술힘으로 빨리 단잠에 떨어지는 버릇을 알지만, 혹시나 깨어날까 싶어 그에게서 되도록 멀리 누웠다.

 이제 나란히 누워서 잠을 자야할 하등의 이유가 없어진 셈이었다.

 

    새하얀 호청을 씌운 요가 청결했고, 면이 주는 촉감이 좋았지만 고급 이불이 사랑이 되는 것은 아니

었다. 아무 무늬도 없는 새하얀 호청의 청결함은 오히려 차갑고 쌀쌀해 보였다.

 

   선희가 머리맡에 놓인 자명종 야광시계를 보니 밤 한 시였다. 시계를 손 닿는 곳으로 가까이 끌어다

놓았다. 닫기만 하고 잠그지 않은 현관문 움직이는 소리를 들음으로 민호가 몇 시에 돌아오는 지를

알고 싶은 심사였다.

 

    밤 2시, 밤 3시, 민호는 돌아오지 않았다. 선희는 어느 사이 잠이 들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조석을

끓일 일도 없으면서 선희는 서둘러 일어나 세수하고 세면장을 나오다가 사무실 방 앞에 놓인 민호의

신발을 확인하고야 안심을 했다.

 

   “내가 왜 이런다지? 네가 새냐? 날아 가버릴까 봐. 네가 꽃잎이냐? 땅에 떨어질까 봐. 네가 수정

꽃병이냐? 깨어질까 봐… ”

    그날은 민호의 늦잠으로 시작되고 있었다.

수정 꽃병 

    날이 밝았다. 또 저물었다. 할 일이 있을 때나 없을 때나 하루의 길이가 같다는 점은 과연 공평한

일인가.  별로 하는 일 없는 하루 해는 너무나 길었다.

 

   선희는 어서 세월이 빨리 흘러 모든 일을 빨리 마무리짓고 그곳이 어디인진 모르지만 엄마의 품속

처럼 따스하여 안길 수 있는 그런 고향 같은 곳으로, 막연한 채로나마 빨리 돌아가고 싶다는 소망 뿐

이었다. 민호의 방에서 기타 소리가 났다. 약간 허스키한 목소리로 노래를 곁들인다.

 

 

              너의 침묵에 메마른 나의 입술

            차가운 네 눈빛에 얼어붙은 내 발자국

            돌아서는 나에게 사랑한단 말 대신에

            안녕 안녕 목 메인 그 한 마디

            이루어 질 수 없는 사랑이었기에

 

 

    가사의 의미가 선희를 때렸다. 민호는 왜 저딴 노래만 부르는가 싶었다. 알고 보면 처음 듣는 노래

가 아닌데도 갑자기 그 가사가 귀를 파고들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하며 되뇌어보았다. 노래와

기타는 배우는 중인지 가끔 한 곳에 멈추어 제자리 걸음하는 소리를 들으니 공연히 웃음이 나왔다.

 

    어쨌던 자기 방에 앉아있다는 사실을 귀로 확인하면서 평안한 맘으로 지난 밤 몫까지 합하여 잠이

들었다. 꿈결인 양 전화 벨소리를 들었다. 여러 번 울린 모양으로 아마 민호도 자기 방에서 깊은 잠이

든 것 같았다.

 

    선희는 귀찮아 하며 수화기를 들었다.

    여자의 목소리가 정민호를 바꿔 달라고 또박또박 말했다. 찾는 여자가 많았음으로 물어보았다.

    수화기

  “누구십니까?” 

  “동생인데요.” 

  “여동생은 없는 줄 아는데요.” 

  “정민호씨 친구의 동생이에요. 꼭 전할 말이 있어서 그래요.” 

 

    시계를 보니 밤 2시 정각이었다. 이런 시각에 전화를 함부로 거는 인간들이란 도대체 뭐냐 싶었다.

    화가 나는 걸 억지로 눌렀다.

 

  “꼭 이 밤중에 전해야 합니까?” 

  “네, 급한 일이에요. 꼭 좀 바꿔 주세요.” 

  “대신 내게 말하면 안 되나요? 내일 아침에 전해 주죠.” 

  “그럴 수는 없어요. 아주 중요한 일이거든요.” 

 

    여자의 목소리는 또랑또랑하고 당당했다. 민호의 방문을 노크했다. 기척이 없었다. 여러 번 노크

하다가 큰 소리로 불러도 본다. 대답이 없다. 몰래 나가버렸나? 아니면 지난 밤에 외박을 하고 아침에

돌아왔으니 골아 떨어질만도 하겠지…

 

    도어을 밀고 들어가 보니 자고 있었다. 종아리를 손으로 때렸다.

  “일어나 전화 받으라구.” 

    푸시시 일어나는 민호의 눈은 반쯤 감겨 있었다. 선희는 얼른 자기 방으로 건너와 수화기를 들고

엿들었다.

 

  “누구우 에요?” 

  “나야 나. 미쓰 김” 

  “미쓰 김 누구우?” 

  “나 말고 미쓰 김 아는 애 또 있어? 아이 참, 미치고 환장하겠네.” 

 미스 김  

    아직도 졸림이 가시지 않은 음성으로 잠결에 말하는 것 같았다.

  “왜애?” 

  “왜라니? 아이 신경질 나.” 

  “신경질?”

 

  “그래, 신경질 나. 남의 맘 그렇게 몰라 주구. 이 시간에 왜 전화 했겠어? 보구 싶어서, 잠이 안 와서

했단  말이야. 지금 나올 수 없어?”

  “아니.” 

 

    아무래도 이쪽에서 떨떠름하게 전화를 받자 내일 다시 걸겠다며 전화는 끊겼다.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대화들이었다. 교양 같은 것하고는 담 쌓은 여자의 말투였다.

 

    미치고 환장하겠네. 아이 신경질 난다니 되짚어 생각할 수록 고약했다.

그러나 한편으론 보고 싶다고, 지금 나오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그 원색의 말솜씨를 배우고 싶기도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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