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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국 장편소설 <꿈꾸는 설악> 연재 24회
2010-04-19 14:24:38
38hwakook

조회:1302
추천:88
소설 <꿈꾸는 설악> 연재 24회|시와 소설 / 이화국  

 

           11. 엇박자

  

 

 

 

    그때 전화 벨이 울렸다. 오후 4시가 다 된 시간이었다.

   “경찰서 수사과라구요?”

    선희는 방에 있었지만 전화를 받고 있는 것이 민호의 목소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경찰서라는 바람에 선희는 방 밖으로 뛰어나왔다. 민호가 저쪽에 대고 말했다.

  “잠깐만요.” 

    송화기를 손으로 막고는 선희를 향하여 설명했다.

  “예비군 훈련을 안 받아서요. 지금 수사과로 나오라는데요.” 

 예비군  

    선희는 이유가 뭣인지 알았어도 공연히 겁이 났다.

    예비군 훈련을 안 받으면 무슨 벌이 내리는 것인가. 사장님께 여쭤보자면서 내일 간다 하라고,

시간을 벌자고 속삭였다.

 

  “지금은 일이 좀 있어서 그러는데요. 내일 오전 중으로 나가면 안될까요?” 

    몇 시냐고 저쪽에서 묻는 모양이었다. 선희가 열시 반이라 하라고 시켰다.

  “열 시 반에요.” 

 

    그러라고 하는 모양이었다. 전화는 끊겼다.

    주민등록을 설악동으로 이전할 때 뭐가 잘못 되어 병적이 누락되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정민호는 설악동에서 아주 살 작정이었단 말이 된다.

 

    그토록 서울을 떠나야만 하는 이유가 그에게 있었을까. 하루 이틀 산행이라면 모르지만 이곳 생활이

좋아서일 리도 없고 젊은 사람에게 어떤 비젼이나 전망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한지붕 아래 살면서도 벌써부터 이별을 생각하고 준비해 온 선희로서는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생활은 길어야 시월 말로 종지부를 찍을 것이다. 관광지의 철장사는 단풍들 때 피크를 이루다가

단풍이 떨어질 때 손님 또한 떨어지기 마련이었다.

 

    멍한 눈이 달력에 꽂혔는데 마침 수요일이었다. 일요일 예배 외에는 교회에 잘 나가지 않았고, 그나마

관광객이 있으면 교회에 못나가고 마는데, 선희는 수요 예배에 가리란 생각으로 성경책과 찬송가책을 찾아 들었다.

 

    민호는 음악도 올리지 않고 시무룩하니 카운터 책상 앞에 앉아있었다.

  “나 교회에 갔다 올게. 정군 위해 기도 할게.” 

    공기가 무거워서 장난기를 섞었다.

     교회

  “내일 수사과에 가야잖아. 아이구 무서워. 난 경찰이라면 공연히 가슴이 달달 떨리거든.” 

    입술 사이로 하얀 이만 슬쩍 내보일 뿐 말이 없었다. 선희는 민호의 눈길을 등 뒤에 느끼며 버스 정류

장으로 향했다.

 

    교회에 앉아있는 사이 갈래 없이 혼돈스런 생각들이 오락가락 해서 제대로 기도가 되지 않았다.

공상만이 가득했다. 그래도 기도는 해야 했다.

 

    ‘사랑에 있어서는 지고지순하여 하느님 닮아지기를 소원합니다’ 라고 아뢰었다.

그리고 이어 덧붙였다.

    ‘이상 기류를 타게 하심으로 못 보던 세계를 체험케 하신 하느님께는 감사를 드립니다. 내 아버지여!’

    다음 소망을 하느님께 또 알려드렸다.

 

    ‘구하오니 아름다운 추억 하나만 간직하게 되옵기를... 한 사람을 백여 일 쯤 맡겨 주시리니 고이

간직 했다가 때가 되면 미련 없이 돌려 보내드리오리다.’

    그 모든 말의 중심에는 주어로써 정민호가 자리하고 있었다.

 

 

             주어(主語)로만 살던 내 자리에

           어느 날 네가 뛰어들었다

 

           그래서 나는 네 밑을 따라붙는

           토씨가 되었다

 

           네가 웃으면 웃고 네가 울면 울어야 하는

           너의 기후 살피기에 편한 날 없다 나는 시든다

 

           빼앗긴 내 자리 잊어버리고

           오늘도 나는 사랑이라는 이름의 토씨일 뿐.

 

 

    사람이 다시 태어나지 않듯이 죽으면 그 뿐이고, 어제도 오늘도 가면 다시 오지 않는다.

    사랑도 그렇게 떠나서 다시는 안 올지 몰라. 그러니까 사랑할 때 그 자리에 못 박고 죽어버려야

사랑이 진실일 수가 있다.

 

    선희는 그날의 설교에는 귀 기울이지 않고 나름대로 로마서 5장 8절을 가만히 펴서 읽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로마서   

    그것은 최고의 극점에 확실한 사랑의 증거를 세운다는 의미가 아니고 무었이랴!

    목숨으로 사랑을 증거하지 않고, 길게 살아감으로 사람들은 진실로 뱉은 말들조차 얼마나 허황한

거짓말로 만들어버리는 실수를 저지르는가.

 

    끝까지 책임을 지지 않으면서, 모두 가벼히 넘겨버림으로 살고는 있지만, 신을 향하여 이보다 더한

기만은 없을 터이다. 한 순간에는 진실일 수 있지만 영구적인 진실이 될 수 없다는 점이 절망스러웠다.

 

    선희가 숙인 머리를 들었을 때 찬양대를 지휘하는 손길이 민호의 손길로 부각되었다.

    지휘봉을 흔드는 손이 마치 민호가 손가락 사이 마다에 잠자리 날개를 끼우고 흔드는 양 하였다.

    지휘자의 얼굴이 민호를 닮지 않았기 때문에 손만 쳐다 보고 있는데 그 손가락 사이 사이로 민호가

얼굴을 내밀었다.

 

    교회 안을 가득 메웠다. 벗어날 수 없는 함정 같았다. 선희는 비로소 ‘괴롭다’라는 낱말을 떠올렸다.

    집에 돌아왔을 때 선희는 민호가 거처하는 사무실 방 앞에서 낯선 여자의 슬리퍼를 발견했다. 호기심에 선희는 짐짓 도어를 슬쩍 밀쳐보았다.

 

    이군이 보였다. 낯 선 여자도 있었다. 얼른 닫았다. 더위에도 그들은 문을 꼭 닫고 앉아있었다.

    무. 릎. 을. 마. 주. 대. 고. 서.

 

    저 여자가 미숙인가? 열다섯 살 쯤? 아님 스무 살 쯤? 되어보이는 애띤 얼굴을 보자 갑자기 선희는

자기 나이를 의식했다. 사업에 고전하면서 갑자기 많아지기 시작한 흰 머리칼을 선희는 염색하는 중이

었던 것이다.

 

    그까짓 머리칼 몇 낱이 세어가는데 뭐가 대수란 말이냐.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은 얼마든지 쌓여 있

었다. 그딴 일에 신경 쓸 겨를 없이 사는 삶이지만 센 머리 그대로 방치한 선희를 보고 자운 모텔 형님

은 꾸짖은 일이 있었다.

  자운모텔

  “젊은 사람이 그기 뭐꼬. 세상 다 산 사람맨쿠로. 더구나 남편 있는 여자들이 몸을 가꾸지 않는 것은

검소하거나 소박해서가 아이라 게을러서 그런 기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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