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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국 장편소설 <꿈꾸는 설악> 연재 23회
2010-04-19 14:19:59
38hwakook

조회:1285
추천:94
소설 <꿈꾸는 설악> 연재 23회|시와 소설 / 이화국  

 

   장바구니를 들려 시장에 나가서 장을 봐서는 들고 가라고 해도 그래야만 하는 게 설악동 숙박업촌 식이었다. 시궁창 같은 어시장 골목을 누비며 물건을 사면 뽀이는 들고 가야 하고 주인은 돈만 지불하면 된다. 그런데도 민호는 왜 싫은 낯색도 없이 숙명처럼 받아 들이는지 알 수가 없었다.

 

     몇 푼의 보수에 뜻이 있어 뵈는 것도 아니었다.

    영혼을 상실한 사람인가? 자존심의 근처에도 안 가 본 사람인가.

 

    집 안에서 쓸려 나온 쓰레기가 마당의 대문 옆에 모아졌다. 고무 통, 고무 함지, 비닐 자루, 사과 궤짝 등

담길 만한 그릇에 다 담기어 대문 옆에 주욱 늘어선 것이 열 개는 되어 보인다. 그 옆에 청소차를 기다리며

민호가 벚꽃나무 밑 돌 위에 멍하니 앉아있었다.

 

    사진을 한 장 찍으면 어떻게 될 것인가. 쓰레기통을 지키고 앉은 사나이 쯤으로 될까. 눈을 뜨고는 있으나 초점이 어디에 맞춰져 있는지 알 수 없는 민호의 옆모습을 처리할 수가 없을 때 딩 동 뎅 청소차의 씨그널 뮤직이 가까이 울려오기 시작했다.

 

    네 아버지 집으로 돌아 가거라. 네 아버지 집에는 식량이 풍부한 품꾼이 얼마나 많을 것이냐. 선희는 민호를 도와주기 위하여 마당으로 내려와 그 옆에 섰다. 쓰레기가 담긴 그릇들을 청소차 위로 올렸다.

 

    온갖 쓰레기를 다 받아 안고도 신이 난다는 듯 청소차는 딩 동 뎅 아름다운 소리를 내면서 옆집으로 옮겨갔다. 그 청소차가 고맙기 그지 없었다. 사람도 모든 아픔을 끌어안고서라도 저 청소차처럼 노래를 부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보냐고 멀어져 가는 청소차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청소차   

 

    선희는 민호 곁에서 오렌지 같기도 하고 미나리향 같기도 한,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그만이 가지고 있는 신선한 향내에 취하자 어젯밤 피로가 다 사라짐을 느꼈다. 그러나 이어 걱정이 앞을 가렸다. 또 언제 예약이 터질 것이냐 말이다.

 

    현관의 소파에 앉아 잠시 LA 올림픽 중계에 시선을 빼앗기고 있을 때였다. 언제 나간 건지 민호가 잠자리를 양 손에 가득, 손가락 사이 사이마다에 날개를 끼워가지고 들어섰다. 선희가 올려다 보다가 일어서자 현관 밖에서 훌훌 다 날려보낸다.

 

  “어디서 그렇게 많이 잡았어?”

  “빨래줄에서요.” 

  “도망도 안 가?” 

 

  “뒤로 손을 가만히 해서 잡았지요. 열 한 마리.” 

  “다 날려 보낼 걸 뭐 하러 잡아.” 

  “무료해서요.” 

  “무료해서라?” 

 

    선희는 되짚어 읊었다. 하기사 권태에 못 이겨 어린이들도 길가에 앉아 누가 똥을 더 크게 누는가 내기를 했다는 얘기를 어디서 읽은 것 같기도 했다. 어쨌거나 혹시 그가 지녔을 과거라는 찌푸린 상과 그 상처로 인한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 있었다면 그 잡념조차 다 떠메고 그 잠자리들이 날아 가버리기를 바랬다.

 

    선희는 민호와 눈이 마주칠까봐 돌아섰다. 사실 스포츠를 즐기지 않는 선희지만 현관에 들어서자 LA 올림픽 중계가 하도 시끄러워 저절로 눈이 그리로 향한 것 뿐이다.

 

    우리나라 선수가 유도에서 금메달을 땄다고 난리들이었다. 키가 크고 인물이 잘 생긴 하형주인가 뭐라는 이름의 선수가 승리감에 도취되어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하며 관중을 향하여 선 자리에서 맴을 돌고 있었다.

    올림픽

    축하할 일이었다.

    남들처럼 덩달아 잠시 환호했지만 내게는 패배의 쓴 잔만이 손에 쥐어졌거늘 저 승리의 함성이 나와 무슨 상관이냐 싶어 선희는 기가 죽어서 방으로 들어왔다.

 

    이제 카운타 방으로 옮겨간 집기들을 다시 돌려와야 했다. 노군은 벌써 어딘가로 사라졌고, 주방장은 주방에서 바쁜 모양이라 대신 민호를 불렀다. 어딘가 내다 판다면 값은 커녕 주워가지도 않을 물건들이었지만 무엇보다 선희의 손 때가 많이 묻은 것들이었다.

 

     민호가 말 잘 듣는 아이처럼 선희의 명령이 떨어지자 주섬주섬 날라오기 시작했다. 작은 문갑을 들고 들어오다가 문지방에 걸려 서랍이 빠지면서 서랍에 있던 것들이 쏟아졌다. 서랍이 두 개짜리인에 한 개는 잘 여닫히지 않는 것이었고, 한 개에는 사진을 넣어둔 것인데 그 서랍이 빠진 것이다.

 

    사진이 여러 장 방바닥으로 떨어졌다. 민호가 주워들면서 드려다본다. 애들과 함께 찍은 가족사진도 있고, 선희의 상반신만 찍은 증명사진도 있다. 민호는 사진을 다 집어 차곡차곡 서랍에 넣고는 한 장을 손에 쥔 채 한참 드려다보더니 그 사진을 제가 갖게 해달라고 선희에게 청했다.

 

     선희가 이리 달래서 보니 양폭산장 가던 길에 찍은 사진이었다. 설악동에서 관광 비철에 업주들이 모여

등산행에 나섰다가 어느 소나무에 기대선 채 찍은 것이었다. 뒤에 기대고 선 소나무가 붉은 단풍들 사이에서 푸르청청 멋진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사진 값 내면..."

    "낼게요."

    "어떻게?"

    "커피 타 드릴게요."

    "벌써 내 약점을 다 알고 있었군."

 

    문갑을 들여놓고 문갑 위에 늘 자리 잡는 휴대용 개스렌지에 물주전자를 올렸다. 그 바람에 처음으로 커피를 방에서 정군과 마주 보며 앉아 마시게 되었다.

 

    이상한 침묵이 흘렀다. 저 아이의 침묵 뒤에는 무엇이 숨어있을까 궁굼한채로 선희가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사랑한다는 말을 한 번 쯤 해보고 싶었다. 그런데 엉뚱한 말이 나왔다.

 

    "이것이 무슨 인연일까 한 집에 살게 되었고... 내 삶이 다 탄로 나버렸고... 이렇게 마주 앉아 커피를 마시다가 이 다음 이 다음 내가 혼자 커피를 마셔야 하게 될 때 민호 생각하면서 민호 몫으로 빈 커피잔을 앞에 놓고 마신다면 어쩔래?"

 

    수줍은 여자도 그럴 수 없을만치 그의 얼굴이 붉어졌다. 고개를 숙이면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진을 볼 거에요."

    사진을 받아들자 민호는 서둘러 방을 나섰다.

 

    우회적이긴 했지만 선희는 용기를 내어 해보고 싶은 말을 했고, 듣고 싶은 소리를 들어서 만족한 미소를 띄우며 자리를 폈다.

 

    사실 그녀에게 있어 사랑한다는 말은 진부했고, 너무 직설적이라 간지러운데다가 해본 지 하도 오래 되어 입에 서툴렀다. 그래서 그녀는 사랑한다는 그 흔한 말을 잘 입에 올리지 않앗다.

    사랑을 쉽게 말하면 급히 단 얇은 냄비처럼 급히 식을 것만 같았다.

 

    또한 그녀의 뇌리 속에는 사랑이란 자기 희생을 전제로 하기 전에는 절대로 할 수 없는 말로 못박혀 있었다. 그만큼 순수해야 했고 정직해야 했다. 목숨을 내 놓을만큼 그런 경지가 아니면 말 하는게 아니다 싶었다.

 

    목숨까지 내놓아 실천한 그런 사나이가 하나 있기는 했다. 그의 이름을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했다.   그래서 그녀도 그를 사랑했다.

 

            그대 사랑이라 이름 하면

          받은 것 없어도 주기에요

          자꾸 주기에요

          주고 싶어서 주기에요

          주기 싫어도 주어야 하기에요

          줄 것 없는 마지막엔 죽어버리기에요

          사랑은 '사랑한다'는 빈 말을

          제일 싫어함으로.

 

 

    중얼거리면서 그녀는 자리를 폈다.

    드디어 밀린 잠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잠결 아득한 속에서 딩동거리는 키타 소리를 들었다. 잠이 쏟아지니 그 어떤 소리라도 다 자장가가 될 판이었다.

 

    스산한 꿈도 없는 잠이 그녀를 부드럽게 감쌌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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