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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국 장편소설 <꿈꾸는 설악> 연재 21회
2010-04-19 14:05:48
38hwakook

조회:1173
추천:89
장편소설 <꿈꾸는 설악> 연재 21회|이 화 국  

 

  얼마나 피곤했으면 저렇게 곤하게 잠이 들었을까.

    아니면 혹시 솜으로라도 귀를 막았을지 모를 일이다.

    시끄러운 생활에 익숙해지기까지는 선희도 그렇게 했었다.

 

    벼개 두 개를 포개어 높이 베고 반듯이 누워 잠들어 있었다. 반듯이 누워 자는 모습이 단정했다.

    입은 꼭 다물었는데 배가 나와 있었다. 이불을 안 덮고 자면 안 되는데 어찌 해야 할까.

 

    선희는 아무리 삼복 중에라도 항상 배만큼은 가리고 자야 하는 법이라던 할머니와 어머니의 당부가

생각나서 들어가 덮어 줄까 하다가 그냥 돌아섰다.

  당부    

    그러한 행위 가운데엔 사고(思考)를 넘어선 미지의 심연이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 심연으로부터는 관능의 향연에서 비롯한 새빨간 마취의 양귀비가 피어나고, 그 혼돈의 어지러움이 구름처럼 뭉게뭉게 괴어올랐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제 네 시가 되었다. 지하 식당 옆에도 방이 있었지만 사람이 들락거리면서 귀찮게 군다고 아예 지붕 밑 방에서 잠을 자는 주방장과 파출 아줌마들을 깨우러 올라가야 했다.

 

    수시로 계단을 오르내리는 일이 얼마나 힘이 드는지 선희는 이 다음에 집을 사게 되면 엘리베이터 없는 5층 아파트에는 절대로 살지 않으리라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그들을 깨워 주방으로 내려가는 것을

보고야 선희는 정신을 잃었다.

 

    머리가 혼미하고 현기증이 심했다. 뱃멀미를 심하게 하고 난 뒤끝 같았다. 아니면 물에 빠져서 코로

입으로 물을 싫컷 마신 것처럼 멍멍하니 귀도 잘 안 들렸다. 일어나려고 해도 일어나 지지 않았다.

 

    시간은 오전 6시. 일어나야 해. 일어나야 해. 밥 시간 늦으면 큰 일 나. 가위 눌린 듯 쫓기고만 있는데 민호가 들어왔다. 선희가 잠이 든 것으로 아는 모양으로 수건을 들고 조용히 나갔다. 항상 조심스런 아

이인데다가 발소리도 없으니까.

 

    불침번이란 그렇게 어려운 노동이었다. 이 일은 물론 보이를 시킬 수도 있지만 소흘히 할 뿐만 아니

김은태는 건강이 좋지 않기 때문에 보통은 선희와 보이들의 몫으로 떨어지곤 했다.

    불침번

    아침밥은 민호가 펐다. 더운 날씨에 밥은 뜨겁고 주걱에 들러붙기 때문에 밥 푸는 일은 생각보다 쉽

지 않은 노동이었다. 선희는 곁에 서서 반찬을 집어 주었다. 밥을 푸기 전에 선희는 민호에게 일렀다.

 

  “밥을 풀 때 말야, 내가 옆에서 발길로 차며 신호를 할 때는 밥을 적게 푸라는 뜻이고, 어떤 때는 밥을 많이 주라고 말하면서도 발길질을 할 테니 이런 때는 내 말은 믿지 말고 적게 푸는 거야. 아무 소리 없을 때는 하던 대로 하면 되는 거고.” 

 

    말하는 선희와 듣는 그, 두 사람이 함께 웃었다. 오랜만에 웃어보는 웃음이었다. 처음 보는 밝은 웃음이어서 선희는 신기하게 여겨졌다. 하지만 세상을 잘 모를 나이에게 세상에 숨어있는 일상의 음모를 가

르쳐 주는 것 같아 죄스런 마음이 들어 한마디 더 덧붙였다.

 

  “다 그런 거야. 일단 해 놓은 밥은 남아도 큰 일이고, 모자라도 큰 일이거든. 그것이 기술이라고.” 

    여관집 뽀이는 그런 일을 잘 해야 한다는 말은 뺐지만 대단한 기술이나 가르쳐 주는 것 같아 속으로

미안했다. 아침 배식 시간에 선희는 한 번도 발길질을 하지 않았다.

 

    둘째 날 저녁에 배식이 끝나고 학생들은 마당에 집합했다. 두 선생님이 기타를 어깨에 메고 음을 고

르기 시작했다. 오락 시간인 모양이었다. 음악과 율동과 박수와 장단맞춤이 계속 되는데 갑자기 전기가 나가버렸다. 좀 기다려도 불이 들어오지 않자 촛불을 켜야만 했다.

  촛불    

    지하 주방에서는 내일 아침 식사 준비가 한창일 텐데 이 큰 집에 몇 개의 촛불을 밝혀야 할지 아득했다.

선희가 양초를 가지러 사무실 방으로 들어갔다가 더듬더듬 나오는데 그때 마침 민호가 뛰어들었다.

아마도 양초를 찾으러 들어온 모양이었다.

 

   그 바람에 두 사람은 어둠 속에서 엉켰다. 선희가 밀려 주저앉으며 뻗은 발목에 민호가 걸려 넘어졌다.

그 바람에 선희의 몸 위로 그의 체중이 떨어졌다. 민호는 당황하여 얼른 일어나 급히 밖으로 나갔지만

선희는 어둠 속에서도 그가 누구인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것은 그의 독특한 체취 때문이었다. 자의든 타의든 가슴과 가슴이 맞닿은 순간이었다는 게 감격이

었다. 그러나 그것이 연인들의 따뜻한 포옹일 수 없음이 아쉬움으로 남았다.

 

    시골에서 농한기에 가끔 단체 관광이 오는데 그들은 꼭 동동주를 손수 담가 들고 왔다. 몇 번인가 얻

어 마신 적이 있는데 마치 그 동동주를 마셨을 때처럼 선희의 얼굴은 발갛게 상기되었고 가슴은 콩당거

렸다.

 

   하지만 촛불 앞에서 얼굴이 붉어보이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보냐고 선희는 속으로 변명을 하면서 민호가 가지고 온 빈 사이다 병에 함께 초를 꽂아 불을 당겼다.

    촛불에 반사되었음인지 민호의 얼굴도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불 붙은 초들은 말 없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소리 없이 자기 몸을 태워 주위를 밝히는 일의 어

려움을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얀 초들은 타들어가며 키를 낮추고 있었지만 거룩한 성자 같아

보였다.

 

    머뭇머뭇 하더니 민호가 물었다.

  “어디 안 다치셨어요?”

 거룩한 성자

    똑 고른 치열로 미안함이 배어나오는 웃음과 함께였다.

    선희는 뭐라고 답해야 할 말을 찾지 못했다. 비록 자의는 아니었지만 두 사람이 하나가 되어 엉키었

던 그 순간에 죽은 줄만 알았던 선희 자신의 모든 감관이 시퍼렇게 살아 있었다는 체험을 하게 된 다행

함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

 

    선희는 그동안 살아오면서 스스로의 여성 성(性)에 대해 생각 해본 일이 별로 없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그런데 어디에 숨어 있었는지 모를 그 여성이 가장 복잡하고 어려운 때에, 참으로 시의 적절

하지 못한 때에 고개를 들려 하다니 주책이 없을 뿐더러 놀랍고 힘든 일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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