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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국 장편소설 <꿈꾸는 설악> 연재 19회
2010-04-15 13:20:52
38hwakook

조회:1216
추천:85
소설 <꿈꾸는 설악> 연재 19회  

                                          

                                                          낭만이 자라다

   

 낭만    

 선희는 아침 일찍 예약된 학생 단체들의 먹거리 준비를 위하여 며칠 전 내려와 대기 중이던

   김은태와 함께 속초 시내 시장으로 나갔다.

  물건의 가지 수도 많고 분량이 많아서 시장 보는 일은 쉽지 않았다.

 

    시장 골목을 누비며 삼백오십 명이 먹을 식료품들을 사가지고 돌아오니 정민호가 뛰어나와 차에서

물건을 내려 주방으로 날라갔다. 선희는 너무 피곤하여 현관의 소파에 주저앉았다.

    무심코 눈이 발등 위로 떨어졌다.

 

    시장 골목을 누비노라 때 묻은 신발이 눈에 들어왔다. 비릿하고 질척한 어시장 골목을 돌아와서

그런지 비린내도 풍긴다. 수시로 신고 벗기 좋으라고 뒤가 열린 나일론 슬리퍼의 밑창이 많이 닳아

있었다.

 

   장을 볼 때는 콩나물이 4관, 도라지 4관, 오뎅이 4관, 단무지 5관, 도토리 묵이 10목판, 두부 15목판,

계란이 15판 ... 이런 식이라 돈 백만 원 가까운 장을 보아오면서도 자기 몸을 위해서는 신발 한 짝도

제대로 차례가 오지 않았다. 새삼 그 사실이 비감으로 다가왔다.

 

   몇 백 명의 식사를 책임진 선희는 늘 긴장하지만 그만 그 슬리퍼가 눈에 들어오는 바람에 맥이 빠졌

다. 설거지도 한 번 안 해보고 결혼한 그녀가 아니던가.

   그래서 세상은 에누리 없이 공평한 것이라고 하는가 보았다.

 

    옛날에 안 해 봤으니까 지금 쯤이라도 이렇게 일 많이 해서 때워야 하는 게라고 선희는 스스로를

긍정하며 위로하였다. 그러고 보니 정민호를 만난 것도 그렇다. 이상한 열기를 동반한 연애 감정이

란 것은 명작 영화나 문학 작품 속에만 있는 줄 알았었다.

 

    평범한 사람들은 사랑조차 평범해서 그런 대로 잘들 살아가고 있다. 사랑이 꼭 에드워드 8세나

심슨 부인 같아야 하며, 로미오와 줄리엣 같을 수는 없는 게라고 별난 사랑 이야기를 들을 때는 늘

즐기는 선에서 멈출 뿐이었다.

에드워드 8세

    남들의 열애를 듣는 즐거움은 크다. 하지만 꼭 자기가 해봐야 할 필요는 없는 거다.

사랑은 운명이니까.

    그런데 바라지 않은 것이 다가올 때가 있다는 현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지 않겠는가?

    이제 모든 연애 소설들을 다시 읽어보면 의미가 달라질 것 같았다.

 

    이젠 명실공히 공감대를 형성할 것임이 분명했다. 그러니까 이 부분도 한 번은 겪고 넘어가야 할

필연이라고 선희는 토를 달았다. 모든 것이 내게로 다가와 손을 내밀면 잡아야 하는 게 도리가 아니

냐 말이다.

 

   누가 큐핏트의 화살에 맞아 피흘리고 싶으랴! 하지만 피흘림도 운명이라면 피를 흘려야 할 터이다.

홍역을 앓아야 한다면 앓아야 하고, 홍역을 앓고 난 자리에 증거처럼 반점이 찍힌다면 그것을 훈장

처럼 가슴에 달아야 할 것이다.

 

    그 훈장은 소쩍새 우는 봄에서부터 가을 무서리를 맞아가며 피어나는 한송이 국화꽃처럼 아름답

게 자리할 것이다. 시들어 말라 비틀어져도 아주 예쁜 꽃의 형상으로, 그윽한 향기로 남을 것이다.

    소파에서 웬만큼 땀을 식히고 있을 참에 주방에서 정민호가 올라왔다.

 

  “제 옷이 없어졌어요. 방에 두었는데.” 

    아마 선희가 시장 나간 사이 찾았던 모양이었다. 열적게 웃고 있었다. 욕실에 내다놓은 속옷을 말

하는 게 분명했다.

  “글세, 어디 갔을까. 혼자 걸어갔을 리도 없고.” 

국화꽃   

    왠지 때아닌 수줍음으로 선희는 얼른 일어나 주방으로 피해 내려갔다.

    속팬티가 주는 연상 때문이었다.

 

    거리에 나앉은 것이나 진배 없는 숙박업이란 장사를 하면서 조금은 사나워지고, 그저 일꾼이요

사람일 뿐이지 한 번도 여성을 의식해 본 적이 없었는데 갑자기 수줍음이라니 스스로에게 혐오감

이 일었다.

 

    병원에 다녀온 남편 김은태의 얘기로는 심한 당뇨에 혈압이 문제라고 했었다. 모르고 있는 사이

당뇨는 중증으로 달렸고, 선희도 성에 대해서 생각해 볼 정도로 여유를 가지고 사는 삶이 아니었음

으로 장기간 방사가 이루어지지 않아도 전연 이상하게 생각해 본 일조차 없었다.

 

    여성이란 것이 도통 개입할 틈이 없는 삶에서 색다른 감정의 낌새를 알아차린 선희는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일차의 감정상에는 하등의 죄라는 것이 없는 법이지 않는가. 사람이 의미를

부여하는데 따라 선이 되고 악이 되는 예는 너무나도 흔한 일이었다.

 

    선희는 조금 뒤면 그가 자기 방의 어느 곳에서 아마 두어 개 쯤 새 것을 발견하리란 생각을 하면

서 정민호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굼했다.

 

    지하 주방으로 내려왔을 때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지하수 뿜어올리는 소리, 환풍기 돌아가는

소리, 거대한 개스 렌지에서 새파란 불길이 이릉이릉 연소되는 소리, 수도물 쏟아지는 소리, 하수물

퍼올리는 소리, 모터 돌아가는 소리, 소리들. 소리들의 총 집합이었다.

 

    사람이 내지 않는 소리의 아우성도 무한히 위협적이었다. 땀이 비오듯 했다. 날품으로 불리어온

장사동 아줌마와 흥수 엄마는 몇 잔 술에 얼굴이 접시꽃 만큼 붉으레 물이 들어서 어려운 줄 모르고

일하고, 주방장과 선희 조차 곤두박질 치듯 동동거리면서 모든 준비는 거의 완료되었다.

  곤두박질

    저녁 7시가 배식 시간이었다. 학생들은 밥 그릇과 반찬 그릇이 한군데 있는 사각의 식판에 밥을

받아먹게 된다. 먹을 것을 배급 받으므로 배식이라고 하는 것이다.

 

    목욕탕 만큼 큰 솥에서 찜판에 쪄낸 밥을 떡처럼 굳기 전에 큰 고무 함지에 쏟아야 한다. 이 일은

민호의 몫이었다. 그러나 구경도 못했을 텐데 어떻게 불러다 시켜야 할 것이냐. 선희는 면장갑 위에

고무장갑을 업어 끼고 큰 고무함지에 밥 찜판을 엎기 시작했다.

 

    그 찜판의 무게로 허리가 아팠다. 날짜를 꼽아보니 8월 6일.

    뜨거운 수증기가 훅훅 안면으로 달라붙는다.  한 판, 두 판 쏟아가는데 민호가 왔다.

  “제가 할께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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