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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국 장편소설 <꿈꾸는 설악> 연재 18회
2010-04-15 13:09:53
38hwakook

조회:1264
추천:77
소설 <꿈꾸는 설악> 연재 18회  

   선희는 자운 모텔 형님께 어떤 관계인 아들이냐고 물어보리라면서 어쨌던 정민호와 얼마간

같이 지내게 된 사실을 속으로 반겼다. 현관으로 들어섰을 때 전화가 왔다. 이미 예약이 되어있

는 단체로부터 온 확인 전화였다.

 

 “정군, 우리는 2박 3일 동안 죽었다 깨어나야 해.” 

  무슨 뜻인지 몰라 정민호는 선희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서 있었다. 선이 분명한 도톰한 입술로 미소

머금고 있었는데, 그 미소는 쳐다볼 때마다 무슨 미스터리인가 싶어 혼돈을 거듭하는 그녀였다.

 

  “학생 단체 삼백 오십 명이 와. 이 더위에. 경험 있어요?”

  “한 번 보긴 했어요.” 

  학생단체

  “한 번 구경한 것만으론 어려울 걸. 우선 내 방 소지품을 사무실 방으로 옮겨다 놓아야겠는데 좀

도와줘요. 방이 모자라 이 방도 내줘야 하니까.”

  “그럼, 어디서 주무십니까?” 

 

    선희는 농담 삼아 어쩌나 보려고 잘라 말했다.

  “정군하고 같이 자야지 뭐.” 

    정민호는 또 예의 그 미스테리를 담은 미소를 머금었다. 선희는 그래서 덧붙였다.

  “잘 시간이 어디 있어. 불침번 서야지.” 

 

    민호가 거처하는 사무실 방으로 소지품들을 옮겼다. 화장품이며 손거울, 커피병. 휴대용 개스 버너

랑 물주전자와 찻잔 등 커피를 마시기 위한 이런 것들은 사무실 카운터에도 준비되어 있었지만 선희

방에도 따로 일습이 마련되어 있었다.

 

    성경책과 찬송가, 랜턴 등 항상 손끝에서 맴도는 물건들이 귀중품은 아니라도 하루도 없으면 뭔가

가 아쉬운 그런 것들이었다. 그러나 없는 것이 한 가지 있었다. 그것은 잠옷이었다. 그 중에도 나이트

가운이었다. 잠자리 날개 같은 잠옷으로 치장하며 사는 여자들은 행복할 일이었다.

 

    잠자리 날개 같은 잠옷의 필요를 전연 느끼지 않는 여자는 어떤 여자들일까. 미혼녀? 과부? 환자?

노녀? 가정부? 버림 받은 여자? 잊혀진 여자?

귀중품   

    소지품을 옮기다 말고 선희는 갑자기 우울해졌다.

    미혼녀도 아니고 과부도 아닌 데다 환자도 아니고 노녀라기엔 사십 대 중반에 멈춰 있는 아직은

쓸만한 나이가 아니냐 말이다.

 

    그런데 촉감 좋게 살갗에 휘감기는 그런 멋있는 장미빛 잠옷이 자기에겐 없다는 사실이 새삼 떠오

른 것이다. 장미빛 가운 속의 여자만이 장미빛 인생을 살 터였다.

 

    항상 남의 식구들와 함께 기거하며 아무 때고 자다가 벌떡 일어나야 하는 생활의 일꾼, 그것도 돈

버는 재미에 모든 수고가 보상되지도 않는 생활이라니 새삼 그 점이 속상하고 왜 마음에 걸리는지

모를 일이었다.

 

    빗살 사이가 넓은 머리빗은 사철 머리맡에 준비되어 있어야 했다. 누웠다가도 급히 일어나야 했

을 때 부시시 헝클린 머리 모양새를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빗은 손에서 가장 가까운 데에 자리

잡아야 했다.

 

    정민호가 거처하는 방에서 선희는 이상한 체취를 느꼈다. 사람마다 각기 다른 체취가 있게 마련

이다. 그래서 화류계 여자들은 세탁을 자주 한다고 했다.

 

  옷이 더러워서가 아니라 사람의 체취가 다르기 때문에 다른 남자를 또 만나야 하는 처지에서는 먼

저 만난 사람의 체취가 맡아질까봐 세탁을 하고, 그렇지 못할 때는 진한 향수를 바꿔 뿌린다는 것이다.

 

   세탁소를 하던 친구의 말이 떠올라 짐짓 숨을 들여마셔 보았다.

이것은 무슨 냄새일까? 이 세상에서 처음 맡아보는 것이라 뭐라고 형용할 길이 없었다.

다만 어지러운, 혼돈의, 카오스의, 안개의 냄새 같은 것.

 

    만져지지도 않고 아무 모양새가 없는 단지 냄새였기에 한 웅큼 잡을 수도 없었다.

그게 손에 잡히는 것이었다면 조금 훔쳐나왔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체취

    우선 방에는 기타가 한쪽 벽에 세워져 있고 의복이 가즈런히 벽에 걸려 있었다. 그 옆에 예비군

군복도 있었다. 그 예비군 옷을 보니 웃음이 나왔다. 그 안에 들어 있는 모습이 상상되기 때문이었다.

 

    민호는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에서 총으로 적을 쏘아대지 못하고 울어버렸다는 어떤 어린 병사

의 모습과 흡사하지나 않을까. 그러고 보니 정민호가 온 뒤로 한 번도 그 방에 들어가 보지 않았다는

기억이 떠올랐다.

 

    볼 일이 있으면 정군으로 하여금 시켜서 가져오게 했었다. 그럴 때마다 얼마나 그 방에 들어가

보고 싶었던가. 자기가 판 함정에 들어가지 않으려는 심사가 설명이 안 되었다. 선악과를 따먹고

눈 밝은 사람들의 교활함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

 

  몇 권의 책이 방바닥에 굴러 있었다. 펼쳐진 책을 들어보니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였다.

되는 대로 넘기다 보니 서시에 붉은 표시가 되어 있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선희는 깜짝 놀랐다. 이런 글이 있었던가. 선희는 갑자기 그 구절을 처음 대하는 듯한 생소한 느낌

속에 빠졌다. 신부나 목사의 설교보다 더 서릿발 같았다. 사람이 이렇게 살 수 있는 건가. 어찌 감히

이런 선언을 할 수 있는 건가. 어찌 감히!

 

    이 세상에 태어나 순진한 영혼으로 들은 최초의 교훈처럼 가슴을 쳤다. 두려웠다.

의미의 심연(深淵)으로 한없이 빨려 들어갔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 했다' 그래서 너

는 그렇게도 괴로운 표정을 지었던 것이냐?

    선희는 그 순간 눈에 덮힌 비늘이 다 떨어져 나가는 것을 자각할 수 있었다.

 심연    

    빈사 상태인 사업과 씨름하며 몇 푼의 돈으로 괴로워 했는데,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 한 사람이 있다니 경이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차원이 다른 고뇌

속에 있는 자, 그가 시인이란 말인가? 두서없이 읽어 내려갔다.

 

    또 한 권을 되는 대로 집어드니 크리슈나무르티의 ‘의식으로부터의 해방’이었다. 현대 동양의

지혜라는 이. 제목이 맘에 들었다.

 

    그래 상습이 된 의식으로부터 벗어나자. 그것도 과잉 의식으로부터 어서 벗어나와야 한다.

    사랑의 주소지는 차디찬 이성이 자리하는 머리속이 아니다.

    따뜻한 피가 흐르는 심장이 있는 가슴 속이다.

 

    그런데 사랑이 사유와 의식 가운데만 갇혀서 숨을 쉬지 못하고 있다라고 깨닫는 순간 의식의

포로 된 사랑이 탈출을 시도하는지 머리 속이 맴돌고 터질 듯 아프기 시작했다.

 

    선희는 자기도 모르게 손으로 머리를 짚었다.

  “아이구, 두통이야.”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언제 들어왔는지 민호는 아스피린을 그녀 앞에 내밀었다.

 

    아스피린 따위가 해결할 두통이 아닌 줄 알면서 선희는 짐짓 알약을 삼켰다.

  “고마워, 언제 준비했어.” 

    정민호는 또 싱그레 웃음지었다. 치아가 고르게 희고 아름다웠다.

 

    꿈속의 작은 요정들이 흰 옷을 입고 일렬 횡대로 줄을 서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필요한 몇 마디 외

에 소리라곤 도통 없는 사람이지만 저렇게 흰 이를 내어보이며 자주 웃음을 보이면 좋겠다 싶었다.

 작은 요정들

    선희는 차츰 자기도 언젠가부터 그를 따라 차분하며 조용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정민호처럼 먼 데를 가끔씩 하염없이 바라보고 가만히 한숨을 길게 내쉰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

이든 닮아간다는 사실은 무엇을 시사하는 것인가 질문을 던져본다.

 

    중요한 것은 민호가 선희를 닮아가는 게 아니라 선희가 민호를 닮아 간다는 사실이었다.

    선희는 자기의 주체성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했다.

 

    선희는 이불을 정리하다가 이불 가운데 짬에서 구겨 박힌 정민호의 속옷을 찾아냈다. 어떻게 할까

잠시 망설이다가 욕실에 내다 놓았다. 그가 가끔 욕실에 들어가 목욕하고 빨래하는 것을 보았지만

남자의 빨래라니 오죽할까.

 

    주방장 대식이 엄마는 마음이 너그러워서 빨아 줄 것이지만 아마도 이불 짬에서 새 것을 발견케

하여 놀래줄까보다 그런 궁리를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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