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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국 장편소설 <꿈꾸는 설악> 연재 16회
2010-04-13 20:59:52
38hwakook

조회:1793
추천:93
소설 <꿈꾸는 설악> 연재 16회|시와 소설 / 이화국  

   사실 정민호에 대해서 이제 이름 외에 아는 거라곤 한 가지도 없었다.

    어디서 흘러 왔는지, 뭐 하던 사람인지, 눈앞에 나타난 그대로인 외모와 가명일지도 모르는 그 성명

밖에는 아는 사항이 전연 없었다.

  “아, 미숙 씨.” 

    민호는 한 번 씨익 웃고 곧 이어 말했다.

  “네, 알았어요. 그러죠.” 

    그런데 선희의 가슴 속에서는 거센 풍랑이 일고 있었다. 오! 맙소사. 그럴 줄은 알았지만 이 난데

는 질투 비슷한 감정은 무슨 회오리란 말인가. 선희가 길 건너에 눈을 던지고 소파에 앉았노라니

정민호는 어디론가로 부지런히 다이얼을 돌려댔다.

    다 부질없는 일이었다. 어리석음이었다. 꿈에도 상상 못했는데 이 때늦은 병의 이름이 무엇이란

말인가.

    그러나 나는 고상해야 해. 네가 고상하니까. 나는 품위가 있어야 해. 네가 품위가 있으니까.

남이 뭐라든 내 눈엔 그렇게 보이니까.  나는 인격자라야 해. 너는 착하고 깨끗한 사람이어야 하니까.

    적어도 내가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그래야만 하니까…

    선희가 펄렁대는 가슴을 오이지 담그듯 두 손으로 누르고 있는데 민호가 돌아선 채로 말했다.

  “제 친구 이군 애인이에요. 사모님 나이를 내기 걸었던.” 

    그러더니 조금 화난 목소리로 전화에 대고 말했다.

    인격자

  “왜 여기로 전화를 걸게 하구 그래. 응 응, 너네 집으로 걸으라구 그래.” 

    민호가 그렇게 말하면서 선희를 쳐다보기 때문에 의무처럼 미소를 만들어 보여주었다. 

    왜 그렇게 열적은 표정을 짓는 거지? 괜찮아요. 나는 다 알고 있으니까. 다 이해 할 수 있으니까 괜

찮아요. 선희가 묻지도 않는데 민호는 한 마디를 더 보탰다.

  “미숙이란 여자, 왕실에 있는 여자예요.” 

  “이군은 정군과 함께 다니면 손해를 많이 볼 텐데.” 

  “저는 항상 다 양보 해버려요.” 

  “양보란 아름다운 미덕이지.” 

    선희는 아주 어른스럽게 말했다. 그러면서 속으로 그런 마음의 소유자라면 나도 사랑할 거다.

하지만 애인도 양보를 할까? 그것이 물건인가 뭐. 그것이 맘대로 되나 뭐. 그는 선희의 말뜻을 못 알아

들었나보았다.

    너는 자석 같은 애야. 자력이 아주 강한… 높은 나무 위 한 마리 학 같은 고독과 기품 속에 감춰져

있는 너. 우수를 머금은 너의 잔잔한 미소는 기쁨이면서 슬픔이구나. 참 알 수가 없다. 정신의 이 혼란

함을 어떻게 빗질해야 하나. 정민호는 가슴을 한참 쓸어 내리더니 말했다.

  “체했나 봐요. 원래 위가 좀 나쁘거든요.” 

    선희는 읽고 있던 ‘잠재의식의 힘’ 이라는 책의 67쪽 아래 부분에 붉은 줄을 그었다. 그리고 '위' 라

는 낱말에는 붉은 동그라미 표를 해서 민호에게 건네 주었다. 줄 친 부분에는 이렇게 씌어있었다.

잠재의식 

    ‘당신의 현재 의식은 근심, 불안, 공포 및 우울증으로 인하여 심장과 폐의 정상적인 활동과, 위와 장

의 기능에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생각은 당신의 잠재의식의 조화적인 기능을 방해합니다.’

    선희가 민호에게 말했다.

  “여기 줄친 이 부분을 잘 읽어 봐요. 도움이 될까 몰라. 흔한 말이지만 돈을 잃어 봐라, 조금 잃는

것이다. 명예를 잃어 봐라, 많이 잃는 것이다. 건강을 잃어 봐라, 모두 잃는 것이다 라고 하지. 무얼

하든 건강 하나는 있어야 해.”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정작 그녀야 말로 근심, 불안, 공포 및 우울증으로 영육이 함께 좀 먹혀들어

가고 있는 중이었다. 언제 부도가 날지 모를, 망해가는 사업을 안고 좌절의 늪을 헤어나오기 위한 정신

무장 삼아 읽고 있던 책이었다. 

    최악의 상태로 부채가 제대로 정리가 안 될 때, 경매라는 강력한 수단에 쫓겨 길에 나앉을지도 모르

는 상황에서 정민호에게 뺏길 마음의 여유가 어디 있는가 말이다. 가당치도 않았다. 그런데도 선희는

민호가 온 뒤로 온통 정신이 그에게 사로잡혀가면서 불면은 심화 되었다. 

    기쁨이냐? 고통이냐? 사랑이냐? 연애냐? 바람이냐? 어지러운 현실에서의 도피냐? 도무지 어지러

웠다. 아침에 눈을 떠서 잠자리에 들 때까지 그 아이와 연결되지 않는 일은 한 가지도 없었다. 그가

거처하는 카운터 방과 선희가 거처하는 방은 복도를 끼고 마주 보고 있었다. 

    기침을 해도 들리고 방문이 열리면 카운터 방 창문으로 선희네 방이 또루 드려다 보였다.

  카운터 방

    그리고 관광 나온 손님들에게 공급되어야 할 물건들은 모두 카운터 방에 쟁여 있어서 선희로서도 수

없이 들락거려야 했다. 보이들이 자거나 말거나 상관치 않고 불쑥 불쑥 드나들었지만 민호가 온 뒤론

이상하게 출입이 어려웠다. 

    예쁜 아이를 보면 어른들이 안아주고 입을 맞추듯이 그런 충동을 선희가 느끼면서 행동의 부자유가

온 것이다. 그것은 선희 스스로 선악과를 따먹은 이브처럼 눈이 밝아져서 자기 감정의 수상쩍음을 일

찍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자기 맘의 색깔을 자기보다 더 잘 아는 이는 아무도 없을 터였다. 

    존폐에 걸린 사업과, 건강의 문제를 안고 있는 남편과, 부모의 의무를 못하고 있는 자식을 셋씩이나

거느리고 있으면서 난데없이 얄궂은 감정의 발동이라니 누가 알까봐 전전긍긍 두려웠다.

    어떤 일을 하려면 결과를 물어선 안 되지만, 왜 사랑이 꼭 같이 늙어가겠다는 사람들만의 전유물이

어야 하느냐고 선희는 자기의 수상쩍은 감정을 변명하면서 내심 항변하고 있었다.

 

 

 

 

 

 

 

 변명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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