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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벗나래 1부
2008-03-11 15:38:50
sionsira

조회:2419
추천:181

<벗나래>

 

최 윤 애

 

 

금옥이 꽃바구니를 들고 프레스센터 20층에 있는 국제회의장으로 들어섰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입구에 즐비하게 세워져있는 화환들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어림잡아도 스무여 개는 넘어보였다.

우리나라에서 내로라하는 기업의 눈에 익은 CEO이름과 국회의원들의 이름도 간혹 보였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은수가 금옥이 나타나자 몇 발자국 잰걸음으로 다가와 손을 덥석 잡았다.

“와 주었구나. 안 올 줄 알았는데. 그 동안 잘 지냈지?”

“그럼. 세상에 둘도 없는 친구아들이 출판기념회를 한다는데 안 오면 되겠니? 축하해.”

“고마워. 저쪽 편한 자리에 가서 앉아.”

“그래.”

꽃바구니를 전해주고 흰 봉투를 유리함에 넣은 금옥이 맨 뒤 구석자리를 잡고 앉았다.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의 시선이 머물지 않는 곳이 더 편해졌다. 맨 뒤 구석자리는 출입문과도 가깝기 때문에 중간에 나가기가 좋은 위치였다.

금옥이 주위를 찬찬히 둘러보았다.

매스컴에서 자주 보이던 국회의원 얼굴도 보이고, 도지사 얼굴도 보였다. 말끔한 몸맨두리로 앉아 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교양과 지성이 넘쳐보였다.

소곤소곤 대화를 나누다가도 웃을 때에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수줍게 웃었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신사들도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며 고개를 끄덕끄덕하다 소리 없는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러면서도 어쩌면 다들 먹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과도 같은 표정들인지, 따사로운 햇볕이 내리쬐는 기름진 밭에 잘 익은 곡식들을 보는 듯했다. 금옥은 그들 속에 부룩박아 놓은 썩은 콩 같이 초라하게 자신이 느껴졌다. 개밋둑이라도 보이면 몸을 숨기고픈 심정이었다.

금옥의 얼굴과 가슴이 화끈거렸다. 부접 못할 장소에 와있는 사람처럼 좌불안석이었다.

초가을 날씨인데도 겨울밤 난로 가에 불을 쬐고 앉은 것처럼 온 몸이 후끈거렸다.

점점 사람들로 빈 좌석들이 메워졌다.

금옥이 앉은 좌석 뒤로도 서서 식을 지켜보는 사람들이 에워쌌다.

금옥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누군가가 몸에 휘발유를 뿌리고 라이터로 불을 지른 듯 속이 타들어갔다. 손에 꼭 쥔 손수건이 축축하게 젖어들었다. 금옥은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이 행여 노출이 될까봐 억지미소를 지으며 단상을 바라보았다.

말끔한 양복을 입은 미소년 옆에는 유명대학 총장으로 보이는 머리 희끗희끗한 사람 몇몇이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상좌에 앉아 있었다.

손님맞이가 끝나자 은수와 그녀의 남편이 미리 예비 되어있는 좌석에 나란히 앉았다.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돌아와 대기업에 취직이 되었다는 큰아들이 사회를 보고 디자이너로 맹활약 중인 둘째 딸은 의사남편과 사이좋게 앉아 미소 띤 얼굴로 경청했다.

평화로운 한 가정의 따스함 속에 금옥은 차갑게 얼어붙었다.

부러움과 질투심이 불일 듯 일어난 것이다. 처음 초대장을 받고 이곳에 오기전까지만 해도 진심으로 친구의 행복을 축하해주리라 마음을 먹었었다.

옛날에야 어떠했든 지금 현재 은수의 모습은 신사임당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어쩌면 그보다 더 훌륭한 어머니로 자리 굳힘을 한 것처럼 위대해 보였다.

곧이어 식이 진행되었다.

“존경하는 귀빈 여러분! 공사다망한 가운데 함께 자리를 빛내 주시어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오늘 이 자리는 저의 아우인 최승주 군이 십여 년간 주말마다 전국을 돌며 야생화를 관찰하며 일기로 써온 것을 책으로 엮어 출판하게 된 뜻 깊은 날입니다. 이렇게 뜻 깊은 날에 여러 박사님들과 국회의원, 도지사님, 그리고 존경하는 여러분들을 모시고 출판기념회를 열게 된 점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어려서부터 식물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더니 이윽고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물질문명 속에 잊혀져가는 한국의 야생화에 깊은 관심을 갖고 야생화도감을 출판하게 된 제 동생 최승주 군을 소개합니다. 여러분! 격려의 박수로 맞아주시기 바랍니다.”

자신감에 찬 큰아들의 목소리에 우렁찬 박수가 일제히 터져 나왔다.

자리에서 일어난 승주가 씩씩하게 걸어 나와 정중하게 인사를 올리고 단상에 섰다.

간단한 자기소개와 감사인사를 한 후 그간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느꼈던 야생화에 대한 견해를 또랑또랑하게 발표했다.

식을 지켜보는 내내 금옥의 마음은 남의 것을 훔칠 때처럼 두근거림을 느꼈다.

은수와 그녀의 자녀들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대견스럽게 아들을 바라보던 은수의 눈가가 눈물로 얼룩졌다. 곁에서 남편이 하얀 장갑을 낀 은수의 손등을 포개어 잡으며 빙긋 웃어 보이자 은수의 얼굴은 다시 활짝 벗개었다.

조금의 모자람도 없어 보이는 평화로운 가족의 모습이었다.

금옥의 얼굴빛이 가을하늘 붉게 물들이는 노을을 닮아갔다.

대학생인 막내아들이 수재라는 소문은 익히 들었었는데 저토록 훤칠하고 잘 난 줄은 몰랐었다. 질투심이 극에 달한 금옥의 가슴은 활활 불타올랐다.

목에 갈증을 느껴 물만 세 잔을 들이켰다. 도우미아가씨가 잔이 빌 때마다 채워주다 아예 주전자를 들고 옆에 서있었다. 아무리 물을 마셔도 갈증은 해소되기는커녕 숯검정이 될 때까지 타들어갔다.

지지배, 좋겠다. 저런 아들딸들이 있어서, 휴! 옛날엔 그토록 옹색하게 살더니만. 난 이 꼴이 뭐람.

금옥의 눈가에 물이 샌다. 화장이 지워져 얼룩덜룩 눈 밑엔 얼룩이 생기고 콧잔등은 기름을 발라 놓은 듯 반들거렸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더 이상 부룩박아 놓은 썩은 콩처럼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금단현상 때문에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어 엉덩이를 드는 순간 은수와 눈이 마주쳤다.

은수의 얼굴은 더 없이 순화롭고 행복에 겨워보였다.

금옥은 본숭만숭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허리를 구부린 채로 식장을 나와 화장실로 향했다. 화장실 거울 앞에 서서 감정을 추슬렀다. 파우치를 꺼내어 화장을 고쳤음에도 나아보이지가 않았다. 빨리 벗어나고 싶어졌다. 이대로 행사장에 있다가는 심장이 터지고 속 내장이 다 타버려 주검이 될 것만 같았다.

세면대의 수도꼭지를 틀었다. 시원스럽게 콸콸 쏟아내는 물소리가 조금은 위안이 되는 듯했다. 마음 같아서는 그 물속에 얼굴을 묻고 한참 동안 세상과 단절이라도 하고 싶었다.

“차라리 모르고 지냈으면 속이라도 편치. 이런 돼먹지 못한 심보는 나이를 먹어도 여전하구나. 한심한 인간아, 철 좀 들면 안 되니? 응? 금옥아, 왜 이렇게 한심한 인간이 되었니. 에구. 망할 년 같으니.”

금옥은 거울 속 추레한 자신을 향해 꾸짖듯 힐난을 퍼부었다.

수도꼭지를 꽁꽁 틀어 잠그고 태연한 척하면서 나왔다.

출장뷔페가 차려진 백색 테이블에는 온갖 맛깔스러운 떡과 음료, 과일, 케이크들이 예쁘게 장식되어 사람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지만 식장 안으로 다시 들어가고 싶지가 않아 발길을 돌렸다.

도우미아가씨는 남의 속도 모르고 친절한 미소를 건네며 작가 친필 사인이 되어있는 책을 주었다. 고맙다고 고개를 주억거리곤 엘리베이터로 향하자 통통걸음으로 다가와 버튼을 눌러 주었다.

금옥은 모든 게 불편했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금옥을 향해 구십도 각도로 인사를 하는 도우미아가씨의 얼굴을 보는 것조차 거북스러웠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힐 무렵 도지사의 축사가 이어졌다. 우렁찬 박수소리가 점점 멀리 들리다 사라졌다.

구름 위를 미끄러지듯 잡음 없이 1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의 문이 시원스럽게 열렸다. 몇 초 동안이었지만 엘리베이터 안은 감옥소의 독방 같이 느껴졌다.

허정허정 걸어 거리로 나섰다.

토요일 오후의 거리는 금옥의 속사정만큼이나 썰렁했다. 서울시의회 건물 앞에는 피켓을 들고 무언의 시위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터벅터벅 걸어가다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아 몇 번이고 뒤를 돌아다보았다. 미련이 남아서라기보다는 자신이 흘리고 온 못난 흔적들 때문이었다.

중간에 나온 부분에 대해 은수는 어떻게 생각할까, 혹시 나를 비웃지는 않을까. 기념식에 참석한 사람들 중에 나를 알아보고 나의 과거에 대해 수군거릴 사람이 혹시 섞여 있지는 않았을까?

쓸데없는 생각들이 금옥의 머릿살을 어지럽혔다.

시원한 공기를 마시면 좀 나을까 싶었는데 도심 속의 탁한 공기는 속만 더 매스껍게 했다.

금옥은 심한 사람멀미를 하고 있었다. 차를 탈 때 느끼는 증세와 흡사한데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에 가면 머리가 어지럽고 속이 울렁거려 토할 것 같은 증세를 느끼는 것이다.

언제부터였는지 확실하게는 모르나 감방에 들어갔다 나온 후부터인 듯싶다. 사람에 대한 불신과 삭막한 세상에 오직 나 혼자뿐이라는 두려움이 앙상한 뼛속으로 깊이 스며들었다.

“제기랄. 나이 먹어서 이게 무슨 주책이람.”

금옥은 손수건으로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찍어내며 사람멀미를 가라앉히려 애를 썼다.

갑자기 외로움이 느껴졌다. 금옥에게 겨레붙이라곤 등 돌리고 산지 오래되어 얼굴조차 가물가물한 언니 한 사람 뿐인데, 그마저도 어디에 사는지 모른다. 간통죄로 징역 6개월을 살고 나오니 창피해서 두 번 다시 동생 얼굴 보기 싫다며 온 가족을 데리고 멀리 떠나버렸기 때문이다. 출소 후 이를 부르르 떨며 마음에서 도려내 버렸던 언니가 새삼 그리웠다.

이럴 때 언니 품에라도 얼굴을 파묻고 실컷 울어봤으면 …….

“인생이 이렇게 쓸쓸해 질줄 누가 알았겠어. 화무십일홍이라는 말이 바로 내 인생이었다는 걸 말이야.”

금옥은 혼잣말로 중덜거리며 슬픈 미소를 지었다.

온몸이 파르르 떨려왔다. 금단현상이었다. 참아야 해. 이 정도도 못 참는다면 앞으로 내 인생은 끝나는 거야. 입술도 바싹바싹 말라왔다. 술과 담배를 끊은 지 이제 한 달이 조금 넘었다. 이 고비를 넘겨야한다고 입술을 깨물면서 스스로에게 채근을 가했다.

금옥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파르르 떨면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응시했다.

머리카락을 찰랑거리며 여자애 둘이 팔짱을 끼고 지나간다. 상큼한 젊음의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내게도 저런 젊은 날이 있긴 있었는데 …….

기억조차 가물가물했다.

금옥은 낡은 가방을 열고 뒤적거렸다. 없었다. 몸은 떨려오는데 하얀색 약통이 손에 잡히지가 않았다. 입술이 계속해서 바싹바싹 타들어갔다.

금옥은 차도로 미친년처럼 내려가 팔을 휘휘 내저었다. 빈 택시가 지나가다 금옥 앞에서 급정거를 했다.

“난곡으로 가주세요.”

“예. 알겠습니다.”

“아저씨, 빨리 좀 가주세요.”

금옥은 차안 공기와 냄새에 구토증이 일어 차 창문을 열었다.

택시기사가 백미러로 금옥을 보며 조심스럽게 충고를 했다.

“손님, 아무리 급한 일이 있더라도 차도에 내려서서 차를 잡는 건 위험하세요. 자칫 과속차량에 치일 수도 있거든요. 저도 아까 미처 손님을 발견 못하고 지나칠 뻔 했습니다.”

“그래요? 제가 급한 일이 있어서요. 아저씨, 빨리 좀 가주세요. 빨리요.”

“예, 무슨 급한 일인지는 모르지만 제가 택시 경력 15년에 서울 지리에 대해선 박사죠.”

기사가 자기 자랑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하루 종일 심심했던 속내를 손님 앞에서 다 털어 놓을 모양이었다.

금옥은 듣는 둥 마는 둥 신경 쓰지 않고 창밖만 내다보았다. 부윤옥의 상징물이라 할 만한 고층건물들이 빠른 속도로 지나쳐갔다. 토요일 오후라 야외로 빠져나간 차들 때문인지 다행히 도로는 한산했다. 활활 타던 속이 화끈거려 정수리까지 따끔거렸다.

“아저씨, 좀 더 빨리 가주세요.”

운전기사는 총알택시 경력이 좀 있었는지 금옥의 요구사항대로 샛길을 이용해 가며 과속으로 쌩쌩 달렸다.

내릴 때는 제법 많은 택시비를 물었다. 잔돈을 거슬러 받으며 아까운 생각이 문득 들었다. 느긋하게 전철을 탔다면 천원이면 동전 하나 남을 거리인데.

언제부터 만 원짜리 한 장에도 몸을 사렸는지, 한심한 생각이 들었다.

5분 정도 골목길을 더 걸어 올라갔다. 그야말로 하늘과 맞닿은 달동네였다.

금옥은 집 앞 구멍가게에 들러 컵라면 세 개와 계란 한 꾸러미를 샀다. 구멍가게 아줌마는 툭하면 왜쭉왜쭉 성질을 부리기 때문에 돈만 지불하고 얼른 나와야 했다. 행여 말 한마디 실수라도 하면 낭패 보기 십상이었다.

처음 이 동네로 흘러왔을 때 계란이 상했다고 멋모르고 교환하러 갔다가 울골질 치는 바람에 대판 싸움이 붙어 온갖 망신 다 당한 적도 있었다. 금옥은 그때 일만 생각하면 두 번 다시 가고 싶지 않지만 근방에 가게라곤 이것 하나뿐이라 어쩔 수가 없었다.

금옥은 까만 봉지를 들고 덜컹거리는 대문을 열었다.

퀴퀴한 곰팡내가 났다. 하수구를 뚫느라 오전에 붓고 간 약품냄새가 화장실 안에서 진동했다. 다섯 보정도 걸어 내려가 반지하방 문을 열쇠로 따고 들어갔다.

라면박스만한 낡은 신발장에 구두를 올려놓고 거실 겸 주방을 지나 딸랑 하나뿐인 방으로 걸어갔다. 좁다란 주방 개수대에는 아무렇게나 쌓여있는 지저분한 그릇들 사이로 바퀴벌레가 미끄럼 타듯이 기어 다녔다.

금옥은 옷을 벗어 행가에 걸쳐놓고 싱글침대에 드러누웠다.

속이 무너져 내린다. 이 나이에 이런 초라한 몰골로 산다는 걸 누구한테 보인단 말인가!

보일 수도 없고 보여서도 안 된다. 아마도 보이는 날이면 자존심이 상해서 제풀에 심장마비를 일으켜 죽을 지도 모른다.

누렇게 뜨고 검푸르게 곰팡이가 서린 천장을 바라보며 누워 있자니 머릿속이 헝클어져 복잡해졌다.

머릿속에는 잘 키운 아들딸들에 둘러싸여 행복한 미소를 짓는 은수의 모습으로 가득 채워졌다. 생각하고 싶지 않는데도 떠오르고, 기억하고 싶지 않는 데도 새록새록 솟아났다. 생각할수록 부러워서 돌아버릴 것 같았다.

시체처럼 누워 눈동자만 요리조리 굴렸다. 사방이 때 묻은 벽지요, 바닥의 낡은 장판과 초라한 옷장, 지저분한 행가와 고물 텔레비전. 제집인 냥 사람을 경계하지도 않고 활보하는 간 큰 바퀴벌레들만이 금옥을 반긴다. 이것이 금옥의 현실이었다. 부인하고 싶어도 부인할 수 없는 참혹한 현실.

몸이 또 부르르 떨렸다. 뻐근한 몸을 일으켜 세우고 서랍에서 약을 꺼내어 삼켰다. 뛰던 심장이 차분해지고 떨리던 몸이 그제야 안정을 되찾는다.

옷을 갈아입고 또 다시 침대에 누워 남이 쓰다버린 고물 텔레비전을 켰다. 오후뉴스타임이었다. 좀 전에 금옥이 다녀왔던 프레스센터가 화면에 나타났다. 출판기념회와는 동떨어진 뉴스였는데도 울화통이 터져 채널을 돌려버렸다.

다른 방송에서는 사랑과 전쟁이라는 가정문제를 다룬 드라마가 나왔다. 울고 짜는 연기는 어쩌면 저토록 실감나게 하는지. 가만히 보고 있으니 불난 집 부채질을 당하는 것 같아 아예 TV를 꺼버렸다. 하는 일 없이 가만히 누워만 있으려니 잡념이 생겨 속을 더욱 괴롭힐 것 같아 손에 고무장갑을 끼었다.

머릿살이 어지러울 땐 일이 최고였다. 우울증에 걸리지 않기 위해 옷소매를 부르걷고 청소를 시작했다.

전에는 도우미아줌마에게 시키고 편안히 소파에 기대고 앉아 과일을 먹으며 묵은 영화를 보고 있을 시간이었다. 혼자보기 심심하면 아무나 한 사람 콕 찍어 부르면 황송하다는 듯 과일바구니를 사들고 찾아오는 남자들도 많았었다.

넓은 거실과 화려한 욕실, 하늘하늘한 커튼이 드리워진 침실, 깔끔한 주방과 드레스 룸.

드레스 룸으로 들어가면 명품 옷과 백으로 그득했고, 부유스름한 전등이 비추는 신발장에는 다양한 디자인과 색깔의 구두가 족히 서른 켤레는 넘게 진열되어 있었다.

옷에 맞춰 구두를 갖추어 신을 정도로 멋을 부리던 때도 있었다. 현관을 나오면 기사가 알아서 차를 대령했고 스포츠센터에 들러 한 두 시간 땀을 흘리고 난 후 샤워를 하고 전신마사지를 받았다.

피부가 비단결 같다는 둥, 타고난 명품피부라는 둥 침도 안 바른 찬사를 받으면 지갑을 열어 두둑하게 팁도 안겨주었었다. 돌아올 때는 백화점에 들러 새로 들어온 옷 몇 벌 사고 카드를 긁었다. 어차피 남자 통장에서 결제가 될 터라 안심하고 긁어댔다.

그때는 온 세상을 다 가진 듯 부러울 게 없었다.

빛나는 미모와 젊음이 있었다. 그런 미모와 젊음을 필요로 하던 한 남자도 있었다. 가진 게 돈밖에 없다는 그 남자는 금옥이 원하는 것이면 집이든 차든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떠안겨주었다.

50평 고급주택도 그가 마련해 준 것이었고, 기사 딸린 고급승용차도 그가 붙여준 것이었다.

금옥은 일주일에 한두 번씩 남자를 만족시켜주기만 하면 되는 거였다.

금옥은 남자에게 많은 것을 요구했으나 남자는 금옥에게 딱 한 가지만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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