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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월평- 한국시의 세계화(월간문학 11월호, 2012)/정성수(丁成秀)
2012-10-30 05:19:38
chungpoet

조회:1498
추천:128

시 월평 (월간문학 11월호, 2012)

한국시의 세계화

정 성 수(丁成秀)

 

 사실상 이미 어느 정도 세계화가 성취되고 있는 한국이지만 대한민국 시, 즉 ‘한국시’의 세계화는 아직도 요원하다. 물론 최근 몇 년 동안 매년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는 고은 시인의 경우가 있긴 하지만 그건 매우 특별한 경우이다.

 좋은 시를 쓰고 있는 일부 역량있는 현역 시인들조차도 대부분 그저 잠룡 상태일 뿐 여의주를 빛내며 세계 시단의 하늘 속으로 눈부시게 솟아오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왜 그럴까? 다른 예술 장르, 음악이나 미술이나 영화 등, 심지어 같은 문학인 소설의 경우에도 신경숙의『엄마를 부탁해』처럼 세계적으로 평가 받는 상황이 펼쳐지고 있는데, 왜 시는 아직도 그렇지 못할까? 그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누구나 지적하듯이 ‘한국시 번역’의 난해함에 있는데, 유능한 번역가(한국어와 외국어에 함께 능통한)를 확보하는 데는 오랜 시간과 경비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세계 주요 국가의 출판 시장에 잘 번역된 시집을 내놓고 효과적으로 홍보하는 것도 시 번역 못지않게 중요하다. 한국의 경우, 이것은 단적으로 말해 국가, 즉 대한민국 정부의 몫이다. 일부 기관에서 그 일을 하고 있지만 유명무실, 너무 미미하다.

 오래 전에 가까운 이웃 일본의 가와바다 야스나리가 소설『설국』으로 노벨문학상을 타게 된 것도 그가 쓴 작품의 문학적 우수성뿐만이 아니라 장기간에 걸친 일본 정부의 투자와 노력에 의한 것이라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소설도 제대로 번역하기가 쉽지 않지만 시를 제대로 번역한다는 것은 지난한 일이라는 것도 이미 다 아는 상식이다. 특히 한국시의 경우, 형용사와 부사의 발달로 인한 언어적 특성상 더욱 쉽지 않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한국시의 번역이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시의 원형을 있는 그대로 외국어로 살리기 어렵다고 해서 한국시의 번역을 아예 포기해버릴 수는 없다는 뜻이다. 우물 안 개구리처럼 한국 안에 주저앉아서 외국어로 번역하기 힘든 한국어의 특성만 나무라고(?) 있을 일이겠는가.

 문제는 대한민국 정부의 보다 미래지향적인 문화정책과 기나긴 투자와 노력이다. 또한 각 문학단체의 자발적인 노력도 더욱 필요하다. 더 나아가서는 시인 개개인이 자신의 시를 외국어로 번역하려는 실질적 노력과 투자도 필요하다.

 잘 아시다시피 기회는 기다리는 자에게 와주지 않는다. 기회는 준비된 자에게 다가오는 특별한 선물이다. 이제부터라도 한국 정부와 문단이 머리를 맞대고 한국시의 세계화를 위한 보다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노력을 기울여 주었으면 좋겠다.

 그것이 세계 속에서 대한민국의 문화적 이미지를 높이고 우리의 미래를 활성화시키는 또 하나의 길이다. 다행히도 몇 년 전 필자가 이 지면에서 소개한 것처럼 세계적 미래학자들은 머지않은 미래의 세계에 ‘문화예술의 시대,’ ‘시의 시대’가 펼쳐지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지 않은가.

 지난『월간문학』10월호(2012)에 발표된 신작시 46편을 한 작품 한 작품 겸허한 마음으로 정독했다. 그 중에서 우선 노두식 시인의 시를 감상해 보기로 하자.

 길을 걸어보네…/먼 길을 앞으로 바람을 비끼어/발바닥을 달궈가며 시장하게 걷네/푸르르 몇 발자국 걷다가/비단벌레마냥 한 박자 쉬어도 보네…/참죽나무 허리께가 휘어 풍문으로는/슬그머니 나무들 사이로 숨는 신기루 한 컷.../뒤돌아보며 슬픔에 밀려/제풀로 길을 걸어갈 적에 하늘을 긋는 새 한 마리/그곳을 향하여 나는 공기처럼 모호하다네/길을 나선 것은 내가 아닌가보이/나를 놓아보낸 손길은 아득한 태몽…

                                                                                                                                      - 노두식,「길을 걷다」 부분

아름다운 시다. 노두식 시인의 저력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특히 ‘그곳을 향하여 나는 공기처럼 모호하다네/길을 나선 것은 내가 아닌가보이/나를 놓아보낸 손길은 아득한 태몽’ 같은 싯귀절은 더욱 훌륭하다.

 다만 이 시를 연 구분 전혀 없이 꼭 이렇게 줄글로 계속해서 이어 써야만 보다 효과적인지는 생각해 볼 문제이다. 짧은 시도 아닌데, 이 작품을 읽는 독자는 물론 한 편의 시 안에 살고 있는 싯귀절들조차 너무 답답하지 않을까. 다음엔 김학선 시인의 시를 감상하기로 하자.

 …곁을 지나다 우연히 본 어두운 눈물샘물고기의 지느러미처럼 세세/하기 그지없는 축축한 눈물샘 호수를 향하여 세세히 겨누는 그녀의 눈/빛은 매섭다/진실은 늘 허약하고 위험하기 그지없어요/세상을 후빌 발톱 하나쯤은 견고해야 하지 않을까요/없는 나의 발톱이 한없이 그리워요…

                                                                                                                                      - 김학선,「여인과 호수」 부분

 시 전체가 하나의 환상적 분위기를 풍기는 작품이다. 고요하고 서정적인 전개이면서도 독백체로 넣은 화자의 말, ‘진실은 늘 허약하고 위험하기 그지없어요/세상을 후빌 발톱 하나쯤은 견고해야 하지 않을까요/없는 나의 발톱이 한없이 그리워요…’는 자칫 단조로움에 빠져들 수 있는 이 시에 그 나름의 신선한 활력을 불어넣어줄 뿐만 아니라 일종의 훌륭한 포인트가 되어 빛을 발한다. 다음엔 임애월 시인의 시를 감상하기로 하자.

 한때 태양을 품었던 열망의 꽃잎들이/뜨거운 찻물 속에서 제 몸을 열었다/적당한 향기로 박제된 유년의 그림자/말라붙은 시간 속의 기억들 풀려 나온다/화려하지 않은 언어들이 고여든 이파리/비릿한 초경(初經)의 향내 찻잔을 넘는다/나그네새들 지나는 계절의 길목마다/삭지 못한 심지 돋워 등불은 켜지고/창밖을 떠돌던 바람도 날개를 접는 밤/누군가 두고 떠난 빛바랜 노래 한 소절/늦가을 새벽 그믐달빛처럼 고요해져/알맞은 온도의 그리움, 식도를 넘어간다.

                                                                                                                                 - 임애월,「국화차를 마시며」전문

 잘 정제된 시다. 시 속의 화자는 홀로 ‘국화차를 마시며’ 유년, 또는 소녀시절로 돌아간다. 말하자면 과거가 사라져간 이 시간 현재의 현실 속에서 추억 속 현실로의 시간여행, ‘늦가을 새벽 그믐달빛처럼 고요해’진 순간과 순간 사이에서 잊혀진 자아로의 고독한 회귀이다.

 국화의 꽃말은 상실, 정조, 고귀, 진실이다. 아마도 화자의 ‘알맞은 온도의 그리움’은 이 가운데 어느 하나, 혹은 그 모두를 추억의 그릇 속에 담아놓고 있을지도 모른다.

 기억과 현실의 고요한 소용돌이 속에서 이 시가 풍겨주는 이미지는 ‘누군가 두고 떠나간 빛바랜 노래 한 소절’처럼 쓸쓸하고 적막하다. 이것이 이 세상의 수많은 추억들이 저어가는 고즈넉한 모습인가.

 어느 날 한 시인의 영혼이 소리없이 지구 밖으로 사라져도 그의 시는 대한민국 어딘가에 홀로 살아있다. 그러나 홀로 살아남은 시의 수명도 시인의 그것처럼 천차만별이다. 살아남은 시가 누리고 있는 시의 영토 또한 천차만별이다.

 그 천차만별의 가장 중요한 열쇠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시인들 스스로가 쥐고 있다. 자기만의 그 특별한 열쇠로 어떤 시의 문을 열 것인지, 그것은 시인 여러분의 뇌와 두 개의 손과 심장이 해야 할 일이다.

 자, 이 땅의 시인 여러분! 하늘 시퍼런 늦가을의 시간, 자신이 쥐고 있는 단 하나의 열쇠가 슬며시 녹슬어버리기 전에 어서 일어나 그대만의 눈부신 시의 문을 여시라…!

 

 

- 2012/9/28일 15시 13분

설악산 백담사 만해마을 문인집필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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