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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국 장편소설 <꿈꾸는 설악> 연재 4회
2010-04-03 17:24:21
38hwakook

조회:1810
추천:71
 

     장편소설 <꿈꾸는 설악> 연재 4회

   그는 말이 없었고, 약간 고개를 숙인 채 벌을 서는 아이처럼 서 있었다.

숱 많은 머리를 짧게 깎은 것이 애띠고 깔끔하게 보였다. 아무래도 선희가 먼저 뭐라고 말해야 그 다음 차례를 말하거나 행동할 모양이었다. 선희는 갑자기 경직된 분위기가 느껴졌지만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자, 이리로 오지.” 

    정군이라 불린 그가 따라왔다. 방안을 들여다 보았다. 그리고

  “저어, 잠깐 나갔다 오겠습니다.” 

 

    선희를 보며 그렇게 말했다. 그때서야 쳐든 얼굴을 바로 보니 외모가 상당히 준수한 편이고 키는 훤칠했다.  눈썹이 짙은 것이 돋보였으나 사납게 느껴지는 인상은 아니었다. 볼륨이 있고 믿음성 있어 보였다. 입술은 왕년의 외국 미남 배우 타이론 파워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선희는 그가 이 집이 마음에 들지 않아 돌아서 나가려 한다고 판단했다.

 

    다래 모텔은 아주 크지도, 아주 작지도 않게 중간치기 규모여서 종업원을 최고로 대우 해줄 형편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헐값으로 예우할 수도 없는 어정쩡한 상태인 것을 선희는 벌써부터 알고 있었던 터라 그 점을 먼저 머리에 떠올렸다.

다래 모텔  

 

    하지만 뭐라고 붙들어 맬 하등의 방도가 없었다. 맘대로 구속력을 행사할 수 있는 무모하기 짝이 없는 권력이란 얼마나 좋은 것인가. 권력이란 가장 전염성이 빠른 병인데도 선희, 그녀만 빼놓고 비켜가질 않았던가!

자기 입안의 혀 조차도 맘대로 휘두르면 안 된다는 점을 아는 선희로서는 그저 망연히 쳐다볼 뿐이었다.

 

   ‘얘야, 제발 가지 말아라. 나랑 살아보자. 너의 얼굴엔 어두운 그림자가 있어. 잎사귀 하나 없이 활짝 핀 꽃처럼 개방적이진 않다만 사려 깊어 보이는구나!’ 선희가 속으로 뇌이노라 아무 말이 없자 이번에도 목례를 하고 그는 돌아서 나갔다.

 

   선희는 ‘참 이상도 하다. 안개 같기도 하고, 무슨 그림자 같은 사람이야. 무슨 혼령인가.’ 그러면서 고개를

갸우뚱 해보니 그는 발소리가 없이 조용조용 걷는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하도 여러가지 타잎의 사람을 겪어보아 경험으로 아는 바이지만, 그렇게 예절 바르고 교양 있는 사람이 이런 업소에 올 리가 없다는 이치는 뻔했다.

 

   선희도 으레히 그렇거니 하고 넘어온 지가 꽤 된 셈이었다. 보통 뽀이라는 이름으로 들어온 종업원들은

한낱 교양이란 인간을 나약하게 약화시킬 뿐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나 그러는 듯이, 거친 말씨에 사나운

욕설과 무례한 행동은 보통이고, 걸을 때는 신발 뒤축을 꺾어 신거나 찍찍 끌고 다니기가 예사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 사람은 뭔가가 달랐다.

   “아무리 좋으면 무얼 해. 가버렸으니 무슨 소용이람.”

     선 희

    종업원

    쓴 입맛만 다시고 우두커니 현관 소파에 앉아 묵은 주간지를 뒤적거렸다.

    그 주간지는 ‘낙서로 뒤덮힌 다래 모텔’ 이라는 제목 아래 ‘김사장은 앞으로 낙서 동우회를 만들 계획이라고 말했다’ 로 끝 맺는 기사가 실려 있는 것이었다.

 

    그 기사를 볼 때마다 분노가 치솟았지만 버리지 않고 그냥 두는 것은 한 번 그 기사를 쓴 기자를 만나 따져보리란 심사에서였다.

 

    어느 날 선희의 대학 동창 남편인 소설가 B씨 부부가 놀러온적이 있었다. 허물 없이 지내온 지가 오래 되었고 무어 숨길 사이도 아니어서 고전하는 사업 속내를 털어놓았었다.

 

   B씨는 이름 있는 작가로 세계 여행도 많이 했는데, 외국의 관광 업소에서는 방명록을 비치해 놓고 사인을 받아서 누구 누구 훌륭한 사람이 우리 집에 다녀갔다는 사실을 영광으로 알고 자랑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사업 수완일 수도 있으니 이 집에서도 벽에 커다란 사인판을 붙여놓고 이곳에 머물다 간 기념으로 사람들이 사인을 할 수 있게 해놓으면 좋을 것 같다고 피력했다.

 

    그럴듯한 의견이라고 생각되어 하얗고 넓은 천을 구해서 현관 출입구 옆 벽에 걸어 놓았다.

    일착으로 B씨가 사인을 했다. 그후 그야말로 개나 걸이나 그 같잖은 필적으로 읽을 수도 없는 사인을 해대는 것이었다.

 

    사인판인지, 낙서판인지 글자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가 되어 그냥 뜯어서 버리고 말았다. 이 싸인판을 어느 기자가 보고 기사를 썼는지는 모르지만 김사장을 만난 사실도 없으면서 김사장은 앞으로 낙서 동우회를 만들 계획이라고 말했다고 써놓았으니 그 새빨간 거짓말은 물론이거니와 이 세상에 어느 미친 놈이 있어 낙서동우회를 만든단 말인가.

작가  B씨

   진짜로 낙서 동우회를 만드는 그런 일을 하려고 한 사람이 있다면 그는 아마 머리가 돈 사람일 것임이 분명하다. 낙서로 골머리 앓는 공중 변소에 들를 때마다 느꼈던 속상함이 그 기사를 쓴 작자를 향해 분노로 치밀어 올라왔다.

 

   깔끔한 성미 때문에도 낙서란 불특정 다수의 적일 수도 있는 일이라고 누구보다 더 낙서를 혐오하는 선희였기에 신경이 날카로워짐을 막을 수 없었다.

 

   거기에다 다래 모텔이 낙서로 뒤덮혔다고 하면 그 기사를 읽은 사람은 설악동 숙박업소 중에서 다래 모텔이 가장 지저분하고 불결하기 짝이 없는 곳으로 기억되어 찾아가기는 커녕 발길을 다른 곳으로 옮겨갈 일이 아닌가.

   안 되는 장사에 초를 쳐도 유분수지, 이런 악선전도 정도껏이라야지 하는 생각에 참다 못한 선희는 B씨에게 전화를 걸어 전말을 얘기하며 어떻게 하면 좋으냐고 자문을 청했었다.

  “아, 그 집 돈 안 들이고 광고 한 번 잘 한 것이구만. 허허허허.” 

 

   그래서 그럭저럭 넘어오고 있긴 하지만 사람이 거짓말을 한다고 해도 이런 정도로 하는 수가 있는지 선희는 도저히 이해가 안되었다. 그것도 금방 뒤집으면 증거가 남지 않는 말이 아닌 인쇄물로 말이다. 선희는 그 기자의 얼굴이 그리운 사람의 얼굴만큼이나 꼭 보고 싶었던 것이다.

 

   따진다는 생각은 뒷전인지 오래 되었다. 주간지 기자라도 배울 만큼 배운 사람일텐데 사람의 얼굴이 어떻게 생겨야 저렇게 거짓 기사를 쓸 수 있을까 궁금하기 짝이 없어 그 기자를 만나 얼굴을 구경하고 싶을 뿐이었다.  그래서 버리지 않았는데 굴러다니는 주간지들 속에 끼어 있었던 모양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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