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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소설 속 작가들의 현실인식에 대하여
2012-05-31 01:2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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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15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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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대소설 속 작가들의 현실인식에 대하여

 

       김유정 문학의 풍자와 해학적 특징을 중심으로

 

 

                                          정종암 문학평론가 

 

 

 

 

 

 

 

  • 들어가며

 

 

 

  1.소설의 허구성과 김유정의 태생

 

 

 

 소설의 핵심은 이야기를 주고받는 소통의 과정이다. 소설은 작가가 만들어 낸 것이다. 즉 실제 있었던 사실 그대로를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작가가 만들어서 조립한 이야기이기에 허구(fiction)라고 한다. 여기서 허구란 아무 것도 아닌 데에서 거짓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재료로 삼아 그것을 가공하여 다시 구조화하였다는 의미를 일컫는 것이다. 고로 허구는 실제와 다를 수밖에 없지만, 실제와 전혀 무관하게 창조되는 것도 아니다. 모든 문학이 다 허구이지만, 문학의 허구란 현실에 부합하는 실제성을 지닌 것으로, 실제와 다르지만 실제적 성질을 지니도록 창조한 것이 허구이다. 이러한 점이 언론의 보도, 수필, 자서전과 같이 실제 있었던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있을 수 있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소설은 현실 자체가 아니면서 현실을 생생하게 반영하는 방법이 바로 모방인 것이다. 문학에서 모방이란 단순히 복제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원 대상을 재료로 삼아 새롭게 창조하는 것을 의미하는 모방은 똑같이 베껴내는 것인 모사와는 다르다.(1 구인환,<소설론>,삼지원,1996,85쪽)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모방의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면서 모방의 개념을 세웠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예술을 모방의 양식이라고 규정하고, 문학은 행동하는 인간을 모방한다고 했다.(2 아리스토텔레스,<시학 2장>)

 이 때 '행동하는 인간'을 모방한다는 것은 구체적인 삶의 목적과 과정을 모방한다는 뜻이다. 즉 문학에서 모방의 대상은 인간 혹은 인간의 삶이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시학> 4장에서 행동의 모방은 '플롯'이라고 했다. 모방이 있는 그대로를 옮기는 것이 아니라 짜내는 것, 구조화하는 것이란 뜻을 숨기고 있다.

 

 작가는 진실을 찾으려는 목적으로 허구를 만든다. 특히 소설이 구체적이고 보편적인 삶의 진실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실제 삶을 모방하기 위한 허구를 만들기 때문이다. 현실을 다소 과장하여 익살스럽게 그려낸 김유정의 지혜와 철저한 장인의식의 그 열정이 참담한 현실극복의 자기구원으로 나타내고 있다.

 

 김유정은 1908년 2남 6녀의 8남매 중 일곱째로 서울 종로구 운니동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성장하면서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에서 1937년 만 서른을 채우지 못하고 삶을 마감했다. 그러나 그는 고향을 걍원도 춘천으로 하고 있다. 그가 춘천에 머문 것은 2년이 채 되지 아니하나, 이러한 면은 그의 선조와 부모의 고향 그리고 자신의 정신적 토대가 춘천이었기 때문이다.

 근간에는 경춘선에 '김유정역'이 신설되었고 춘천시민들도 그를 숭모하고 있다. 고향을 어디로 정하든 작가 김유정의 몫이지만 서울 태생인 것만은 분명하다. 고향은 자기가 태어나서 자란 곳이다. 또한 마음 속 깊이 간직한 그립고 정든 곳을 일컫는다. 조상대대로 살아온 곳도 고향이란 범주에 속한다.(3 정종암,<목월의 사랑과 기독교적 영성>,한국문학방송 엔솔리지 제2집,2011.10, 정종암은 문학계에선 문학평론(비평)가이자 시인이며 수필가이다. 또한 문학계를 벗어 나서는 정치,사회분야를 비평하는 시사평론가이기도 하다) 한국 근대소설사에 뚜렷한 개성을 지닌 그의 작품 그 중에서도 1930년대 일제치하 피폐한 농촌 현실 및 도시 서민들의 궁핍한 생활상을 사실적으로 그려낸 작품을 중심으로 살펴 보고자 한다.

 

 

 2.김유정 문학이 태동한 시대적 배경

 

 

 

 먼저 근대소설의 흐름부터 보고자 한다. 근대소설의 범주는 일반적으로 1900년대 초에 나타난 신소설부터 1945년 해방 직전까지의 소설을 의미한다. 19세기 말에서 1910년대 초까지 조선사회는 개화기였다. 그럼으로써 조선사화는 물질과 정신의 양면에서 엄청난 변화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된다. 동학농민혁명과 갑오경장이란 이 역사적 사건을 통해 매우 빠른 변화의 물살을 타게 되었다. 신분제도의 철폐로 상징되는 반봉건 의식이나 선교사 등에 의해 설립된 근대 사립학교를 통한 근대적 교육의 실시로 상징되는 신문화운동 등이 바로 그것이다.

 

 김유정이 주로 발표한 1930년대는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침략 야욕이 더욱 강화되기 시작한 시기로, 만주를 점령한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대륙침략의 야욕을 드러내 결국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켰다. 이로써 식민지 조선의 민중들이 겪는 고통은 그 끝을 알 수 없을 만큼 가혹했다. 1930년대 조선사회의 가장 큰 관심은 식민지 농촌의 계몽이었다. 당시 조선의 산업 90%이상, 인구는 80%이상이 농업과 농민이었음을 볼 때, 이 시기 농촌과 농민에 대한 관심은 사실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1920년대 중반부터 기독교와 천도교 등 종교단체를 중심으로 한 농촌계몽운동이 전개되기는 했었지만, 이 시기에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서 주도한 농촌계몽운동은 문학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쳐 1930년대 농민소설 등장의 중요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 이 시기 중요한 작가로는 본고에서 고찰할 작품의 작가인 김유정을 비롯하여 심훈, 채만식, 이효석 등이 있다.

 

 또한 1930년대 일본 제국주의의 시장확대정책에 따라 급격한 도시화의 과정 속에 있었던 서울과 그 속에서 자라난 도시세대의 등장이라는 문학세대적인 조건이 놓여 있었다. 조선에 진출한 일본 제국주의의 금융자본은 조선시장 확대정책에 따라 지속적인 도시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1934년에는 서울(경성)의 인구가 38만 2천 명(4 <개벽>속간호 1호,1934.11,120쪽), 1941년에는 97만 명에(5 <서울 600년사>권,서울특별시,1981)이르는 것으로 보아 다른 도시의 인구 증가율도 상대적으로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서울의 인구 급증은 1934년 총독부에 의한 '조선시가지계획령'과 그에 따른 인근지역의 서울 편입(용산, 성북 등)이 주요인이라 하겠으나, 외형적으로는 1930년대 10년 동안 약 70만 명의 인구가 늘어난 것이다. 그만큼 서울은 한반도내에서 일본 제국주의의 가장 큰 시장이었을 뿐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중심지였다. 그러나 식민지 지배였기에 조선인이 주체세력은 되지 못하였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김유정이 1930년대 조선의 농촌 현실 및 도시 서민들의 생활상을 실감나게 그려냈다. 1930년대 김유정은 농촌의 피폐와 도시의 궁핍화를 식민지라는 사회적 구조의 모순으로 인식하고, 이러한 사회적 모순이 빚어낸 유랑민들과 도시 빈민들의 삶을 토대로 한 시대적 현실 인식과 해학적인 시각으로 그려낸 소설을 분석, 비평코자 한다.

 

 

  • 김유정 문학의 시대적 현실 인식과 해학적 특성

 

 

 

1. 피폐한 농촌의 현실 인식

 

 

 

 농촌 피폐의 원인을 비교적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음을 김유정의 소설 속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즉 '자작농의 소작농화 -> 빚 -> 도시로의 이농 -> 도시 속에서의 극빈'과 같은 이 모든 현상을 각각의 단편들을 통하여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6 이하 작품은 원문에 충실하기 위해 당시의 한글 맞춤법에 의한다. 또한 본고의 작품도 원본에 의한다.) 농민의 비참한 생활모습을 그린 같은 시대 작가인 이기영의 <고향>, 권환의 <목화와 콩>에서도 이러한 계급주의 경향을 볼 수 있다.

 

 

   -캄캄하도록 털고나서 지주에게 도지를 제하고,

  장리쌀을 제하고 색초를 제하고 남는 것은 등줄기를 흐르는 식은 땀이 있을 따름.

  그것은 슬프다 하니보다 끗업시 부끄러웝다.

  가치 털어주든 동무들이 뻔히 보고 섯는데 빈 지게로 덜렁거리며

  집으로 들어오는 건 진정 열쩍기 짝이업는 노릇이었다.

  참다참다 옹오는 눈에 눈물이 흘럿든 것이다.

 

  만무방.84쪽

 

 

    -그는 자긔의 고향인 인제를 등진지 벌서 삼년이 되엇다. 해를 이어

   흉작에 농작물은 말못되고 딸이 빗쟁이들의 위협과 악마구니는

   날로 심하엿다. 마침내 하릴업시 집, 세간사리를 그대로 내버리고

   알몸으로 밤도주를 하엿든 것이다. 살기조흔 곳을 찻는다고 나어린

   안해의 손목을 이끌고 이산 저산을 넘어 표랑하엿다. 그러나 우정

   찻어 들은 것이 고작 이 마을이나 살속은 역시 일반이다. 어느

   산골엘 가 호미를 잡아보아도 정은 조그만치도 안나붓헛고 거기에는

   오즉 쌀쌀한 불안과 굶주림이 품을 벌려 그를 맛을 뿐이엇다.

   터무니 업다하여 농토를 안준다.

 

   소낙비.31쪽-

 

 

 위 '만무방'이란 작품은 1930년대 1년 농사를 짓고 남는 것이 등줄기를 흐르는 식은 땀뿐이라는 인식은 당시의 소작인들의 상황을 잘 요약하고 있다. 농토로써는 전혀 부적합한 정자터마저 도지를 놓아 소작인을 착취하는 것이다. 근 1세기가 흐른 대한민국에서도 소작인들의 상황은 크게 달라진 게 없다. '소낙비'에서 보면 결국에는 야반도주로 고향을 등지고 아내까지 매매하는 주인공의 행위는 김유정이 근본적으로 1930년대의 궁핍화되고 피폐화된 농촌이 안고 있는 현실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사회비평(평론)가의 기질도 엿보이는 측면도 없잖아 있다.

 풍자와 조롱으로 일관한 작품도 있으나, 시대적 상황 때문이었는지 독설이나 비판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기에 사회비평(평론)가의 범주에 놓기에는 이러한 점에서 어렵다. 다시 말해 옳거나 그르거나 간에 분명히 짚고 넘어가는 점이 없다는 것이다. 김유정이 나라를 빼앗긴 일본 제국주의하에서 그 세력들에게 적의를 품고 공격할 수 없었던 점은 이해할 수 있는 면도 없는 게 아니지만, 그의 내심을 알 수 있는 길이 없기에 그의 몫에 맡길 수밖에 없다. 어쩌면 식민지하의 지식인들의 무기력함을 엿볼 수 있는 면으로 한민족으로서는 애석할 따름이다.

 

 김현은 이러한 김유정의 문학을 '하나의 소설적 트릭도 없이 있는 그대로 내보임으로써 그 어떤 작가보다도 식민지 치하 농촌의 궁핍상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7 김현,<김유정 혹은 농촌의 궁핍화 현상,민음사,1994,199쪽)'고 보고 있으며, 또한 김병익도 자기와 더불어 살고 있는 농민들이 왜 가난한가를 명백하고 정확하게 통찰하고 있으며, 농민들의 참상을 완벽하게 우리의 고전적 언어와 서정으로 농축시켰기에 이 작가야말로 가장 당대적이며 초시대적인 문학성을 획득(8 임병택 외편,<한국근대문학사론>,한길사,1982,535쪽)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글로벌화된 21세기인 작금에도 FTA(대외무역협정)체결 등으로 농산물과 축산물의 수입으로 일부 기업농을 제외하고는 농촌의 궁핍상이 상존하고 있다. FTA가 필수 불가결한 요소임에도 불구하고 식량자급률이 아주 낮은 우리나라의 농민들이 브랜드화나 고급화가 되지 않고는 값싼 농수산물 수입으로 고통을 받기 때문이다. 또한 농협 등이 본래의 목적을 잃고 아주 교묘하게 영세농을 착취하고 있는 부분도 없잖아 있다. 채산성이 맞지 않아 적자에 허덕이는 농민자신이 가꾼 농작물을 불 태우거나 기른 가축을 굶기거나 자살하는 등 빚에 야반도주가 간간이 발생하고 있는 게 아이러니하다.

 

 위 작품에 이어 다음으로 '동백꽃'은 소작인의 아들인 '나'와 '삼순이'사이의 계층적 차이와 갈등까지 맞물려 있음에 주목할 필요성이 있다. 김유정의 처녀작으로는 1933년의 <산ㅅ골 나그네>이다. 1930년대 초는 문학에 대한 일제의 탄압이 극도에 달한 시기이다. 이로써 1920년대 중반부터 활발했던 프로문학은 지속되기가 힘든 시기였다. 1930년대는 김유정을 비롯하여 채만식, 유진오, 이상, 황순원, 김동리, 정비석, 이부영 등이 등단한 시기이기도 하다.

 

 

 -설혹 주는 감자를 안받아 먹은 것이 실레라 하면

주면 그냥 주었지 '느집엔 이거 없지'는 다 뭐냐.

그렇잖아도 즈이는 마름이고 우리는 그 손에서

배재를 얻어 땅을 부침으로 일상 굽신거린다.

 

동백꽃.101쪽

 

 

 "이 놈아! 너 왜 남의 닭을 때려죽이니?"

"그럼 어때?"

하고 일어나다가

"뭐 이 자식아! 누 집 닭인데?"

하고 복장을 때미는 바람에 다시 벌렁 자빠졌다.

그리고나서 가만히 생각을 하니 분하기도 하고 무안스럽고

또 한편 이을 저질렀으니 인젠 땅이 떨어지고

집도 내쫓기고 해야될는지 모른다.

 

동백꽃.151쪽-

 

 전자는 점순이에 대한 '나'의 견해를 드러내는 부분이다. 즉 점순이의 집요한 유혹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이유는 여성스럽지 못한 그녀의 천연덕스러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점순이랑 일을 저질렀다가는 점순네가 노할 것이고, 그러면 우리는 땅도 떨어지고 집도 내쫓기고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까닭'이기 때문이다.

 후자는 점순이의 집요한 계락에 이기지 못하고 '한창 피여 퍼드러진 노란 동백꽃 속으로 파묻혀' 쓰러져야 하는 나의 소극적 행동양식의 원인 역시 결국 '남의 닭'을 죽인데 있는 것이 아니라 '누집 닭', 즉 마름 집의 닭을 죽인 것에 있으며 이는 '나'의 생존이 달린 문제와 직결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안해'에서 찾을 수 있는 아이러니는 자기 아내에게서 일천오백 원을 바라는 화자의 어리석음이다. 그러나 이러한 아이러니의 배후에는 고달픈 그의 삶의 모습이 자리하고 있음을 인지할 수밖에 없다.

 

 

 -가다가 속이 맥맥하고 부하가 끓어오를 적이 있지 않나.

농사는 지어도 남는 것이 없고 빚에는 몰리고,

게다가 집에 들어스면 자식놈 킹킹거려,

년은 옷이 없으니 떨고 있어 이러한 때 그냥 백일수야 있는냐.

트죽태죽 꼬집어 가지고 년의 비녀쪽을 턱 잡고는 한바탕 훌두들겨 대는구나.

한참 그 지랄을 하고나면 땀이 뿍 흐르고 한숨가지 후, 돈다면 웬만치

속이 가라앉을 때였다.

담에는 년을 도로 밀쳐버리고 담배 한대만 피어물면 된다.

 

안해.153쪽

 

 

 우리가 요즘 먹는 것은 내가 나무장사를 해서 벌어드린다.

여름 같으면 품이나 판다 하지만 눈이 척척 쌓였으니 어름을

꺼먹느냐. 하기야 산골에서 어느놈 치고 별 수 있겠냐 마는

하루는 산에 가서 나무를 해드링고 그 담날엔 읍에 갔다가 판다.

나니깐 참 쌍지개질도 할 글력이 되겠지만, 잔뜩 나무 두지개를

혼자서 번차레로 이놈 져다놓고 쉬고 저놈 저다놓고 쉬고

어떻게 해서 장찬삼십리 길을 한나절에 들어가는 구나. 그렇지

않으면 은제 한지개 한지개식 팔아서 목구녕을 추길수

있겠느냐.

이 멋에 게집이 고마운 물건이라 하는 것이고 내가 또 년을

못 잊어하는 까닭이 거기 있지 않나.

 

안해.155쪽-

 

 

 결국 그가 아내를 들병이로 내보낼 계획을 세우게 된 동기는 그의 정조관이 부족했던 탓일까? 이건 분명 아니다. 후안무치하고 금수 같지 않고는 불가능한 짓이다. 작중에서 보듯 농사를 지어도 흑자가 아닌 적자에 허덕이고 빚에 몰리는 형국이었기 때문이다. 인간이 살아감에 산 입에 거미줄을 칠 수 없는 당시 농촌의 궁핍하고 고단한 삶을 그렸다. 이러면서도 주인공은 남의 일을 이야기하듯 태평스럽다. 이러듯 김유정의 작품 전반에서 보여지는 삶은 일본 제국주의치하 농촌의 수탈과 농민의 궁핍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것이지만 실제로 그 원인 규명이나 삶의 전망에 대해서는 어떠한 언급이 보이지 않는다. 단지 그는 현실에서 소박한 농민의 삶을 제시하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점에 대해서는 사회비평과 다른 점이다.

 

 김유정이 스스로 현실파악을 하지 못할 만큼 바보스러운 인물을 제시하여 궁핍한 한 삶의 대처방안으로 고작 아내를 들병이로 보낸다는 계획을 세우게 하고, 여기에 자신의 아내에게 아이를 출산케 하여 그로부터 일천오백 원을 벌어들일 궁리를 하게 되는 아이러니 구조를 마련함으로써 독자에게 작중 인물이 처한 삶의 한계에 주목하게 하고 연민을 느끼게 한다.

 

 김유정은 '만무방'에서도 그러한 아이러니를 낳는다. 즉 옹오가 자신의 욕망을 달성하는 방식에 있어 정상을 벗어나 심하게 훼손되어 있다는 점에서 아이러니를 찾을 수 있다.

 

 

 -하기는 응오의 안해가 지금 기지사정이매 틈은 업섰다.

하드라도 돈이 놀아서 약을 못쓰는 이판이니 진시 벼라도

털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왜 안 털엇든가 -

그것은 작년 응오와 가치 지주 문전에서 타작을 하든

친구라면 뭇지는 안흐리라. 한해동안 애를 조리며 홋자식

모양으로 알뜰이 가꾸든 그 벼를 거더드림은 기쁨에

틀림업섯다. 꼭두새벽부터 엣, 엣, 하고 괴로움을 모른다. 그러나

캄캄하도록 톨고나서 지주에게 도지를 제하고, 장리쌀을 제하고

색초를 제하고보니 남는것은 등줄기를 흐르는 식은 땀이

잇슬따름. 그것은 슬프다 하니보다 끗업시 부끄러웝다. 가치

털어주는 동무들이 뻔히 보고 섯는데 빈지게로 덜렁거리며

집으로 들어오는건 진정 열쩍기 짝이업는 노릇이었다. 참다참다

응오는 눈에 눈물이 흘럿든 것이다.

 

만무방.84쪽-

 

             

 작중에서 응오는 일본 제국주의의 가혹한 농민수탈과 그에 기생하는 악덕 지주의 횡포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응오는 농민의 현실을 타개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은 끝에 강구한 게 자기 벼를 자기가 훔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에서 아이러니하다.

 

 이러한 바보스런 인물을 등장시키는 것은 그럴 수밖에 없었던 당시의 농촌 현실이 아프게 부각되어 농민의 삶과 농촌의 황폐화를 드러내 독자들에게 더욱 가슴 저미는 아픔으로 인식시켜 주고 있는 것이다.                                                                       

 

 

 

2.일제치하 도시화 과정에서 그 하층민들의 현실인식

 

 

 

 김유정은 현실인식이 농촌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그 당시 2천만 인구 중에서 80%가 농촌 거주였고 그들이 도시가 아닌 농촌에 살고 있다는 당시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이들의 도시 특히 서울에 대한 관심 집중은 조선의 리얼리티를 도외시한 것으로 비쳐질 수도 있다. 그러나 서울시민 특히 실업자의 많은 수가 가중되는 농촌의 궁핍화에 따라 일자리를 찾아 무작정 상경한 농민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그 도시를 새로운 각도에서 깊이있게 통찰할 수 있는 작가의 도시적 상상력의 개발 여부이다. 문학은 그 본성에 있어 늘 구체적인 현실 체험에 근거하지 않을 수 없는 분야다. 작가의 임무는 그 체험에 어울리는 효과적인 표현을 부여하는 것이다.(9 서준섭,<한국모더니즘 문학 연구>,일지사,1988,34~5쪽)

 

 그러기에 이러한 슬픈 이야기의 아이러니는 열악한 도시의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나와 이웃집 남자와의 관계 사이에서 일어난다. 나는 옆방에서 들려오는 소란 때문에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는데 내가 이러한 환경으로부터 탈출하려는 욕망의 좌절에서 아이러니가 빚어지고 있다.

 

 

 -새루 두점이나 바라 보련만도 그대로 고생고생 하다가

이제야 눈꺼풀이 어지간히 맞아 들어올라 하는 데다 갑작스리 꿈,

하고 방이 울리는 서슬에 잠을 고만 놓지고 마는 것이다. 이것은

재론할 필요없이 요 뒷집의 거는 방과 세들어 있는 이 내방과를

구분하기 위하여 떡막아논, 벽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울섶으로

보아 좋을 듯 싶은, 그 벽에 필연 육중한 몸이 되는대로

디리받고 나가 떨어지는 소리일 것이 분명하다.

 

슬픈 이야기.273쪽-

 

 

 지금 내가 살고 있는 동네는 '번시라 푼푼치 못한 잡동산이만이 옹기종기 몰킨 곳'으로 있는 방 역시 '오래된 도배지가 너털너털 쪼개지고, 그래서 어짜다 뽕 뚫린 하잘것없는 그 구녕'이 있는 그런 방이다. 해방이후 산업화를 거치고 민주화된 작금의 대한민국에서도 심한 빈부격차 속에서 하루하루를 힘들게 살아가는 피골이 상접한 영혼들의 안식처인 쪽방촌의 사람들은 그때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다.

 김유정이 왕성한 작품활동을 했던 1930년대와 2010년대 도시하층민들의 삶이 크게 달라지지 않은 이 시대를 살았더라도 사물을 보는 눈이 크게 달라졌을지는 의문이다. 그 시대의 열악한 생활조건 때문에 그는 옆방의 소란을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처지가 되고 결과적으로 이웃집 남자와의 관계에서 자신은 바보로 몰리는 꼴을 겪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위 작품에서 나타나는 아리러니의 근본적인 배경은 열악한 도시의 거주 조건을 볼 수 있는 한 단면이다.

 

 또한 '생의 반려'는 전체적으로 보아 명렬의 명주에 대한 개인적 욕망의 추구로 보여진다. 이러한 욕망이 발생하게 된 동기는 모성애의 굶주림 그리고 누이의 변덕스러움과 히스테리는 공장생활이라는 도시적 삶의 궁핍에 그 원인이 있다. 일본 제국주의란 착취계급이 더 큰 원인을 제공하고 있다. 또한 1930년대는 일본 제국주의 식민지 파쇼통치 시대였다. 이러한 말살정책은 모더니즘이 등장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지만 신지식인들의 무기력함은 심했다.

 

 

 -그러나 허약한 젊은 여자에게 공장살이란 견디기 어려운

고역이었다. 공장에 다닌지 단 오년이 못되어 그는 완연히

사람이 변하였다. ...중략... 낮 같은 때 공장에서 일을 하다가

까빡 졸적이 있다. 그러나 삐긋하면 엄지손가락을 재봉틀에

박는다 마는 뺄수는 없고 그대로 서서 쩔쩔 매는 것이다. 그러면

감독은 와서 뒷통수를 딱 때리고

 "조니까 그렇지 -"

하고 눈을 부라린다.

혹은 뒤를 보러갔다 늦을 적이 있다. 감독은 수상이 여기고

부낳게 쫒아온다. 그리고 잡은창 문을 열어제친뒤 자로다

머리를 따리며

"알캥이를 세고 있는거야?"

하고 또 호령이었다.

그러나 그는 치바치는 설움과 분노를 꼭꾹 참지않을 수 없다.

감독에게 말대꾸하는 것은 공장을 고만두는 사람의 일이었다.

 

생의 반려.241쪽-

 

 

 작중에서 일본 제국주의 시대의 도시 근로자가 겪는 삶의 질곡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21세기이자 경제대국 대한민국에서도 도시의 일용노동자가 현장에서 겪는 고단한 삶도 달라진 것이 없다. 착취자와 피착취자의 삶은 시대를 초월하여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다. 작중에서 누이는 이러한 삶에서 받는 정신적 압박감 때문에 정신적인 황폐함을 겪는 결과에 의해 자연스럽게 명렬에게도 심한 구박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명주를 향한 명렬의 불타는 사랑으로 겪어야 했던 아이러니는 작품에서도 당시 도시적 삶의 황폐화를 보여주는 것으로 도시적 삶의 궁핍상이 하나의 서술조건을 이루고 있음을 보여준다.

 

 김유정의 '땡볕'은 농촌에서 살 길을 찾아 상경한 부부의 절망적인 삶의 순간을 그려나가고 있다. 덕순의 아내는 죽은 아이를 그대로 뱃속에 넣어두므로 자꾸만 배가 부어오른다. 이런 사실을 알지 못하는 덕순은 대학병원에서 이상한 병은 월급을 주고 고쳐준다는 소문을 곧이 듣고 아내를 지게에 태워 땡볕을 걸어서 병원으로 간다. 하지만 간신히 찾아간 병원에서는 월급은커녕 의사와 간호사로부터 비웃음만 안은 채 돌아온다.

 김유정은 이렇게도 절박한 부부에 대해 어떤 동정심이나 친근감을 강요함이 없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희화화하여 웃음으로 전개해 나가고 있다. 하지만 김유정은 무지하면서도 무능한 덕순과 그의 아내를 통하여 농촌에서 이주한 도시하층민의 궁핍한 삶을 극명하게 파헤치고 있는 것이다.

 

 

 -덕순이는 눈우로 덮는 땀방울을 주먹으로 훔처가며

장차 캄캄하야 올 그 전도를 생각해 본다. 서울을 장대고 왔든 것이

벌이도 제대로 안되고 게다가 인젠 안해까지 잃는 것이다.

지에미부틀! 이놈의 팔자가, 하고

딱한 탄식이 목을 넘어오다 꽉 깨무는 바람에

한숨으로 터저버린다.

한나절이 되자 더위는 더한층 무서워진다.

 

땡볕.309쪽

 

 

  -햇빛이 안들고 늘 습한건말고 조금만더 넓었으면 좋겠다.

 영애나 아끼꼬나 둘 중의 누가 밤의 손님이 있으면 하나는 나가잘수밖에 없다(286쪽).

 어쩌다 공장에서 뒤를 늦게 본다고 감독에게 쥐어박히거나,

 혹은 재봉침에 엄지손톱을 박아서 반쯤 죽어오는 적도 있다(288쪽).

 변또 하나만 차면 공장의 게집애나 뻐쓰껄로 알가봐서 그 무거운 잡지책들을

 힘 드는줄도 모르고 들고  왔다갔다 하는 것이 아니다(291쪽).

 

 따라지-

 

 

 이무영의 소설 <제1과제 제1장>에서도 보듯이 1930년대는 도시생활에 대한 비판과 함께 등장한다. 위의 '따라지' 역시 사직골 꼭대기의 깨끗한 초가집에 세들어 사는 인물들을 등장시켜 도시 중에서도 변두리의 군상들의 삶을 총체적으로 조명한 작품이다. 그러한 속에서도 이처럼 궁핍한 삶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악착같은 생명력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인간의 근원적인 힘이다. 일본 순사까지 대동하여 미납된 방세를 독촉하는 임대인 노파를 교활하고 뻔뻔스러울만큼 능청스럽게 곯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망할 년!이번에 봐라 내 장독우에 오줌까지 깔길테니!"하고 벼를 정도로 생에 대한 애착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김유정이 단지 토속적이고 해학적인 작가로서만 머물지 않았다는 것이다. 즉 투철한 시대정신이 살아있는 작가라는 점도 인식시켜 주고 있다.

 

 

3.풍자와 해학의 극치

 

 

 

 풍자와 해학은 골계의 하위개념으로 모두 개인이나 사회의 결점과 모순의 상태를 그 대상으로 하고 있다. 사회의 모순구조에 대하여 표면적이든 이면적이든 공격하고 개선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는 것이 풍자와 해학의 공통적인 기반이다. 그러나 엄격한 의미에 있어서 그 용법과 효과의 측면은 같은 맥락으로 파악될 수 없는 상이점을 갖는다.

 

 풍자는 현실에 대한 부정적이고 비평적인 태도에 근거를 두고 성립하므로 노골적인 공격의 성격을 가지고 있으면서 대상의 교정과 개량의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풍자는 항상 그 대상이 있고, 그 대상에 대하여 비판적이면서 냉소적이다.

 풍자가는 우선 그가 하고 있는 일의 가치와 그 필요성을 독자에게 설득시키고자 한다. 대상은 부조리하며 그러한 부조리한 대상은 개선이 필요하다는 점을 인식시키기 위해서는 자신의 말이 진정이라고 독자에게 설득시켜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풍자가가 하는 말이 그의 의도와 일치해야 하고, 적어도 그의 말이 진정이라고 독자에게 납득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10 Arthur Pollard,송낙헌 역,<풍자>,서울대출판부,1980,93쪽) 이러한 풍자가의 태도로 인하여 풍자는 항상 그 대상을 향하여 항의하고 공격하려는 자세를 갖추게 되는 것이다.

 

 대상에 대하여 적대적인 풍자와는 달리 해학은 대상의 부조리나 모순을 나타내기는 하되, 이에 대하여 한층 넓고 깊게 통찰하여 동정적으로 감싸 주는 것이다. 따라서 해학은 동료 인간에 대하여 신의를 가지고 그 약점, 실수, 부족을 같이 즐겁게 시인하는 공감적 태도로써 특히 우스운 것의 '무형식의 형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이것은 대상을 조롱함으로써 상대의 값, 즉 가치를 깎아내리는 기법으로 저의가 있는 희극과 저의가 있는 위트가 들어있는 풍자와는 다른 것이다.

 이처럼 해학은 모순과 불합리한 것에 대한 반발과 저항에서 출발하지만 모순되고 불합리한 대상과 정면으로 맞서서 교정, 타파한다기보다는 인상 깊은 비유, 육담과 비속어, 유머있는 어휘, 희극적인 모습 등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부정적 대상을 야유하는 신속한 방법을 의미하는 것이다.(11 조건상,<한국현대골계소설연구>,문학예술사,1985,151쪽)

 

 김유정은 공격과 비판을 표면에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애정이 담긴 웃음을 통하여 세상을 보고 있다. 비록 사회의 모순을 풍자하고는 있으나 그가 다루는 인물은 '철저하게 순박하고 우직하기에 차라리 유머의 대상, 동정의 대상'으로 보여준다.(12 유인순,<김유정문학 연구>,강원대 출판부,1988,220쪽)

 

 김유정이 활발하게 소설을 쓴 시기는 1933,1~1936,5월까지이다. 이 시기, 즉 1930년대는 프로문학이 퇴조하고 순수문학이나 역사소설 그리고 자기고발 또는 풍자소설이 주류를 이루었다. 풍자작가는 인간에 대한 동정과 웃음을 본질로 하는 것이 아니라 원정(怨精)을 기초로 그것을 일반화하여 풍자문학을 일구어 나간다. 풍자가는 타인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 반면에 유머작가는 너그러운 마음을 갖고 자신보다도 타인의 관점에서 애정을 쏟는다. 김유정의 '심청'이라는 작품에서 이러한 냉소적인 풍자가 드러남을 볼 수 있다.

 

 

 -"오, 주여! 당신의 사도 '베드로'를 나리사 거지를 치워주시니

너머나 감사하나이다"하고 나즉이 기도를 하고 난뒤에 감사와

우정이 넘치는 탐탁한 작별을 동무에게 남겨놓앗다.

자기가 '베드로'의 영예에서 치사를 받은 것이 동무는 무척

신이 나서 으쓱이는 어깨로 바람을 치올리며 그와 반대쪽으로

거러간다.

때는 화창찬 봄날이엇다. 전신줄에서물찍통을누려깔기며

"비리구 배리구"

지저귀는 제비의 노래는 그 무슨 곡조인지 하나도 알랴는

사람이 없엇다.

 

심청,165쪽-

 

 

 풍자의 기법을 사용하여 농촌에서 도시로 올라와 도시생활에 부적응하는 거지와 비교하여 출세란 관계를 설정해 조변석개하는 친구를 냉담하게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풍자는 김유정의 어투에서도 나타나는데 '요놈', '애벌레'등 직설적인 표현을 사용하고 있으면서도 출세한 친구에게는 깍듯한 어투로 '베드로'의 치사를 하는 이중성이 특이하다. 그러면서 이 작품 외에는 풍자가 사용되는 게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 또한 특이하다. 그의 대부분의 작품은 강렬한 비판정신을 표면에 앞세우는 풍자의 정신보다는 인간의 영혼을 감싸는 해학의 전통을 계승하여 너그러움, 애정을 바탕으로 하는 웃음의 이성적이기보다는 감성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13 박세현,<김유정의 소설연구>,인문당,1990,78쪽)

 

 김유정은 유별나게 등장인물 대부분을 자신의 처지나 현실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바보형 인물들로 제시하고 있는 게 특징이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거의가 예외없이 단순하면서도 우직한 바보들로 설정하여 선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마침 바보들의 행진을 보는 듯 하다.

 

 

 -일원짜리 때묻은 지전뭉치를 끄내들드니 손가락에 연실 침을

발라가며 앞으로 세여보고 뒤로 세여보고 그리고 이번에는

꺼꾸루 들고 또 침을 발라가며 공손히 세여본다. 이렇게

후질근히 침을 발라셋것만 복만이가 또다시 공손히 발르기

시작하니 아마 지전은 침을 발라야 장수를 하나부다.

 

가을.176쪽_

 

 

 소장수가 복만의 아내를 매수하는 매매계약서를 작성한 연후에 대금을 지급하는 장면이다. 대금을 지급하는 주인공들인 소장수와 복만은 지폐 한 장이라도 더 가고 덜 받지 않으려는 듯 제법 똑똑한 체하지만 우스꽝스럽기 그지없다. 아내를 돈으로 환산하여 거래하는 바보인 것이다.

 이처럼 김유정은 그의 소설에서 나타나는 해학이 여느 풍자작가들과 달리 다른 특징을 가지는 것은 이처럼 대상화된 인물들에 대한 야유가 아니라, 그들에 대한 따뜻한 애정을 가지고 그러한 행위들을 바라보는 데서 비롯된다.

 

 

 

 

  • 끝내며

 

 

 

 이러한 김유정 문학의 해학적 특징은 열등한 인간들이 그 열등의식을 자각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벌어지는 희화성(戱畵性)에 있다. 그의 언어감각이 가장 잘 드러난 것도 웃음을 자아내는 '바보형 인물창조'에서 그 재능이 유감 없이 발휘되었다는 점이다. 현실을 누구보다 날카롭게 파악했으면서도 현실사회에 대한 울분의 폭발이나 고발적 공격성을 일체 드러내지 않고 오직 자기희화화(自己戱畵化) 내지 현실희화(現實戱畵)에 열정을 쏟음으로써 현실과 자신을 나누어 볼 수 없는 초월의 상태, 즉 자기 구원의 방법을 찾아낸 그의 인식에 이르는 아주 준열한 고통을 이해했을 때야만이 작금의 문학도들이 제대로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김유정은 시대적 피해상황을 풍자와 해학이라는 방법을 택했다. 웃음을 환기하는 세계를 통하여 1930년대 하층민의 일상화된 비극적인 삶을 드러냄은 물론 동시에 현실에 대응하는 방법으로 삼고 있다. 그의 작품에서 평론(비평)가의 면모가 보이기는 하나 외향적으로는 맹렬하게 비판을 못한 것만은 사실이다. 소설가나 수필가의 범주에는 속하나 문학평론(비평)가는 물론 사회평론(비평)가의 반열에 넣기는 어렵다. 내심적으로는 아리스토파네스(Aristophanes)와 같은 성격의 소유자라고도 볼 수 있지만, 적대세력에 대해 독설로 공격을 마다하지 않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면이 다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 식민지 지식인의 이러한 무기력함에 비애를 느낄 수 있는 작가는 김유정만은 아니다.

 

 

 

 

 

*참고문헌*

 

 

 

 아리스토텔레스,<시학>,이상섭 옮김,문학과 지성사,2005

 박세현,<김유정의 소설연구>,인문당,1990

 구인환,<소설론>,삼지원,1996

 김현,<김유정 혹은 농촌의 궁핍한 현상>,민음사,1994

 임병택 외편,<한국근대문학사론>,한길사,1982

 박세현,<김유정의 소설연구>,인문당,1990

 유인순,<김유정의 문학연구>,강원대 출판부,1988

 조건상,<현대골계문학예술사 연구>,문학예술사,1985

 서준섭,<한국모더니즘 문학연구>,일지사,1988

 김영기,<김유정-그 문학과 세계>,서문사,1992

 

*인용한 부분의 각주는 편의상 본문에다 처리했다. 본 창작품을 인용시는 저작권법상 작가의 서면동의를 구함과 동시에 출처와 작가명을 반드시 밝혀야 한다.(jja-news@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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