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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실리(時失里)에서(2-1)
2010-02-17 10:34:44
yookh

조회:1329
추천:83

시실리에서(2-1)

                                   

  여러 해 지난 30대 초반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마을 이름 하나. 시실리(時失里).

 내 안쪽, 깊은 곳에서 해체되고 흐려져 그 마을의 기억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서부터 재구성이 되었는지조차 확실하지 않지만 시실리라는 이름만으로도 나는 잠시 숨이 막혀 온다.

대나무 작은 가지 사이를 스치고 지나던 감미롭던 바람소리, 그리고 코끝에 남아 있는 은은한 금목서(金木犀) 향기를 어떻게 지울 수 있겠는가. 정말이지 나는 그 몽롱하던 꽃향기를 떨쳐 버릴 수가 없다. 금목서, 길러 보시  게요? 흰 꽃 피는 게 은목서, 이렇게 노란 꽃을 피우는 놈이 금목서지요...중국 원산으로 물푸레나무과 상록수 교목으로 가을에 길고 둥글게 마주보는 잎 사이에 등황색 자잘한 꽃이 이렇게 엄청 달립니다. 흔한 나무는 아니지요. 정원수 시장을 지나다가 기억 속의 그 이상한 꽃향기에 놀라 잠시 멍해 있는 내게 수목원 주인은 덧붙여 말했다. 이 나무는 원래 우리나라 중부 이상에서는 살지를 못했어요. 그럼 먼 중국 남쪽에서 사는 나무였네요. 나는 잠시 꿈꾸듯이 대꾸했다. 은은하면서도 그 몽롱한 향기를 뜻하지 않게 서울 도심, 나무 시장에서 현실로 다시 맡으면서 내 기억의 일부가 환영만은 아니었으리라는 생각에 나는 잠시 몸을 떨었다.     

-상상력의 세계와 밀접한 선생의 직업이 잠시 의식에 혼란을 주었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현실과 허구의 경계가 견고하게 독립되어 있지 못하고 잠시 뒤섞였다고 할까요? 아무튼 소설 쓰는 작업을 당분간 중단하시고,  단순하게 눈앞에 보이는 것만 확인하면서 지내시는 게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만.

 그 날 젊은 의사는 내게, 사실 나보다는 가족들을 향해 그렇게 말했었다.

 나 역시 고개를 여러 번 끄덕거려 버렸다.

- 너무 피곤해서 꿈을 꾼 모양입니다.

어머니와 누이의 얼굴에 번지는 안도감을 보면서 나는 미소까지 지어 보였다.    

 기억이라는 것이 사실과 달라질 수도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 마을에서의 며칠이 심한 열병을 앓을 때의 환영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의구심이 그 후에도 가끔 들기는 했다.

 그러나 내 기억 속의 향기를 실제로 내뿜는 꽃이 있고, 그 나무의 실체까지 확인하고 나서는 그 시실리의 편린들을 이젠 소중하게 입안의 박하사탕처럼 아끼기로 했다.   

 

 잠에서 반쯤 깨어 꿈과 현실이 구별 안 되는 의식의 경계에서, 때로 살아나는 대숲을 지나던 바람소리, 파도소리와 돌탑, 더구나 그 금목서 향기와 샤샤의 그윽하던 눈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그 시간, 죽음이 친밀하게 아주 가까이 내 곁에 와 있다는 그런 기분으로 주저앉았던 안개 속의 밭둑이었다.

 가라 앉아가던 의식 속에서 잠깐 고개를 들었던 내 눈앞에, 안개에 휘감겨 있던 못생긴 자연석이 보였고, 서툰 글씨체의 시실리라는 마을 이름이 들어 왔다.

 시실리.

 글씨가 보이자 언제부터인가 콧속으로 기어들고 있던 이상한 향기의 정체를 찾아 그때서야 주위를 돌아보았다.

 지독한 안개 뿐. 시야에는 아무 것도 들어오지를 않았다, 싸아한 냉기를 지닌 그 냄새는 방향마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내 후각 밑바닥에 고여 있던 영안실의 그 향(香)냄새를 밀어내며 그 신선한 향기는 집요하게 안개 저편에서 끊기듯 이어져 왔다. 

 허옇게 무서리가 마른 풀 위를 덮고 있던 오솔길 위로는 한 밤 어둠 같은 안개뿐이었다. 마치 견고한 벽처럼. 안개의 벽이라니. 아마 그때 잠시 생각했을 것이다. 작은 안개의 물 알갱이들이 끈끈한 접착제들로 서로 엉켜, 뚫고 들어가기 힘든 질긴 벽을 세워 놓은 것이라고.

 시실리.

 시간을 잃어버린 마을이라니...

 넋을 놓고 얼마동안을 그렇게 앉아 있다가 나는 그 기묘한 향기의 자력에 끌려 안개의 벽을 향해 몸을 움직였다. 그리고 한 순간 그 안개의 장막을 뚫지 못하면 그 자리에 그대로 녹아내려 몸과 영혼이 해체될 수밖에 없을 것 같은 절박함이 왔던 것 같다.

 

 그때 나는 인도 여행에서 쫓기듯 돌아 온지 20여 일이 지났을 것이다.

 

 서울을 도망치듯 빠져나가 몇몇 머리 빈 친구들이 그 무렵 유행처럼 찾아갔던 인도를 향했던 내 여행 자체가 지금 생각하면 유치한 발상이었다.

 비평가, R이 나를 만나고 돌아가던 밤길에 뺑소니차에 치어 즉사 한지 1주일 후였다.

  R의 사고가 아니었다 해도 그 무렵 나는 누에고치처럼 일체 외부와 연락을 끊고 내 방에 처 박혀서 자살까지를 상상하며 극심한 우울증 속에 가라앉아 가고 있던 때였다.

 R은 그래도 한때 잘 나가던 옛 친구를 위해 주소조차 바뀐 내 오피스텔을 이틀을 뒤져 찾아왔던 것이다.

-아직 젊어. 뭐가 두려운 거야? 잠시 충전이 필요한 거지. 인생을 다 산 것 같은 꼬락서니 사실 그것이 더 건방진 거야.

 그는 들고 온 위스키 한 병을 혼자 다 마시면서 스무 번도 그 비슷한말을 더 하고 떠났었다.

 그리고 30분도 지나지 않아 횡단보도에서 피투성이로 절명했던 것이다.

- 나, 위로 안 해도 되. 끝난 걸 내가 잘 알아.

 썰물처럼 내게서 모든 것이 빠져나가 버린 바로 그 직후였다.

 문학에 대한 야망, 꿈, 돈, 여자도, 신기하게 동시에 내게서 떠나간 후, 황당하게 친구 R이 그렇게 죽고 나자, 나는 친구의 영안실에서 맡았던 그 향냄새를 피해 도망가듯 비행기를 탔었다.

 인도에 가면 다시 시작될 수 있을까. 피폐해진 영혼에 기적처럼 습윤한 정신적 영양이 채워질 수 있을까.

 홍콩 행 비행기를 탔고, 거기서 비행기를 바꾸어 뭄바이에 내렸었다.

 얼음으로 빚어진 육신이 여름 한낮 햇볕 속에 내동이쳐진 것 같던 그 시기의 처절함이라니. 죽는 두려움보다 초라한 육신의 잔해를 남기는 것이 겁이 났던 때였다. 그런데 R의 죽음까지라니. 친구의 죽음에 대한 죄의식까지 겹쳐 나는 더 이상 서울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것 역시 얼마나 어리석은 망상이었는가.

 

 늦은 오후였는데도 기다리고 있었던 듯 덤벼들던 뭄바이의 그 후더운 열기와 소음, 갈비뼈가 모두 드러난 채 거리를 어슬렁거리던 몇 마리 소. 아임 헝거리..아임, 헝거리..파리 떼같이 몰려들던 맨발의 야윈 팔목들 앞에서 곧바로 나는 나의 여행을 후회하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마지막 구원은커녕 혼란 하나가 더 나를 감싸 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친구의 영안실 주위에 떠돌던 향 비슷한 독특한 냄새는 비행기에서부터 시작되었는데, 그 냄새는 거리고, 식당이고, 호텔 침대 맡에서도 끈질기게 나를 쫓아다녔다.

 그 지독하던 인도의 냄새.

 나는 잠을 이룰 수 없어 그 첫 밤을 뒤척이다가 새벽 거리로 나가 버렸다.

 그러나 그 이상한 도시는 새벽마저 후더운 열기에 잠겨 있었다.

 부우윰한 어둠 속에서 도로 한쪽, 몸을 웅크리고 잠들어 있는 사람들의 갈퀴처럼 거칠고 야윈 맨발들이 그 새벽 맨 처음으로 눈에 들어 왔다. 내 영혼 한 조각이 그 곁에 나란히 눕고 있는 환영으로 고개를 돌리려는데, 비쩍 마른 소 한 마리가 잠들어 있는 사람들의 발 아래에서 오줌을 누기 시작했다.

 길 반대쪽 쓰레기더미 위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던 석상 같은 한 노인의 모습이 그 다음의 풍경이었다.

 죽은 것인가, 죽어가고 있는 것일까, 노인이 눈을 뜨는가를 기다리다가 돌아섰던 기억을 시실리의 마을 어귀, 안개 속에서 내가 잠시 떠 올렸었는지... 죽어 있었는지, 요가 상태의 수양 중이었는지 구별 안되던 뼈만 드러나 있던 그 이상한 침묵이라니..그 독특한 인도의 냄새와 노인의 모습이 내  인도 여행을 중단하게 했을 것이다.

 영혼의 자유는커녕 하늘과 땅, 낮과 밤을 온통 채운 그 열기에 섞인 향냄새와 카레 냄새. 나는 서울로 돌아오고 나서 전화 코드까지 뽑고 방문을 걸어 잠갔다.

 다시 내 방에 혼자 쳐 박혀 1주일이 지났다. 그러다가 한 밤 중 몽유병자처럼 집을 빠져 나와  행선지를 확인하지 않고 버스 터미널에서 심야 버스 한대에 올랐다.

 

 작은 도시 변두리의 새벽 거리에 내가 그림자처럼 서 있었다.

 다시 마을 버스를 탔고, 또 내리고, 다시 타고, 허깨비에 홀린 듯 수도 없이 시외 버스와 마을 버스를 무작정 갈아탔었다.

 주로 밤 속으로, 짙은 안개 속으로, 혼자 흔들리며 달리다가 인적이 없는 곳에서 차를 내렸다. 그리고 걸었다. 아주 오래오래. 쓰러질 것 같이 피곤해지면 또 아무 차라도 다시 바꿔 탔다. 그런 식으로 벌써 여러 날이 지났을 것이다.

 그날도 짙은 안개 속에서 마을 버스를 탔을 것이다.

 그리고 얼마나 졸다가 더 지독한 안개 속에서 차를 내려 무작정 걸었다. 나는 그때 이미 내 육신이 한 순간 공기와 대지 위에 흩날려 사라지는 그런 환상 속에서 모처럼 안온한 잠의 유혹에 잠겨갔던 것 같다.

 그러다가 문득 너무 강렬한 향기의 유혹에 고개를 들어 시실리라는 마을 표지를 본 것이다.

 그때 사실 나는 그랬다.

 걸을 수 있는데 까지 걸어가리라. 더 이상 몸을 움직일 수 없을 때, 바로 그 자리에서 눈사람이 녹아내리 듯 그렇게 삶을 끝내도 괜찮지 않는가. 육신이 더 이상 움직일 수 없는 그 장소에서 길지도 않았지만 누추해진 육신을 바람과 햇빛, 물과 흙 속에 해체시켜 돌려보내리라.

 그래서 참으로 자유로워지리라.


장래가 유망한 것으로 갑자기 알려지기 시작한 건방진 젊은 소설가가 한 사람 있었다.

중앙의 신춘문예 현상 모집에 당선. 그리고는 10여 년의 음울하던 습작기에 써 두었던 열 몇 편의 단편과 장편소설 두 편이 약간의 손질과 재 포장되어 연이어 발표되었다.

문예지와 출판사에 박혀 있던 친구들 덕에 비슷한 시기에 한꺼번에 작품들이 햇빛을 보았던 것이다. 그러자 친구들이기도 했던 젊은 비평가들이 앞 다투어 소설 분량 보다 더 긴 소설의 해설들을 신나게 써 갈겨가기 시작했다.

죽은 친구만이 젊은 소설가를 뜨악한 눈으로 처다 보았다.

- 속도 조절을 좀 하는 게 좋지 않겠나?

- 달리는 말 등에 올라타면 기수도 맘대로 못한다는 거 알잖어?

- 좀 무리하는 것 같다. 나야 유명한 작가와 친구인 것만으로도 좋지만 건강 생각도 해야 하고 말야. 또..

몇 개의 여성잡지에까지 그의 사진이 끼워 들었다.

그러면서 그는 어느 사이 가장 촉망되는 젊은 소설가군의 선두에 이름이 올라 있었다. 문학성과 상업성을 동시에 갖춘 놀라운 천재성이라는 말이 그의 이름에 따라 붙으면서 예상치 않았던 몇 개의 문학상이 수여되었고, 그와의 대담이나 사인을 요청하는 독자들이 불어났다.

출판사와 비평하는 친구들 사이에서도 그와의 관계 유지를 위해 신경을 쓰는 눈치들이 보였다. 편집자들이 전화를 집요하게 걸어왔고, 저녁과 술을 샀으며, 문화부 기자들의 인터뷰 요청들 역시 폭주해 갔다. R이 연락을 끊고 있었을 때부터였을까, 우선 맹렬하게 돈이 통장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소설 집필 착수금 명목의 돈이었다.

쑥과 마늘만 먹고 사람이 되어 동굴을 나온 웅녀처럼 온 세상이 그 앞에 금빛으로 빛나기 시작했으며, 문학 잡지와 신문, 매스컴의 문화란 들은 그를 위해 존재하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햇빛이 잘 드는 넓은 오피스텔로 숙소를 옮겼고, 뒤이어 가구도 새 것으로 바꾸어 들였다. 컴퓨터, 오디오 비디오가 바뀌었다. 출판사 사장 한 사람이  중형의 새 승용차 한대를 선물로 보내온 곳도 그 무렵이었다.

자연스럽게 스스로 왕자로 태어났거니 그런 기분 속의 2년 여. 그것은 그에게 삶의 황금기였다.


그런데 어느 날 매미의 생태에 대한 다큐멘터리 필름을 우연히 본적이 있었다.

며칠을 노래하기 위해 매미가 6,7년을 땅 속 어둠에 묻혀 살아간다는 해설을 들으면서 이상하게 오싹하는 한기가 왔다. 노래의 계절이 지나면서 매미의 생애 역시 끝난다는 이야기가 집요하게도 불쑥불쑥 떠올라 왔다.

가난 속의 10여 년, 자학하며 웅크리고 지독하게 고뇌하며 써 왔던 그 습작품들의 먼지를 털어 윤을 내고, 포장을 다시 해 출판사들에 내던지는 동안 언제든 샘물이 솟듯 그 정도 속도로 새로운 원고도 써서 내던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쌓아 두었던 재고품이 거의 바닥 났을 때까지도 젊은 소설가는 아무 걱정도 하지 않았다. 언제든 이름 석자만 붙으면 대학 1학년 때 가볍게 썼던 원고조차도 비평하는 친구들의 붓끝을 통해 살아났으니까.

그는 이미 장래가 가장 촉망되는 천재적인 젊은 작가중의 하나였으므로.

그러나 당선하기 전까지 10여 년 세월, 쌓아 왔던 언어의 조립품들이, 언어의 덩어리와 조각들이, 깊은 서랍 속에서 거의 빠져 나온 다음에야 알았던 것이다.


그가 뱉어낸 무수한 언어들. 10여 년 동안 차곡차곡 저장해두었다가 먼지를 털고 녹을 벗겨 최신의 포장지로 처리하여 쌓아올렸던 언어의 탑이 내 뿜던 찬란한 광휘가 이상하게 소멸되어 가고 있음을. 그 빛나던 언어의 블록들이 어느 순간 중심을 잃더니 기울어지기 시작하고 있는 것을 그 역시 눈치 채었던 것이다.

그 영광스럽던 건축물들이 내 뿜던 황금 색깔은 반대쪽에서 쏘아보내던 탐조등이 잠시 각도를 바꾸면서 어둠에 우중충하게 가라 앉아가고 유리처럼 균열을 일으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토록 빛나던 빛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자랑스럽던 언어 구조물들이 서서히 금이 가고 와해되어 쏟아져 내렸다. 한 순간 접착력을 잃은 언어의 조각들은 몇 개의 단락으로 해체되면서, 문장들로 나뉘어져 질서를 잃고 유령처럼 떠돌기 시작했다. 단어의 조각들로, 끝내는 자음과 모음으로, 부서져 그 구조물들은 끝내 흩날리고 있었던 것이다. 응집력을 잃어버린 언어의 조각들은 깨진 사금파리 가루였다. 한때 빛을 반사했던 기억으로 혼란스러운 색깔들로 방향을 잃은 채 날뛰다가, 이제 도리어 젊고 촉망받던 제 주인을 향해 날을 새우고 비수가 되어 달려들고 있었다. 풍화되어버린 언어의 조각들, 언어의 시신들의 그 질서 없는 날뜀이라니. 바늘 조각같이 언어의 모래 바람은 이제 작가의 발목을, 다리를, 온몸을, 심장을 찔러대며 저희의 시체로 덮어 가는 거였다. 언어들이 일으키는 잔혹한 보복이라니....  


그 언어의 붕괴에 그가 당황해 하는 사이 후배 작가들이 새로운 별들로  떠올라왔고, 신선한 감성과 감각적인 언어로 쓰인 그들 소설 쪽으로 서치라이트는 움직여 가고 있었다.

그는 이를 악물고 새로운 소설을 썼다.

묵은 원고를 고쳐 가는 것이 아니고 새롭게 썼다.

그러나 그의 원고를 받아 든 편집자의 입모습이 조금씩 뒤틀리는 것이 보였다. 화려한 명성이 2년을 갓 채운 뒤였다.

 그는 이를 갈며 주먹으로 드디어 편집자의 책상 유리를 박살내고는 두 손이 피투성이가 된 채, 휘황한 밤거리로 내몰리듯 나왔다.

그 나락의 깊이라니.. 술과 수면제.. 꽃게가 잘린 집게발이 다시 자라 회복될 때까지, 물 속 깊은 돌 틈에 웅크리고 있는 것처럼.. 그 동안 사랑한다던 여자 역시 그를 떠나갔다.

R이 찾아오고, 죽은 것이 그 무렵이었다.

그는 마지막 처방을 내렸다. 다시 채워 오자. 웅녀처럼 쑥과 마늘을 다시 먹자. 그것이 인도였다. 당시 비겁한 친구들이 유행처럼 떠났던 인도 여행을 그 역시 시도했던 것이다.


시실리 이야기를 하자.

손가락 틈 사이로 빠져나가는 공기의 입자나 수증기의 작은 알갱이들이 때로 견고하게 얽혀서 벽을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을 나는 그 산골 밭둑의  안개에 부딪치면서야 알았다.

물이 얼음이 되는 이치를 생각해 보면 쉬울 텐데요. 소리를 내어 말한 것은 아니었지만, 내 의문에 샤샤는 냉풍이 몰려나오는 시실리의 산 중턱 동굴 입구의 고드름을 가리키며 웃어 보였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지독한 응집력. 마을을 둘러싼 안개의 벽안으로 들어가려다 부딪쳐 주저앉고, 다시 주저앉았던 그 초라함이라니. 몇 번이었는지 모른다. 전신으로 안개의 벽에 도전했고, 탄력을 가진 안개의 벽은 나를 계속 내동이쳤다. 그렇게 수 십 번. 한 순간 그러다가 나는 안개의 담 너머로 나뒹굴어 떨어지면서 정신을 잃어버렸다.


눈을 뜬것은 마을 앞 어귀에서 맡았던 그 은은하던 꽃향기를 확실하게 맡은 직후였다.

잠시 내가 죽어 다른 세상에 온 것이거니 했다. 아(亞)자 무늬 푸르스레한 한지의 창문에 부드러운 빛이 머물러 있었다. 누워있는 내 머리맡에 흰 머리칼의 남자 한 사람과 소녀 하나가 내가 눈을 뜨자 고개를 끄덕이며 웃어 보였다.        

-어딘가요? 여기가.

 일어나려 했지만 온몸이 돌덩이가 된 듯 움직일 수가 없었다.

 내가 말을 걸자 노인과 소녀는 같이 손뼉을 치며 커다랗게 웃었다. 어딘가요? 여기가. 폐 끼칠 생각이 아닌데.. 길을 잃어서요. 딸인 듯한 소녀가 얼른 냉수그릇을 내밀었고, 노인이 내 어깨를 잡아 일으켜 앉혔다. 나는 물을 반 대접이나 들이키고 나서야 내가 어느 시골집 방안에 누워 있다는 것을 알았다. 정신을 잃었던 모양입니다. 폐를 끼쳐서.. 다시 노인과 소녀가 눈을 마주치며 즐거운 듯이 웃었다. 부녀가 둘 다 농아인지도 모르겠다. 잠시 그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곳에서 며칠을 지나면서 몇 집인지 확실하지 않았지만, 그 마을의 누구도 말을 주고받지 않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그냥 웃었고, 얼굴을 마주 대하는 것으로 모든 의사 소통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이틀쯤 지난 후였다.


하루를 더 지나고 아침을 맞았을 때 나는 대나무 숲을 지나는 서그럭대는 바람소리와 파도소리를 어렴풋이 들었다.

노인이 외출을 하는 듯 싶어 그를 따라 나설 셈이었다.

내가 밖으로 나서자 노인은 작은 뜰채 한 개와 망태기를 맨 채 나를 기다리듯 서 있었다.

-괜찮으시면 저도 따라 가겠습니다.

 노인은 말을 하지 않았지만 충분히 내 말을 알아들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소녀가 작은 부엌 앞에서 우리를 바라보고 흰 이를 들어내 보이며 손을 흔들었다.


안개 속 대밭 사이로 난 좁은 산길을 20여분 걸어 작은 산등성이를 넘자 물결소리가 들렸다. 바다인 것은 확실했지만 안개가 바다의 중간쯤을 견고하게 가로막고 있었다.

썰물이 된 해변은 크고 작은 바위들로 어지러웠는데 놀랍게도 한쪽으로  10여 평쯤 되는 원형의 담을 쌓아 둔 것이 눈에 들어 왔다.

그 돌담 안에서는 썰물에 빠져나가지 못한 고기떼들이 인기척에 놀라 훤히 등을 내 보이며 어지럽게 뛰어 오르고 있었다. 수십 마리, 수백 마리의 고기들이 한꺼번에 뛰어오르면서 마침 떠오르기 시작한 아침 햇빛을 비늘에 반사시키기 시작했다. 나는 나도 모르게 탄성을 지르며 해초 덮인 바위위로 뛰어 내려갔다.    

노인은 고기 비늘에 반사되는 햇빛을 감상하듯 천천히 가두리 안에 갇힌 고기들을 둘러보고 뜰채로 얕은 물에서 놀라 뛰는 팔뚝만한 물고기 두 마리를 건져 올렸다. 올라오는 동안 한 마리가 튀어 다시 물 속으로 돌아갔다.    노인은 껄껄거리며 건져 올린 한 마리를 망태기에 담고는 뜰채를 내게 내밀었다.

나는 생전 처음 어부가 되어 요령껏 한꺼번에 다섯 마리를 건져 올렸다. 노인이 큰 소리로 웃었다. 내가 자랑스럽게 뜰채를 내밀자 노인은 뜰채 속에서 큰 고기 두 마리만을 망태기에 넣고는 세 마리는 다시 물 속에 넣어 주었다.

의아해 하는 내게 고개를 흔들어 보이고, 노인은 이제 앞서 벼랑의 바위 언덕위로 올라갔다.

갑자기 수백 마리의 갈매기 떼들이 시끄럽게 울어대며 바위틈 사이에서 솟구쳐 올랐다. 노인은 흐뭇하게 날아오르는 갈매기 떼들을 올려다보고는 바위틈 사이의 둥우리들로 고개를 돌렸다. 수백 개 갈매기 둥우리들이 우리 발  아래 깔려 있었다. 어떤 놈들은 끝까지 우리 발 밑에서 꼼짝 않고 둥우리를 지키는 녀석들도 있었다. 나는 노인이 그 갈매기 둥지들에서 한 개씩 만 알을 꺼내 망태기에 넣는 것을 보았다.

그 날 아침 밥상에 앉아서야 나는 왜 노인이 생선을 세 마리만 건져 왔는지 알았다. 세 사람의 아침 식량으로 필요한 만큼만 건져 왔던 것이다.

그것은 다음날 소녀를 따라 갈대밭으로 청둥오리를 잡으러 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갈대 줄기에 묶어둔 엉성한 올가미에 오리 세 마리가 걸려 있었는데 그녀는 깔깔거리며 두 마리의 발에 묶인 올가미를 풀어 날려 주었던 것이다.


아, 그녀, 샤샤. 그녀에게 이름이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내가 끈질기게 나를 가리키며, 내 이름을 말하고, 이어서 그녀를 가리켰을 때, 그녀 입술 모양이 그렇게 바람소리를 내었던 것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샤샤. 나는 지금도 가끔 그렇게 그녀를 불러본다.

청둥오리를 잡아오면서 갈대밭 언덕에 서 있는 작은 돌탑을 보았다. 탑이라기보다 그 돌무더기는 특별한 형상 같은 것도 없이 지나는 마을 사람들이 손에 잡힌 대로 돌멩이들은 올려놓은 구조물이었다. 그러나 수 십 년도 더 지난 듯 아래쪽은 바위 옷과 이끼들로 뒤덮여 있어 마치 한 개의 바위가 처음부터 그렇게 웅크리고 있는 듯이 느껴졌다.

나도 그녀를 흉내내어 돌 한 개를 내 가슴 높이의 돌무더기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자 갑자기 그녀가 내 손을 쥐고 흔들며 높은 소리를 내며 웃어댔다. 까르르르 웃어대는 그녀의 가무잡잡한 얼굴 피부 안에서 하얀 이가 눈부시게 들어 났다.  

그녀가 산중턱과 바다 족으로 난 오솔길을 가리켰다.

대나무 숲 곁에도 희미하게 돌탑들이 보였다. 왜 마을 사람들이 돌탑 위에  돌을 얹어 놓는 거지? 내가 물었지만 샤샤는 흰 이를 내 보이며 내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한 순간 아득한 깊이의 동굴 속으로 내 육신이 빠져 들어가는 듯한 현기가 일었다. 파도소리가 멀리서 들려 왔다. 말이라는 것의 맹랑함. 나는 그녀의 시선을 피해 얼른 아득한 산봉우리 위로 눈길을 주어 버렸다. 한 개의 적절한 단어, 하나의 문장, 그것들의 조합을 위해 내가 기우려 왔던 한 시절의 노고가 얼마나 도로(徒勞)와 낭비였는지. 더구나 언어가 소통을 정지했을 때 매미 허물 같은 흔적뿐인 무의미라니....나는 어금니를 물면서 고개를 내저었다. 


사실 얼마동안은 그들이 내 말을 알아듣건 듣지 못하건 나는 많은 말을 했다.

마을 입구의 바윗돌에 새겨진 시실리라는 마을 이름을 발견했을 무렵 내가 얼마나 절망적인 상태였는지, 또 친구의 교통사고와 그 뒤부터 내 콧속에서 떠나지 않던 영안실의 향냄새와 내가 쓴 적 있는, 지금은 생각하기도 싫지만 책이름과 인도에서 보았던 쓰레기더미 위의 노인과 비쩍 마른 소에 대해서도 주절주절 많은 이야기를 했다. 나를 떠난 여자에 대해서도, 그 여자의 눈과 코, 광대뼈의 성형 수술과 내 인터넷 주소....그리고 언어라는 것의 무서운 복수 앞에 자살의 유혹을 어떻게 받았는가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그때 노인은 잠시 귀를 기우리 듯 고개를 갸웃하기도 했다. 샤샤는 움직이는 내 입모습을 빤히 쳐다보다가 금방 깔깔거리며 웃거나, 제 손가락을 가져와 더 이상 내 입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막아버렸다.... 알았어. 말이 가지는 공소감, 그 언어의 허상을 나도 이제 알아.. 그리고 나 역시 말을 하지 않아도 불편하지 않다는 것을 느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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