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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양식의 다양화와 현대시/정성수(丁成秀)
2012-04-16 13:27:27
chungpoet

조회:1410
추천:114
<평론> 소통양식의 다양화와 현대시 - 정성수(丁成秀) 시인론 류 재 엽 umusil1@hanmail.net 여행을 좋아하는 필자는 서너 차례 러시아를 가볼 기회가 있었다. 그곳에서 슬라브 민족들이 창작한 이콘화(icon畫)에 많은 관심이 갔다. 벼룩시장에는 이콘화를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팔고 있었다. 그것은 모두 헐가였지만, 그것들은 해외반출이 금지된 품목인지라 글자 그대로 “그림의 떡”에 불과했다. 러시아는 당초 문자를 갖지 못했다. 그리스정교를 받아들여 국교로 삼았지만, 백성들에게 기독교의 교리나 성경의 내용을 말로써만 전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니 자연스레 목판 등에 채색한 그림이라는 수단을 사용하여 그것을 알려주어야 했다. 지금 이런 이콘화는 인류의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우리가 컴퓨터의 기초 화면을 켜면 나타나는 아이콘이란 용어도 여기에서 온 것이라고 한다. IT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아이콘이야말로 현대적 기호를 대표한다. 그 후 러시아는 11세기 들어 다시그리스문자를 가져다가 저들의 문자로 삼았다. 즉 당초에는 이콘화가 의사소통의 주요수단이었다면 다음에는 그리스 문자가 그 역할을 대신했다. 우리 주변에 있는 모든 물적 형성체는 도구적 기능과 소통적 기능을 함께 지니고 있는데, 두 가지 중에서 소통적 기능에 기여할 때, 즉 문화적 영역에 속할 때 우리는 이것을 기호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기호의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 기호란 그리 특별한 것은 아니다. 우리의 주위를 둘러보면 모든 것이 기호로 둘러싸여 있음을 우리는 알게 된다. 거리의 도로 표지판에서부터 밤이면 여기저기서 불이 켜져 빛나는 교회의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기호를 바라보며 기호를 통해 세계를 인식하고 다른 사람들과 의사를 소통한다. 이처럼 우리는 기호의 홍수 속에 살고 있는 셈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우리는 기호가 표상하는 의미와 가치들을 통해 사회와 커뮤니케이션을 이룩하며 문화를 형성해나간다. 에코의 말처럼 “모든 문화의 과정은 커뮤니케이션 과정”이라고 한다면 기호학은 어떤 현상을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규정지을 수 있다. 모든 커뮤니케이션에서는 형식들을 심층에 있는 코드에 의해 메시지를 보낸다. 즉 모든 커뮤니케이션의 고정 속에는 일정한 문화계약에 기초한 규칙이나 코드가 존재하고 있다. 철학이 인간의 사상을 탐구하고, 심리학이 인간의 정신구조를 탐구하는 것이라면, 기호학은 인간이 다루는 모든 상징체의 구조와 그것이 재현하는 사상성을 탐구하는 학문이다. 인간은 심리학의 바탕 위에 서서 철학의 하늘 아래 산다. 다시 말해 인생에는 철학과 심리학 사이에 펼쳐진 공간과 시간의 체험을 지닌다. 철학과 심리학 사이를 채우고 있는 것이 상징체들이고, 그러한 상징체의 기본이 바로 기호이다. 인간이 창조적 동물이이라고 할 때, 그것은 인간이 기호들을 엮어 의미 있는 상징체로 만들어내는 능력을 갖춘 존재라는 뜻일 게다. 기호학이란, 사람들이 사용하는 기호를 지배하는 법칙과 기호 사이의 관계를 규명하고, 기호를 통해 의미를 생산하고 해석하며 공유하는 행위와 그 정신적인 과정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기호학의 전통은 철학의 전통과 같이 한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의 기호학을 크게 발전시킨 이로는 두 명의 선구자적 역할을 담당한 학자가 있는데, 미주를 대표하는 퍼스(C. S. Peirce)와 유럽을 대표하는 소쉬르(F. de Saussure)가 그들이다. 그 가운데 퍼스는 기호를 도상(icon)과 지표(indices), 상징(symbol)으로 구분하였다. 도상은 그 사물적인 형태가 직접적으로 기호의 형태로 발현된 것으로, 기호와 지시하는 대상과 닮은 형태를 지닌다. 즉 기호 자체의 성격에 의해서 그 지시대상에 언급하는 기호인데, 기호와 대상 사이에 직접적이며 공통된 속성을 지닌다. 초상화, 지도, 도형, 조각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지표는 그 대상에 의해서 실제적인 영향을 받고, 그 사실을 구성원들이 인정함에 따라 대상의 기호로써 기능하는 것을 말한다. 지도상의 온천, 광산, 학교 등이 여기에 해당하는데, 기호와 해석체 사이에 우연적이고도 실질적인 연관을 갖는다. 상징은 기호가 그것을 지칭하는 대상과 임의적이거나 자의적인 관계를 지니는 것으로 언어가 대표적이다. 2 기호학이 의미 작용과 커뮤니케이션을 포괄하는 기호작용에 관한 학문이면서도 특히 의미 작용에 더 관심을 두는 것은 그것이 근본적으로 정신적 과정이라는 점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만일 인간의 삶 전체를 문화라고 한다면 문화야말로 기호 작용의 총체라고 할 수 있다. 자연의 질서에 인간이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을 번역, 해석하여 인간의 삶에 도움이 되도록 바꾸어 나간 것이 문화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은 기호의 세계를 벗어날 수 없고 그 안에서 살다가 그 안에서 죽는 것이다. 오늘날 기호학이 기호가 가진 힘과 그것이 인간의 삶에서 차지하는 몫뿐만 아니라 기호의 과잉에 따른 위험을 지적하고 있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이처럼 인간은 사회생활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의사소통을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강구하여 왔다. 당초 기호로부터 시작된 커뮤니케이션의 역할도구는 우리 시대에 와서 (문자)언어라고 하는 하나의 쉼표를 찍었다. 우리들이 통상 시인이라고 일컫는 이들은 (문자)언어로써 시(詩)를 창작한다. 시는 일정한 형식에 의하여 통합된 언어의 울림, 조화, 리듬 등의 음악적 요소와 언어에 대한 이미지 등 회화적 요소에 의해 독자의 감정이나 상상력을 자극하는 문학작품이다. 인간의 언어는 형식인 음성과 내용인 의미의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언어의 의미에 대한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먼저 지시설이다. 지시설은 언어의 청각 영상이 실제적으로 가리키는 구체적인 지시대상이 언어의 의미다. 즉 낱말의 의미를 사물 그 자체와 동일시하는 관점이다. 의미의 지시설은 상품의 상표나 고유명사의 의미 규정에는 어느 정도 타당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대다수의 낱말이 명시적으로 사물과의 관련성을 띠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므로, 의미를 지시로 취급하는 것은 의미 본질의 일부를 드러내는 데 불과하다고 하겠다. 다음은 개념설이다. 언어의 의미는 그 언어가 가리키는 구체적인 대상물이 아니라 개념이다. 즉 언어는 지시물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속의 개념인 사고와 지시를 통하여 연결된다고 봄으로써, 사고와 지시의 부분을 의미로 규정한 것이다. 이 관점을 뒷받침해 주는 것이 바로, 구체적인 지시대상이 실재하지 않는 말들이 많다는 것이다. 일상생활에서 사람들은 직설적인 말하기나 글쓰기를 통해 자신의 생각이나 느낌을 표현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시인은 자신이 표현하려는 생각과 느낌을 직접적인 설명만으로 표현하지 않는다. 시를 읽으면서 비유적이거나 상징적인 표현과 마주칠 때 우리는 해석의 어려움을 겪기도 하지만, 그 어려움을 해결하고 나면 대상에 대한 새로운 인식에 도달하게 된다. 사물을 총체적으로 바라보고 그 안에 담겨 있는 진정성을 찾아내는 시의 본질은 비유와 상징을 통해 개별적인 시 작품 속에 구현된다. 따라서 비유와 상징을 이해하는 것은 시를 감상하고 향유하기 위한 바탕이 된다. 그것은 문학 가운데서도 특히 시는 비유와 상징이 그 생명이기 때문이다. 3 그런데 이번에 정성수(丁成秀) 시인이 느닷없이 『기호 여러분』(월간문학 출판부, 2012. 1)이라는 제목의 시집을 출간했다. 느닷없다고 표현한 것은, 지금껏 우리가 대하던 언어의 범주라는 틀 안에 자리하던 대다수 시인의 시와는 달리 그가 기호로써 창작된 자신의 시적 표현물을 우리들 앞에 던졌기 때문이다. 비교적 긴 시의 제목들에 비하면 본문은 단 한 개의 기호뿐이다. 예를 들면 작품 「이 세상 모든 고독한 존재에게」의 본문은 “&"라는 기호로 표기되어 있다. 따라서 이 시집에 게재된 작품 79편에는 79개의 기호가 등장한다. 시인은 이미 시집 『세상에서 가장 짧은 시』(2009)를 상재한 적이 있는데, 거기에 10여 편의 기호시를 선보이고, 이번 시집에는 아예 기호시만 게재하고 부제를 「세상에서 가장 짧은 시(2)」라고 붙였다. 그리고 시인은 이번 시집의 머리말에서 비시적인 요소의 유행을 지적하고 짧은 시를 창작하리라는 다짐을 한다. 다른 하나의 이유에 대해서는 번역의 문제라고 말한다. ‘시의 산문화에 대한 반작용뿐만 아니라 시의 내용을 외국어로 온전히 번역하는 것이 사실상 불 가능한 ’문자의 한계‘를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 그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내용(본문) 번역이 불필요한 시'(제목 번역은 다행히도 시 내용에 비해 그리 큰 제 목이 되지 않는다)가 이 시집이 지향하는 또 하나의 목적이다. 시는 어차피 운명적으로 상징이나 비 유나 심상이 아니겠는가! 시인의 기호에 대한 집착은 이미 오래 전부터였던 것으로 보인다. 시인은 중학교 3학년 재학시절에 출판한 첫 시집 『개척자』(1961)를 비롯하여 이번 『기호 여러분』까지 상당수 시집 표지 그림을 자신이 직접 그렸다. 그리고 그것은 사람의 모습을 추상으로 형상화한 선화(線畵)였다. 이것은 시인이 얼마나 기호가 지닌 상징성에 유의하고 있는가 하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기호는 의미작용의 기호와 의미소통의 기호로 나눌 수 있다. 전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것과 전달되는 것들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를 중점적으로 살핀다면, 후자는 정보전달이론에서 말하는 바와 같은 어떤 의미와 신호전달의 경로에 관심을 기울인다. 이 시집의 본문에 해당하는 79개의 기호들이 의미작용으로서의 기호와 의미소통으로서의 기호 가운데 어느 부류에 해당하는지는 잘 알 수 없다. 따라서 시의 제목으로써 분류하는 수밖에 없는데,「그믐달 속 작은 별」, 「꽃들은 우산을 쓰지 않지」, 「지구야, 놀라지 마라」, 「우주는 빈 의자」 등 예닐곱 편의 작품을 제외한 대부분의 작품이 인간과 그 관계를 제재로 하고 있다. 여기에서 무작위로 몇 편의 시를 골라 보았다(사실 무작위가 아니라 컴퓨터 문자판에서 찾기 쉬운 기호를 위주로 하였다.). 그랬더니 “∨”(「나와 그대 사이」), “H”(「사람과 사람」), “&”(「이 세상 모든 고독한 존재에게」), “+”(「나는 너의, 너는 나의」), “-”(「살아온 날들은 빼 주세요」), “‥”(「콧구멍이 두 개인 이유」), “⌒”(「웃는 눈은 왜 위로 휘어지는가」), ":"(「정자는 질주하며 소리를 내지 않는다」), "△"(「사랑의 끝」), "×"(「존재 속에 사라졌다, 너는」), "ㆅ"(「지구야, 놀라지 마라」), “1/2”(「갈 수 없는 나라」), “ㆆ”(「해의 씨앗은 땅 속에 계시다」), “☆”(「별들은 대낮에도 잠들지 않지」)과 같은 기호들이 나타난다. 긴 작품의 제목이 설명적이고 본문은 단지 한 개의 기호로 성립되어 있는데, 메시지의 전달이 정의(定意)의 방식을 취하고 있다. 정의란 “무엇은 무엇이다.”라는 진술 방법으로 피정의항과 정의항 사이에 등식이 성립되어야 함을 전제로 한다. 여기에서 피정의항은 긴 제목이고 정의항은 기호이다. 확장된 정의라는 용어가 있다. 피정의항이 복잡한 것일 때 단순한 정의로는 부족할 경우가 있다. 그런 경우 일반적으로 허용된 견해나 개념만으로 정의가 불가능하다. 이때 필자는 자신이 내세우는 새로운 견해나 개념을 동원하여 새로운 정의를 내세우게 되는데, 이를 확장된 정의라 한다. 정성수 시인의 기호시는 확장된 정의에 가깝다. 위에 열거한 작품 몇 개를 살펴보자. 작품 「나와 그대 사이」를 “∨”으로 표기한 것은 아무리 사랑하는 사이라도 감정적인 간극이 존재하고 절친한 친구 사이라도 작은 틈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라면, 「사랑의 끝」을 "△"으로 말하는 것은 사랑이 변증법적인 현상이 아니라, 소위 말하는 남자 1, 여자 2 혹은 남자 2, 여자 1라는 삼각관계로 돌입할 때 그 사랑은 끝나고 만다는 인과론적 관계를 보여주고자 하는 시인의 의도가 드러나 있다. 또 「갈 수 없는 나라」의 본문 “1/2”은 원래 한 민족 한 국가였던 한반도가 남과 북으로 다른 정치체제로 절반씩 나누어져 서로 갈 수 없는 비극을 이야기한다. 이승하 시인은 정성수(丁成秀) 시집『기호 여러분』의 해설에서 “각각의 부호에 대해 시인이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하고 새롭게 의미를 부여했는가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하지 않기로 한다.”라고 결론처럼 언급하면서, 이는 “독자가 자유롭게 감상할 수 있는 부분을 해설자가 빼앗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이승하 씨는 시집 해설에서 『기호 여러분』에 나온 본문들과 관련시켜 이 작품들을 기호시라고 불러야 할는지 부호시라고 불러야 할는지 애매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그만큼 이번 시집이 우리 문단 초유의 것이기 때문이리라. 사실 문예기호학은 기호 혹은 부호로 된 시를 해석하는 학문이 아니다. 기호의 하나인 언어로써 창작된 작품의 구조 관계를 밝히는 것이다. 현대 기호학의 발전은 역시 구조언어학의 발전에 힘입은 바 크다. 구조언어학이나 기호학은 거의 소쉬르의 개념에 토대를 두고 있다. 소쉬르는 언어를 가장 체계적인 기호로 보고, 자율적인 언어체계가 내재적으로 지니고 있는 법칙을 발견하려고 했던 것이다. 4 그렇다고 해서 정성수 시인이 당초 짧은 시와 기호시만을 고집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첫 시집 『개척자』(1961년 1월에 등사판으로 초판을 발간하고. 1994년에 동천사에서 재판으로 발행)에 드러난 그의 시정신은 역사의식과 사회정의에 대한 고발정신이 대부분이다. 당시는 4․19학생의거가 일어난 직후로 시인은 중학교 3학년 재학 중이었다. 이 시집에는 당연히 사춘기의 감성이 드러나 있지만, 당시의 시대상황에 대한 인식으로 가득 차 있다. 몽둥이도 없이 총도 없이 최루탄도 없이 맨몸으로 몽둥이 삼아 총 삼아 최루탄 삼아 날아오는 것 받으며 끊임없이 달려라 분노 앞에 모든 것이 굴복한다 얌전히 고개 숙여 항복하는 것들에게 소리 질러라 자유의 소리를 침을 던져라 쫓겨가는 독재자에게…… -「젊음의 피」 부분 순수한 학생의 나라사랑과 자유의지가 담겨 있는 이 작품은 모두 35행으로 비교적 장시에 속한다. 자유라는 것은 다의적(多義的)인 개념으로, 그 규정도 천차만별이다. 이러한 자유를 추구한다는 자유주의란 무엇인가. 자유주의란 개인의 여러 가지 자유를 존중하고, 봉건적 공동체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는 사상 및 운동이다. 즉 개인의 자발성을 우선시하며, 국가와 제도가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고 개성을 꽃피우기 위해 존재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4․19의거 이전의 자유당 정권에서는 개인의 자유와 개성은 크게 위협을 받았다. 이런 시대상황 아래 순수한 영혼을 가지고 있는 학생시인은 독재 세력에 맞서 젊음의 피를 흘려 싸우자고 온몸으로 절규한다. 그래서 열여섯의 나이에 발간된 이 시집에는 젊은 학생다운“이유 있는 반항”의 외침이 들어 있다. 정성수 시인의『사람의 향내』(월간문학 출판부, 2008)는 14년 동안 발표한 작품을 한데 모은 시집이다. 시인은 여기에서 시인으로서의 고독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그래서“나 죽으면 바다로 가리”라고 울부짖는다. 나 죽으면 바다로 가리 내 조상 아메바가 숨쉬는 또 하나의 하늘로 그냥 맨발로 떠나리 내 일찍이 파도 속에서 태어났으므로 낯선 객지 돌고 돌아 그곳에 닿으면 눈먼 내 알몸 감쌌던 양수의 물결 아직도 태초의 비린내를 풍기고 배꼽 위에 매달렸던 긴 탯줄 겨울 달빛에 젖은 채 창백하게 떠 있으리 어릴 적에 불렀던 내 노래의 한 소절이 이제는 모두 떠나간 작은 섬 갈대밭에서 홀로 뒤척이고 내가 짝사랑했던 열다섯 살짜리 소녀가 등대 곁에서 과거도 없이 날 기다리고 있으리 무죄로 죽기 전의 내 누이동생과 남동생 헌수 치아가 이쁜 어머니와 함께 고단한 호롱불 아래 졸면서 깨면서 술 취한 아버지의 늦은 귀가를 기다리는 키가 아주 나지막한 바다로, 그 그림자 속으로 나 이제 돌아가리. 다시는 떠나지 않으리 죽음도 잊은 듯이 눈부신 세상의 한쪽을 오래오래 내다보는 저 한 떨기 시퍼런 파도가 되어 출렁이리. -「나 죽으면 바다로」 전문 이 작품은 시인의 자전적인 내용이 바탕을 이룬다. 열여섯 살의 천재적인 문학소년이 인식하였던 인생의 밑바닥에는 동생의 죽음과 가난, 술주정의 아버지 모습, 짝사랑의 상대였던 열다섯 살의 소녀, 그리고 치아가 예쁜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자리하고 있다. 이 작품은 바다 이미지를 원용한다. 문학작품의 이미지는 어떤 사물을 감각적으로 정신 속에 재생시키도록 자극하는 말을 뜻한다. 다시 말해 감각적 체험과 관계가 있는 일체의 언어는 나름대로 심상이 될 수 있는데, 바다 이미지는 바다 또는 바다와 관련된 표현이 머릿속에 떠올려 주는 감각적 세계를 의미한다. 바다 이미지는 소외 ․ 도피 공간으로서의 바다와 불안 ․ 초월 공간으로서의 바다라는 원형을 지니고 있다. 또한 우리의 고전에 나타난 바다 이미지는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는 공간 이미지와 인간이 자연을 의지하고 숭배하는 외경심이 적극적으로 반영된 심미적인 이미지의 결합적인 색채를 보이고 있다. 그리고 바다의 모성애적 포용성과 구원의 이미지, 생존과 파괴가 반복되는 생멸의 이미지가 강하게 반영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카뮈의 소설『이방인』에는 태양과 바다의 이미지가 함께 표현되어 있는데, 뜨거운 태양은 강력한 이미지로 부각된다. 햇빛을 그대로 반사하는 상황을 가중시키는 바다와 포용력과 자유를 상징하는 바다가 이방인에서의 나오는 두 가지 상반된 이미지이다. 작품 전반의 뫼르소가 마리를 만나는 바다와 작품 후반의 감옥에서 그리워하는 바다의 이미지는 포용력과 자유를 표상한다. 여기서의 바다에는 마리의 이미지가 반영되어 있다. 마리는 모성에 대한 대리충족과 원시적 본능의 충족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마리는 뫼르소에게 성적 대상인 동시에 그를 포용하는 어머니와 구원자의 역할을 담당한다. 또한 그에게 심리적 안정을 가져다주고 그를 이해하고자 하는 유일한 사람인 동시에 그에게 삶의 행복을 순간적이나마 느끼게 해주는 인물인 것이다. 여기에서 바다는 어머니와 소녀와 죽은 아우들이 시인을 기다리고 있는 고향, 그것도 천상의 고향의 이미지를 갖고 있다. 이 작품은 우리들이 흔히 갈구하는 피안에 대한 인식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것은 매연 말미에 “―으리”라는 어구를 사용하여 음악적인 효과를 높이고 있다. 이는 선명한 이미지와 함께 한층 고양된 서정성을 보여준다. 『누드 크로키』(월간문학 출판부, 2009)에 게재된 작품들은 탐미와 관능이 돋보이는 것들이다. 한분순은 이 시집의 해설에서“원초적 사랑, 아가페적 사랑, 신과 자연에 기대며 섬기는 사랑이 교차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시인이 이 시집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단순한 여성의 관능과 탐미가 아니다. 다음 작품에서 그것은 잘 드러난다. 보여주지 않네, 그대는 가장 깊은 곳에 숨겨둔 신들의 아기집 마치 지구별 어린이들이 어른들이 모르는 곳에 그들만의 보물을 감추어 놓듯 지구인 사내들 앞에서 옷 속에 감추어둔 속살 모두 다 꺼내주었으나 순은빛 영혼까지 슬쩍슬쩍 보여주었으나 끝끝내 보여주지 않네, 그대는 소녀 적부터 준비해 둔 아주 작은 아기집 어느 추운 떠돌이별에서 최초로 꽃송이가 피어나는 날 새벽 가장 아름다운 외계인 하나와 만나야 할 영혼의 집 한 채 하느님이 그대 알몸 속에 깊이 감추어둔 오랜 약속 -「그대 아기집」 전문 이것은 생명에 대한 외경이다. 새봄이 되면 마치 죽은 것처럼 보이는 대지에서 새로운 싹들이 돋아난다. 그리고 그것은 크게 자라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고 다시 대지로 돌아간다. 얼마 전 지리산에 방사된 반달곰이 동면 중임에도 새끼 두 마리를 낳았다고 한다. 어미는 동면을 하고 있지만 새끼 반달곰은 어미젖을 빨면서 건강하게 자라고 있다. 그것을 보면서 우리는 생명의 외경을 느낀다. 우주 가운데에는 모든 생명의 씨앗을 품고 있는 아기집이 있다고 시인은 느낀다. 그것은 마치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설파한 엘리엇(Eliot)의「황무지」와 상통한다. 정성수의 짧은 시와 기호시들은 『세상에서 가장 짧은 시』(월간문학 출판부, 2009)에 와서 비로소 선보인다. 시인은 여기에서 1음절시, 1어절시, 1행시, 2행시, 3행시에 이르기까지 단형시의 여러 형태를 시험해 보였다. 그리고 몇 개의 기호시를 선보인다. 시인 임보는 시집의 해설에서 정성수의 시집이 지닌 의의를 “이 짧은 시들은 압축과 간결을 지향하는 시라는 글의 형식이 오늘날 얼마나 산문화되고, 난삽해지고, 느슨해지고 있는가를 반성케 하는, 촌철살인의 각성제로 현 시단에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라고 언급하고 있다. 디지털 시대의 시적 상상력은 언어의 재현성을 넘어서 문자에 도상적 기호(icon)의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다. 이 경우 문자는 그 자체로 이미지가 되어 언어적 해석보다는 시각적 효과로 새로운 의미를 생산해 낸다. 물론 이런 특성은 지난 1980년대 실험되었던 형태시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독일의 구체시 운동에 뿌리를 둔 형태시는 전통적인 시의 형식 해체와 전복을 양식화함으로써 내용과 형식을 무너뜨리는 전위적 성격을 드러냈다. 사회적, 제도적 언어에 대한 불신과 지배 질서에 종속된 언어에 대한 비판의식으로, 문자언어 너머의 또 다른 언어적 표상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이러한 탈언어적 상상력은 사진, 그림, 만화 등이 결합된 상호 텍스트적 양상으로 나타난다. 문자언어(물론 언어도 기호의 하나이지만)와 기호 중 어느 것을 우위에 놓을 것인가의 문제는 여전히 논쟁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그것 자체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고, 그 의미가 어떤 구조와 요소들 사이의 관계에 의존하며 사회적으로 결정된다는 점에서, 필자는 언어 쪽에 무게를 두어도 무방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시집 『기호 여러분』이 우리에게 던지는 의미는 매우 크다. 그것은 문자와 기호가 지닌 동질성과 이질성의 문제에 대한 탐색에서 나온 소산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정성수 시인의 작업을 관심 있게 지켜보며 격려를 보낸다. 그것은 시인과 독자 사이에 일어나는 또 하나의 의미전달과 의사소통을 거친 상징과 은유의 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성수 시인이 보여주고 있는 시세계는 날것처럼 퍼덕이는 은유와 상징을 바탕으로 언어의 조탁을 통한 시의 서정성에 있다* - <월간문학> 4월호(2012 한국문인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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