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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봉환 문집 "꼬마각시와 꼬마신랑" 중에서(2)
2009-05-03 20:55:32
bbh39

조회:1665
추천:105

박봉환 문집 “꼬마각시와 꼬마신랑” 중에서(2)

봉덕이와 순이는 싸리나무를 듬성듬성 얽어놓은 나지막한 담장 사이의 이웃으로 틈만 나면 서로 만나서 소꿉장난하는 단짝 친구였다. 어른들은 매일같이 동트기가 무섭게 일터로 나갔다. 어른들이 일터에서 돌아와서 저녁 밥상을 차려 줄 때까지 온 종일 함께 지냈다. 봉덕 이와 순이 에게 점심은 사치였다. 그저 부엌에 있는 누룽지나 데워 먹는 정도였다. 어른들이 없는 시골집에서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온종일을 버텨야 하는 이들에게는 서로의 존재가 너무나 소중했다.

순이 어멈은 마을의 각종 행사에 불려 다니면서 온갖 궂은일을 해준 후 조금씩 얻어온 부스러기 떡이나 과일 등 먹을거리가 있을 때면 항상 봉덕 이를 먼저 챙겼다. 봉덕 어멈은 그러는 순이 어멈을 고맙게 생각하며 반상 관계를 따지지 않고 순이 어멈을 살갑게 대했다. 사실 봉덕이와 순이가 싸우지 않고 친하게 지낼 수 있었던 것도 어머니들의 이런 관계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어느덧 한 해가 지나고 여름이 왔다.

“오늘이 중복이라지?”

일터로 나가려고 연장을 챙기던 봉덕 어멈이 나지막한 싸리담장 너머로 순이 어멈을 보고 말을 건넸다. “마님, 그러네요. 오늘이 중복이네요. 오늘은 좀 일찍 집으로 돌아와 개떡이라도 부쳐서 마님네 도련님도 드리고 우리 순이도 좀 먹여야 하겠네요.” 순이가 봉덕 이를 격의 없이 대하는 것과는 달리 순이 어멈은 봉덕 이를 도련님이라 부르며 항상 깍듯이 대했다. 봉덕 어멈과 순이 어멈은 일터로 나갔다.

중복 날답게 아침부터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며 온 산하(山河)를 지글지글 달구고 있었다. 이런 날씨면 봉덕이와 순이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집 옆에 있는 도랑으로 달려가 옷을 훌훌 벗어 던지고 물속에 들어가 텀벙거리고 노는 것이 통상적인 하루의 일과였다. 나이 여섯 살이면 이제 어느 정도의 부끄러움도 있을 법하지만, 갓난아기 시절부터 항상 마주하며 허물없이 자라난 터라 그들은 거리낌 없이 옷을 훌훌 벗어 재꼈다.

“어! 뭐가 달렸네?”

“으응! 순이 너는 아무것도 없잖아!”

아무 생각 없이 주고받은 간단한 대화였지만, 그래도 둘은 이내 무엇인가 좀 겸연쩍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년 여름 이맘때 멱(목욕)을 감을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내 잊고, 물장구치는 재미에 흠뻑 빠져들었다.

“우리 엄마놀이 할까?”

“어떻게 하는 거야?”

“나는 엄마하고 너는 아빠 하면 되지?”

“그래 그럼 한번 해보자!”

“이리와 엄마 아빠는 잘 때 서로 꼭 껴안고 자는 거야.” 순이가 봉덕이의 허리를 꼭 껴안았다.

봉덕이와 순이는 도랑 언덕에서 알몸인 채 서로 팔을 내밀어 팔베개 자세로 반듯하게 들어 누워 잠자는 시늉을 했다. “너와 나는 이제 엄마와 아빠가 된 거야. 어른들처럼 말이야. 알았지?” “자. 그럼 약속해. 우리는 꼬마신랑 꼬마각시로 어떠한 일이 있어도 서로 싸우지 않고 잘 살기로 말이야.” 순이는 봉덕이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오른손을 내밀어 새끼손가락을 쫑긋 폈다. “그래!”봉덕이도 오른손 새끼손가락을 펴서 순이의 손가락과 깍지를 꼈다. 그렇게 그들은 꼬마신랑과 꼬마각시로서 부부(夫婦)의 연(緣)을 맺었다.

시냇가 저쪽 풀숲으로 해가 기운다. 이 시간이면 부모가 밭에서 일어나 손에 묻은 흙을 툭툭 털어내며 연장을 챙기고 있을 시간이다. 소꿉놀이도 하고, 노래도 부르다 지쳐 깜빡 잠들었던 봉덕 이와 순이는 옷을 챙겨 입고 집으로 돌아왔다. 길게 드리워진 둘의 그림자 사이로 뻐꾹새가 뻐꾹, 뻐꾹 사랑놀이를 하자며 쉴 새 없이 짝을 불러댔다.

집으로 돌아온 봉덕이와 순이는 누룽지를 야금야금 우물거리며 허기진 배를 채웠다. 마당에 펼쳐놓은 멍석에 누웠다. 봉덕 이는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을 쳐다보며 개울가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우리가 맺은 인연(因緣)을 어른들이 알면 어쩌지?’ 윗마을 모과나무에서 서쪽, 서쪽, 서쪽 새가 울어댔다.

해방된 지 반년쯤 지났을 무렵 봉덕이와 순이는 집으로부터 오리쯤 거리에 있는 초등학교에 나란히 입학했다. 봉덕이와 순이는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면서 선생님의 선창에 따라 목이 터지라 하고 신나게 후창을 했다. 선생님은 한 손으로 더듬더듬 오르간을 치고 있었다. 어린이들은 건반 위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선생님의 손가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오르간의 건반을 잘못 눌러 음정이 틀릴 때마다 선생님은 처음부터 다시 하기를 반복했다.

국어 시간에는 가, 갸, 거, 겨, 하면서 한글을 열심히 읽고 썼다. 봉덕이와 순이는 방과 후에도 선배들의 교실에서 들려오는 오르간 소리에 매료되어 넋을 잃은 채 노래를 함께 따라 부르곤 했다. 수업이 끝난 후 어떤 선배 학생이 흥얼흥얼 일본 노래를 부르다가 선생님에게 불려가 벌을 받기도 했다. 반년 전까지만 해도 학생들은 일본노래와 일본말을 부르며 배웠었다.

둘은 6년 동안 거의 매일같이 함께 학교에 다녔다.6학년 중순 무렵 봉덕이 부모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중학교로 진학시키고자 없는 살림에도 읍내에 나가 입시에 필요한 몇 권의 책을 사왔다. 봉덕이와 순이는 그 책으로 열심히 공부했고, 초등학교 졸업생 25명 전체에서 그 둘만이 중학교 입시에 합격했다. 하지만, 순이 아범은 순이의 중학교 입학을 맘대로 허락할 수 없었다. 순이가 중학교에 입학한다는 것을 박 씨 종친회에서 알면 벼락이 떨어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양반인 자신들의 아이들도 중학교 시험에 떨어진 마당에 산지기의 자식이, 그것도 여자가, 중학교에 진학한다는 것은 그들의 자존심에 금이 가는 일이었다.

딱한 사정을 알게 된 학교 선생님 6명 모두가 총동원되어 박 씨네 종친들의 허락을 받은 뒤에야 순이 아범은 순이의 중학교 입학을 허락했다. 봉덕이와 순이는 30리 길을 걸어서 통학했다. 그들이 중학교 3학년이던 어느 날 여름이었다. 삼복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토요일이라 일찍 공부를 마친 봉덕이와 순이는 시내에서 만나 함께 집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서낭당 고갯마루를 지날 무렵 갑작스럽게 소나기가 내렸다. 순이의 옷이 흠뻑 젖었다. 하얀색 엷은 모시로 만든 순이의 교복 상의가 비에 젖으면서, 순이의 툭 불거진 젖가슴의 윤곽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순이의 아담한 젖가슴은 이미 6살 때 본 그것이 아니었다. 봉덕이는 자신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고 있다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순이도 순간 부끄러워하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러나 이내 당황해 하는 봉덕이를 바라보면서 묘한 장난기가 발동됐다.

‘볼 테면 보라지.

나의 꼬마신랑 봉덕이 아니던가!’순이는 자신이 여자로서 성숙해가고 있다는 것을 봉덕 이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순진한 봉덕 이는 못 볼 것을 본 것이 미안하고 부끄러운지 순이의 얼굴을 애써 외면했다. 갑자기 부모님과 종친 어르신들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오르자 얼굴이 불에 댄 듯 화끈거렸다.

‘지금 이 상황을 어른들이 본다면 뭐라고 하실까?’

다행히 소나기가 이내 그쳤고 언제 그랬느냐는 듯 따가운 햇볕이 다시 내리쬐면서 순이의 저고리가 금세 말랐다.

*박봉환 문집 “꼬마각시와 꼬마신랑” 중에서 (청어출판사 02-586-04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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